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19th Century Continental

합스부르크 제국 철학사 개괄 -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3)

Soyo_Kim 2018. 12. 29. 14:21

2. 황제와 그의 궁정

 

"흔히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소모되어) 무너지게 돼있었다고 한다. (...) 제국을 단결시켰던 바로 그 힘, 즉 황제의 완강함과 관리들의 전통주의가 결국은 제국을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비극이었다."[각주:1]

 

크라우스나 트라클의 비관주의와는 반대로, 몰나르Franz Molnár아 헤르만 바르Hermann Bahr같은 낙관주의자들은 안전사회를 주장했다. 빈 태생의 유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어제의 세계: 한 유럽인의 회고』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1890년 전후에 성장기를 보내며 그는 유복한 가정이 미래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사회에 도취됐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구호가 사회에 자리잡았으며, 중산층은 새로운 문물들(전깃불, 가스 설비, 전화, 자전거 등)을 보며 지속적인 진보를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815년 이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빈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세대들에게 있어 제국과 시대의 종말은 (그리고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체적으로 세기말의 빈은 비관주의와 체념이 지배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경제 발전과 차란한 지적, 문화적 삶이 공존했다.

츠바이크와 그라프가 전쟁 전의 안정을 찬양한 것과 반대로, 다른 작가들은 붕괴의 조짐을 강조하는 다수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위기를 물리칠 수 있다는 용기와 신념으로 1차 대전을 맞았다." 이러한 젊은이들 가운데는 물론, 『논리-철학 논고』를 준비하던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다. 그가 남긴 『전쟁 일기』에서는, 전쟁의 대의와는 무관한 개인의 실존적인 선택으로 전쟁에 참전한 비트겐슈타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가치에 대한 동경과 대의에 대해 언급하는 비트겐슈타인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질과 로트 같은 비관주의자들에 힙입어 비평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사를 제국 쇠망의 역사로 해석하게 됐다. 요즘 들어서는 이탈리아의 독문학자인 마그리스Claudio Magris가 『오스트리아 문학에서의 합스부르크 신화』(1963)란 논문을 발표하며 이에 합류했다. 그에 따르면 대다수 오스트리아 작가들은 1918년 이전에 제국의 붕괴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몸을 떨었지만, 1918년 이후에는 전쟁 전의 허약함으로 아름다운 낙원을 장식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허약함을 한탄했다는 것이다. 또한 합스부르크의 은폐에 관한 신화는 전날 바르와 호프만스탈 같은 젊은 빈Junges Wien의 찬미자들을 매혹시켰으며,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몰락한 제국을 예찬했다고 한다. 그에 앞서 그릴파르처와 슈티프터도 일찍이 주위에 만연한 데카당스와 부정의를 호도하는 데 합스부르크 신화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각주:2]

마그리스는 이러한 분석의 전제로 오스트리아 작가들이 현실을 기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이 정치적인 것인지, 경제적인 것인지, 심리적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그는 헝가리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요커이Mór Jókai 등 많은 작가들은 왕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충만해 있었으며, 1918년 이후에는 섹퓌Gyula Szekfü와 같은 시사 평론가들이 합스부르크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각주:3]또한 "레너와 같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포포비치 같은 연방주의자들처럼 합스부르크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협조한 사람들"[각주:4]도 무시되고 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산업화하는 세계 속의 비더마이어 군주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산업화하는 세계 속의 비더마이어 군주였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1세로 1848년 12월부터 1916년 11월까지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 왕, 그리고 20여 개 작위의 상속자로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비더마이어 황제이자 정신이 박약한 페르디난트 1세의 조카였다. 1860년과 1867년의 입헌 정치 요구를 용인했으며, 1907년에는 보통선거권의 도입을 허용했다. 그는 실무나 업적 보다도 제국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공경의 대상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기술의 변화에 요지부동이었고, 항상 엄격한 삶의 태도를 평생동안 유지했다.

