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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즐거움과 미래를 위한 투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Soyo_Kim 2018. 12. 28. 15:36

2018-2 응용윤리학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를 위한 투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1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를 위한 투자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가?” 다음의 질문은 철학적 질문인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철학적 질문이 우리에게 정신적 경련을 일으킨다고 표현한다. 즉 우리는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언제나 그것이 지칭하는 무언가를 가리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아득해짐을 느끼곤 한다. “존재란 무엇인가?”, “()이란 무엇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주장에 따르면, 그 질문이 가리키는 어떤 특정한 사례의 특징, 혹은 사례들의 나열이 아니다. 철학의 고유한 질문 형식 – “~란 무엇인가?”는 그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자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그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음의 질문은 얼핏 보기에 철학적 질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질문은 오히려 개개인의 신념이나 취향, 혹은 믿음에 대한 근거를 요구하는 질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까닭에 이 질문이 사실의 영역(존재론- Ontology)이나 믿음의 영역(인식론- Epistemology)에 속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철학이 추구하는 참된 지식(Episteme)이 아니고, 단지 억견(Doxa)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러기에 이러한 질문에 대해 나는 철학적으로 답변해야 할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바나나가 좋은가? 혹은 사과가 좋은가?” 라는 질문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의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철학적 질문을 끌어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다음의 질문을 우리가 당위의 영역(윤리학- Ethics)에서 분석해본다면, 다시 말해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를 위한 투자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한다.”로 본다면, 이것은 철학적으로 답변할만한 위상을 얻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우리는 처음의 질문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보고자 한다.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를 위한 투자 중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질문의 의미를 분석해본다면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현재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2) 미래를 위한 투자란 무엇인가? 3) “중에 어느 한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4) “우선해야 하는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1)2)를 다시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 현재란 무엇인가? 1-2)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2-1) 미래란 무엇인가? 2-2) 투자란 무엇인가?

먼저 1)2)3)에 의해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질문이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의 논리적 형식을 고찰한다면 과연 이 두 선택지가 대립되어 있는가에 대해 따져볼 수 있다. 3)1)2)를 선언 기호(V)를 통해 연결하고 있다. A v B의 형식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배타적 선언인지, 혹은 포괄적 선언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배타적 의미의 선언이라면, 1)2) 중 어느 하나만을 양자 택일하여야 하지만, 포괄적 의미의 선언이라면,

A B    A v B

T T      T                                                                                        

T F      T

F T      T

F F      F

 

이므로 진리표 상에서 1)2)가 모두 참인 경우를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보아도, 우리가 하는 일 중 어떤 일은 현재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미래의 투자를 위한 일인 경우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시험 공부를 진리 추구 그 자체에 대한 즐거움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미래의 직업을 위한 투자로 간주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직관에 따른다면 우리는, 1)2)가 완전히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공통적인 성격을 지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둘 다 어떤 가치 있는 일, 혹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반면 1)2)가 대립되어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 이는 시간의 한정과 대비로 인해 성립한다. 1)2)는 미래와 현재라는 시간을 중심으로 대립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가 가진 한정된 시간 때문에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에 대한 투자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로 1)에 대해 고찰해본다면, 1-1)현재는 여기에서 2-1)미래와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미래의 대비를 시간의 어느 한 점의 대비로 바라본다면, 이는 앞에 서있는 점과 뒤에 서있는 점 사이의 대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순서의 차이로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경우, 둘 사이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은 여전히 취향의 문제, 즉 주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다른 관점에서 파악해볼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 무엇이라도, 지나가는 것이 없다면 과거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무엇도 오는 것이 없다면 미래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존재하는 것이 없다면 현재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그렇지만 그 두 가지 시간, 즉 과거와 미래의 경우,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 그 과거와 미래는 어떻게 존재하는지요? 또한 현재는 항상 현재로서 과거에 옮겨지지 않는다면 그런 현재는 이미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 현재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각주:1]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른다면,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현재에 종속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가치 판단이든 미래에 대한 가치 판단이든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말해진 바로서의 현재는 또한 언제나 과거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현재의 의미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과거 안에서 존재하는 현재로서 하나의 기억이자 사실인 현재이며, 다른 하나는 무시간성으로서의 영원의 현재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두 번째 의미의 현재이니, 이는 앞에서 고찰한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사실로 상대적 가치를 지니는 반면에, 영원을 의미하는 현재의 경우 가치 판단의 결정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보다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1-2)의 즐거움을 욕망의 충족으로, 2-2)의 투자를 보다 더 큰 욕망의 충족을 위한 절제로 이해한다면, 이는 모두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대적 가치란 그것이 명제로 표현되었을 때, 사실로 환원될 수 있는 우연적 명제로 표현됨을 의미한다. 가령 이 의자는 저 의자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의자가 미리 결정된 어떤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 저 의자보다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치라는 단어는 그것이 사전에 정해진 목적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즉 모든 상대적 가치 판단은 사실들의 단순한 진술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치 판단의 모든 외관을 상실하는 그런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랜체스터(Granchester)로 가는 올바른[더 가치 있는] 길이다.”고 말하는 대신에 당신이 최단 시간 내에 그랜체스터에 도착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이 가야하는 올바른 길이다.”라고 말해도 똑같이 좋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좋은 경주자이다.” 단순히 그가 몇 마일을 몇 분 내에 달릴 수 있다는 등등을 뜻합니다.”[각주:2]

