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국가』, 번역 박종현, 서광사, 2005
1) 제 7권의 논의 전개
제 6권에서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시도된 "좋음의 이데아"와 앎의 대상들 및 앎의 단계들에 대한 도식적 설명 대신에, 7권에서는 "동굴의 비유"를 통한 보다 입체적 설명을 시도한다.
동굴 안은 가시적 현상의 세계를,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각기 비유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실재들을 인식하는 것인데, 이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비교육의 단계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를 위한 교과가 제시된다.
이 예비 교육이 끝난 이후에 변증술에 대한 집중적인 단련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변증술적 논변의 오용과 관련된 위험성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러한 단련을 거친 후에는 오랜 세월 동안의 실무적 경험을 쌓게 한다. 그 동안의 교육 과정을 밟게 하는 각 단계의 연령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쉰 살이 된 적격자들로 하여금 통치를 위한 본을 갖도록 하기 위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써, 마침내 철인 치자의 확보 가능성이 보이게 된다.
이 구도를 다시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태양’의 비유 (506d-509b)는 최상의 원인으로서의 선(to agathon)의 역할을 언급하고, (b) ‘선분’의 비유(509c-511e)는 원리로서의 선, 즉 최상의 원리(arche)6)로서의 존재 영역과 인식 영역의 구조를 설명한다. (c) 플라톤 철학함의 전체적 운동으로서의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선의 인식에로 향한 교육의 길이며, 플라톤의 철학 사유가 불확실한 것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확실한 목적, 즉 ‘선의 이데아'(Idee des Guten)에 한 직접적 인식이다. 1
2) 본문 (1) 동굴의 비유(514a-517a)
"그러면 다음으로는 교육paideia 및 교육 부족apaideusia과 관련된 우리의 성향을 이런 처지에다 비유해보게나.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의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spēlaion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 주듯 말일세."
첫 문장에서 대화 편의 전체 주제가 정의와 더불어 다시금 교육, 즉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이 확인된다. 만일 "동굴의 비유"를 단순히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묘사하기 위한 비유라고 받아들일 경우, 이 비유가 지닌 힘과 의미는 상당히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동굴의 비유에는 동굴과 바깥의 이분법보다도 그 양자를 넘어가면서 겪게되는 적응의 문제가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동굴의 비유는 "어둠 속에서 태양의 빛과 밝음으로 나아가는 상승과정과 그 빛에서 동굴의 어둠속으로 귀환하는 하강과정 속에 담긴 네 가지 상이한 체류과정-1) 지하 동굴에서의 인간의 상황, 2) 동굴 안에서의 인간의 해방, 3) 근원적인 빛에로의 인간의 본래적 해방, 4) 해방된 자가 동굴 속으로 귀환함-"으로 이루어진다. 2
처음으로 주목할만한 부분은, 동굴 안의 죄수들이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채로"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박을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파악했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인식과 결부시켜볼 때,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박은 스스로 풀어질 수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가? 일차적으로 이 글이 교육에 관한 텍스트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일견 후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에 7권에서 다시 암시되는 부분이지만, 플라톤은 자연발생적으로 결박에서 풀려나는 경우 역시 염두해두는듯 하다.(520a-520b)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통치자의 자질에 적합한 사람은 그 본성상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치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금전적 이득과 명예를 오히려 혐오하는 사람이므로, 교육은 여기서 단순히 훌륭한 통치자를 양산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통치자의 필요조건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의 유래에 대하여 고찰해보자. 플라톤은 어찌하여 굳이 비유의 장소로 "동굴"이라는 공간을 선택하였는가?
우리는 희랍 세계에서 행해진 ‘동굴제식’(祭式)과 ‘신비 동굴’을 구분해야만 한다. 동굴은 신을 숭배하는 제식을 위해 사용된다. 동굴 모양의 닫힌 공간에서 비의식의 축성 (Einweichung)이 이루어진다. 반쯤 어두운 동굴에서 사람들은 신성(神性)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된다.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밀의식(Mysterienkult)에 참여한 자들은 분명히 빛의 현상, 즉 신비스러운 어두움 가운데 갑작스런 밝음을 통해 깊은 인상을 얻었을 것이다. 후일, 사람들은 인간 세계의 모상(模像)으로서 ‘동굴’이라는 공간을 미트라스(Mithras) 제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을 만나는 곳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를 종교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으로 해석하려들지만,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그 까닭은 플라톤에게 동굴은 신이 하는 곳이나 숭배되는 장소가 아니며, 사람들은 신들에게로 나아가기 해서 동굴 밖으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3
인간세계를 어두운 동굴로 비유하며, 이 세계가 참된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최초의 철학자는 플라톤보다 2세대 앞서 살았던 아크라가스Akragas 출신의 엠페도클레스였다. 이를 통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역시도, 플라톤 자신의 고유한 창작이라기보다는 그의 사유에 여러 영감을 주었던 사유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
‘ 빛 ’ 은 바라봄과 인식을 뜻하며 , ‘ 어두움 ’ 은 이와는 반대로 보지 못함과 무지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부터 우리들에게 일반인 경험 사실로 여겨졌다. 초기 희랍 문학, 특히 호메로스(Homeros)와 핀다로스(Pindaros)에게서 빛, 어둠, 청명한 하늘, 안개는 이러한 의미에서 ‘실제’, ‘모상’, ‘은유’ 의미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것으로 종종 나타난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철학자들이 ‘빛의 형이상학’(Lichtmetaphysik)이라고 부르는 사상이 점차 생겨난다. 이러한 사상에서 인식의 근원은 ‘빛’이며, 이 빛은 태양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5
실로 플라톤 이전의 많은 사상가들이 이러한 1)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 2)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이행, 3)빛을 진리aletheia로 여기며, 진리와 현상 사이의 구분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파르메니데스는 "말들이 이끄는 마차에서 태양(helios)의 딸들에 의해서 밤의 영역에서 낮인 빛의 영역으로 이끌"린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유비(Analogia) 관계를 통해 상이한 것들의 관계적 유사성을 도출해낸다.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학파는 위에서도 언급했던 육체(soma)를 혼의 무덤(sema)으로 간주하는 사상의 최초 발원지이다. 오르페우스교 사람들은 영혼을 육체를 보호하기 위한 감옥으로 여겼다. 기원전 5세기 중반(483-423)에 살았던 엠페도클레스는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6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영혼은 어떤 과오로 인해 신들의 세계에서 쫓겨나 육체와 결합되어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우리는 지붕이 있는 이 동굴로 왔다”(elythomen tode hypo antron hypostegon)라고 표현한다. 7
“살인과 증오와 다른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바싹 마르게 하는 질병과 부패 그리고 어둠 가운데 재앙의 초원위로 강이 이리 저리 흐르는 외로운 장소"
이 장소는 "인간의 혼이 사후(死後)에 하데스로 간다는 희랍인의 일반적 사고를 전제"로 한다. 하데스는 인간의 영혼이 지하세계의 어두운 곳으로 이끌려, 현세에 지은 죄를 씻어내고 용서를 비는 곳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이에 더해, "인간은 ‘ 현재 ’ 이미 지하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미 이전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참회를 위한 처벌을 ‘ 지금 ’ 이곳에서 받고 있다" 8는 사고를 덧붙인다. 9
물론 인간의 세계 밑에도 형벌의 장소인 어두운 하데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빛의 세계인 신들의 세계에 비해 인간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어두움을 강조하고 있다. 더 높은 세계에는 신들이 있고, 순전한 영혼이 있으며, 태양이 있다. 인간은 이승에서의 정화를 통해 순전한 빛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또한 상상해보게나. 이 담(흉장)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세. 글쎄, 우선 이런 사람들이 불로 인해서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인들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실상 이들이 일생을 통해서 머리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당했다면, 어떻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반문했네.
