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 서양고중세철학
보에티우스(Boethius)- 라틴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
1) 스콜라 철학의 특징
<중세 수도원의 학문적 커리큘럼>
1. 이론적, 사변적 철학
1) 자연학 – rationabiliter 합리
2) 수학 – disciplinaliter 체계
3) 신학- intellectualiter 지성, 직관
산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 : 4학(Quadriuium)
2. 실천적, 활동적 철학
1) 개인윤리
2) 정치윤리
3) 가정윤리
반면 Techne, 기예를 다루는 학문은 artes mechanicae(servilles), 노예의 학문으로 불렸다. 이는 효용성, 기능성, 유용성을 추구하는 학문들에 국한되었다. 또한 실제적인 학문으로 신학, 법학, 의학 등이 있었으며, 중세기 학제에는 위에서 언급한 산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을 4학(Quadriu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논리학)을 3학(Trivium)으로 하여 자유 칠과목(Seven Liberal Arts)을 이루었다. 물론 이는 모두 De ver religione, 참된 종교를 위한 학문적 수양이었다.
James A. weisheiple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먼저 과학적 탐구는 올바른 때에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탐구도, 상기도 아닌 제기된 사안에 관한 탐구를 통해서만 과학은 성취될 수 있다. 둘째로, 과학적 탐구는 4가지로 나누어진다. 1) An sit?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2)Quid sit?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3)Qualis sit?(그것의 퀄리티, 질과 성질이 무엇인가?), 4)Propter quid sit?(무엇을 위하여 그것은 존재하는가?)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적절한 논증이라 함은 그 과학의 고유한 주제 아래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은 스콜라철학(Schola)의 근간이 된다.
스콜라 철학의 의미인 Müsse는 여유를 뜻하며 스콜라인(Scholosticus)은 일상사와 잡다로부터 해방된 뛰어난 학자, 법정변호인, 수사학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중세에 수도원 선생으로, 성당학교의 인문학자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교육은 1.Lectio((정규)강의, 특강, 연습), 2.Disputatio(토론)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텍스트는 쭉 읽기- 나눠 읽기- 나눈 걸 세밀하게 해석 –토론의 과정을 거쳤으며, 이러한 까닭에 텍스트에 대한 권위는 높아졌다. 교부들의 철학 전통은 “권위의 인정”으로, 이후 스콜라 철학에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통념처럼 권위에 무조건적인 의존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권위를 인정한 이후에는 다양한 지식의 추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들의 철학은 Concordia(상충되는 사안들의 조화/일치)로 표현될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시인된 진리들을 수집하고 짜깁기 하는 사람들로, 신 자신에 의해 계시된 진리를 드러내고, Voces(신의 말씀)의 빛 아래에서 res(존재자)를 빛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스콜라 철학의 이러한 목표를 고려해 볼 때, 이들은 정통 교리의 독단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냥꾼이자 발명자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보에티우스(Boethius)의 영향- 번역을 통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파
보에티우스의 첫 번째 목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술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가 라틴 세계에 전달하고자 했던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부분은 결국 번역되었다. 또한 그는 철학이 지배하는 과학의 분류뿐만 아니라 철학의 정의도 후계자들에게 물려주었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지혜는 바로 실재, 즉 만물의 살아 있는 생각과 원인이다. 이 실재는 스스로 존재하고 존재하는 데 자신만 필요할 뿐이다. 지혜는 사람의 사고에 빛을 비춰 줌으로써 사랑을 통하여 사람을 자신에게 이끈다. 그러므로 철학은 곧 하나님에 대한 탐구 및 사랑으로 고찰될 수 있었다.
보에티우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는 데 있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논리학이었다. 철학은 사변 철학과 실천 철학 두 분야로 나누어진다. 사변 철학은 또한 여러 가지 과학으로 세분화된다. 보에티우스는 존재를 3 종류로 구분한다. 예지적 존재들(intellectibilia), 지적 존재들(intelligibila), 자연적 존재들 혹은 자연들(naturalia)이다. 지적 존재들은 인간 영혼과 같이 타락하여 육신이 된 예지적 존재들이다. 자연적 존재들은 그 형상이 질료와 떨어질 수 없고 혼자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예지적 존재들을 다루는 학문을 신학에, 지적 존재의 학문에 해당하는 학문의 이름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영혼학(psychology)에, 자연적인 몸체들, 자연들에 대한 탐구를 자연학(physiology)에 분배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전체를 이루는 학문들의 집합을 서술하면서, 자연에 대한 연구에 해당하는 네 학문들에 사학, 사과(quadrivium)라고 이름 붙인다. 그는 이 용어를 지혜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실천 철학의 경우, 이론 철학이 인식 대상에 따라 구분된다면 실천 철학은 이루고자 하는 행위에 따라 구분된다. 실천 철학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덕의 획득에 의하여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부분, 2) 사려와 정의와 용기와 절제의 동일한 덕을 갖는데 있는 부분, 3) 가정생활 경영에 대한 부분이다. 세 가지 다른 분야들은 트리비움, 즉 문법과 수사학과 논리학을 형성한다. 이들은 지식의 획득보다 해설의 방법에 관계있다.
