2014-1 철학의 문제들 기말고사
존엄사와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칸트의 안락사 비판론과 쇼펜하우어의 칸트 윤리 비판을 중심으로-
1997년 12월 4일, 보호자 없이 보라매병원 중환자실로 후송된 한 환자는 성공적으로 끝난 수술에도 불구하고 뇌부증으로 인해 호흡에 문제가 있는 상태였다. 다음 날 환자의 보호자가 '자신의 동의 없이 수술했으며 경제적 여유가 없음'을 들어 환자를 퇴원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병원 측 에서는 퇴원 했을 때 환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병원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은 후 환자를 퇴원시켰다. 환자는 퇴원 후 산소 호흡기를 뗀 뒤 5분 만에 사망했다. 그러나 병원이 받은 각서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보호자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담당 전문의와 전공의는 각각 살인죄의 종범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비록 존엄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발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존엄사 논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 사건 전까지 관례처럼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퇴원시키던 병원들에게 각서를 받던 안 받던 생환가능성 없는 환자를 퇴원시키면 살인죄가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10년 뒤 존엄사 논쟁을 촉발시키며 새롭게 논쟁을 낳았다. 2008년 2월 18일 폐암 여부를 확인하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인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할머니에 대해 가족들은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병원 측에 요청했으나 병원 측은 이를 거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존엄사 허용에 관한 소송이 제기했다.(통칭 김할머니 사건)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간 존엄사 허용 여부에 대한 판례는 단순히 ‘김할머니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 판결된 존엄사의 허용여부에 관한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수많은 논란과 논쟁을 낳았다. 병원의 입장은 각서와 상관없이 징역이 걸려있다는 점에서 퇴원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으며 소송의 쟁점도 존엄사 여부의 찬반이 아닌 이후에 벌어질 존엄사 사건에 대해서 가족과 의료진이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체적 근거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존엄사를 허용할 수 있는가? 존엄사를 허용할 수 있는 상황과 기준은 무엇인가? 환자의 자유의지가 결여된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수많은 논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주제가 바로 존엄사 논쟁이며 이 존엄사 논쟁은 2014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뜨거운 감자다.
존엄사 논쟁에 관해 가장 먼저 정의해야 될 것은 존엄사의 성격과 범위에 관련된 문제이다. 존엄사는 필연적으로 안락사와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데 이는 존엄사가 방식과 결과의 측면에서 안락사와 동일하며 그 동기를 정확히 유추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와 동일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엄사와 안락사의 미묘한 차이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윤리적 함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엄사와 안락사를 비교함으로써 차이를 도출해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안락사는 <좋은 죽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euthanasia이라고 불리운다. 이름의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 안락사는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서 안락하게 죽게 하는 것의 통칭이며 죽음을 택하는 동기나 주체 환자의 동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뉜다. 여기서 다룰 안락사는 존엄사와의 비교를 위해 일괄적으로 통일하도록 하겠다. 즉 이 글에서 다루는 안락사는 ① 병자의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②-1 그 방식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에게 약제 등을 투입해서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와(적극적 안락사) ②-2 적극적인 의료조치를 강구해도 병자의 생명을 약간밖에 연장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오로지 그에게 고통을 주기만 하는 경우, 그 조치를 행하지 않는 경우의(소극적 안락사) 두 가지를 모두 포괄하도록 하겠다. 이는 비자발적 안락사가 뇌사나 식물인간 등의 상당히 특수한 사례들에만 적용되며 또한 존엄사와 안락사의 논의가 대부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입장을 전제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엄사는 무엇인가? 존엄사는 안락사와 방법과 결과의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목적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즉, 안락사의 목적이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면, death with dignity라 불리는 존엄사의 목적은 병자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미묘하지만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다시 말해, 그 결과와 수단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존엄사나 안락사 모두 찬성하겠지만, 칸트로 대표되는 동기주의 철학에 있어서는 두 방식의 죽음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지상주의 철학과 동기주의 철학이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결국 존엄사나 안락사 모두, 동기의 차이를 지닐 뿐, 특수한 형태의 자살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사실 때문이다. 존엄사나 안락사를 단순히 동기의 차이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거친 방식이지만, 이들이 모두 특수한 상황에서의 자살이 윤리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가라는 도덕적 물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지상주의와 동기주의의 입장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얼핏 보면 이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자유주의는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이념중 하나이고 우리가 자신에 대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근대사회에 들어서나 가능해진 일이니 말이다. 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 몸의 처분권은 온전히 자신에게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심각한 맹점을 하나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처분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 얼마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 자체로 비도덕적인 행위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기매매의 예시는 어떠한가? 