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프라하의 마르치온주의자들
뵈멘의 체코인과 독일인들 간의 분쇄 전쟁
1848-1918년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두 개의 역사 과정이 충돌한다. 뵈멘(체코)과 빈(오스트리아), 부다페스트(헝가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업 경제에서 산업 경제로의 이행과, 종속 민족의 각성이 그것이다. 뵈멘에서 전개된 체코 민족주의의 대두는 참정권 요구로 이어졌는데, 이로 인해 뵈멘에서는 라이프니츠 식 철학을 통해 체코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독일 철학자들의 움직임을 포착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체코인들의 행동주의와 뵈멘 내에서 소수 민족에 속하는 독일 지식인들의 탈정치철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뵈멘의 민족 갈등은 극에 달해 연방제 정부에 대한 요구가 가장 강했다. 체코인들은 1860년 10월의 문서를 지지했는데, 이 문서란 봉건제를 바탕으로 연방제를 실현하려는 것이었고, 1871년 클람-마르티니크Clam-Martinic(1824-1887)의 계획에 따라 거의 실현될 뻔 했다. 그러나 독일과 헝가리 지도자들의 반대로 국무총리였던 호엔바르트Hohenwart(1824-1899)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체코인들은 제국의회를 1879년까지 지속했는데 1863년부터 지속적으로 거부운동이 시작됐다. 70년대에는 자유주의 노선의 아우어스페르크 정부가 프라하를 군정에 내맡겼다. 군정 기간 동안 총독이었던 콜러 장군은 체코의 언론인들을 독일의 배심재판에 고소했고 공공집회를 제한했다. 타페 백작의 통치 시절엔 체코인들이 제국의회에서 정부를 지지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죄가 경감됐다.
체코인과 독일인 사이의 적개심은 두 집단의 언어 경쟁전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1840년 가량까지 보헤미즘으로 알려진 스위스식 우정이 존재하기는 했다. 또한 독일쪽의 사상가들-볼차노, 에베르트, 하르트만, 마이스너 같은 작가들이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1848년 6월 프라하에서 있었던 체코인들의 반란이 유혈진압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4월에는 팔라츠키와 리거의 지휘하에 보수파 체코인들이 프랑크푸르트 의회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거절했다. 팔라츠키는 "진정으로 오스트리아 황제국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럽을 위해서, 인본주의를 위해서 서둘러 그러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오스트리아슬라비즘은 문화 민족주의를 호소했다. 보수파 체코인들은 체코어의 부활을 촉구했는데, 이 운동은 독일의 피어리스트회 수사인 도브너Felix Dobner(1719-1790)나 예수회원이었던 도브로프스키Dobrovsky(1753-1829), 고등학교 교사였던 융만Jungmann(1773-1847)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헤르더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보수파 체코인들은 1818년 뵈멘 민족 박물관을 설립했다. 팔라츠키는 5권으로 된 『뵈멘의 역사』에서 후스파들이 추구하는 바와 연속적으로 연관을 맺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체코인들이 유럽에서 무기의 폭력에 의해 로마 가톨릭으로 재개종된 유일한 민족이라 믿었다.
1860년 이후 개혁파 체코인들은 팔라츠키의 실패를 보며 더 초조해졌다. 마우트너에 의하면 실러의 탄생 100주년(1859)이 프라하에서 체코인과 독일인들이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체코인들은 민족 감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티르쉬에 의해 1862년 시작된 소콜운동의 일환으로 체조를 하기도 했다. 1868년엔 프라하의 체코 민족 극장 기공식이 있었는데 1881년 문을 열었으나 두달 후 한 지붕공의 부주으로 화재가 발생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다수의 독일인들이 개건 비용 모금에 참가했으나 개혁파 체코인들은 독일인들의 거부 행위라고 착각함으로써 이 불행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타페가 프라하에 체코 대학을 설립했지만 민족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1863년 체코 대학은 체코어과와 독일어과로 나뉘었고, 1869년엔 독립적인 기관으로 존재했다. 두 과의 분리는 독일 쪽 교수들에게 경제적 곤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1880년 이후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체코어 배우기를 거절했고, 80년대에 프라하의 지방 정신병원 원장이었던 아르놀트 피크는 환자들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체코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언어 싸움은 빈까지 확산되어 1883년 빈의 체코인 공동체는 시의회에 그들만을 위한 초등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빈대학의 총장이 이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퇴진하게 되었을 때, 프라하의 체코 대학은 감사장을 보냈으나 그들이 증오하던 독일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여진 글이었다.