"그럼 운반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이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만일에 이들이 서로 대화(토론)를 할 수 있다면, 이들은 자신들이 [벽면에서] 보는 이것들을 실물들(실재들)ta onta로 지칭할onomazein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지 않는가?"
"그야 필연적입니다."
그림자의 현상이 불로 인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현상은 태양을 조건으로 하여 나타난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소크라테스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세."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이러한 유비 관계의 확장이 다시금, 현상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즉, 동굴의 죄수들이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면, 이는 곧 죄수들이 그림자를 "실물들(실재들)ta onta로 지칭할onomazein 것" 만큼이나 이 비유를 전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금 하데스와 혼의 감옥인 육체가 거주하는 이승, 육체로부터 풀려나 정화된 영혼이 가는 빛의 세계의 구도를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인공적인 제작물들의 그림자들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걸세" 내가 말했네
"다분히 필연적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생각해보게. 만약에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태가 자연스레 진행된다면, 이들이 결박에서 풀려나고 어리석음에서 치유되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지 말일세.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 만약에 누군가가 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그가 엉터리를 보았지만, 이제는 진짜(실재)to on에 좀은 더 가까이 와 있고 또한 한결 더한 실상을 향하여 있어서, 더욱 옳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면, 더군다나 지나가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가리켜 보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서는 대답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그는 당혹해 하며, 앞서 보게 된 것들을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더 참된 것들로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2) 동굴 안에서의 인간의 해방"이 묘사되고 있다. 플라톤은 이를 "어리석음에서 치유"된다고 표현함으로써 (앞서 확인하였던) 영혼의 치유를 지칭하는 동시에 知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즉 영혼의 정화 내지 치유는 知의 추구와 같이 움직이는 영혼의 활동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만한 부분은, 결박으로부터 풀려나 그림자로부터 불빛으로 시야가 전환될 때, 결박되어 있던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뿐 아니라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이어지는 "익숙해짐"의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만약에 그로 하여금 그 불빛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그는 눈이 아파서,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것들로 향해 달아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방금 지적받은 것들보다도 정말로 더 명확한 것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그럴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 올 때까지 놓아 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 온 데 대해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가 빛에 이르게 되면, 그의 눈은 광휘로 가득 차서, 이제는 진짜들이라고 하는 것들 중의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물었네.
"적어도 당장에는 볼 수 없겠죠." 그가 대답했네.
"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synētheia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 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eidōlon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 걸세. 또한 이것들에서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걸세. 낮에 해와 햇빛을 봄으로써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말일세."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는 그가 해를, 물 속이나 다른 자리에 있는 해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필연적으로 그럴 겁니다." 그가 말했네.
"또한 다음으로 그는 태양에 대해서 벌써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을걸세. 즉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또한 어느 면에서는 그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일세."
"그가 그 다음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높은 곳의 것"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들의 위계 안에서, 한 위계로부터 다른 위계로 넘어가 인식하기 위해서는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익숙해짐을 넘어 플라톤 특유의 상향적 인식이 드러난다. 인식은 1) 처음에는 그림자들, 2) 물 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의 상eidōlon들, 3) 실물들, 4)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행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각각의 현상들이 모두 어떤 조건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림자들은 불을 통해서 현상하고, 상eidōlon들은 물 속에 비침으로써 현상되며, 실물들은 해의 투영을 통해서 현상한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는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러한 이행에 걸쳐저 있는 모든 조건들이 그 다음 단계의 조건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조건이 되는 불은 결국 해의 투영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이러한 조건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그 자체로서의 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태양은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를 포함한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다.