우리가 자신의 몸에 대한 온전한 처분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장기를 판매하는 것을 규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전근대 유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싱싱한 이를 팔아 부자들의 잇몸에 심는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비록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하는 자유지상주의의 논리에서는 전연 하자가 없을지 몰라도 일반적인 도덕적 관점에서 바라보기엔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볼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한 처분이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장기매매는 돈에 의해 자신의 목숨마저 판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저울질하며 인간의 인격을 수단화 시킨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역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독일의 대표적인 의무론 자이자 동기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라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온전한 자유권의 주장에 대해 그들이 자유의 의미를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논박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자유의 의미는 보다 도덕적으로 엄격하고 철학적으로 엄밀히 정제된 개념이다.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므로 자유롭게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논리와 달리 칸트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몸을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 있는 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장기매매나 자신의 신체를 판매한다거나 자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자세히 보면 모두 쾌락이나 고통회피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이라는 인격을 수단화시키는 행위이다. 이것은 인간을 욕구와 정념의 노예로 종속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 인간을 이성을 지니지 않은 다른 동물들의 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게 만든다. 생물학적 욕구나 사회적 요구를 위해 자신을 복종하는 행위는 칸트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오히려 자유의 의미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결국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성과 자유의지의 주체로서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나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을 목적으로서 존중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자살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살은 결국 어떠한 목적(그것이 어떠한 특수한 상황과 요인에 의해 좌우될지라도)을 위해 자신의 인격을 수단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타살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존엄사나 안락사 역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라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자살과 다를 바 없지 아니한가? 존엄사나 안락사 역시 결국 칸트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행위에 다름 아닌가? 이 지점에서 바로 존엄사와 안락사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갈린다. 안락사 허용에 찬성한다는 것은 존엄사의 이유인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포함하여,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지속하면서 받게 될 가족들의 경제적 고통 이라든가 환자가 겪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같은 다양한 이유들을 근거로 삼는다. 위에서 칸트가 반박한 자신의 몸에 대한 처분권은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다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논리 역시 안락사를 찬성하는 한 가지 논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들이 칸트의 윤리관 아래에서 허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가족들이 받게 될 경제적 고통이나 환자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사실 의무보다 연민을 앞세우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비록 인간의 자기보존의 의무가 중요하기는 하나 그들이 받게 될 고통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며 안락사를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이나 환자에 대한 개인적인 연민은 뒤로하고 칸트의 윤리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안락사는 결국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기위해 자신의 인격을 수단화 시키는 행위라는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칸트는 모든 안락사에 대해서 엄격한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존엄사는 일반적인 안락사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하나 지니고 있지 않은가? 존엄사의 찬성논거는 연민이나 소유권에 관한 논리가 아닌 죽음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칸트는 분명 자신의 정언명령 제 1법칙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를 들었다. 그렇다면, 존엄사의 논거인 인간의 존엄성 보존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정언명령 제 1법칙에 부합하고 있는 것 아닌가? 기실 이러한 논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내가 보기에 칸트가 현대과학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해서는 도덕적인 고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당연하다. 칸트의 시대에는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라 하면 경제적 고통이든, 육체적 고통이든,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수단으로 여기는 행위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시점까지 몰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칸트의 주장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생명권을 포기하는 것’에 문제에 대한 논의였으나, 오늘날 우리가 존엄사를 찬성할 때 드는 핵심 논거는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피하기 위한 생명권의 포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존엄사는 더 이상 자살의 허용이라는 이분법적인 논쟁을 넘어섰다. 