1897년 바데니 백작이 뵈멘의 모든 공무원에게 직무 수행시 두 언어를 다 사용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적대감이 눈에 띄게 고조되었다. 체코인들은 두 언어를 배워야했기 때문에 이 제안이 유리했으나, 제국의회는 이 제안에 대한 논쟁으로 마비되어버렸다. 전시법에 의해 프라하가 다시 해방됐지만 곧 독일어로 된 거리 이름들이 사라졌고, 독일계 배우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바그너보다는 베르디 공연이 잦았고, 독일 극장 앞에는 폭력사태가 벌어졌으며, 독일인이 체코인에게 말을 걸면 손가락으로 귀를 막는 사람도 있었다. 메렌은 1905년 협정을 맺어 이러한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거기서는 독일인들과 체코인들이 제 2 언어 학습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자녀를 일정기간 교환하는 풍습을 유지했다.
프라하에서 독일어는 거의 일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소수언어로 간주됐다. 릴케는 쿠헬 뵈멘어나 쿠헬 독일어 중 하나를 말하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을 한탄했고, 마우트너는 프라하에 독일어와 체코어, 유대어가 공존한 데서 그의 언어철학적 관심이 시작됐다고 한다. 관료들은 왕실의 체코식 독일어를, 귀족은 프랑스어를, 하인들은 체코어를 사용했다. 뵈멘의 독일인들은 쇠너러가 주도하던 독일 민족운동에 가담할뿐만 아니라, 교회의 분열을 꾀하는 사회주의자 집단으로서 1904년 체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독일노동자당과도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좌절을 표출했다. 1918년 이후 이 당은 독일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당명을 개칭했다.
1918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수백 년간 독일인들이 잡고 있던 패권에 보복을 가한다. 그들은 독일인이 세운 영웅 기념비들을 파괴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규모로 탈퇴하도록 촉구했다. 삼백만 정도의 소수집단인 독일인들은 그들의 대학교와 김나지움을 보존하고는 있었으나, 억압에 대해 고통스러운 호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뵈멘과 매렌은 비극적인 분단을 맞긴 했지만 1918년까지 놀랄만큼 많은 독자적인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빈에 정착했다. 뵈멘과 매렌이 빈의 지적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 후설, 크라우스, 아들러, 포퍼-린코이스, 말러, 켈젠, 치머만, 보미-바베르크, 주트너, 로스와 슘페터를 언급하면 될 것이다.
프라하 독일인들의 세계 몰락관
프라하는 독일의 지배에 대한 체코인들의 저항정신을 키우는 온상이었다. 독일 제국 내 다른 주의 수도 중 프라하 만큼이나 독일인과 슬라브인,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골이 깊은 곳은 없었다. 브로트Max Brod는 이 도시를 "논쟁의 도시"라 불렀다. 체코인들은 1830년에 팔라츠키와 리거를 중류층의 지도자로 내세웠고, 뵈멘 지역이 중세부터 가지고 있던 자치권을 되돌려줄 것을 황제에게 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프라하의 작가들은 세계가 몰락할 것이라 믿는 성향이 특히나 강했다. 1781년까지 프라하의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살아야 했다. 이 게토는 1852년 다섯 지구 중의 하나로 프라하에 편입됐고 그때 이름이 유대인 시에서 요제프 시로 바뀌었다. 1880년까지 프라하는 1년 내내 티푸스나 천연두로 시달렸고, 1890년까지 대중 교통수단은 대단히 한심한 실정이었다. 환자들의 수송에 이용되는 것은 마차뿐이었다. 1890년 9월 초 보통 때는 유유히 흘러가던 몰다우 강이 범람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재해로 도시는 엄청나게 황폐해졌다.
