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라이프니츠의 조화론
베른하르트 볼차노: 명제들의 확실한 객관성에 관하여
오스트리아와 특히 뵈멘에서 철학의 시조는 작센인 라이프니츠(1646-1716)였다. 그는 1712-1714년 오이겐 황태자의 총애를 받으며 빈에서 살았다. 그는 항상 화해하는 정신으로 논제를 펴면서 백과전서적 관심과 전체 복지에 대한 배려, 그리고 보편정신을 글에서 드러냈는데, 이는 1800년 이후 뵈멘의 개혁 가톨릭주의에서 부활한다.
"나는 대부분의 종파가 그들의 가르침에서는 옳으나 거부에서는 옳지 않다는 경험을 했다."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세계가 위계질서들로 구성돼 있다는 학설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 위계질서들에는 그가 단자라고 부르는 그런 타고난 감수성을 가진 존재들이 살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이 존재들 각각은 다른 존재들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으나(즉, 단자는 독립적이다.) 그것들에 맞춰져 있다고 봤기 때문에(예정조화설), 라이프니츠는 복수주의와 일원론의 장점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전 우주는 조화로 가득 차있으며, 신은 스스로를 조정하는 단자들을 배치했기에, 이 단자들은 예정된 조화 속에서 기능한다. 인간은 신과 자연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는 특혜받은 단자이다. 성철적인 정신은 그가 바라보는 힘들의 조화에 대해 기뻐하는데, 창조의 세계에 기쁨을 느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에 맞서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이 1800년 이후 셸링에게 재수용된 반면, 라이프니츠는 볼차노, 헤르바르트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됐는데, 이들은 칸트와 그 후계자들, 즉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 전체에 논박을 가했다.
논리학자이자 신학자인 뵈멘 출신의 볼차노(1871-1848)는 1820년 무렵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새롭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들을 재발견했고, 후설을 격려하여 반심리주의로 지향하게 했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 프라하의 요제프주의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는데, 이 시기는 가톨릭 신도이며 철학교수인 자이프트Seibt(1735-1806)가 고트셰트Gottsched, 겔러트Gellert, 바움가르텐Baumgarten, 볼프와 같은 독일 계몽주의 작가들을 이끌었던 시절이다.
그는 대학에서 자이프트의 강의를 들으면서 1년 이상을 칸트의 비판 철학을 공부하는데 바쳤고, 프라하 대학 철학부에 종교학 교수가 신설되자 수학과 철학, 종교학을 잇는 자신의 비전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볼차노는 빈에 프린타네움Frintaneum을 세웠던 프린트Jakob Frint(1766-1834)와 같은 반요제프주의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가 이들에게 축출당하게 되는데, 볼차노가 이단이라고 고소하려던 노력들이 1825년 12월 무죄판결이 내려짐으로써 모두 소용없게 됬음에도 불구, 교수직에 다시 복직하지는 못했다.
그는 끊임없는 경찰의 감시하에서도 1820-1830년 4권으로 된 주저 『지식학』을 완성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교우관계를 맺었고 이 중에는 빈의 헤르바르트파인 엑스너Exner(1802-1853), 신부인 프르시혼스키 등이 속했다. 볼차노는 체코인과 독일인들 사이에서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던 뵈멘당의 일원이었다.
볼차노는 논리학에서 재능을 발휘했는데 특히 명제 그 자체에 관한 이론에서 그러하다. 그는 이상적인 실체들 그 자체에 대해서 플라톤적 사실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지식학』에서 그는 표상 그 자체, 명제 그 자체, 진리 그 자체를 구분한다. 볼차노는 실체들 자체는 각각 어떤 종류의 의식과도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표상이란 명제의 토대가 되는 요소로, 진리란 실재하는 명제로 정의내린다. 그는 각각의 명제 자체가 실재하든 안 하든, 그 어떤 의식에 의해 생각된 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신이라도 그 같은 명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신은 시공간 바깥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명제 그 자체는 표현된 명제 형식, 또는 사고된 명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표상과 진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표상과 진리는 표현될 수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또 생각될 수 있거나 아니면 생각될 수 없기도 하다. 명제들의 표현과 명제들에 대한 생각을 구분하는 것은 명제 그 자체가 언어 이전에 존재하고 모든 종류의 사유 방식 이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명제 그 자체를 그들이 칭하는 말들로부터, 그들을 생각해내는 주관적인 행위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러한 논리의 선험성을 주장하는 테제는 베를린의 물리학자인 람베르트Lambert(1728-1777)가 이미 암시한 적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수학적 진리의 선험적 성격을 논했으며, 현상들에 대한 연구를 기호학과 구분하기 위해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볼차노는 논리적 명제들의 확고부동한 객관성을 최종적으로 공고히 했다. 즉 각각의 명제 그 자체는 그것을 표현하거나 생각해내는 인간들의 노력과 무관하게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단자의 자율성을 누린다. 이러한 사고 모델은 이념들의 세계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이 이념들 중 일부는 인간의 사유 대상이 될 수 있고, 다른 일부는 결코 인간 정신 영역에 닿지 못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의 모든 음모로부터 보호받는 초월할 수 없는 이념의 불가침성을 주장하면서, 어떤 인간의 오류나 정치 행위도 진리를 무너뜨리거나 본질을 수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즉 명제 그 자체는 영원 속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존엄성을 알아보는 사상가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가장 지혜로운 신학의 가르침이란, 신적인 전지전능도 오류 없는 확실성도 갖추지 못한 우리 인간들의 유한한 본성으로 인해 교리 역시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을 시인하는 거라고 열렬히 강조했다. 볼차노의 윤리학에는 라이프니츠의 전체의 복지에 대한 배려가 반영되어 있다.
