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1 - [Research/Publications] -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2022 석사논문 제1장 제2절
실증주의적 해석과 “형이상학의 극복”
『논고』의 실증주의적 해석은 분석철학사에 남긴 영향과 별개로 오늘날에는 이론적 설득력을 상실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카르납과 에이어는 모두 그들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오해했다고 고백한다. 특히, 이들이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이다. 먼저, 카르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철학적 물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는 슐릭(Schlick)과 나의 태도와 비교했을 때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모임에서 읽었던 초기에, 나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가 우리의 태도와 유사하다는 그릇된 믿음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의 책에 나타난 신비적 진술에 관하여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이 영역에서의 그의 느낌과 생각이 나의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Carnap (1967), pp. 35-36.
카르납과 마찬가지로 『논고』가 반-형이상학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던 에이어는 그와 비트겐슈타인의 차이가 부분적으로 칸트를 통해 해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논고』의 세계관이 그 책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던 빈 학파(the Vienna Circle)의 구성원들과 나 자신을 포함한 젊은 영국 철학자들에 의해 오해를 받았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 우리는 그가 형이상학을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당연하게 여겼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을 그가 ‘신비로운 것’이라 부르는 것과 동일시했고 그 안에 가치 판단들과 삶의 의미에 대한 감상을 포함했던 한에서, 그의 태도는 신앙의 관심사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한계 짓고자 의도되었던, 형이상학 비판을 수행했던 칸트의 태도와 훨씬 유사했다. Ayer (1985), pp. 30-31.
인용문에서 에이어가 파악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칸트적 성격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 durch logische Analyse der Sprache)’이라는 테제로 요약되는 카르납의 철학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Carnap (2004), S. 81-109 참조). 우리가 여기에서 칸트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을 극복(Überwindung)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 이성의 한계로부터 비롯하는 하나의 운명(Schicksal)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 말할 수 있다. 1
해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가 슐릭과 카르납을 위시한 빈 학파에 미친 영향 중 하나로 철학 개념(conception of philosophy)의 혁신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빈 학파와 영국 논리 실증주의의 두 가지 주요 목표였던 과학적 세계이해(the scientific world-conception)의 정립과 형이상학의 제거(the demolition of metaphysics)는 비트겐슈타인의 전례 없이 급진적인 철학 개념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Hacker (1996), pp. 42-45 참조). 2 즉, 비트겐슈타인은 (1) 흄(Hume)의 경험주의를 그 연원으로 하는, 철학을 마음의 인지적 활동에 관한 탐구로 바라보는 심리주의(psychologism)의 견해, (2) 러셀이 표명했던, 철학이 비록 그 고유한 탐구 대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개별 과학들과 차별화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연 과학의 일부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3) 플라톤(Plato) 이래로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철학을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모두 거부하였다 (Hacker (1996), p. 42 및 25-27번 미주 참조). 대신에, 그가 생각했던 철학의 과제는 언어비판(Sprachkritik)으로서의 철학이며, 언어의 실제 논리적 형식을 탐구함으로써 자연 과학의 명제들을 분석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의 명제들이 무의미한 사이비-명제(the pseudo-proposition)임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TLP 4.0031; Hacker (1996), p. 42 참조).
이렇게 볼 때,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했던 철학의 과제는 일견 카르납이 제시한 테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양자의 철학적 혁신이 (1), (2), (3)의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빈 학파의 경우,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했던 언어의 논리적 분석은 경험주의(empiricism), 그리고 실증주의(positivism)와 함께 과학적 세계이해를 이루는 세 가지 이론적 요소 중 하나였다 (Stadler (2007), p. 15 참조). 우에벨(Uebel)에 따르면, 빈 학파는 1924년부터 1927년에 걸쳐 『논고』를 읽으면서 비트겐슈타인의 상징 이론이 경험 과학의 기초에 관한 그들의 연구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Uebel (2017), p. 705 참조),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논고』에 대한 충실한 해석을 시도하기보다 오히려 그 책에 제시된 이론들을 활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철학은 『논고』의 영향에 앞서 직접적으로는 (1) 경험을 넘어서는 모든 요소를 형이상학적이고 신화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마흐(Mach)의 견해를 계승하였으며 (마흐 (2014), 671-672쪽 참조), 간접적으로는 (2) 정의될 수 있는 용어들에 대한 명료한 정의를 제시하고, 본질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용어들을 정의하려 하는 잘못된 시도들에 대해 논박하고자 했던 러셀과 무어의 태도에 조응하고 있었다 (Janik and Toulmin (1996), p. 211 참조). 이후, 『논고』의 영향을 받은 카르납은 수리 논리학을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여겼던 러셀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도구를 통해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solve)의 대상이 아닌 해소(dissolve)의 대상으로 드러날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Friedman (2008), pp. 393-395 참조). 요컨대, 카르납에 따르면 “논리적 분석은 경험을 넘어서거나 경험의 배후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 하는 모든 허위적 인식들이 무의미하다는 판결을 내린다” (Carnap (2004), S. 102). 이러한 이유로, 재닉과 툴민은 빈 학파가 마흐의 인식론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분석을 종합하려 시도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빈의 젊은 실증주의자들의 철학적 목표는 무어와 러셀의 목표와 유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론은 달랐다. 케임브리지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분석을 통해 철학을 개혁하는 일에 착수했던 반면, 빈의 실증주의자들은 이미 그것의 가치가 과학적 이론 안에서 입증되고 있었던 방법들을 일반화함으로써 철학을 개혁하겠다고 결심했다. […] 마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지식에 관한 모든 주장이, 그것의 정당성을 우리의 감각들의 증거로부터 부여받으며, 이러한 ‘증거(evidence)’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개별적인 감각 장들(our individual sense fields)[에 주어진] 직접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논증했다. 그리하여, 과학 전체는 아니더라도, 인식론은 감각들의 분석(Die Analyse der Empfindugnen)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 빈 학파의 철학은 오직 『논고』의 논리학이 마흐의 감각론적인 인식론과 들어맞을 때만 완성되었다. Janik and Toulmin (1996), pp. 212-213.
