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henomenology 13

이남인 (2004) 현상학과 해석학 (2)

이남인 (2004).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 후썰과 현상학의 이념 1.4 형식적 존재론과 영역적 존재론 경험과학의 조건① 대상에 대한 경험: 우리는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다양한 유형의 현상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유형의 과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 대상에 대한 경험은 이러한 여러가지 과학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과학은 모두 나름대로의 고유한 경험에 기초해 있는 것이며, 바로 이처럼 이러한 과학들이 대상에 대한 나름의 경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경험과학이라고 ..

이남인 (2004) 현상학과 해석학 (1)

이남인 (2004).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 후썰과 현상학의 이념1.1 현대의 위기와 현상학의 이념 Husserl 현상학의 출현 배경: 제1차 세계대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 전세계적인 경제공황, 나치주의의 대두 등  Husserl 의 진단① [이는] 현대과학이 병들어서 그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위기상황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 현대과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 함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과학이 역설적으로 인류의 삶과 고양을 위해 그것이 지녀 왔던 본래적인 의미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음을, 다시 말해 과학이 과학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22-23]② 그러나 [...] 이러한 과학의 위기의 최종적인 원천은 바로 철학..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2019-2 예술철학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 글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지 않고, 곧장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왜냐하면 후자의 질문이 합당하게 해명되고 나서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영미의 분석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철학자들, 즉 예술 정의 불가론을 주장하는 웨이츠(M. Weitz)나, 정반대로 예술이 정의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단토(A. Danto) 혹은 디키(G. Dicky) 등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들은 “예술은 정의(定議)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있어 양 극단에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 ..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3)

8절 후설의 시간의식Zeitbewußtsein을 다루기 위한 예비 작업 -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중심으로 후설은 명증성Evidenz을 ‘사고한 것이 주어진 사태나 대상과 일치함’으로 사용한다.[각주:1] 이러한 명증성은 다시 사태와 사고가 일치하는, 즉 지향한 대상이 충족되는 충전적adäquat 명증성과, 주어진 사태가 존재하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필증적apodiktisch 명증성으로 구분된다.[각주:2] 이 부분에서는 일종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아데쿠아티오(adequatio)라는 단어는 흔히 동화, 일치라는 뜻을 지니며, 전통적인 진리개념- 즉, “진리는 대상과 판단 사이의 ‘일치’에 있다.”에서 바로 그 ‘일치’에 해당한다. 이 단어의 유래는 아리스토텔레스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장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과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설 4절 논리주의(Logizismus)와 심리학주의(Physchologismus)의 대립 앞서 설명했듯이 데카르트가 결행한 cogito의 확립은 근대의 존재론을 확실성을 기반으로 한 마주-세움(Gegen-stand)의 존재론으로 이끌었다. 이 확실성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clara et distincta, 즉 명석하고 판명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명석한 지각이란 “집중하고 있는 정신에 현존하며 드러난 지각”을 의미하며, 판명한 지각이란 "명석하기 때문에 모든 다른 지각과 잘 구별되어 단지 명석한 것만을 담고 있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 최초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

2019.04 사회철학반 발제문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장 후설 이전의 근대 철학의 문제의식에 대하여 대강 서술함 1절 근대 철학 이전 존재론Ontology의 주요 개념들- 아리스토텔레스의 ‘ousia’ 개념에 대한 중세 철학의 수용 지성사에 있어 사유가 인식과 맺는 독특한 관계는 언제나, 하나의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철학사는 마치 자연수로부터 정수, 유리수, 실수로 나아가는 교과서와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었을 텐데, 이는 철학사 곳곳에서 나타나는 돌발적인 사건들- 즉, 차이를 지닌 사상들 사이의 전투와 대립, 예기치 못한 공명과 결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철학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 그 자체로 ..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5)

19. 라이프니츠의 조화론 베른하르트 볼차노: 명제들의 확실한 객관성에 관하여 오스트리아와 특히 뵈멘에서 철학의 시조는 작센인 라이프니츠(1646-1716)였다. 그는 1712-1714년 오이겐 황태자의 총애를 받으며 빈에서 살았다. 그는 항상 화해하는 정신으로 논제를 펴면서 백과전서적 관심과 전체 복지에 대한 배려, 그리고 보편정신을 글에서 드러냈는데, 이는 1800년 이후 뵈멘의 개혁 가톨릭주의에서 부활한다. "나는 대부분의 종파가 그들의 가르침에서는 옳으나 거부에서는 옳지 않다는 경험을 했다."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세계가 위계질서들로 구성돼 있다는 학설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 위계질서들에는 그가 단자라고 부르는 그런 타고난 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이 살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이 존재들 각각은 다른..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4)

18. 프라하의 마르치온주의자들 뵈멘의 체코인과 독일인들 간의 분쇄 전쟁 1848-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두 개의 역사 과정이 충돌한다. 뵈멘(체코)과 빈(오스트리아), 부다페스트(헝가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업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의 이행과, 종속 민족의 각성이 그것이다. 뵈멘에서 전개된 체코 민족주의의 대두는 참정권 요구로 이어졌는데, 이로 인해 뵈멘에서는 라이프니츠 식 철학을 통해 체코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독일 철학자들의 움직임을 포착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체코인들의 행동주의와 뵈멘 내에서 소수 민족에 속하는 독일 지식인들의 탈정치철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뵈멘의 민족 갈등은 극에 달해 연방제 정부에 대한 요구가 가장 강했다. 체코인들은 1860년..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3)

2. 황제와 그의 궁정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소모되어) 무너지게 돼있었다고 한다. (...) 제국을 단결시켰던 바로 그 힘, 즉 황제의 완강함과 관리들의 전통주의가 결국은 제국을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각주:1] 크라우스나 트라클의 비관주의와는 반대로, 몰나르Franz Molnár아 헤르만 바르Hermann Bahr같은 낙관주의자들은 안전사회를 주장했다. 빈 태생의 유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어제의 세계: 한 유럽인의 회고』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1890년 전후에 성장기를 보내며 그는 유복한 가정이 미래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사회에 도취됐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구호가 사회에 자리잡았으며, 중산층은 새로운 문물들(전깃불, ..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2)

1부 합스부르크 관료 체계_타성 대 개혁 "죽지도 않고 고칠 수도 없는 병, 그것이 가장 나쁜 병이다." - 에브너-에센바흐 1. 바로크에서 비더마이어로 "1867년부터 1914년 사이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렇다 할 목표나 국호가 없는 이상한 왕조 국가였다. 1800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중동부에서 적어도 세 가지 과업을 수행했다. 남부 독일인들을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게 했으며,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물리쳤고, 서구 문명을 반(半) 동양적인 나라에 전파했던 것이다."[각주:1] 합스부르크 왕조는 1800년 즈음 되어 그들 스스로를 합스부르크 왕조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임하였다. 이들은 1806-1867년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1867-1918년엔 오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