이 세 번째 체류과정에서는 동굴의 어둠에서 나와 태양의 빛과 낮의 밝음 가까이로 상승하는 사건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진정한 해방을 성취하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 의 비유’의 전체적인 의미에 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517 b 이하), 동굴은 하늘 아래 이 땅 에서의 생활을 상징하고, 동굴 속의 불은 태양을 의미하며, 동굴 속의 그림자는 우리가 하늘 아래서 보고 있는 사물들을 상징한다고 해설한다. 또한 동굴 밖은 이데아들의 자리이고, 동굴 밖의 사물들은 이데아들이며, 동굴 밖에서 빛나는 태양은 사람들이 아주 힘겹게만 통찰할 수 있는 최고의 이데아, 즉 좋음의 이데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 진리를 통찰하여 자유를 획득한 자의 자리는 하늘에 있고, 그곳에는 최고의 이데아를 중심으로 이데아들이 조화롭게 질서를 이루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10
이데아란 "개별 사물들(동굴 속의 그림자와 동굴 밖의 반사된 모습)을 ‘넘어선’ 어떤 다른 것"이다. 즉 그것은 "각각의 사물들이 스스로를 ‘어떤 공통된 무엇’으로 내보여주고 있는 그것의 보임새(Anblick)로서, 지성적인 봄을 위해서 그리고 지성적인 봄 안에서 일차적으로(primär) 보이는 것, 즉 인식되는 것을 가리킨다." 11 12
플라톤은 개별 사물들을 봄에 있어, 이미 앞서 이해되고 있는 그것을 이데아로 파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은 이데아의 이데인(봄), 즉 이데아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비-감성적인 것을 보고 받아들이면서 파악하는 능력을 누스Nous, 즉 지성이라 부른다. 13
그리스인들에게서 존재자의 존재는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아리스토텔스에 따르면 제2실체로서의 우시아(οὐσία), 즉 지속인 현존성(beständige Anwesenheit)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데아란, 어떤 것이 현존할 경우에, 하나의 사물이 공통된 무엇으로 자신을 내보여주고 있는 그것의 존재를 가리키는데, 그러나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는 하이데거의 눈으로 바라보면 존재 자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자성(Seiendheit)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킬 뿐이다. 14 15
"어떤가? 이 사람이 최초의 거처와 그곳에 있어서의 지혜 그리고 그때의 동료 죄수들을 상기하고서는, 자신의 변화로 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되,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자넨 생각지 않는가?"
"그러고말고요."
"만약에 그때 [그들 앞의 벽면에] 지나가는 것들을 그들 사이에서 가장 예리하게 관찰하고서는,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들이 곧잘 먼저 그리고 뒤에 또는 동시에 지나가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가, 이에서 앞으로 닥칠 사태(미래)를 가장 유능하게 예측하는 사람에게 명예와 칭찬 그리고 상이 주어졌다면, 그가 이것들을 갖고자 욕심부리며,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 힘깨나 쓰던 자들을 부러워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호메로스의 처지가 되어, '땅뙈기조차 없는 사람의 농노로서 남의 머슴살이를' 몹시도 바랄 것으로,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의견(판단)을 가지며'doxazein 그런 식으로 사느니보다는 무슨 일이든 겪어내려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플라톤의 존재론적 체계는 곧 가치론으로 이어진다. 이는 517b-517c 구절의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는데, 좋음의 이데아는 그것을 인식한 것만으로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궁극적인 것이다. 한 위계 안에서의 가장 좋은 일도, 그보다 높은 영역에서의 좋음에 비하면 (마치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가치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결박에서 풀려나 태양을 바라본 죄수가 동굴 안에서 계속 머물며 명예나 칭찬, 상을 추구하기보다 차라리 동굴 밖의 세계에서 머슴살이를 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내가 말했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렇지만, 만약에 그가 줄곧 그곳에서 죄수 상태로 있던 그들과 그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봄에 있어서 경합을 벌이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도 눈이 제 기능을 회복도 하기 전의 시력이 약한 때에 그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전환에서 반드시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은 단순히 더 높은 세계로 고양될 때뿐만 아니라, (마치 밝은 빛 속에 있다가 다시금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눈이 적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동굴 밖에서 다시 동굴 안으로 복귀할 때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플라톤은 이 점을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연결시킨다. 내부에서의 명예나 칭찬, 상을 바라는 동굴 안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데아의 빛을 바라보고 온 소크라테스는 비웃음의 대상이자, 붙잡아서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로서 빛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 만큼이나, 다시 동굴로 복귀하여 어둠을 바라볼 때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3) 본문 (2) 혼의 전환과 통치자의 육성(517b-521b)
"그러면, 여보게나 글라우콘! 이 전체 비유eikōn를 앞서 언급된 것들에다 적용시켜야만 하네. 시각을 통해서 드러나는 곳을 감옥의 거처에다 비유하는 한편으로, 감옥 속의 불빛을 태양의 힘에다 비유함으로써 말일세. 그리고 위로 오름anabasis과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의 구경thea을 자네가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으로 향한 혼의 등정anodos으로 간주한다면, 자네는 내 기대에 적중한 셈이 될 걸세. 자네는 이걸 듣고 싶어하니 말일세. 그렇지만 그게 진실인지 어쩐지는 아마도 신이나 알 걸세.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 같으이. 즉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각고 끝에 보게 되는 것이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이네. 그러나 일단 이를 본 다음에는, 이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아름다운(훌륭한) 것의 원인aitia이라고, 또한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는 빛과 이 빛의 주인을 낳고,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에서도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prattein 하는 자는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idein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네." 내가 말했네.
(...)
"즉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인간사에 마음쓰고pattein 싶어하지 않고, 이들의 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플라톤은 빛을 향해 올라가는 영혼의 등정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지성의 장소에서 최종적으로 통찰하게 되는 이데아를 '좋음의 이데아'라고 부른다. 이 좋음의 이데아는 진리와 더불어 지성적 인식을 보장해준다.
"(좋음이라는...) 이 낱말은 우선 도덕적인 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이 낱말의 근원 의미는, ‘그것(아가톤) 덕분에 다른 어떤 것들이 어디에 유익하게 사용되는 그런 것’, 따라서 ‘다른 어떤 것들을 유용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을 뜻한다."