"너에게 가능한 행동들 중에서, 모든 결과를 고려할 떄 항상 어떤 부분에서든지 간에 전체의 복지를 가장 많이 진작시킬 수 있는 행동들을 선택하라."
-볼차노
실제에 있어서 이러한 원칙은, 집중되지 못한 행동들을 통해서 전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 가장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된 정관파 신비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슈티프터, 그릴파르처와 같은 다른 요제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 전체 복지에 대한 볼차노의 열성은 사회의 각 분야에서 개선을 시도하는 일을 체념하도록 유도했다. 즉 진리 그 자체를 관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세계의 구성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일은 우리를 현명하고 훌륭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의 구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정치이론에서 그는 국가 자체를 분석했다. 그가 국가에 대해 가르친 것은 국가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지만, 이 국가를 실제로 옮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완벽한 모델을 제시했으나, 현존하는 불완전한 상태를 비춰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델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상적인 실체들을 규명하는 일에 그토록 집중하면서도 그것의 세속적 활용가능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고려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의 비전을 혁신시킨 뵈멘의 개혁가톨릭주의
19세기 전반기에 볼차노를 위시한 가톨릭 교도들은 철학적인 면에서 요제프주의운동을 전개하는 일을 주도했는데, 이는 뵈멘에서만 유일한 성과를 거두었다. 학교를 설립하고 합리주의 신학을 전파하며 독일과 체코인 사이를 조화롭게 조정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슈티프터나 권터와 같은 사상가 및, 헤르바르트 학파의 많은 철학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보헤미즘이라 불리는 체코-독일 간의 협력 프로그램도 이와 유사하다.
메테르니히 치하 뵈멘의 가톨릭주의는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다. 교회 내부에서 계몽의 가치들이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교권주의는 최소한으로 줄었다. 그 결과 계몽정신으로부터 경건한 낭만주의 정신이 생겨날 수 있었고, 계몽에 대한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그들은 급진적 몬타니즘Ultramontanismus과 중앙집권주의 사이의 중도를 선택했다. 그들은 지역 행적 당국이 관에 의해 "위로부터" 강요당하는 일 없이 "지역 이성"에 맞게 단계적인 개선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보았다. 점진적 발전에 대한 헤르더의 이상에 맞춰 교회는 초등학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뵈멘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사회개혁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했고, 실제적인 교육을 인본주의 문화와 연결시켰다. 이는 체코 학생들로 하여금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망을 심어주어 조국의 자치권 투쟁으로 이어졌다.
뵈멘의 지식인들은 라이프니츠의 우주조화론 주위로 몰려들었다. 메테르니히 치하 빈의 신비주의자들이나 검열관들과 달리 그들은 학문과 종교의 합일을 모색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노년의 괴테는 뵈멘에서 친구를 발견했는데 카스파르 슈테른베르크(1761-1838) 백작이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 지성인들이 소우주와 대우주의 조화론을 거부하던 시절에 이에 대한 믿음을 밝혔다.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자르는 괴테적 정신으로 자연을 연구하는 뵈멘의 신부이다.
칸트는 도덕을 신학의 통제 바깥으로 두었기 때문에 거부당했다. 역사 진보에 관한 헤르더의 사유 모델이 뵈멘에서는 더 환영받았다. 그것은 슬라브적 사유의 부활을 예시한 것뿐 아니라 또한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학문은 서로 모순될 수없다는 라이프니츠의 전제 아래에서 이들은 중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인문 및 자연과학 교육을 도입했다.