반면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그의 철학은 방법에서는 (2)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으나 그 궁극적 목표에서는 오히려 (3)과 유사했다. 러셀은 ‘과학적 철학함(scientific philosophizing)’이라는 표현으로 선험적 추론(a priori reasoning)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전통과 대립하는, 객관적 지식을 창출하며 진보하는 학문의 특징을 나타내고자 했다 (Morris (2020), pp. 775-776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러셀이 비판하고 있는 선험적 추론이란, 개별 과학들과 차별화되는 철학의 선험적 영역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의 선험적 역할을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유리하여 다루었던 브래들리(Bradley) 등이 제시한 관념론을 의미한다 (Morris (2020), p. 776 참조). 말하자면, “그가 거부했던 것은 선험적 추론이 세계가 보이는 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도록 우리를 필연적으로 이끈다는 생각, 즉 그러한 추론이 현실의 기저를 이루는 신비롭고 형언 불가능한 무언가를 옹호하면서 감각의 세계를 거부하도록 이끈다는 생각이었다” (Morris (2020), p. 776).
비트겐슈타인 또한 철학이 개별 과학들과 차별화되는 영역을 갖는다는 러셀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러셀과 달리 철학이 자연 과학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TLP, 4.111). 그에게 있어 철학은 첫째, 언어비판이고, 둘째,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die logische Klärung der Gedanken)이며, 셋째, 구체적인 내용을 갖는 학설이 아닌 특정한 활동(Tätigkeit)에 해당한다 (TLP, 4.0031, 4.112).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활동과 명료화, 그리고 언어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선구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러셀이다. “러셀의 공적은, 명제들의 가상의 논리적 형식이 그것들의 실제 형식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TLP, 4.0031). 예컨대 ‘프랑스의 현재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the present King of France is not bald).’라는 명제의 논리적 형식에 관한 러셀의 유명한 분석은, 모순율을 위배하는 대상들을 허용하는 마이농(Meinong)의 이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이 논리 법칙들과 명제의 형식에 관한 올바른 분석 위에 근거해야 한다는 그의 관점을 반영한다 (Russell (1905), pp. 484-490; Smith (1985), p. 305 참조).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러셀의 기술 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s)은 명제의 진정한 논리적 형식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로, 기만적인 문법적 형식과 실제 논리적 형식의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언어비판의 전형으로 보였다 (Hacker (2021), p. 8 참조).
만약 이러한 관점을 반-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에이어의 지적처럼 『논고』 역시 반-형이상학을 표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yer (1985), p. 18 참조).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의 「논리학에 관한 노트」(“Notes on Logic”)에서 “철학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으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그것의 토대이다” (Ludwig Wittgenstein, “Notes on Logic”, Appendix Ⅰ to Notebooks 1914-1916, p. 106)라고 쓰고 있으며, 1916년 8월 2일의 『일기』에서는 “내 작업은 논리의 기초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본질까지(zum Wesen der Welt) 확장되었다.”(NB, 79/411쪽)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 적어도 논리에 기초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가설들에 관해서는, 비트겐슈타인 역시 카르납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순전히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TLP, 머리말). 그가 보기에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어떤 이가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시도할 때 그가 자신의 명제들 속 기호들에 어떤 의미(Bedeutung)도 주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TLP, 6.53).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철학적인 것들에 관하여 쓰인 대개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nicht falsch, sondern unsinnig).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물음들에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없으며, 그저 그것들의 무의미성(Unsinnigkeit)을 규명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들과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근거한다. TLP, 4.003.
그러나 설령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이 공유하고 있는 방법론이 경험으로부터 유리된 가설들을 제시하는 브래들리의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 유효하다 할지라도, “감각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김석수 (2011), 188쪽, 12번 각주) 칸트의 경험의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원천적 거부를 표명하고 있는지는 모호하다. 우리가 보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궁극적 목표가 (3)과 유사했다는 주장의 일차적인 근거는 논리의 본성에 관한 그의 견해가 프레게와 러셀의 견해와 다르다는 점에 있다. 이제 이 점을 보다 자세히 고찰하기로 하자.
- “인간 이성은 그들 인식의 한 종류에서는 특별한 운명(das besondere Schicksal)을 지니고 있다: 이성의 본성 그 자체로부터 부과되었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성의 전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대답할 수도 없는 물음들에 의해 괴롭힘당하는 것이다.”(KrV, A Ⅶ-Ⅸ.) 『순수이성비판』의 인용은 직접 번역하되 번역본을 참조했으며, 특히 주요 개념어에 대한 번역은 대부분 이를 따르고 있다. [본문으로]
- 해커는 ‘과학적 세계관(the scientific world-view)’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나, 본고는 ‘Wissenschaftliche Weltauffassung’의 본래 뜻을 살린 ‘과학적 세계이해(the scientific world-conception)’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cf. 고인석 (2010), 59쪽, 14번 각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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