"따라서 플라톤은 존재자들이 좋음의 이데아 덕분에 보여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도 좋음의 이데아 덕분에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이 파악하는 이러한 좋음의 성격을, 여타의 모든 이데아들에게 권능을 부여해주는 것(das Ermächtigende)이자, 존재 그 자체와 진리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das Ermöglichende)이라고 말한다." 16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통치자의 역설이 생겨난다. 즉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기에 통치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바로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사에 마음쓰고pattein 싶어하지 않고, 이들의 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이데아를 보아야만idein, 장차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슬기롭게 행하고자prattein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선의 이데아를 보았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인간사에 마음쓰고pattein 싶어하지 않"고 선의 이데아만을 계속 탐구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는 통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플라톤이 말하는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가 단순히 선의 이데아를 보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국가의 운영을 위한 통치자의 육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에 관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면 다음은 어떤가? 자네는 이런 걸 놀라운 일로 생각하겠는가? 가령 누군가가 신적인 관상theōria들에서 인간적인 나쁜 일들로 옮겨 가서, 어색한 꼴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또한, 아직도 제대로 못보는 상태인 데다 주위의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지기도 전에, 법정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올바른 것의 그림자들 또는 이 그림자들을 생기게 하는 상들과 관련해서 말다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리고 '올바름 자체'를 결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도대체 이것들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두고서 열띤 논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몹시도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면 말일세." 내가 말했네.
516e-517a와 연동되는 구절로,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연상시킨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현실은 모른 채로 자신의 철학적 행각과 확신 그리고 사명을 열띠어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이가 지각이 있다면, 그는 눈에 있어서의 두 가지 곤혹 현상이 두 가지 것에서 연유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즉 빛에서 어둠으로 옮겼을 때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겼을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할 걸세. 이 사람은 똑같은 현상들이 혼의 경우에도 일어난다는 데 생각이 미치어, 어떤 혼이 혼란을 일으켜 뭘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더라도, 생각 없이 웃지 않고, 이 혼이 한결 밝은 삶에서 와서 미처 익숙하지 못하여 암흑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밝은 삶에서 와서 미처 익숙하지 못하여 암흑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심한 무지의 상태에서 한결 더한 밝음으로 감으로써 눈부셔하는 것인지를 살피려 할 걸세. 그래서 그는 한쪽에 대해서는 혼의 그런 처지와 삶을 행복하게 여기되, 다른 쪽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길 것이며, 또한 이 혼에 대해서 웃고 싶은 심정일지라도, 그의 웃음은 위쪽의 빛에서 온 혼에 대한 웃음보다는 덜한 것일세." 내가 말했네.
"아주 적절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네.
앞에 언급했던 것처럼,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로서 빛을 바라보는데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 만큼이나, 다시 동굴로 복귀하여 어둠을 바라볼 때 필요한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의 중요성 역시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에 더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한 "혼의 혼란"이, 밝음에서 암흑으로의 이행인지, 아니면 심한 무지의 상태에서 한결 더한 밝음으로의 이행인지에 대하여 살필 것이라 주장하면서, 가치론의 위계, 즉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만일에 이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네. 즉 교육이란 어떤 사람들이 공언하여 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일세. 그들은 주장하길, 혼 안에 지식(인식)epistēmē이 있지 않을 때,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을 넣어 주듯, 자신들이 지식을 넣어 준다고 하네." 내가 말했네.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들 주장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의 논의는 각자의 혼 안에 있는 이 힘dynamis과 각자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기관(수단)organon을, 이를테면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에서 전환해야만 된다는 걸 시사하고 있네. 또한 이는 실재to on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밝은 것을 관상하면서도 견디어 낼 수 있게 될 때까지 해야만 된다는 걸 말일세. 한데, 이것을 우리가 좋음이라 말하겠지?" 내가 말했네.
플라톤은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이행하면서 겪었던 눈의 변화(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를 혼의 전환으로 유비시켜 사유를 전개한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혼 안에 지식(인식)epistēmē을 주입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 전체의 (어둠에서 빛으로의) 방향 전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혼 안에 있는 힘dynamis과 혼의 기관organon을,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로부터 전환해야만 참된 인식이 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겪어내야 하는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은 지식의 주입과는 도대체가 무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의 전환periagōgē에는 방책(기술)technē이 있음직하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하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환을 하게 될 것인지와 관련된 방책 말일세. 이는 그것에다 보는 능력을 생기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능력을 지니고는 있되, 바르게 방향이 잡히지도 않았지만, 보아야 할 곳을 보지도 않는 자에게 그러도록 해 주게 될 방책일세." 내가 말했네.
바로 위 문단의 논의와 이어지면서, 혼의 전환을 위한 방책(기술)technē들이, 능력의 효과적인 사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지식이 결코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는 플라톤의 생각은 그가 『메논』 등에서 전개했던, 지식이 "상기되는 것"이라는 생각과 이어진다.
"한데, 혼의 이른바 다른 '훌륭함'(덕)aretē들은 신체적인 훌륭함들에 가까운 것들인 것 같으이. 사실인즉, 이전에는 그 안에 있지 않았으나, 습관ethos과 단련askēsis에 의해 나중에야 생기게 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똑똑함to phronēsai의 훌륭함(덕)은 무엇보다도 더 신적인 것 같아 보이네. 이것은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으며, 그 전환에 의해서 유용하고 유익하게도 되는가 하면 반대로 무용하고 해롭게도 되네. 혹시 자네는 흔히 못된 사람들로 불리나 영리한 사람들의 그 작은 혼(마음)이 얼마나 약삭빠르게 보며, 그것이 향하는 것들을 얼마나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지를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건 변변찮은 시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이를 나쁜kakia에 봉사토록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것이 더 날카롭게 볼수록 그만큼 더 나쁜 일들을 하게 되기 때문이란 걸 말이세."
"물론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지만 이런 성향의 이 부분이 가령 어릴 적부터 곧장 다듬어져서 생성genesis과 동류인 것들이 잘리어 나가게 된다고 해 보세. (...) 만약에 이것들에서 이것이 벗어나게 되어, 참된 것들로 방향을 바꾸게 되면, 이 참된 것들을 똑같은 사람들의 똑같은 이 부분이 또한 가장 날카롭게 볼 걸세."
(...)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진리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도, 끝까지 교육받느라 소일하도록 허용받은 자들도 결코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말일세. 앞의 경우는 그들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하게 될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서 목표로 삼아야 할 그러한 인생에 있어서의 목표를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뒤의 경우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에 이주한 것으로 믿고서, 공사간에 자진해서 행하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일세." 내가 말했네.