그러나 1860년 이후로 체코인과 독일인들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면서 라이프니츠의 철학 자체는 힘을 잃어버렸다. 요제프주의 철학과 보헤미즘에 실망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대립되는 마르치온 주의에 몰두하였다. 국교는 세계 질서의 구현이 아닌 합스부르크 왕가의 학정을 대변할 뿐이었고, 이로 인해 많은 체코인들이 자유사상이나 프로테스탄티즘으로 전향했다. 뵈멘의 유대인들은 적대 관계에 있는 두 계보 사이에 서있었고, 반라이프니적인 세계 몰락관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했다.
뵈멘 남부에서 태어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1805-1868)는 개혁가톨릭주의의 정신적 가치들과 괴테의 정신을 연결시켰다. 『늦여름』(1857)에 등장하는 귀족 예술가이자 학자인 인물은 오스트리아 최초의 전보 체계를 만들고 제머링 철도의 건설을 준비한 뵈멘 출신의 엔지니어 바움가르트너(1793-1865)를 모델로 했다. 중세기의 뵈멘을 무대로한 슈티프너의 다른 소설 『비티코Witiko』(1865-1867)는 전체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찬가였다. 팔라츠키의 역사관과 슬라브 족의 혈연 공동체 및 이익 공동체 형식에 대한 헤르더의 개념에 근거한 이 소설은 인간을 실제적인 일들로부터 떼어놓는 유미주의에 대한 투쟁이다. 기독교의 사랑이 복지사회의 유일한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슈티프너의 확신은 볼차노의 윤리관을 상기시킨다. 정관적인 이 뵈멘인들은 교육이 인간의 마음과 머리를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다.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이상적으로 계승한 사람은 1849-1875년 프라하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했던 독인인 레온하르디Leonhardi(1809-1875)였다. 그는 튀링겐의 공상가 크라우제Krause(1871-1832)의 제자였으며, 사위이기도 했다. 크라우제는 만유재신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그 이전에 코메니우스Comenius의 사회학을 부활시켰다. 크라우제의 보편성을 향한 노력에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각각의 인간은 모든 다른 인간의 일부분이라는 가르침을 폈던 사람이 레온하르디였다. 그는 1868년 유럽연맹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프라하에서 최초로 국제철학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는 주트너와 쿠덴호브-칼레르기의 정치적 목적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었다.
뵈멘의 신학자 귄터(1783-1863)는 대학시절 볼차노의 제자였고 1810년 빈으로 갔다. 그는 호프바우어와 함께 몇 년간 일 한 후, 1820년 신부가 되었으며, 1828-1848년에는 도서검열관으로 일했다. 30년간의 격렬한 논쟁 끝에 1857년 교황은 귄터의 모든 저서를 금서로 지정하고 저자에게 잘못을 시인하라고 강요했다. 사변적 관념론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귄터는 기독교의 신정론을 자연 속에 신이 내재한다고 보는, 이교적 사유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오류를 계속 발전시킨 것이라고 공격했다. 자연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던 원죄의 시대에 범신론이 들이닥치면서, 구원의 주체가 인간의 정신에서 신의 정신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구원이란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과 신은 서로 유사하다고 전제하는 동종이론과 어긋난다. 신과 필조물이 동일한 실체라면 어떻게 죄와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귄터는 물었다. 그렇다면 신은 그와 대립관계에 있는 악의 창조자일 것이다. 신의 선을 구원하기 위해 귄터는 급진적 이원론의 인간학을 전개했다. 인간은 신과 다른 자연에 속하는 존재로서 태어나고 신이 그에게 정신을 부여해주도록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단의 근거를 신학적 진리의 한 부분을 과장하는 것이라 볼 때, 귄터는 신과 인간의 분리를 과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원인은 아마 헤겔과 셸링이 신과 인간의 분리를 부인하는 것을 귄터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귄터는 제일 먼저 라이프니츠의 조화론과 단절한 사람이었다. 인간과 신 사이의 틈을 벌려 보임으로써 이미 마르치온주의로 향해 갔던 것이다. 그의 이원론적 인간학은 가톨릭 사회학자인 카를 빈터Karl Winter(1895-1959)에 의해 수용됐다. 빈터는 사회와 신학은 서로 다른 영역이라 주장했다. 귄터가 신부가 아니었다면 영향력있는 철학 학파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빈터는 평가했다.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한 독일 사상가가 오스트리아에서 거둔 승리
1820-1880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던 철학가로서 개혁 가톨릭주의자와 일반 교육자의 존경을 함께 받았던 독일의 사실주의자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Fredrich Herbert(1776-1841)는 한 번도 오스트리아에 간 적이 없었다. 그는 개신교도였고, 니더작센 출신으로 예나의 피히테에게 교육을 받ㄷ았으며, 1805-1809년 괴팅겐 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그는 1809-1832년 훔볼트의 프로이센 교육제도 개혁에 동참할 교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했다.