황제는 가족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의 딸로 태어난 프란츠 요제프의 어머니인 대공비 조피(1805-1872)는 아들을 황제에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야심가였다. 그녀는 1854년 아들을 그녀의 조카딸인 엘리자베스(1837-1898)와 결혼하도록 하였다. 사촌끼리의 결혼이 빈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몇 년 뒤 멘델이 빈에서 130킬로미터 떨어진 브륀에서 수행한 유전학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각주:5] 근친결혼의 결과 합스부르크 황실은 17세기에 이미 손실을 입었고 정신 박약으로 태어난 페르디난트 1세 등을 낳게 되었다. 이는 또한 황태자 루돌프의 불안정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피는 황궁의 살림과 아이들 교육에까지 책임짐으로써 아들의 결혼생활을 망쳐놓았다. 시어머니의 간섭에 엘리자베스는 여행과 승마에 빠져 사는 것을 낙으로 삼기 시작했다. 황제는 비록 부인을 평생동안 사랑하긴 했으나, 그보다 더 큰 그의 의무에 대한 사랑, 즉 어머니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열의를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정치분야에서 1866년 헝가리 정치인 데아크Deák의 타협안을 받아들이도록 황제를 설득한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헝가리인들을 설득해 1867년 황제를 환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외에 그녀는 생애 마지막 20년을 대부분 여행으로 보냈다. 이는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의 루돌프의 자살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으며, 1898년 9월 10일 제네바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소행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황제 부부는 루돌프 황태자(1858-1889)와 함께 두 딸을 낳았다. 루돌프는 어머니에게서 이어받은 예민한 신경과 순교적인 삶을,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의무감과 세부적인 것에 몰두하는 경향[각주:6]을 물려받았다. 요제프가 루돌프를 동반자라기보다는 경쟁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무관심 아래에서 1870년부터 자유주의적인 아우어스페르크 내각을 보면서 성장했다.

"처음에는 체코인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타페Taaffe의 교권적인 체제를 싫어하게 됬으며 칼만 티소Kálmán Tisza의 억압 정치에 대해서도 개탄했다. 루돌프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헝가리인들에 대한 사랑을 누렸다. 요커이에 따르면 루돌프는 헝가리어를 농부처럼 할 줄 알았다."[각주:7]

"제국의 다양성을 찬미하기 위해 루돌프는 마흔 두 권으로 된 말과 그림으로 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빈 1886-1902)를 출간하도록 했는데, 거기에는 나라마다 따로 조사 평가한 해설과 삽화가 실려 있었다. 요커이는 이 "황태자의 저작물"을 헝가리어로 펴냈다."[각주:8]

"반교권주의자인 루돌프는 데카르트와 볼테르를 높이 평가하고 프랑스를 찬양한다는 점에서 그의 아버지와 달랐다.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소원한 태도를 보였다."[각주:9]

 

1876-1878년 경제학자인 카를 멩거Carl Menger는 루돌프의 선생 자격으로 그와 함께 여행을 했다. 루돌프와 멩거는 영국 귀족 계급이 지닌 공민으로서의 책임의식에 큰 영감을 받았고, 오스트리아에서 사냥과 무도회에만 몰두하는 젊은 귀족 계급들의 게으름을 한탄하였다.

1889년 1월 30일 마이어링Mayerling의 사냥 막사에서 루돌프가 자살한 사건은 아직까지도 신비에 쌓여 있다. 셉시의 딸인 추커칸들-셉시는 황태자가 프라하에서 한 젊은 유대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가 유배지를 탈출한 뒤 죽었다고 주장한다. 루돌프는 벨기에에서 온 스테파니 공주와의 불행한 결혼에 대해 무효 선언을 내려줄 것을 교황 레오 13에게 청원했는데, 교황은 이를 곧장 요제프에게 반려하는 바람에 그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말았다. 루돌프는 1888년 11월 5일 그리스계 혼혈인 베차라 남작 부인을 만났는데, 그 때 이 유대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셉시는 이뿐만 아니라 루돌프의 자살이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주장한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1888년 6월에 즉위했는데, 그의 오만함 때문에 쾨니히그래츠Königgrätz 시절의 루돌프가 느꼈던 분한 마음이 곧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정치, 결혼, 아들로서 실패한 루돌프는 베체라와 자신을 쏘았다. 그러나 빈 당국에서는 그 사건의 감상적인 측면, 즉 루돌프가 여자 때문에 죽은 것이지 자기 신념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했다.

요제프와 이미 중년이 된 후계자 페르디난트 대공(1863-1914) 역시 사이가 좋지 못했다. 페르디난트는 황제의 동생 루트비히 대공(1833-1896)의 맏아들이었다. 루트비히는 7년 동안 제위 후계자로 있었는데 너무나도 깊은 신앙심에 요르단 강물을 계속 마시다가 1896년 장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1901년부터 페르디난트는 군사 문제에 있어 적극적인 구실을 했따. 그는 호프부르크 궁에 자신의 제2참모부를 유지했으며 신교도인 회첸도르프 장군(1852-1952)을 후원하였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탈링아와의 해군력 경쟁에 참가하는 걸 지원했으며 크로아티아로부터 수병을 모으기도 했다.