플라톤에 따르면, 다른 '훌륭함'(덕)aretē들(이를테면 신체의 훌륭함)과 선의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똑똑함to phronēsai의 훌륭함(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1) 후자는 결코 배울 수도, 생겨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다. 2) 후자는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신적이며, 그 방향전환에 따라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고로 플라톤은 이 힘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방안, 즉 "어릴 적부터 곧장 다듬어져서 생성genesis과 동류인 것들이 잘리어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본 권의 주제인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다시금 전체 대화편인 국가Politeia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육(육성)을 겪지 못하거나, 끝까지 교육(육성)받느라 소일하도록 허용받은 자들 모두 능히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를 통해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나라를 다스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를 국가Politeia에 대한 통치로 연결할 수 있는가?
"바로 거기에 머물러katamenein 있으려 할 뿐, 저들 죄수 곁으로 다시 내려가서katabainein 저들과 함께 노고와 명예를, 이게 다소 하찮은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간에,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세." 내가 말했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은데도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사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그가 말했네.
"여보게, 자넨 또 잊었네. 법nomos은 이런 것에, 즉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걸 말일세. 법은 시민들을 설득과 강제에 의해서 화합하게 하고, 각자가 공동체to koinon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그런다네. 또한 법은 나라에 그런 사람들이 생기도록 하는데, 이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향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 사람들을 십분 이용하기 위해서일세." 내가 말했네.
(...)
"글라우콘, 더 나아가 이 점에 유의하게나. 즉 우리의 이 나라에서 철학자들로 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지켜주도록 우리가 강요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걸 이들한테 말해 주게 된다는 걸 말일세. 우리는 이렇게 말할 걸세. '다른 나라들에 있어서는 그런 사람들이 생기더라도 그 나라들에 있어서의 노고는 함꼐 나누지 않는 게 합당하오, 그들은 각각의 나라에 있어서의 정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게 되었으니, 더구나 스스로 자란 것은 어떤 것에도 양육의 신세를 지지 않았을진대, 어떤 것에도 양육의 빚을 갚으려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게 정당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 자신들과 함께 여느 시민들을 위해, 마치 벌떼 사이에 있어서 지도자들 및 왕들처럼 여러분을 탄생시켜서는, 여느 시민들보다도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또한 양쪽 생활 다에 더 잘 관여할 수 있도록 했소.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느 시민들과의 동거를 위해 각자가 번갈아 내려가서는,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오.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eidōlon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인데, 이는 여러분이 아름다운 것들과 올바른 것들 그리고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 참된 것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오. (...) 한 나라에 있어서 장차 통치하게 될 사람들이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그리고 제일 반목하는 일이 없이 경영될 게 필연적일 것이지만, 이와 반대되는 자들을 지배자들로 갖는 나라는 역시 반대로 다스려질 게 필연적이오'라고 말일세." 내가 말했네.
글라우콘은 위의 물음과 연관된 합리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 되며, 이들로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은데도 우리가 이들로 하여금 더 못한 삶을 사도록 만들게 될 텐데요?"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은 첫째, 법nomos은 어느 한 부류의 좋은 삶보다, 오히려 온 나라의 이익, 즉 각자가 공동체to koinon에 이롭도록 해 줄 수 있는 이익을 서로들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만듦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법nomos은 나라의 단합을 위해 이들의 더 나은 삶을 제한할 수 있으며, 십분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이 법nomos의 강제력이자 법 그 자체의 목적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반론이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반론은, 위에서 언급했던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와 연관된다. 설령 선의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하게 될지라도, 이들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에 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 빚을 갚을 의무, 즉 통치에 참여할 의무를 갖는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정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게" 된 경우, 이러한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고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본질은 단순히 결박된 자로 하여금 빛과 그 빛을 가능하게 하는 선의 이데아를 보게 함이 아니고, 그 빛을 보게함과 동시에 그 빛을 본 이들로 하여금 통치에 참여해야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7권의 주제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인 이유가 결정적으로 해명된다. 고로 이들은 어두운 것을 보는 익숙해짐을 반드시 겪어야 하고, 그러한 익숙해짐 이후에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플라톤은 고로 "한 나라에 있어서 장차 통치하게 될 사람들이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그런 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여긴다.
"그러나 거지들이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은 것들에 허기진 자들이 공적인 일들에 관여하게 된다면, 이에서 좋은 것을 낚아채야만 된다고 생각하고서 그런다면, 그런 나라가 실현될 수는 없다네. 통치하는 것이 쟁취의 대상이 되면, 이런 싸움은 동족간의 내란으로서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시민들마저 파멸시키기 때문일세." 내가 말했네.
"더없이 참된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네.
"자넨 정치적인 관직을 깔보는 삶으로서 참된 철학자의 삶 이외에 다른 것을 댈 수 있겠는가?" 내가 물었네.
"단연코 없습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나 실은 통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통치에 임하도록 해야만 하네. 만약에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경쟁자들이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일세."
4) 본문 (3) 혼의 전환periagōgē에 필요한 방책(기술)technē들 (521c-531e)
"그러면 이제는 이 문제를, 즉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기게 되며, 또한 어떻게 이들을 광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인지를 우리가 생각해 보기를 자네는 원하는가? (...)"
"이건 (...)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psychēs periagōgē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지혜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to on로 향한 등정(오름)epanodos일 것 같으이."
이로써 혼의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방책들, 즉 교과들(학문들)mathēmata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생성되는 것to gignomenon에서 실재로 혼을 끌어당기는 교과(학문)mathēma"를 찾으면서, 그러한 교과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1) 체육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교과가 될 수 없다. 2) 시가는 체육과 상관적이며, 습관ethos들을 통해 교육된 것이다. 3) 또한 모든 기술은 분명히 수공적이다. 고로 시가와 체육 그리고 기술들은 이러한 교과가 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제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모든 기술과 모든 형태의 사고와 지식이 이용하는 공통의 것"이 그가 찾고 있는 교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교과는 바로 수arithmos와 계산logismos이다. 이 교과들은 전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본성상 지성의 의한 이해(앎, 직관)noēsis로 인도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앎들은 존재(본질)ousia로 이끌기에 알맞다. 왜냐하면 감각(감각에 의한 지각)aisthēsis들의 경우, 어떤 것들은 감각에 의해 판단된 것들로도 충분하기에 지성에 의한 이해로 이행할 수 없으나, 어떤 것들은 이러한 이행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감각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이 나타난다.