그것은 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생명의 의미와 존엄성이 이제는 ‘무엇이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까지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에게 삶의 연장과 편의를 제공했지만 한편으로는 삶을 추하고 무의미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만 가능하다면, 무의미하게 숨만 붙어 있는 상태라면 과연 그것을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칸트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행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죽기 위해서 존엄한 죽음을 택하는 행위를 자신의 인격을 수단화 시킨다고 보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의식을 잃고 죽어가는 육체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행위야말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전하지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불완전한 발전을 이용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삶을 추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칸트의 논의는 분명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안락사 찬성 논거에 대해 성공적인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인간존중을 기반으로 한 의무론적 윤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을 절대적 윤리지침으로 여김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대명제를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또한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 당사자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는 점과 존엄사의 경우, 칸트의 윤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칸트 철학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칸트의 윤리관이 기독교의 윤리관의 근대적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심이다. 칸트의 철학은 도덕의 최고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해야하는 이유에 대해서 내세와 신의 개념을 끌어오는데, 이러한 선한 삶을 위해 ‘요청되는’ 신은 결국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 선하게 통치하는 신의 존재와 내세의 삶을 희망할 수 있다는 기존의 기독교적 사상과 논리를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받아들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칸트는 오직 인간의 삶의 궁극적 이상이 내세에 있다는, 기존의 기독교적 논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도덕적 의무에 얼마나 충실한가와는 상관없는 인간 삶의 불합리함을 얼버무리고 회피하려 하였다. 칸트는 남들보다 더 선하고 도덕적인 인간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 보다 더 비참하고 때로는 더 비인간적일 경우가 많다는 문제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기독교의 인격신이라는 개념을 끌어오면서도(선험과 직관을 통해 논증을 회피했을 뿐) 신에 대한 논증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모래성 같은 기반위에 논증을 세운 격으로 그가 단순히 기독교의 황금률을 정언명령의 방식으로 재포장하였을 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은폐할 수 있었지만 후에 이러한 칸트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정언 명령적 윤리관을 비판한 것이 바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이다.
쇼펜하우어는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칸트의 철학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였음을 지적한다. 칸트의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인 정언 명령적 형식은 아무런 증명 없이 우리의 행위가 복종해야 하는 법칙이 있다고 전제했으며, 그 법칙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해야한다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자신의 명령적 윤리에 대한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신학적 도덕을 끌어왔기 때문에 칸트 윤리학의 개념들도 신학적 전제를 떠나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칸트철학의 문제점이다. 그는 칸트 철학의 최고 원리인 정언 명령이 이기주의에 근거하는 가언 명령에 불과하며 칸트의 윤리학이 확고한 기초를 갖추지 못한 ‘신학적 도덕의 위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가 칸트의 ’이성에 기초한 정언 명령적 도덕 법칙’에 반하여 모든 도덕성의 근본으로 주장하는 것은 바로 동정심이다. 재미있게도 칸트가 진정한 윤리적 행위에 포함될 수 없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던 동정심에 기반한 윤리가 진정한 도덕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비합리성과 직관을 중시하며 삶에 대한 맹목적 생존의지만이 인간의 삶 전체라고 주장한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당연해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삶 전체가 체험과 의지로 이루어져있으며 인간은 그러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결핍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구분되지 않음을 알아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윤리학의 최고 원리로 “누구도 해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도와라”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정의와 인간애라는 두 가지 근본 덕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무한한 이기심이 내재된 인간에게 이 덕이 가능한 것은 동정심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도덕의 참된 기초로 동정심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고통 받는 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인식함으로서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나와 타자의 동일화를 통해 자기희생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론은 안락사와 존엄사의 찬성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동정심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삶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결국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보편적인 안락사와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존엄사의 논리 모두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도덕의 최고기준으로 동정심을 내세우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논리는 인간의 존엄과 동정심을 포괄하는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논리 역시 지나친 염세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점 등을 지니고는 있으나, 그러한 점과 별개로 동정심을 기반으로 한 안락사를 비판하는 칸트의 윤리를 성공적으로 논박하고 있으며 칸트의 철학이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존엄사의 찬성논거까지 성공적으로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출처
1.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8)- 쇼펜하우어
2.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3. 安樂死에 關한 현대신학적 고찰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docId=48348231&qb=7Lm47Yq4IOyViOudveyCrA==&enc=utf8§ion=kin&rank=4&search_sort=0&spq=0
4.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1> 쇼펜하우어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353
5.칸트의 실천철학에 있어서의 자유와 도덕성의 관계
http://diebildung.net/bbs/view.phpid=scriptoriu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desc&no=158
6.종교학대사전
안락사[ 安樂死, euthanasia ] [네이버 지식백과] 안락사 [安樂死, euthanasia]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292&cid=204&categoryId=204
7.김○○ 할머니 사건(존엄사 판결)
[네이버 지식백과] 김○○ 할머니 사건(존엄사 판결) (법원 이야기, 2011.3.7,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96413&cid=124&categoryId=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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