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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되지도 않을 연애에 온통 마음 쏟고 있는가?

만남 같지도 않은 만남을 하고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져공포영화 보는 꿈을 꾼다 남들이 지르는 비명을 뒤로 하고두 시간 내내 멍하니 스크린만 바라보다 나오는공포영화 같은 꿈을 꾼다 이는 그저 내가 목소리가 없는 탓인데이루어지지도 않을 연애에 왜 벌써부터 설레고 있을까? 삶이 예술이고, 표현이라는누구누구의 철학을 신나서 떠들다 가도정작 앞에서는 내색 한번 하지 못하고왜 우두커니 서 있었을까? 남들이 호흡처럼 편하게 뱉는 말들도이런 날엔 그저 비탈길 간신히 뱉은 말이허공 속에 흩어지는 건 두려운 일이니그렇다면 시작도 못할 연애 주변에서왜 서성이고 있을까? 비가 내려 모든 말이 빗속에 잠겼으면젖은 마음의 망설임만큼만말에도 녹이 슬면 좋을 텐데 작년처럼 시린 봄바람은 텅 빈 마음에 맴돌다 어눌한 숨결에 다시 골목 ..

이탈

화랑대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도보 사이에 숨어 있는 기찻길을 보았습니다 더는 열차가 지나다니지 않아미세한 떨림에 관한 기억만 남겨둔 기찻길 그 길에 사람들이 발자국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경적이 울릴 때마다 느끼던설렘은 이제 뭉그러져도 길 잃은 낙엽과타다 만 노을과다정한 연인들의 발걸음이 내년에도 후년에도이 길 위에 계속 살아있을 것만 같습니다버려진 기찻길이 남몰래 떨고 있는 듯질서 없이 울렁이는 가을 오후

경종명상

돌탑의 무게중심은 황홀하다 무게를 부여잡고 있는 고요는 어떠한 떨림도 허용할 줄 모르니 소리의 모양도 저 황홀에서 나오는가 싶어 열 번의 타종에 귀를 기울였다, 둥근 소리와 둥근 소리, 종은 울음을 삭혀내는 중이다 동굴처럼 물기가 제 속을 다 파먹을 때쯤 깊이 없는 저 아래까지 누군가 어루만지길 어떤 기다림이 저만치 서있었다 누군가 내 삶을 들여봐 준다면, 침묵할 말이 없어 그저 얼굴을 붉힐 뿐 탑을 쌓은 건 나였으나 황홀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

터-있음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 삶이 의지와 부딪칠 때 내는 파열음을이제는 기분 좋게 들을 수도 있다 스스로 살고 싶어살게 된 삶은 없고 외로움은 노력하지 않아도얻을 수 있으니까 흐르는 구름을 받아잠시나마 울렁이는 괸 물처럼 삶도 그저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졌을 뿐이니까 그러나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온전한 의지의 몫이기에 이제는 잊혀가는 것들의 외로움을 노래하련다 세계가 의지 속에 담길 적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

우선 이 책이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나는 우산 쓰는 일을 싫어했다 사람을 품고 살 줄 모르니 비라도 품고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덕분에 물기 들어찬 신발 끌 듯 질척거리며 글을 쓰고 걸레짝이 된 양말을 말리며 하루를 누이기도 한다 비에 젖어 담배를 피우다 보면 소리도 물기를 머금고 있어 갈증이 나지 않았다 담뱃불은 묵혀 둔 빗방울 소리에 맞춰 요리조리 에둘러가며 제 살을 태운다 생이 언제 빗방울처럼 스러질 진 몰라도 어쩜 이 버릇으로 과로사는 면해온 걸 수도 있겠다 *루이 알튀세르,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의 한 구절.

기억이 자리 없이 떠돌 땐

사북읍 안경다리 오른편으로 외제차들이 햇살에 잠긴 채 신호를 기다린다 누구도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다리 밑 늘어진 시간 속으로 굳이 들어가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 투석전(投石戰)이니 최루탄이니 곡괭이니 각목이니 물속에 던져 넣은 말들은 수압에 찌그러져 비로소 제 소리에 맞는 빛깔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말들의 부글거리는 숨소리…귀 기울여 봐도 들려오지 않는다 에어컨 아래에서 박제된 광부 헬멧 물끄러미 바라보다 쾌적한 바람에 문득 섬찟해져 밖으로 나왔다 기찻길 따라 걷다 보면 아스팔트 바닥 흥건한 버찌 자국 지우개똥 같은 기억들은 다리 난간에 묻어 있었다 *이성복,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에서 얻음.

자전거를 고치다

결국 어제를 위해 살아온 삶이었다 예전 일은 가장 추악했던 기억도점점 밝아지지만 요즘 일은 가장 즐거웠던 기억도 점점 희미해 가니까 그래서 오늘을 증오하기엔아직 너무 이른 것이다 밖에서 봄바람 맞고 서있는내 자전거처럼 녹이 잔뜩 슬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고더 이상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는 겨울이 지나고 나니이제 그만 시들어버려도 될 것만 같은 그 울렁이는 마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봄바람에 내맡긴 채 자전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