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 서양고중세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3) - 삼위일체와 시간의 문제
1)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로마 쇠락기에 이교도 아버지와 기독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웅변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로 글을 썼다. 그의 제일 널리 알려진 저작인 “고백록(Coffessiones)”은 397년에서 401년에 쓰였는데, 이 글에서 그는 388년, 34살의 나이에 그의 아이가 일찍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어, 그가 18살에서 19살 때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통해 읽은 “파이돈”으로 플라톤을 접했으며, 386년에 쓴 저작인 “De beate Vita”에서는 신플라톤주의에 경도된 모습을 보인다.
그는 늦은 나이인 33살(387년)에 Hortensius를 통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391년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사제 서원을 통해 수도사가 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고백록”, “삼위일체론(De Trintate, 400-416)”, 신국론(De Civitate Dei, 413-426)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어려운 저작 중 하나인 삼위일체론(De Trintate)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정립된 삼위일체론에 대한 해명이다. “고린도 후서”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관계 맺음에 대한 구절이 나오는데, 삼위일체에 대한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논쟁, 테오토코스(Theotokos) 논쟁, 단성론(Monophysitism) 논쟁은 모두 이러한 관계에 대한 해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서로는 Ferdinand Ulrich의 “Homo Ahyssus”, Roland Kanys의 “Augustins Trinitätsdenken Bilanz, Kritik und Weiter führung”(2007) 등이 있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믿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함부로 접근하지 않겠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 신학자들처럼 하나님을 “존재”로 인식한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제일 원리는 일자이다. 이 일자는 모든 존재 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 위에 있으므로 하나님은 제일 원리인 일자이다. 또한 성경에 따라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므로 하나님은 존재이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존재인 동시에 일자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그에게 존재는 일자와 같다.
이는 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플로티노스의 삼위일체는 세 가지 보편적 원인으로 이루어진다. 존재 위의 일자와, 누스이면서 존재이지만, 말씀 혹은 로고스는 아닌 지성과, 세 가지 보편 원인 가운데 가장 낮은 세계 혼이 그것이다. 일자는 지성 위에 있고, 지성은 세계 혼 위에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서는 세 위격이 동등하며 존재 속에 있는 본질에서 통일을 이룬다. 즉 세 가지 보편적 원인이 같은 존재(Ousia)에 참여한다.
플로티노스에게 존재는 존재의 칭호를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지성과 더불어 오직 일자 다음에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성부 하나님은 말 그대로 존재이다. 이런 교리 차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의 존재 개념을 성부 하나님에게 사용한다. 이때 플로티노스의 존재란 존재성(entity, ousia)로 파악되며, 언제나 스스로와 동일하다. 즉, 영원하며 불변하다. 영원성과 불변성은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두 가지 중요한 속성으로 중세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영원하며 불변한다는 교리로부터 생성과 존재의 관계, 변화와 불변의 관계, 시간과 영원의 관계에 대한 일련의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주된 관심사도 이러한 문제들에 있었다. 플로티노스의 주된 형이상학적 문제는 다자와 일자의 관계였고, 아퀴나스의 문제는 존재의 가장 높은 행위에 대한 존재자의 분유(分有)적 행위의 관계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제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고 있는 것”과 “영원 속에서 변함없이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의 관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De Trintate 9권”에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을 하나의 신으로, 동일성은 아니나(각각 다른 인격체), 동일한 본질의 통일체로 설명한다. 이러한 동일본질(Homoousios) 안의 위격(성부, 성자, 성령) 차이는 건드릴 수 없는 믿음의 내용이자, 권위의 인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럼에도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유적 접근을 시도한다. 즉, 삼위일체론은 확고부동한 진리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렵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상(Imago)을 제시함으로써 삼위일체의 구조와 합리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가지 상이한 것이 어떤 하나의 본질로 통합될 수 있는 일상적 사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1)사랑, 2)사랑하는 자, 3)사랑받는 자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행위 안에 구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정신(Mens)의 자기 사랑에 대해 논한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가 성립되는 방식은 1)정신 자체, 2) 그에 대한 말(Logos)인 정신의 인식 3) 사랑 으로 이루어진다. 정신은 사랑을 통한 인식의 아버지이며, 사랑하면서 인식할 때만 정신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와 유사한 논지를 전개하는데 그에 따르면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은 우리 의식의 무한성에 대한 의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 따라서 주체가 인식하는 필연성이란 주체 자신의 대상화된 본질이며, 의식이란 자기의식, 자기 완전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인식한다는 정신은 인식 아래에서 스스로를 사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삼위일체의 실제 문제를 정신의 독자성 문제로 스스로와 관계하는 사고 작용의 내적면모를 보여준다.
3)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제 1동기는 불안에 있다. 마음에 대한 해명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 철학이 일어나는 장소에 대한 규정이며, 또한 플로티노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탐구에 있어 내면으로의 전환이 나타난다.
Noli foras ire, 밖으로 나가지 마라
inte ipsum redi, 너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in interiore homine 인간의 내면 안에
habtat veritas! 진리가 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거로서 비물질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는 신(神)이다. 물질적, 변화, 영원하지 않은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다. 신과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연결하는 통로는 영혼이다. 영혼은 몸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과정을 지각함으로써 감각 지각을 통해 물질적인 것을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감각적 차원을 통해 감각 지각을 형성한다.
영혼에게 있어 기억(Memoria)은 신적 지혜,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기억은 갖가지로 지각된 무수한 표상들의 보물창고이며 무엇이든 간수되고 저장된다. 기억은 모든 의식적인 것의 연원으로 우리의 정신과 사고는 이러한 보물창고를 통해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으로 도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역시 모순율 아래에 있기에, 기하학과 추상적 인식 너머로 도야할 수는 없다.(ipas veritas) 우리는 단지 정신의 첨단(acies mentis), “정신의 뾰족한 탐침으로 그것을 건드려볼 수 있을 뿐이다.”
