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Nietzsche

니체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문체 비교- 의지와 모순을 중심으로

Soyo_Kim 2018. 12. 28. 15:53

2018-1 철학으로 본 문학

 

니체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문체 비교- 의지와 모순을 중심으로

 

이 글은 문학적 문체와 철학적 문체 사이의 긴장을 다룬 니체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중심으로 하여 둘 사이의 문체를 비교하고 두 사상가의 문체적 유사성이 기실 의지라는 하나의 주제어 안에서 모순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쓰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프리디리히 니체는 모두, 그들의 동시대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 철학자들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는 지나치게 이단적인 것으로 판정되어 그의 몰락을 가져왔고, 니체의 시적인 문체는 그 당시 인정은커녕 주목조차 받지 못했다. 니체의 문체는 당대 독일인들에게 모순적인 인상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이러한 두 사상가의 무관심과 탄압이 이루어졌던 까닭은 두 사상가의 사상이 시대에 비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라볼 때, 어쩌면 두 사상가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자유분방한 문체는 그들의 사유의 급진성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이 점을 차치한다 할지라도, 두 사상가의 글에는 기존의 서양 철학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문체적 유사성이 드러난다. 이 들은 그들의 저작에서 의도적으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 점이 바로 그들의 사상을 극도로 난해하고 해석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니체의 경우, 그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어려운 까닭은 그 사상이 파편화 되어 여러 군데 흩어져 있다는 이유 때문보다도, 짤막짤막한 잠언과 구절들에서 나타나는 명백히 모순적인 언명들 때문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말하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굴복시키고 탄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본인 스스로가 데카당한 인간 유형이라고 고백하기도 한다.(이 사람을 보라) 니체가 결정적으로 미치게 된 계기-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다 결국은 파괴되어버리고 만 그의 정신-과 그가 일상적으로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과 병으로 인한 고통을 달고 살았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그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남성적이고, 폭력을 긍정하며, 충만한 의지를 지닌 용암 같은 문체와 그의 병약했던 삶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모순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은 하이데거처럼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말하는 니체로, 들뢰즈처럼 차이의 반복을 말하는 니체로, 카우프만처럼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의 니체로 끊임없이 변용되며 이어져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단지 삶과 철학 사이의 간극이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그는 자신의 저작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의 삶이 데카당하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자신이 오늘날 유일하게 데카당하지 않은 인간 유형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명백히 모순되는 구절은 이전의 서양 사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특히 고대로부터 이어져온(아마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암묵적으로 받아 들여져온) 사유의 제 1원리는 모순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니체의 자뭇 당당한 모순적 문체는 하나의 문제로 남아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삶의 근본 원리라 말하며 인간은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초월적인 신(혹은 도덕)이라는 망상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의지는 또한 하나의 의지긴 하지만, 생을 부정하는 가장 저열한 형태의 의지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철학에서는 주체로부터 초월적인 규범적 요소는 전부 부정되는가? 물론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니체의 모순적인 언명으로부터 그가 완전히 초월적인 규범적 요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을 도출해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힘에의 의지가 하나의 규범성의 영역에 자리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능적으로 초월자로서의 역할과 동일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살아야만” 한다면 이제 이러한 규범적 요소는 온전히 주체의 선택으로부터(그러니까 주체의 실존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고양은 존재 자체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존의 결단으로부터 존재자의 존재로 나아가는 하이데거의 사상과 다소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비록 하이데거는 니체를 그러한 방식으로 독해하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데카당한 저열한 의지의 근본적 대표자는 니체가 볼 때 기독교와 그 정신에 있다. 니체는 기독교가 서구 사상에 미친 영향이 오늘날의 왜소한 현대인을 만들어낸 주범일뿐더러, 기독교는 그 정신면에서 원한에서 비롯된 종교라고 말한다. 니체에 대한 미셸 푸코의 이해를 바탕으로 첨언하자면, 첫째,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나누며 기독교의 도덕관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는 날선 비판을 가한다. 둘째, 푸코에게 있어 이것은 윤리와 도덕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이다. 윤리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기술로 자기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그 핵심이 있으며 규범이나 진리 역시 이러한 정의 아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도덕은 자기 자신, 그러니까 주체와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초월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다. 그래서 주체가 없어도 도덕은 존재하고 이 경우에는 주체가 어떻게 삶을 잘 살 것인가 보다는 진리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있다. 셋째, 윤리가 그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키는 것이라 정의 내렸으므로, 윤리를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까닭에 도덕을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발명한 개념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가치를 창조한 사람들을 악으로 놓음으로써, “그렇기에 나는 선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넷째, 이러한 이유에서 니체는 선악은 그리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선악의 구분으로부터 나온 도덕, 원한에서 나온 도덕을 노예의 도덕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정신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와 정 극단에서 이러한 의지와 모순의 문제에 대해 접근한 철학자가 있다. 그는 위에서도 언급했던 독일의 신비주의 기독교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다. 에크하르트는 니체가 비판했던 의지를 버리는 행위를 그 극단까지 사유해보면 다시 의지하는 동시에 의지하지 않는 상태-즉, 모순적인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밝힌 철학자이다. 그는 먼저 철저히 기독교적 텍스트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그가 주요 논거로 드는 텍스트는 산상수훈의 한 구절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정신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들 것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다음의 구절로부터 과연 진정으로 정신이 가난한 자는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한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정신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은 정신이 가난한 자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물질적 가난과 같은 외적 가난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가난에 걸맞는 가난은 오로지 내적가난 밖에 없다는 논리적 사유를 전개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내적 가난이란 마음의 겸손이라든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신의 의지를 따른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신의 의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의지를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자신의 의지를 버려야한다고 말하는 기독교의 의지관이 여전히 하나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그것도 생을 부정하면서 생을 존속시키는 가장 저열한 형태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을 상기하자!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니체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몇안되는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논리적으로 볼 때, 의지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는 신의 의지를 따르려는 의지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에크하르트는 놀라운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대들이 영원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는 한 그대들은 가난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는 사람만 가난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나의 최초의 원인 가운데에 서있었을 때 나는 어떠한 신도 갖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나 자신의 원인이었다. 거기서 나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였고, 나는 진리의 향유 가운데서 나 자신을 인식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나 자신을 원했으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곧 내가 원하였던 것은 나였고, 나였던 것을 내가 원하였다. 거기서 나는 신과 모든 사물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자유의지로부터 나와서 나의 창조된 존재를 받아들인 바로 그때 나는 하나의 신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이 있기 이전에는 신은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은 그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온전히 돌보는 자가 되는 것, 곧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의지를 버리고 떠나있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온전히 자신만을 의지하는 행위와 동일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