 

따라서 현재의 즐거움으로 얻고자 하는 욕망이나, 더 큰 욕망(미래)을 위해 행하는 절제(투자), 모두 우연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둘은 모두 다른 욕망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만 성립하며, 또한 그렇지 않은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시간성으로 이해되는 현재와, 그러한 현재 속에 머무르며 가치 판단을 결정하는 의지(der Wille)는 우연적인 사실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4)를 취향의 문제가 아닌 당위의 문제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해야 한다.”는 형식에 내재한 필연성의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의지가 우연적인 사실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사실 판단들이 단지 사실들의 진술들임이 입증될 수 있지만, 어떤 사실 진술도 결코 절대적 가치의 진술이거나 절대적 가치를 함축할 수 없다.”[각주:3] 다시 말해 절대적 가치를 함축하는 사실이나 명제(진리치를 갖는 문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위적 명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참을 함축하는 명제, 위의 비유에 이어서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올바른, 모든 사람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가야할 도로이기 때문이다.[각주:4] 절대적 가치를 함축하는 모든 당위 명제의 형식은 “A해야 한다. 왜냐하면 A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로 나타난다. 이것은 동어반복의 형식이기 때문에 단적으로 무의미하다. 우리가 어떤 도로를 보며, 다른 도로보다 깨끗하기 때문에 이 도로는 더 가치 있는 도로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이 도로와 비교될 수 있는 다른 도로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뜻을 갖는다. 그러나 존재하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사물의 어떠함(Wie)과 무관한 도로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를 이미 왜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라는 문장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렇게 언어의 논리는 존재에 관한 사실에는 선행하나 존재 그 자체에는 선행하지 않는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은 언어적 한계로 인해 언어의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문장만을 산출해낸다.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각주:5]

 

3

따라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시점으로의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따져보는 것이 아닌, “영원으로서의 현재에 얼마나 충실한가?” 다시 말해 내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배려하고 있으며 말해진 것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고 살아가는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견지에서만 우리가 당위적 판단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절대적 가치는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온 열정을 다하여 알 수 없는 그 어떤 다른 삶을 살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승의 삶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도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간 세월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삶을 마치 또 다시 던질 수 있는 주사위처럼 다시 살 수는 없다.”[각주:6]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11권 천지창조와 시간론, 번역 김희보, 강경애, 동서문화사, 2008, p.314 [본문으로]
  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소품집』, 윤리학에 관한 강의, 편역 이영철, 책세상, 2006, p.26 [본문으로]
  3. Ibid p.27 [본문으로]
  4.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5. IbId p.33 [본문으로]
  6. 피에르 아도,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번역 이세진, 열린 책들, 2017, p.31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