헤르바르트의 장점은 명료한 설명과 대상을 알기 쉽게 구분해내는데 있다. 그는 온건 사실주의를 대표했고, 스승인 피히테와 셸링의 사변적 이성주의에 반대했다. 헤르바르트는 철학을 논리학, 형이상학, 심리학, 실천철학으로 나누었다. 이중 형이상학은 이념들의 근원을 연구하는 학문인 반면, 심리학은 이념들의 전개와 연결을 보여준다. 그는 진정한 스콜라 학자로서 형이상학을 다시 방법론, 존재론, 공간과 시간 같은 연속적인 현상들에 관한 학문 및 인식 가능성에 관한 학문으로 구분했다.
헤르바르트는 존재론에서 절대적으로 단순히 실재하는 사물들의 다수를 존재라 정의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온전히 하나이고 그 스스로와 영원이 일치한다. 우주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적인 존재 또는 신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무한히 많은 자족적 단자들로 구분된다. 헤르바르트가 라이프니츠와 다른 점은 칸트처럼 우리가 실재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특질들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데 있다. 하지만 칸트와는 달리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 이 사실로부터 추론되는 것은, 우리 의식 속에 실재하는 것의 총체가 표상된다는 것이다. 공간, 시간, 운동, 단위 같은 범주들은 실재하는 사물들의 그러한 총체들로부터 파생된다. 헤르바르트는 데카르트의 천성적 이념이나 칸트의 선험적 개념들을 다 거부한다.
심리학에서, 헤르바르트는 영혼 또는 자아가 실재하고, 이것은 다른 사물들의 집합, 즉 몸체에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이 이 사물들 각각은 자신을 엄습하는 방해물들에 대항해 자기주장을 하려고 앴느다. 정신은 지진계와 같이 작동하면서 자아의 자기보존행위들을 모두 기록한다. 이러한 자기 보존 행위들은 자아에 부딪힐 수 있는 다른 사물들에 저항하기 위해 표상들을 만들어낸다. 한번 만들어진 표상들은 영혼의 파괴되지 않는 원자가 된다. 그것들은 헤르바르트가 말하는 의식의 경계 내에 머무르는데, 여기서 표상들은 의식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면서 서로 경쟁을 벌인다. 표면에 떠오르려는 움직임에 저항하는 힘을 칭하기 위해 헤르바르트는 억압Verdrängung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음악에서의 화성학에 매료되어 그는 표상들의 강함과 약함을 질량화하기 위한 상세한 계산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용어 중에 몇개를 받아들인 프로이트 역시 마찬가지지만, 헤르바르트는 그가 질량화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절차를 전문화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만들어 많은 영향력을 미친 신조어들 중 하나는 라이프니츠 개념인 통각Apperzeption을 수정한 것이다. 이 개념은 새로운 표상들이 비슷한 종류의 옛 표상들을 통해 동화되는 것을 칭한다. 이 개념은 암기보다는 연상법을 사용하는 수업을 높이 평가하는 교육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헤르바르트에게서 표상이란 정신적 삶의 기본 현상이다 그는 각각의 행위에서 표상되는 대상에 따라 느낌과 욕망의 일정한 유형들을 분류했고, 그리하여 쇼펜하우어 같은 주의주의자들이나 카루스Carus같은 주정주의, 또는 칸트와 피히테같은 주지주의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의 교육적 입장은 페히너Fechner와 분트Wundt같은 실험론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호평을 얻는 성과를 낳았다. 이들은 그의 통각 개념을 계속 사용했다.
『철학 입문 교본』(1813)에서 그는 350쪽에 걸쳐 철학의 모든 부문을 다루고 있다. 그는 먼저 각 부문의 전반적인 문제를 펼쳐보이고, 그런 후에 세부 사항들을 해설하는 집필방식을 택했다. 형이상학의 일반 문제들 중에는 회의론, 변화, 절대적 존재, 절대적 특성, 칸트의 방법론을 논했다. 이 토포스들을 개별적으로 다루면서 그는 그때까지 사용됐던 원칙적인 입장들을 구분지었고, 각각의 경우에서 개념을 손질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과거 철학자들의 입장을 이렇게 철저히 분석하는 것은 헤르바르트 제자들의 주된 활동이었다. 그는 플로티노스와 헤겔의 신비주의와 로크의 경험주의 사이에 독자적 형이상학을 세웠다. 그는 과거 철학자에 대한 풍부한 지식, 즉 "철학은 철학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라는 입장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헤겔과 닮아 있다. 심리학자로서 또한 경험적 학문들의 방법론자로서는 헤르바르트가 헤겔을 앞서지만, 역사 발전의 개관에 있어서는 헤겔이 그를 능가한다. 오히려 그는 정태적 조화라는 고전적 이론을 지향하는 반면에, 헤겔은 정신적, 사회적 변화에 낭만주의적으로 매료되었다.