말씀(Logos)은 성부의 자기 지식이며 그 자체로 성부의 형상이며 모양이다. 사실상 말씀은 성부의 완전한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모양(Resemblance) 그 자체이며, 다른 모든 모양들의 모델이 된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또한 자신 안에 실존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유형이나 이유들이다. 이러한 유형과 모델이 바로 신적인 이데아(Idea)이며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로고스를 신적인 이데아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 유형을 따라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요한복음 1장 9절 “말씀(Logos)가 빛이었다. 그 빛이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모든 불완전한 것들의 배후에는 완전한 것들이 있다.”
로고스는 또한 인간 지성의 빛이기도 하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는 사물들이 오직 형상일 뿐인 세상에서 인식하는 지성이 사물들을 그 모델에 연결 짓지 못하면 참된 지식은 불가능함을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과 생명이듯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가 서로 나누는 사랑, 즉 성령으로 지복이 된다. 지복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진리는 절대적 존재인 가장 높으신 선에 대한 지식으로, 하나님은 지복 자체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진리에 머무를 때만 행복할 수 있고, 이 진리의 영원성이 사람들을 영속적인 생성으로부터 구속할 수 있다. 고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행복이란 불변하고 영원하지 못한 인간이 불변성과 영원성에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써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세상은 하나님이 자신의 지복에 참여하게하기 원했던 지적인 피조물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했고 그의 말씀이 능력이며 의지이므로 세상이 존재했다. 오직 하나님이 존재하고 그가 세상이 있기를 의욕 하였기 때문에 세상은 존재한다. 이런 점을 넘어서 창조의 원인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측면에서 자기원인이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원인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조행위는 변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또한 시간을 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든 미래 시간들의 연속은 총체적인 모든 미래 존재와 더불어 창조의 순간에 동시에 지음 받았다. 이는 곧 in principio(근원, 근본, 시원, 원리)의 문제를 낳게 된다.
창세기 1장 1절에 따르면, “태초에 신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창조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영원 속에 있는 당신(하느님)도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았는가? 신은 이미 미래의 일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시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세계의 최초의 시간적 시작에 대한 논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미 고찰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가 순간이며, 따라서 시간적인 최초는 그 자체로 모순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모든 순간이라는 것은 그 순간 이전의 과거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은 시간 안에서 시간으로 소리 나지만, 하나님의 영원에서는 발설되는 바가 하나로 그치고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원에서는 발설되는 바가 하나로 그치고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시간의 변화이며 참된 영혼도 불멸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은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 전체로 도약한다. 시간은 스쳐지나감 안에 그 존재를 가진다. 따라서 시간을 세계 전체 안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은 내적 의식의 경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존재는 우리 영혼의 힘 안에, 즉 시간의식에 근거를 둔다. 영혼이 그 시간의 길이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영혼은 또한 신에게 정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우리가 예지할 수 있는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능력(미래에 대한 현재), 직관하는 능력(현재에 대한 현재), 기억하는 능력(과거에 대한 현재)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는 시간을 측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전체로서의 현존)과는 결코 비견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의 눈부신 영원성을 이해한 사람은 순간들의 연속과 영원성은 서로 비교도 될 수 없음을 알지도 모릅니다. 또한 긴 시간도, 동시에 전개될 수 없는 수많은 지나가는 운동들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길어질 수 없고, 영원한 것에 있어서는 그 무엇도 지나가버리는 것은 없으며 전체가 현존합니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전체로서 현존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과거의 시간은 미래의 의해 쫓겨나게 되고, 모든 미래의 시간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며, 모든 과거와 미래도 항상 현재적인 것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인간의 마음을 붙들어 고정시키고, 과거나 미래의 시간이 아닌, 즉 항상 머물러 있는 저 영원이 어떻게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지시하는지 알아볼 수 있게 하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11권 천지창조와 시간론
5)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윤리적 지식은 신적인 이데아의 결과인 하나님의 조명의 특별한 한 경우이다. 지성은 보편적인 도덕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하나의 빛을 받는다. 학문적 인식에 대한 사변적인 조명과 마찬가지로 덕에 대한 도덕적 조명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정의에 대한 존중”, “동등한 사물들을 동등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 “모든 사람에게 제 몫을 주는 것”, “열등한 것을 우월한 것에 종속시키는 것” 등의 규칙들을 제공한다.
우리 안에 빛을 비추는 도덕 규칙들은 자연법을 구성하고, 이 자연법에 대한 의식을 일컬어 양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양심과 지식은 도덕적 생활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지성뿐만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 안에서 얻어야 하는 질서의 모형은 우리 앞에 있는 자연 안에 놓여있다. 사려와 용기, 절제와 정의, 이 네 가지 핵심덕목들은 영원법을 이루며, 이러한 영원법을 의지가 따를 때 선하다고 말하고, 따르지 않을 때 악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악은 “진리를 따르려는 의지보다 물질적 선을 향유하기를 더 좋아하는 의지들의 질서 없는 운동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육신이 (파이돈과는 달리) 영혼의 감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다만 원죄의 결과물이며 도덕 생활을 통해 이를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죄는 육신이 영혼에 대해 일으키는 반란으로 여기서 욕망과 무지가 생긴다. 영혼이 육신에게 도리어 통제받을 때, 영혼은 스스로를 육신으로 착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이러한 타락 상태가 자유의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주장하며, 자유의지의 복권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허락하시는 도움이므로 도덕적인 의를 이루기 위하여 은혜와 자유의지는 모두 사용될 수 있다. 고로 은혜로 악을 행할 수 없는 지점에 갇히는 것은 자유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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