하지만 논리학에 대해 한 가지 난점이 생긴다. 즉 논리학은 기술인가 혹은 학문인가? 다른 말로 하면 논리학은 철학에 이바지하는 수단인가 아니면 철학의 부분인가? 보에티우스는 논리학이 양자를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 혹은 개연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술로서의 논리학은 자신의 대상을 갖고 있고, 따라서 철학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논리학은 철학의 다른 모든 분야에 유용하므로 그것은 도구적이라고 또한 말할 수 있다.
보에티우스의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한 주석이다. 보에티우스는 포르퓌리오스가 쓴 주석서를 상당히 따르는데, 여기에서 플라톤의 철학에 따른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의 경향이 나타난다.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한편으로는 보존하였음에도 동시에 플라톤의 논리학을 도입하였다. 포르퓌리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입문”, 통칭 Isagoge는 유와 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포르퓌리우스는 유와 종을 다룰 것이라고 선언한 다음, 유와 종이 본질적으로 실체적 존재인지 단순히 지성의 개념에 불과한지에 대하여 자신의 판단을 나중에 미루겠다고 덧붙인다.
포르퓌리우스는 유와 종이 실재이면서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비물질적인 실재라고 제시한다. 그는 이어서 이러한 비물질적 실재가 감각적인 사물들과 따로 존재하는지, 혹은 연합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존재하는지에 대해 연구한다.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포르퓌리오스의 해석이 내재한 양자택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불화를 화해시키려 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서론에 대한 두 주석서에서 일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답을 받아들인다. 그는 먼저 일반 개념이 실체일 수 없음을 증명한다. 이를테면, 유개념인 동물과 종개념인 사람을 가정할 때 유와 종은 그 정의상 개별자 집단에 보편적인 것이다. 동물이라는 유는 돼지 a, 사람 b, 말 c라는 개별자에 대해 보편적이다. 따라서 어떤 개별자에 보편적인 것은 개별자가 아니다.
유가 전적으로 종에 속하지만(다시 말해 사람이 전적으로 동물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반면에 유가 존재라면, 유가 그 다양한 종의 분유 사이로 나누어져야 하기 때문에 몇몇 개별자에 보편적인 것은 개별자일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유와 종의 보편자가 지성의 단순한 개념들이라면, 실재에서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개념들에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없다. 보편자들은 무엇에 대한 사고여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자가 단순 개념이라면 우리의 사고는 사물들을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된다.
보에티우스는 감관들이 혼란스럽거나, 복합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고 말한다. 우리의 정신은 이 자료들을 다시 나누고 결집하여 고찰한다. 마음은 비물질적인 존재 속에서 유와 종을 발견한다. 이때 이 존재 속에서 유와 종은 질료로부터 구분되고 이미 뚜렷이 구분된다. 혹은 마음은 물질적인 존재 속에서 유와 종을 발견한다. 이 경우에 마음은 육신이 포함하고 있는 비물질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순수한 형태로 따로 고찰하기 위해 그것을 육신으로부터 분리한다. 감각 경험에서 우리가 주어진 구체적인 개별자로부터 사람과 동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들을 이끌어 낼 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보편자들은 감각적 사물들과 연결된 상태로 유지되지만, 우리는 육신으로부터 구분되는 보편자들을 안다.(subsistunt ergo circa sensibilia, intelliguntur autem praeter corpora.)”
“플라톤은 유와 종과 다른 보편자들이 육체와 따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육신들을 떠나서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물질적인 것과 보편자들은 실로 지식의 대상이지만 그것은 감각적 사물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견해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의도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좀 더 높은 철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지지했는데 (...)”
- 보에티우스
그러나 여전히 보에티우스에게서 플라톤의 영향이 소거된 것은 아니다. 그는 마음이 그 신비로운 작용의 본질과 상태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고서 예지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말한다. 게다가 보편자들은 오직 개별자 속에서만 유지되지만, 이 보편자들은 무엇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존재든지 감각, 상상력, 이성, 혹은 직관에 의해 인식된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질료 속에서 한 형태를 보며, 상상력은 질료 없이 형태를 그린다. 이성은 형태를 넘어서 일반 관점에서 모든 개별자 속에 있는 종의 형상을 파악한다. 그러나 직관은 더 높은 것을 보는데, 직관은 우주의 벽을 없애고 마음의 순수한 눈초리로 본질적으로 순수한 그 형상을 명상하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는 보편자와 상응하는 실재는 이데아의 실재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보에티우스는 7개의 자유학예의 완결된 백과사전을 쓰지는 못했지만, “음악의 요소들(De institutione musica)”, “수학의 요소들(De institutione arithmetica)”, 유클리드 기하학의 요약인 “기하학(De geometrica)”을 남겼다. 그의 학문적 논문들은 4학의 가르침에 양분을 제공했고 논리학에 대한 그의 책들은 수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대신했다. 신앙과 이성의 결합자로서, 보에티우스는 스콜라주의 철학의 창시자 중 한명이었다.