미학에서 헤르바르트는 철저한 형식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미의 본질이란 한 대상의 부분들이 형식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에 있다고 했다. 부분들 상호 간의 관계는 쾌 또는 불쾌의 표상을 일깨우는데 이는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헤르바르트는 미를 형식과 내용의 조화로 전재하는 해겔의 견해에 반대한다. 헤르바르트는 한스릭에게 영향을 주어 그가 표제음악을 과소평가하는데 헤르바르트적 형식주의를 이용하게 되었다. 헤르바르트 그 자신 역시 음악가였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작곡했으며, 화성론의 문제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이념이 아니라 의지를 객관화하는 것으로 보았던 시대에 헤르바르트는 예술을 라이프니츠 식으로 해석했다. 즉, 화성들 사이의 관계는 정신의 작업 과정을 반영하는 실재들을 나타낸다. 헤르바르트에게 조화는 표상들끼리의 상호작용을 객관화하는 것인 반면, 쇼펜하우어에게 조화는 전 우주에 만연한 자기보존 욕구를 찬양하는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헤르바르트는 교육학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교육학은 페스탈로치의 교육학 원칙들을 일반화했다. 루소의 제자인 이 스위스 학자에게 자극을 받은 헤르바르트는 괴테의 휴머니즘 이상에다 학습 심리의 옷을 입혔다. 헤르바르트가 이전의 교육학자들과 다른 점은 지성과 성격이 함께 발달되어야한다는 주장에 있다. 괴테와 실러처럼 그는 자아실현을 바탕으로 윤리학과 교육학을 구성하고자 했다. 즉 그는 도덕성이란 의무에 따른 자유를 체험하는 데서 얻어진다고 봈는데, 이러한 전제는 좋은 교육으로 형성된 양심이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헤르바르트는 학생들에게 두 가지 형식 이념을 명심시키고자 했다. 하나는 학생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촉구하는 내적 자유의 이념을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의 효력이라는 이념으로서 이것이 세계의 윤리적 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강력하고 집중된 의지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 윤리적 질서를 그는 세 가지 구체적인 이념인 선의, 정의, 평등으로 정의했다. 선의는 각 개인에게, 자기 자신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과 똑같이 타인의 안녕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정의는 투쟁에 대해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불쾌감을 발전시킴으로써 갈등을 회피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평등은 악한 것이나 선한 것으로 변한 개인 의지들 관계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지향한다. 헤르바르트는 전체의 복지를 준칙으로 삼는 라이프니츠의 원칙을 응용하면서 동시에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볼차노보다 중시했다.
혁명에 대해 반감을 갖는다는 점에서 헤르바르트는 괴테, 헤겔과 같은 입장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학은 잘 교육받아 법을 무서워할 줄 아는 시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같은 정태적 세계관을 인정함으로써 헤르바르트의 교육학은 어떠한 변화도 꺼리는, 반쯤은 봉건적이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사회를 지지했던 것이다. 1848년 대타협 이후 헤르바르트학파는 도덕 및 지적 부문을 강화하고 정치나 신학 영역을 최소화함으로써 그동안 신부들과 경찰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교육제도를 바꿔갔다. 낭만파와 교권주의의 패혜를 교묘히 피해가며 헤르바르트는 최선의 가능성을 바이마르 고전주의에서 건지고자 했다.
헤르바르트 학파는 오스트리아에서 교육제도 개혁자들로 나타났다. 김나지움 대학의 개혁은 50년대 초 볼차노의 제자인 툰 백작가 엑스너 튀링겐의 고대문헌학자 보니츠에 의해 추진됐다. 1850년 이후 프라하대학은 헤르바르트 사상의 중심지가 됐다. 뵈멘 태생의 프라하인 심리학자인 추프르Frantisek Cupr, 폴크만Volkmann, 린트너Lindner, 그리고 엑스너의 제자 중 한 명이 쓴 경험심리학 교과서들은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사용됐다. 프로이트 역시 김나지움에서 린트너의 교과서로 교육받은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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