독일인과 유대인들은 체코인들과의 경쟁으로 인해 몹시 시달렸다. 프라하 전체 인구의 15.5퍼센트를 차지하던 독일인들은 1880-1900년 7.5퍼센트로 떨어졌다. 독일인뿐만 아니라 체코인들도 현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으나, 특히 독일인들은 체코인들이 어느 날 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했다. 독일 지성인들은 이러한 민족 갈등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 싸우는 그런 내전에 대한 환상을 공중에 그려냈다. 작가와 철학자들은 그노시스파적 우주론을 끌어냈는데, 그에 따르면 단 하나의 묵시록만이 다가오는 홍수를 저지하 수 있다는 것이었다. 1890년과 1930년 사이에 프라하에 만연해있던 종교관은 마르치온주의라는 기독교 이단이었다. 아나톨리아와 로마에서 설법했던 마르치온(85-160)은 유대인들의 창조주는 사악한 신으로, 예수가 와서 구원할 때까지 인간을 붙잡아두는 일을 한다고 주장했다. 지고의 선한 신인 예수가 와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데, 이 복음에 따르면 변덕스러운 신이 시작한 폭정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치온은 유대의 율법을 비난하면서 사망 후에 나쁜 창조주의 전횡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고 확언했다.
율법에 대한 적대감과 멀리있는 구원에 대한 갈망은 프라하 그노시스파의 특징이기도 했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의 법이 나쁜 신의 법을 공고화한다는 듯이, 법이라는 것을 구원의 장애물로 그려냈다. 복수심이 가득 찬 세상에서 사랑의 복음을 갈망하는 베르펠, 변덕스러운 자연의 법칙에 대한 상상을 펼친 마이링크, 육체의 자유로움을 오히려 즐기는 육체없는 천사들의 상을 그린 릴케, 그의 제 3교향곡에 표현된 것처럼 육식하는 자가 없는 천국을 갈망하는 말러 등이 잔혹한 창조주로부터 해방된 세계를 동경하는 마르치온적 갈망을 반영하고 있다.
1896-1929년 프라하에서 설법했던 크리스티안 에렌펠스는 마르치온의 이원론에 완벽한 논리를 부여해 하나의 새로운 우주론을 만들어냈다. 신의 섭리에 대한 그노시스적 비판은, 1860년까지도 뵈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라이프니츠적 믿음, 예정 조화(신과 피조물 사이의 조화)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1860년 이후 라이프니츠적 신정론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은 이율배반의 상태를 초래했고, 그것이 점차 그노시스설로 변형되어갔다.
마르치온주의를 가장 열렬히 환영한 사람들은 프라하의 유대계 작가였다. 파울 아들러, 카프카, 브로트, 코른펠트, 베르펠 등이 모두 1878-1890년 사이에 태어났고, 체코인과 독일인들 사이의 갈등이 정점에 달한 시절에 성장한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독일 문화의 정체성을 갖고 있긴 했으나, 소수 민족 내에 있는 또하나의 소수 집단으로 어느쪽으로부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표현주의자들로 분류되는 이들은 철저히 종교적인 사람들로 자연의 법칙을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왜곡시켰다.
극작가 아들러(1878-1946)는 수학과 의학, 법학, 신학을 공부한 광범위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지식으로 보자면 신을 고소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상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간디의 신봉자로 1차 세계대전 때 입대 의무를 기피하고 드레스덴 근처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문명을 비판하는 극작품 『그런즉Nämlich』, 『마술피리』를 만들었다. "그런즉"에서는 정신분열증적인 바이올린 연주가가 소크라테스와 가상의 대화를 벌이면서 신과의 투쟁을 표현하였고, "마술피리"에서는 모다치의 "인간의 비극"을 표현주의식으로 각색해 서구 문명의 황폐상을 보여준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과의 관료주의를 혐오했고, 가난한 과부에게 유죄판결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되자 법관직을 사퇴했다.