플라톤에 따르면, 대립되는 감각enantia aisthēsis으로 넘어가지 않는 모든 것은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이 동일한 것을 단단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한 것으로도 알려 온다면, 이제 이 대립되는 감각enantia aisthēsis은 혼으로 하여금 계산logismos와 지성에 의한 이해를 불러일으켜 고찰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내가 이를, 즉 어떤 것들은 사고dianoia를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것들은 그러질 않는다고 방금도 말하려고 하고 있었던 걸세. 자기들간에는 대립되는 것들과 동시에 감각에 부딪쳐 오는 것들을 그걸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라 정의하되, 그러지 않는 것들은 '지성에 의한 이해(앎)'를 '일깨우지 않는 것들'이라 정의함으로써 말일세."
(...)
"그리고 이 경우에 혼은 당혹해 하면서aporein, 자기 안에서 사고 작용ennoia을 가동케 하여, 탐구를 하지zētein 않을 수 없게끔 될 것이며, '하나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걸세. 또한 이렇게 해서 '하나'에 대한 공부는 실재to on의 고찰로 이끌어 주며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하기에 적합한 것들 중의 하나로 될 걸세." 내가 말했네.
"그러나 실은 시각도 하나와 관련해서 이런 점을 적지 않게 갖고 있습니다. 동일한 것이 동시에 하나이면서도 수에 있어서 무한함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했네.
"한데, '하나'가 이러하다면, 모든 수가 같은 처지에 있지 않겠는가?" 내가 물었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산술logistikē과 수론arithmētikē은 모두가 수와 관련된 것일세."
(...)
"그렇다면 이것들은 우리가 찾고 있는 교과들에 속할 것 같으이. (...) 철학자로서는 생성genesis에서 벗어나서 존재(본질)ousia를 포착해야만 되기 떄문이겠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결코 계산에 능하며 이성적일 수가 없을 테니까."
이러한 논의를 통해 수arithmos와 계산logismos는 지성에 의한 앎을 불러일으키는 교과로 판명된다. 그러나 이 교과는 "무역상이나 소매상들처럼" 실용적인 목적에서 다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수들의 본성physis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혼의 방향전환metastrophē을 용이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수arithmos와 계산logismos으로부터 그 다음 학문인 기하학geōmetria이 따라나오며, 이 학문 역시 그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에 대한 앎이라는 점이 논의된다. 그 후 세 번째 교과인 천문학astronomia이 논의되나, 곧 기하학 다음의 것을 잘못 취했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이어진다. 즉, "평면epipedon 다음에 입체stereon를 그 자치로 취하기도 전에, 이미 회전 운동을 하고 있는 입체를 취했"다는 지적이다. 순서에 따르자면 이차원deutera auxē 다음에 차례대로 삼차원tritē auxē이 취해지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아직 입체 기하학의 학문적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 교과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세 번째 교과로 (나라가 이를 추구할 경우 성립할) 입체 기하학과, 네 번째 교과로 다시금 천문학이 정해진다. 17
"이 교과들을 통해서 각자의 혼의 어떤 기관organon이 순수화되어ekkathairetai, [그동안의] 다른 활동들로 인해서 소실되고 눈멀어 버린 이 기관이, 눈 만 개보다도 더 보전될 가치가 있는 이 기관이 다시 점화된다는 것을 말일세. 이것에 의해서만이 진리가 보이기 때문이네."
"하늘에 있는 장식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확한 것들이라 믿어지지만, 참된 것들에는 많이 미치지 못한다네. 즉 '실재하는 빠름'과 '실재하는 느림'이 참된 수와 온갖 참된 도형schēma에 있어서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운동하며, 아울러 그 안에 실재하는 것들을 운동시키는 그런 운동들에는 말일세. 이것들이야말로 이성logos과 추론적 사고dianoia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들이지, 시각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 것들이네. 혹시 자네는 달리 생각하는가?"
여기서 플라톤의 천문학이 당대의 생각과, 또 오늘날의 천문학과 이질적이라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문학이 육안의 관찰에 의존하는 것이었고, 또 케플러가 확립했던 타원 궤도로서의 천체 운동이 관측(관찰)에 의해서였던 것처럼, 천문학(과 과학)은 일반적으로 경험을 통해 지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천문학을 추론적 사고dianoia의 대상으로서 수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티마이오스』에서는 먼저 천체들의 운행 궤도를 수학적으로 산정하고서 그 궤도를 따라 천체들이 운행을 하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즉 경험으로부터 실제의 궤도를 도출해내기 보다, 마치 설계도처럼 추론적 사고에 이행하여 궤도를 수학적으로 산정하고, 이에 맞춰 실제 천체들의 운행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 세계관으로 이어져, 케플러 이전까지의 천문학자들은 천체의 궤도가 완전한 원이라고 상정하고 이에 맞춰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려 했다. 이는 케플러가 관측에 근거하여 천체의 운동을 타원이라고 수정할 때까지 오랜 시간동안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져,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심원운동 등의 복잡한 궤도를 만들어야 했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천문학과 더불어 움직이는 운동phora에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눈이 천문학에 맞추어졌듯, 귀는 화성적 운동enarmonios phora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 학문들epistēmai은 서로 자매 관계에" 있다. 화성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지성nous보다 귀를 앞세운다"는 점이 지적된다. 결국 수론,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은 모두 지성의 의한 이해(앎, 직관)noēsis로 인도하는 것들이며 사고dianoia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이 교과들은 "아름다우며 좋은 것의 탐구를 위해서 유용한 것이지, 다른 목적으로 추구한다면 무용한" 것이다. 고로 이 교과들이 참된 철학을 위한 교과인 변증술dialektikē을 위한 서곡(서론)prooimion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 모두는 마땅히 배워야 할 바로 그 본 악곡nomos의 서곡들인 것이다. 18
5) 본문 (4)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과 앎의 네 단계 (532a-534e)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이 본 악곡임을 밝힌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에 의해서 일체의 감각aisthēsis은 쓰지 않고서 이성적 논의logos를 통해 "각각인(-ㄴ, x인)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로 향해서 출발하려하고, 그래서 좋은 것 자체auto ho estin agathon를 지성에 의한 이해(앎) 자체autē noēsis에 의해서 파악하게 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을 때, 그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to noēton의 바로 그 끝에 이르게 되네. 마치 동굴을 벗어난 그 죄수가 그때 가시적인 것to horaton의 끝에 이르렀듯이 말일세."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여정poreia을 바로 변증술dialektikē이라 정의한다. 즉 앞에서 다루었던 교과들은 모두 "혼의 최선의 부분으로 하여금 결박에서 풀려나 실재들ta onta 가운데서도 최선의 것to ariston의 관상thea으로 이끌어 올리는 힘"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교과들과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각각인 것 자체' 하나와 관련해서는 다른 어떤 탐구 방법methodos이 모든 경우에 대해 체계적 파악을 시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하학과 이에 뒤따르는 것들은 모두 실재의 어떤 면을 파악하고 있기는 하나, 또한 실재에 관해서 꿈을 꾸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정hypothesis들을 이용은 하되, 이러한 가정들 자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지logon didonai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근본학문이라 부르기엔 그것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에 비해 열등한 것이다. 이들은 그 출발점(원리, 전제)archē들이 해명되지 않았기에 결코 지식(인식)epistēmē이 될 수 없다.