3) 보에티우스(Boethius)의 신학
보에티우스는 예지적 존재인 신학에 대한 학문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놓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권적인 선(善)으로,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본유적 지식을 갖고 있다. 보에티우스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의 감소(diminution)이라는 원리를 주장한다. 불완전한 자의 실존은 완전한 자에게 의존하며 이는 하나님이고 지복이다. “선한 모든 것의 연합으로 완전하게 된 상태”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께 참여하고 말하자면 스스로 신이 됨으로써 복된 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사람의 지복은 하나님의 지복에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보에티우스는 또한 하나님은 모든 범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고, 오직 그가 세상을 경영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속성과 술어는 아직 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예지적 존재 다음인 지적 존재자에 대해 논한다. 인간 영혼은 예지적 존재에서 육체와의 접촉을 통해 지적 존재로 타락한 영혼이다. 이를 위해 영혼은 행복을 다시 얻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사람은 운명의 불행이 어떠하든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로운 의지를 사용해서 그렇게 하기에, 또한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지적 존재들은 완전한 지식을 누리므로 그들의 자유는 완전하다. 사람은 그의 영혼을 신적인 사유에 맞출 때 자유롭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땐 그렇지 않다.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를 분리하여 다룬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행위를 미리 보지만, 이 행위가 예견되었다는 사실이 행위를 필연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지하지 않고 섭리한다. 하나님한테는 어떤 사건이 총체적인 현재적 지식에서 그 이전에서나 그 이후에서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4) 보에티우스(Boethius)의 자연학
보에티우스는 칼키디우스가 주석을 단 “티마이오스”를 원용하여 그의 자연학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의 인자함에 의하여 이데아의 유형에 따라 혼돈한 질료를 형상으로 꾸민다. 그는 운명을 섭리에 종속시키는데, 사물들의 질서는 섭리이며, 또한 내적 법칙으로서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섭리이며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에 섭리의 실현인 운명은 섭리에 대립하지 않는다. 운명은 단지 섭리에 이바지한다.
그가 고찰한 두 번째 문제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존재를 선으로 보고 비존재를 악과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과 선한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물들이 실체적으로 선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선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그는 모든 개별 존재는 독특하고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우유(accident)의 집합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집합은 바로 무엇(id quod est)이다. 그러므로 무엇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의 집합의 결과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의 복합적 존재이기 떄문에 육신인 동시에 영혼이며, 또 육신도 영혼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떤 한 부분은 인간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in parte igitur non est id quod est) 반면 하나님은 완전한 단순성을 지니기에 그 존재와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복합적 실체의 존재(esse)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안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존재는 복합적인 존재의 부분들을 전체로 묶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있는 것의 존재는 전체의 구성적 요소이다. 이제 모든 복합적인 것은 하나의 결정적 요소에 의하여 통일체로 환원되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궁극적 피규정자는 질료이며, 궁극적 규정자는 형상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육신으로 이루어진 질료와 질료를 육신으로 조직하는 영혼으로 구성된다. 영혼은 사람이 본질이다. 그것은 id quod est(무엇)의 quo est(있음)이다. 그리고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재하게 하므로, 그것은 그의 존재(esse)이다. 따라서 복합적 실체의 존재(esse)는 전체 실체가 본질이게 하는 형상이다. 반면에 복합적 실체의 이 구성적 형상은 전체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의 형상일 뿐이다.
복합적 실체의 에세(esse)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에세(esse)는 오직 있음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은 복합적 실체에 고유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다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중세 철학자의 모든 지혜와 관련되는 표현들이 나온다. diversum est esse(형상), id quod est(완전한 실체), ipsum enim esse(형상만), nondum est(본질적으로 실체가 아님), at vero quod est(그러나 실체는), accepta essendi forma(그것을 존재로 만드는 형상을 받아들임), est atque subsistit(존재하면서 동시에 실체다). 따라서 존재와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 존재의 형상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아직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체는(omne quod est), 존재하게 하는 형상을 분유한다.(participate eo quod est esse) 그러나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하여 그것은 다른 무엇을 분유한다.(alio vero participat, ut aliqui sit) 또 모든 복합적인 것에서 형상과(omni composito aliud est esse) 복합적인 것은 다른 것이다.(aliud ips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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