그의 부인이었던 조피 호텍Chotek(1868-1914)이 헝가리 사람들을 가리켜 "흉노족"이라 부르고, 부다페스트의 유대인들에겐 너무 동화되려 야단이라고 비난했듯이, 황태자 역시 보통선거권이 도입되길 기대했던 헝가리에 대해 공공연한 적개심을 내비쳤다. 그는 제국 안에서 가톨릭인 크로아티아인과 그리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이 통합되기를 바랐다. 그의 구상은 분리주의 지도자들이었던 젊은 세르비아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들은 대 세르비아의 꿈을 살릴 수 있는 극단적인 조처를 취하게 된다.

빈에서 사교 계절의 마지막 행사로 더비 경마가 열리던 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 이것이 세계 1차 대전을 불러일으킨 사라예보 사건이다. 황태자의 오스트리아 합중국론[각주:10]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소수민족인 슬라브족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을 규합하려 했던 세르비아 왕국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이미 고령이라,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갈 상황이 이미 임박해 있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 대공이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에 방문한 1914년 6월 28일은 세르비아 왕국이 1389년 암셀펠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한 치욕의 날이자, 제 2차 발칸 전투에서 터키인들에게 승리한 영광의 날이기도 하였다.[각주:11]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라는 민족주의 조직은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Црна рука"의 도움을 받아 이 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페르디난트와 조피는 요제프에 대한 반항심으로 안전과 관련된 경고를 모두 한 귀로 흘려버리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우연이 겹겹히 겹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각주:12] 이 사건으로 인해 황태자가 계획했던 유화책은 좌절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1914년 7월 23일의 최후 통첩을 세르비아 왕국이 거부[각주:13]하면서, 1914년 7월 28일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은 전통적 군주제와 함께, 제국의 몰락을 결정적으로 초래하였다. 

황태자는 비록 교권주의에 대한 집착, 금전 문제의 인색함, 동맹국에 대한 불신, 미술품 수집가로서의 몰취미, 사냥에서의 잔인한 도살 행사 등의 결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몬테누오보 후작이 고인에게 제대로 경의를 표하지 않은 덕분에 순교자가 되었다. 사라예보에서 빈을 거쳐 장지인 도나우 강변 푀히라른 근처의 아르슈테튼 성에 이르는 동안, 곳곳에서 지체와 태만이 되풀이되며 운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각주:14] 이러한 모욕에 관리들과 군인들은 충격받았고, 이는 페르디난트에 대한 영웅 숭배로 바뀌어 복수에 대한 결의를 다지게 된다.

요제프 주위의 황실 인물들은 대개가 불행한 삶을 살았고, 대신들에게도 지독하게 굴었지만,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요제프 황제는 제국의 단결을 유지시키는 안정의 원천으로서 대다수 국민들의 존중을 받았다. 그는 "근면하고 실질적이었으며, 관례에 따름으로써 자신이 상속받은 나라와 특권을 후계자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믿는 최고위 관료 같았다."[각주:15] 그의 정치는 조용하면서 정적quieta non movere이었고, 경직적이었으며, 비밀스러웠다. 이러한 비밀주의는 오히려 빈에 음모와 풍문이 가득하게 차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신들이 회고록을 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언론도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풍문이 사실을 대신하게 되었다.

귀족정치와 하위 귀족: 개혁을 가로막는 특권

빈의 상류사회는 귀족계급 또는 고위 귀족과 하위 귀족, 즉 작위증을 통해 서임된 귀족Briefadel과 봉직 귀족Dienstadel이라는 두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류 사회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국을 다스린 조상을 두지 못한 자들 보다는 1806년에 속국이 된 영주 집안의 지위가 더 높았다. 고위 귀족들은 후작Fürst, 백작Graf이라는 작위를 가졌으며, 황실에 속할 때는 대공Erzherzog이라 불렸다. 서임 귀족과 봉직 귀족의 지위는 보통 왕위를 통해 봉사안 집안에 내리는 것으로 서열에 따라 남작Freiherr, 기사Ritter, 귀인Edler, 폰Von 등을 붙였다. 고위 귀족은 호흐게보렌Hochgeboren이라 불렀으며, 하위 귀족(때로는 일반 시민까지도)은 남작님, 또는 볼게보렌Wohlgeboren이라 칭했다. 이 두 사회층 구성원들은 사육제 기간의 자선무도회 때 말고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각주:16]

공식적으로 1919년 4월 3일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귀족제를 폐지하고 폰Von을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지만 이후에도 사회에서 작위가 계속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임 귀족이나 봉직 귀족은 요재프의 궁정에 들이지 았았다. 관례에 따라 대대로 네 귀족이 있어야 입궐할 수 있었다. 반면 장교는 누구나 입궐할 자격이 있었으며, 이것은 장교의 이점일 뿐만 아니라 명성을 주는 특전이었다.