고로 변증술적 탐구 방법hē dialektikē methodos만이 모든 가정들을 하나하나씩 폐기하고서,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원리archē 자체로 나아간다. 변증술적 논변to dialegesthai은 위에 언급된 학술들technai을 협조자들 및 동조자들로 이용하며, 조용히 이끌어서는 위로 인도한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습관 탓에 이것들을 종종 인식들(지식들)epistēmai로 일컬었지만, 이 명칭이 사실은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이들은 의견(판단)보다 명료하지만, 인식(지식)보다는 한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제 앎을 네 단계로 분류한다.
"그렇다면 앞서처럼, 첫째 부분은 인식(지식)으로 부르되, 둘째 것은 추론적 사고로, 셋째 것은 믿음(확신)pistis으로, 그리고 넷째 것은 상상(짐작)eikasia으로 불러 족하다네. 그리고 뒤의 둘을 함께 의견(판단)doxa으로, 앞의 둘을 함께 지성에 의한 이해(앎)noēsis로 일컫네. 또한 의견은 생성genesis과 관련된 것이지만, 지성에 의한 이해(앎)은 존재(본질, 실재성)ousia에 관련된 것이라 일컫고, 그리고 존재가 생성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성에 의한 이해(앎)가 의견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으며, 지성에 의한 이해(앎)가 의견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지식(인식)이 믿음에 대해, 그리고 추론적 사고가 상상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네. 그러나 이것들이 대응하는 대상들에 대한 유비 관계analogia와 이 대상들의 각각, 즉 의견의 대상to doxaston과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대상to noēton이 각기 둘로 나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세."
이러한 분류 중 나머지 셋, 즉 dianoia, pistis, eikasia의 경우는 제 6권 511d-e와 같으나, 첫째 것, 즉 이데아에 대한 앎을 511d에서는 지성에 의한 앎noēsis이라 말하고 여기서는 지식(인식)epistēmē이라 말하고 있다. dianoia와 epistēmē는 포괄적으로 noēsis라 했는데, 이는 그 대상들이 포괄적으로 ta noēta라 지칭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자체는 각각의 것의 본질(존재, 실재성)ousia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자를 변증술에 능한 자dialektikos로 지칭하는가?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자를,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설명을 해줄 수 없는 한은, 그것과 관련해서 그는 그만큼 지성nous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자넨 말하는가?"
"그러니까 좋음to agathon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이겠지? (...) 이런 처지에 있는 자가 좋음 자체auto to agathon를 알고 있다고도 자네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 밖의 다른 좋은 걸 알고 있다고도 자네는 말하지 않을 걸세. 그러나 만약에 그가 어떻게 해서 좋음의 어떤 영상을 포착한다면, 그는 인식 아닌 의견에 의해서 포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자네는 말할 것이며, 또한 현재의 삶을 꿈을 꾸며 조는 상태로 보내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저 세상에 미리 이르러, 완전히 잠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자넨 말하겠지?"
고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에 있어, 변증술dialektikē은 마치 갓돌처럼 다른 교과들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로써 교과에 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다.