카프카(1883-1924)도 법에 대해 비슷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라하의 마르치온주의를 현대의 이미지로 만들었으며, 사망 이후의 구원이라는 희망에 대해 어떤 정당성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비관적인 사상을 유지했다. 그는 이 세상만이 관료주의에 오염된 것이 아니라 내세에도 관료주의가 있어 구원에 대한 희망을 좌절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중립성 보장에 기초한 요제프 황제 시대의 일처리 방법들을 카프카는 변덕스러움의 상징으로 바꿔 해석했다. 그는 삶을 의식으로 묘사했다. 이 의식의 목적은 선두 지휘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카프카는 희망에 관한 모든 복음이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창조주가 고안해낸 또 하나의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 마르치온을 훨씬 넘어섰다.
막스 브로트(1884-1968)는 마르치온주의가 일종의 과도기로서 윤리적인 무차별주의라 보았으며, 쇼헨하우어와 플로베르에게 찬사를 보내는데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노르네피게 성: 무관심자의 소설』에서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무관심한 한 미학자를 그리고 있다. 벨치Weltsch와 프라하 출신의 유대계 장님 시인 바움Oskar Baum의 영향을 받은 브로트는 1910년 이후 행동주의로 전향했다. 바움의 쾌활함과 벨치가 대표하는 전체론은 한동안 라이프니츠의 전통을 압도했다.
코른펠트(1889-1942)는 스베덴보르크와 슈트린트베르크의 신비학을 전하기 위해 표현주의 비극인 『천국과 지옥』을 써냈다. 이 책은 한 백작 부인의 성에서 벌어지는 감금 사건을 보여주는데, 그 백작부인은 결국 그녀의 딸을 죽이고 만다. 여기서 한 늙은 남자가 등장해 신은 악마의 쌍둥이 형제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반자연주의적인 선언서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와 심리를 가진 자』(1918)를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부버처럼 황홀경에 빠지는 것을 지지하면서 현실 순응을 거부했다. 영혼이란 에테르와 같은 것으로 불멸하지만, 성격은 물리적이고 천박하며 이 세상의 법칙에 예속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1920년 코른펠트는 신이 만든 법칙을 철회해달라고 신에게 간청한다. 부버와는 달리 코른펠트는 자연의 법칙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영혼이 성격을 누르고 이기는 일이 일어나리라곤 믿지 않았다.
부버로부터 영향받은 일종의 경건함을 지닌 베르펠은 아들러나 카프카 또는 코른펠트 등에게서 볼 수 있는 모순된 절망은 피했다. 그는 점점 더 가톨릭주의로 기울어짐을 느끼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원론적인 신학이 교회에 입교하는 것은 저지했다. 그는 과거와 미래가 무한히 병존하는 동질성의 영원과,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이질성의 시간을 구분했다. 이질성의 시간에서 영원 속으로 도피하려는 베르펠의 시도에는 창조주의 법칙에 대한 마르치온적 초조함이 반영되어 있다. 『위와 아래 사이에서』(1946)에서 베르펠은 분리된 사건들을 신의 은사에 의해 동시적으로 파악하는 정신능력에 대해 해석했다. 『바바라 혹은 경건성』,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별』 (1946) 등에서 한순간에 전 생애의 경험들을 집약시키는 기억의 능력을 보여준다.
"프라하의 모든 유대인이 마르치온주의자는 아니었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마르치온주의자가 뵈멘 출신은 아니었지만, 창조에 관해 그토록 많이 공격적인 불만들을 토로한 다른 도시 출신은 없었다. 프라하의 그노시스주의는 헝가리 지식인들의 현세중심적 참여주의나 빈의 유미주의와는 대조를 이룬다. 빈 청년파 작가들이 죽음을 유희적으로 다루긴 했으나 그들의 나태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하나의 우주론을 만들지는 못했다. 빈 사람들이 지나친 포만감에 젖어 있을 때, 독일인들, 그리고 특히 프라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보전하려는 점점 더 가망없는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갇혀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치온주의는 포위당한 채, 그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침묵시키기를 열망하는 소수집단의 절망을 드러냈다." 1
- 윌리엄 존스턴,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번역 고원, 김래현, 변학수, 사순옥, 신혜양, 오용록, 이기식, 채연숙, 주 문학동네, 2008, p.444-44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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