6월부터 10월과 11월까지 귀족들은 여름을 시골 영지에서 보내며 사냥을 하기위해 빈을 떠났다. 한해에 한 번 가족 모임 날에는 가장 주위에 일가 친척이 모였는데, 이때에도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앞으로 있을 경축행사를 계획하며 보냈다. 귀족은 사냥에 빠져 있었는데 황제와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 였다.

루돌프 황태자와 멩거가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에는 귀족들이 사냥과 사교에 정력을 소모하느라 정치활동을 등한시하거나 군사훈련도 받지 않는다는 질책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귀족들은 특권을 누린다고 할 수 있지만, 체면을 지킬 수 없으면 보통 시민들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대다수 귀족에게 자허 호텔은 제 2의 고향이었다. 남편 아두아르트 자허가 죽자 1892년 푹스 집안의 안나 자허Anna Sacher(1859-1930)가 1876에 시작한 사업을 이어받았다. 무일푼이라도 멋진 남자라 마음이 끌리면 모든 걸 아주 싼값에 주지만, 백만장자라도 무시하는 사람이면 그녀에게 쫓겨나기 마련이었다. 호텔 식당은 그녀가 선택한 손님들을 위해 예약돼 있었지만 부엌에서는 규칙적으로 빈곤층을 돌봐줬다. 위층 별실은 정치 음모의 밀회 장소였고, 요제프와 비헬름 2세의 초상화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식당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직도 1914년 어느 여름날 링슈트라세 호텔 문간에 기품 있게 서 있는 베르히톨트 백작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막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에 서명했었다. 그리고 날씬한 모습으로 반어적인 웃음을 보이며 (...) 행인들과 얘기를 나눴다. 교양있는 링슈트라세 사람들은 이렇게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산산히 흩어졌다. 그들은 웃고 농담을 하면서 살았고 웃고 농담을 하며 죽었다."[각주:17]

귀족에게는 출세하거나 망하게 할 수 있는, 즉 운명을 좌우하는 특권이 있었다. 고위 관료층은 궁정사회의 구성원에게 은혜를 입고 있었으므로 관의 승인을 얻어야 할 사업도 우선 황실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 후견 관행은 대학교수직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 문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편애와 경박성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문화생활에 정신적 독립이라는 귀중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메테르니히 후작 부인과 빌체크Wilczek 같은 박애주의자들은 예술인 보호자로서 국가가 억압한 사업들을 후원했다. 또한 귀족을 비롯한 모든 계층이 예술과 축제를 사랑하였다.

극장에서건 프라터 공원에서건 상류, 중류, 하류층 모두가 "생활양식의 민주주의Stil-Demokratie"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모든 계층이 윤리 목표라곤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국가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또 귀족층과 중하위층은 모두 부유한 중산층과 이 계층 출신의 관료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계층이 지니고 있었던 도시적, 그리고 (유대적인) 자유주의가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주의가 지닌 성과 위주의 태도를 싫어하였고 농촌사회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리하여 자유주의는 중하위층에 의해 기독교사회주의로 대체되고, 귀족은 황실로 하여금 현상을 유지하도록 힘을 북돋아줬다.[각주:18]

  1. 1.윌리엄 존스턴,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번역 고원, 김래현, 변학수, 사순옥, 신혜양, 오용록, 이기식, 채연숙, 주 문학동네, 2008, p.61 [본문으로]
  2. Ibid. p.64 [본문으로]
  3.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4.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5. Ibid. p67 [본문으로]
  6. Ibid. p.68 [본문으로]
  7. Ibid. p.68-69 [본문으로]
  8. Ibid. p.69 [본문으로]
  9.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10. 오스트리아, 헝가리 뿐만 아니라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태의 연방제안. 이 정책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정책으로 오스트리아계와 헝가리계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11. 이 날은 심지어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12. 첫 번째 암살시도인 폭탄 테러는 실패했으며,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다친 수행원의 병문안을 강행했다. 지름길로 가야한다는 말을 운전기사에게 하지 않았고, 운전기사는 우연히 길을 잘못들어 후진하게 되었으며, 암살범은 우연히 주변 카페를 서성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총탄은 방탄복을 피해 황태자의 경동맥에 맞고 말았다. [본문으로]
  13. 다른 조항들은 수용하였으나, 오스트리아의 내정 간섭 및 조사 허용 조항을 거부하였다. [본문으로]
  14. Ibid. p.72 [본문으로]
  15. Ibid. p.74 [본문으로]
  16. Ibid. p.75 [본문으로]
  17. Ibid. p.80 [본문으로]
  18. Ibid. p.8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