6) 본문 (5) 교과들의 배정과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구체적 방안 (535a-541b)
이제 마지막으로 교과들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배정할 것인가가 문제시된다. 즉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구체적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먼저 통치자로 키워낼 사람들의 선발은 1) 가장 견실한 자들, 2) 가장 용감한 자들, 3) 가장 잘 생긴 자들, 4) 성격에 있어서도 고귀하고 강건한 자들, 5) 이 교육에 적합한 성향을 지닌 자들이라는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5)에 대한 기준으로 학문에 대한 날카로움을 타고 나야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혼은 체육보다는 까다로운 학문들에서 훨씬 더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다. 또한 기억력이 좋고 꿋꿋하며 모든 면에서 열심인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기준이 확립되지 않았기에, 오늘날 철학이 여러 잘못과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에 대한 무자격자의 접근을 차단하고, 적자들이 철학을 건드려야만 한다. 고로 이제 철학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이 제시된다. 이는 1) 모든 일에서 부지런해야하며, 2) 항상 진실해야하며, 3) 절제와 용기, 고매함, 그리고 훌륭함(덕)의 자질을 타고나야 한다. 그리하여 "사지가 건전하고 마음이 건전한 사람들"을 교육한다면, 정의dikē 자체도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에 있어 늙은 사람이 아닌 젊은 사람을 후보로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계산이나 기하학, 변증술에 앞서 교육받아야 할 일체의 예비 교육propaideia의 교과들은 아이들일 때 제공되어야 하며, 또한 강제적인 배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배우도록 하여, "그들이 저마다 무엇에 적합한 성향을 타고났는지"를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비교육의 교과들과 싸움터에서의 훈련을 통해 가장 민활한 것으로 드러나는 자들을, 필수적인 체육에서 벗어날 때에 선발한다. 이 기간은 20세가 되기 전의 2, 3년간의 기간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기간 동안은 나라의 수호를 위한 군복무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 후 스무 살이 된 자들 중에 적임자를 선발하여, 교과들을 교육시키고 교과 상호 간의 친근성 및 실재to on의 본성physis에 대한 포괄적인 봄synopsis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보는 사람ho synoptikos은 변증술에 능한dialektikos 자이기도 하므로, 이는 변증술적 자질dialektikē을 테스트하는 시험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간을 거친 후에는, 서른 살이 된 사람들 중 다시금 인원을 선별해 변증술적 논변의 힘에 의해 시험을 거친다. 그리하여 이들 중 실재 자체auto to on로 진리와 더불어 나아갈 수 있는 자를 파악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변증술적 논변이 무법(범법)paranomia 상태라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올바른 것들 및 아름다운 것들과 관련된 신념dogma들이 어릴 적부터 있어 그것에 복종하며 자라오는데, 변증술적 논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런 신념들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to kalon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지자, 그는 입법자nomothetēs한테서 들은 걸 대답하고, 논변logos이 이를 논박하는데, 이 논박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하여져, 그가 입법자한테서 들은 것이 추한 것aischron이 아니듯, 아름다운 것도 전혀 아니라는 의견(판단)을 그로 하여금 갖도록 하며, 또한 올바른 것이나 좋은 것 그리고 그가 가장 존중해 왔던 것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 꼴이 될 경우에 말일세.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가 이것들에 대한 존중 및 복종과 관련해서 무슨 짓을 할 것으로 자네는 생각하는가?"
(...)
"그는 어느새 준법적인(관습을 지키는)nomimos 사람에서 범법적인(paranomos) 사람으로 바뀐 것으로 보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따라서, 자네의 이 서른 살 된 사람들에 대한 이 연민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조심하여 [변증적] 논변에 관여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그렇고 말고요"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논변을 맛보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신중성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네가 다음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걸로는 생각지 않으이. 즉 청년들이 처음으로 논변의 맛을 보게 되면, 이를 언제나 반박(반론)antilogia에 이용함으로써, 놀이처럼 남용하네. (...)"
이러한 이유에서 소크라테스는 변증술적 논변이 신중하게 교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더 든 사람은 이런 광기mania에 관여하지 않고, 놀이paidia를 위해 변증술적 논변을 이용하는 자들 보다 참된 것을 고찰하고자 하는 자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즉 논변에 참여토록 할 사람들은 성향에 있어서 예절 바르고 견실해야만 하며, 따라서 지금처럼 아무나 그리고 어느 면으로도 적합지 않은 사람이 이에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변 기간은 신체와 관련된 단련에 상응해서 두 배 햇수, 대략 5년 정도로 정해진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다시 저 동굴 속으로 내려가 익숙해짐을 겪으며, 전쟁에 관련한 일과 젊은 사람들에 맞는 관직들을 맡게 된다. 이 15년의 기간을 거쳐 이들이 50살이 되었을 때, 실무나 학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비로소 모든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최종 목표에 다다르게 된다.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젖히고서 혼의 눈으로 하여금 모든 것에 빛을 제공하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야만 하네. 그리하여 좋음 자체to agathon auto를 일단 보게 되면, 이들은 그것을 본paradeigma으로 삼고서, 저마다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면서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만 하네. 이들은 여생의 대부분을 지혜사랑(철학)으로 소일하지만, 차례가 오면 나라일로 수고를 하며, 저마다 나라를 위해 통치자로도 되는데, 이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이것이 훌륭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어서일세."
"그리고 이처럼 언제나 자기들과 같은 또 다른 사람들을 교육시켜서는 나라의 수호자들로서 자기들 대신에 남긴 다음,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떠나가서 살게 되도록 해야만 할 걸세. 한편, 나라는 이들을 위해 기념물을 만들고 공적인 행사로 제물을 올리는 의식을 행할 것이며, 만약에 파티아Pythia가 동의의 대답을 내린다면, 이들을 수호신daimōn들로 모시되, 만약에 그런 대답을 내리지 않는다면, 복되고 신과도 같은 분들로서 모시도록 해야만 할 걸세."
이로써 7권의 주제인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 육성)의 문제가 모두 해명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이러한 통치자의 조건으로 "자질을 충분히 지니고 태어난 자들"을 들기 때문에, 이는 여성 통치자에게도 해당된다. 그리하여 1) 참된 철학자들이, 2) 한 나라에서 최고 권력자들로 되어, 3) 현재의 명예들을 저속하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라 생각하고서 경멸하는 한편, 4) 바른 것to orthon과 이것에서 생기는 명예는 최대한 높이사며, 5)올바른 것to dikaion을 가장 중대하고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자신의 나라를 질서잡히게 하는, 이상적인 국가Politeia의 본paradeigma이 완성된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방안의 구체적 실현을 위해, 나라에서 열 살 이상 된 사람들을 모두 시골로 보내되, 그들의 아이들은 공동의 생활방식tropos과 법률 안에서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동 양육이 민족ethnos에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 임성철,「플라톤 동굴 비유의 기원에 관하여」, 2004, 417 - 436, p. 419 [본문으로]
- 신상희, 「동굴의 비유 속에 결박된 철학자, 플라톤 -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성격과 진리경험의 변화에 관하여」, 2009, 171 - 196, p.173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p. 420-421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p.421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p.423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p.424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p.428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p.429 [본문으로]
- 임성철, op. cit. [본문으로]
- 신상희, op. cit. p.175 [본문으로]
- 신상희, op. cit. p.175 [본문으로]
- 신상희, op. cit. p.175-176 [본문으로]
- 신상희, op. cit. [본문으로]
- 신상희, op. cit. p.176 [본문으로]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이 글에서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다른 지면에서 다룬다. [본문으로]
- 신상희, op. cit. p.183 [본문으로]
- 입체 기하학sterometria이라는 명칭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 phora는 장소적 이동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운동은 kinēsis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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