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 서양고중세철학
1. 중세 철학의 성립 가능성
고전1:18 십자가의 말씀(Logos/Verbum) or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바 ㄱ)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장 18절-20절
초기 교부들의 사도 바울 수용에 대하여- De vera religione 신실한 종교
초기 교부들에 있어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기독교의 말씀을 세상의 어두움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기독교 교리와 세속 철학 사이의 위계질서를 설정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자기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세속의 지혜를 넘어갔는가? 또 기독교는 여전히 현대의 철학을 얼마나 넘어서 가고 있는가? 고로 문제는 십자가의 말씀과 구별되는 세속의 지혜라는 구도에서 그 기준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탐구와 세속의 지혜에 대한 탐구는 어떠한 방식으로 구별되는가? 이는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세속의 지혜에 대한 탐구는 플라톤의 사고에서 중시되고 오늘날까지 철학에 남아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그 방법으로 지니고 있다. 이것은 바로 Logon didonai, 즉 철학은 자기가 하는 말에 근거를 대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대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는 철학적 전통이자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당위를 넘어서서 말하는 자의 탁월성을 뜻하는 아레테(arete)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에 있어 하나의 탁월성이고 철학적 진술은 이해가능하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것이 철학적 로고스(Logos)의 본질이다.
물론 중세에도 여전히 철학적인 거인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적인 것의 사유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의 사유는 그 진술을 규정하는 방식들의 규정에 있고 또한 오직 그러한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중세의 가장 차별화되는 특징은 사도바울과 함께 들어온 로고스가 계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나 예수는 그리스도이고 구원하는 자이고 내가 육화된 로고스이고 살과 뼈가 된 로고스이고 다시 말해 사람이 된 로고스이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쓴 피에르 아도는 이러한 로고스라는 단어의 이중성이 중세 철학이 성립하게 된 요인이라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계시로써의 말씀은 이 이중성을 통해 철학적인 로고스인양 가면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로고스는 세속적인 생각의 한계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것과 차별화된다. 즉, 이러한 계시적 로고스의 드러남에는 어떠한 근거도 댈 수 없으며, 급작스럼게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진리인 것이다. Episteme인 진리와 Pistis인 믿음 사이의 이러한 편차에서 후자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진리로 드러난다.
중세철학이 그 이전의 철학과 차별화되는 두 번째 지점은 새로운 관념의 등장이다. 이는 현세의 인간이 원죄의 상태에 있다는 죄의 관념이다. 원죄는 적어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관념이었으며, 고로 이들에게는 원죄의 궁극적 의미-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가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계시인 Evangelium, 기쁨의 복음이자 좋은 소식 역시 인간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 적 없는 고대의 철학자들에게는 앎의 위계질서에 있어 낮은 믿음에 할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부들, 그리고 중세의 철학자들은 기독교 이전의 고대 철학을 수용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기독교적 진리를 묘사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다. 고로 바로 그 근거인 기독교와 기독교 이전의 근접성에 중세철학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잠복해있다. 기독교적 진리는 계시를 통해 드러나기에 근거를 요청하지 않고 이것을 철학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 이는 철학에서 용납할 수 없는 범죄적 행위이자 기독교에서는 혼탁하고 이단적인 사교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은 통념과 달리 기독교 사회의 주류에서도, 철학의 본질적 정신에서도 불일치하는 심각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을 전면에 내세운 토마스 아퀴나스의 덕론에 대한 사상적 박해는 이러한 사례로 여겨질 수 있다. 중세에 있어서는 모든 철학에 앞서서 기독교의 권위, Auctoritas가 존재했으며, 따라서 신적인 지혜와 인간적인 철학적 지혜 사이의 위계설정이 바로 기독교적 철학의 자기 이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철학의 내적 긴장과 모순은 바로 “왜 기독교적 로고스가 철학적 로고스보다 위에 있어야 하는가?”를 (철학적 로고스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는 데에 있다.
당신의 말이 단지 단어들로만 명령을 내렸다면 그것은 내게 너무나 불충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행동하면서 발생했던 명령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Confessione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이러한 접근은 어떠한 사고나 사상도 권위만으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통상적인 그리스인들처럼 아폴론에 대한 우상숭배자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적 철학은 진정한 철학으로 넘어가길 원하는 신앙심과 믿음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철학이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믿음이며,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왜 위에 있어야만 하는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결국 기독교적 로고스(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기독교적 로고스를 배제해야하는 역설을 낳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우리의 통념과 달리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는 명제가 말하는 기독교에 대한 철학의 종속 내지 열등함은 신학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철학을 통해 신학적 권위를 배제하는 방향성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이에 따르자면 권위 auctoritas와 이성 ratio의 사이에는 시간적 우선권과 실제적 우선권이 성립한다. 안셀무스 (Anselmus Cantuariensis)는 이를 fides quaerens(지식을 취하는 신앙)이라고 표현한 바 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crede ut inteligas(알기 위해 믿어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들은 계시된 진리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면서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주의를 과감히 밀고 나갔으며, 고로 교회입장에서는 이단으로 파악될 만큼의 사유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들은 믿음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사고의 자유를 진지하게 믿었고 교회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정도였다. 그렇다면 권위와 이성 사이의 긴장이 무너질 때 생기는 현대의 위험을 우리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적 맥락에서 다시 파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종말론적 시간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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