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History of Analytic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형이상학

Soyo_Kim 2024. 11. 8. 02:29

2023.12.21 - [Research/Publications] -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김현균.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비판철학 : 스테니우스의 칸트적 해석에 관한 비판적 고찰」. 건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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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석사논문 제3장 제1절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형이상학

이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개념이 (1) 심리주의의 견해와 (2) 러셀의 견해를 넘어 (3) 사변적 형이상학에 조응하는 지점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는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종류의 사변적 형이상학과 그 방법론을 받아들였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비록 칸트가 구분했던 독단적 형이상학과 순수이성의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을 모두 비판하지만(그리하여 모든 비합법적인 철학적 사변을 통틀어 형이상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궁극적 목표와 목표에 이르는 방법의 측면에서 칸트가 제시했던 경험의 형이상학과 유사한 독자적인 형이상학의 체계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KrV, A 840-842/B 868-870; Glock (1997), p. 287 참조).

그런데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칸트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동시에 칸트와 유사한 방법론을 이용한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적 사변이 무의미한 명제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형이상학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근거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 명제들의 무의미함과 별개로 형이상학적 진리들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첫째, 우리는 앞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논리학과 형이상학으로 구분했으며 전자를 후자의 토대로 보았다는 것, 또한 191682일에 이르러 논리의 기초로부터 세계의 본질까지 자신의 작업을 확장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중 후자의 단상에서 그가 세계의 본질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유아론의 주체에 관한 진리와 더불어 논고의 최후반부 논의를 이루는 선과 악, 의지, 그리고 윤리에 관한 진리들이다 (NB, 79/411쪽 이하 참조). 따라서 만약 그가 실증주의적 해석의 이해처럼 형이상학을 원천적으로 거부했다면,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이 논고에서 여전히 제시되고 있는 까닭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리를 토대로 하는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을 1913년 이후 포기했거나 비판했다는 명시적인 근거는 없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와 그 이전의 단상들을 통틀어 형이상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논리를 토대로 하는 형이상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형이상학을 자연 과학의 과제인 세계의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본성에 관한 탐구와 구분되는 세계의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본성에 관한 탐구로, 또한 전자의 탐구가 전제해야만 하는 세계의 조건들에 관한 탐구로 이해한다면, 위의 진리들을 모두 형이상학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그리 무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Hacker (2017), p. 209 참조).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들은 경험에 의해 알려질 수 없고,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성립하며, 세계와 그 세계의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본성이 전제하고 있는 조건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은 일기에서 주체가 세계의 실존의 조건이며 윤리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조건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NB, 77, 79/401, 411쪽 참조). 주체, 윤리, 그리고 논리에 관한 진리들은 한편으로, 명제에 의해 기술될 수 있는 경험적 지식과 달리 어떤 명제에 의해서도 기술될 수 없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진리들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 안의 우연적 사실들과 달리 모든 가능한 세계의 전제 조건들에 관한 진리라는 점에서 필연적이다.

둘째, 우리는 형이상학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진리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무의미한 명제이며, 후자는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이다. 논고에 따르면 명제는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명제에 의해 말해지는 것은 사정이 그러하다는 것(daß es sich so verhält)’이다 (TLP, 4.022). 또한, 명제는 현실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 주며,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사정이 어떠한지(wie es sich verhält)’를 보여 준다 (TLP, 4.022, 4,121). 이외에도 논고에서는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제시된다. 예컨대,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반복들이라는 것은 언어와 세계의 형식적(논리적) 속성들을 보여 준다. ‘밝은 푸른색은 어두운 푸른색보다 더 밝다.’와 같은 대상들과 사태들의 내적 속성들과 관계들의 존립은 명제들 안에서 드러난다(zeigt sich) (TLP, 4.122, 4.123; Hacker (2000), p. 354 참조). 어떤 것이 이러저러한 유형에 속해 있다는 것은 대상의 그 기호 자체에서 드러나며, 경험적 실재의 한계는 요소 명제들의 총체 안에서 드러난다 (TLP, 4.126, 5.5561). 자연 과학의 법칙, 유아론이 뜻하는(meint) , 언표될 수 없는 것이자 신비로운 것으로서의 윤리는 모두 드러난다 (TLP, 5.62, 6.36, 6.421, 6.522; Hacker (2000), pp. 354-355 참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형식이 잘 갖춰진 명제에 의해 보이거나 드러나는 것인 반면, 형이상학적 명제는 바로 그 보일 수만 있는 것을 우리가 말하고자 시도할 때 생기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형이상학적 명제의 사용은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기인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명제의 구성 요소들에는 실제로 의미(Bedeutung)가 부여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의미를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TLP, 5.4733). 따라서 형이상학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진리는 다르다. 전자는 언어적 차원의 무의미인 반면, 후자는 언어에 의해 표현될 수 없는 세계에 관한 통찰이다.

셋째, 에이어가 논고를 반-형이상학적 저작으로 독해한 근거였던 6.53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그는 거기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는 형식적 개념을 고유한 개념처럼 사용하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무의미한 사이비 명제들이라는 주장의 필연적 귀결이다. 또한 자명하게,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형식적 개념들을 고유한 개념들처럼 사용하는 여러 명제를 제시한다. , 그는 대상이나 사실과 같은 낱말들이 형식적 개념들을 지칭하는 낱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TLP, 4.1272), 바로 이 개념들을 고유한 개념처럼 사용하는 무의미한 명제들을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전달하기 위해 제시한다. 논고에 따르면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닌 사실들의 총체이며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를 형성한다 (TLP, 1.1, 2.021). 또한, 유아론의 주체는 형이상학적 주체이자 세계의 한계이다 (TLP, 5.641). 이러한 진술들은 모두 형이상학적 명제에 속하며 논고의 논의 대부분을 이룬다. 따라서 형언 불가능성 해석은 논고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를 형성한다.’, ‘유아론의 주체는 세계의 한계이다.’ )이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세계가 사실들의 총체라는 것, 대상들이 세계의 실체를 형성한다는 것, 유아론의 주체가 세계의 한계라는 것 등)은 형식이 잘 갖춰진 명제에 의해 보이거나 드러난다고 주장한다.[각주:1] 형언 불가능성 해석의 관점에서, 실증주의적 해석은 형이상학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진리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반면, “논고의 혁신은 논리학의 필연적 진리들이 뜻을 결여하며(senseless), 다른 모든 추정상의 필연적 진리들은 말해질 수 없되 오직 보일 수만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는 데에 있다” (Hacker (2000), p. 370). 해커는 이러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자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것[『논고』]의 주제는 언어와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세계의 대물적(de re) 필연성들이다. 이에 더해, 그것이 이르고자 하는 진리들은 선험종합적이다. 그 진리들은 분석적이지 않다: (칸트가 말하듯이) 술어가 주어 개념에 포함된 것이 아니며, (프레게가 말하듯이) 명시적 정의들과 논리 법칙에 의해 참인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세계와 연관된 실체적 진리들이라는 점에서(substantive truths concerning the world)-종합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경험 독립적으로 알려진다는 점에서-선험적이다. 그것들은 이성적 논증(rational argument)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지, 경험적 관찰과 가설-형성, 그리고 실험적 확인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Hacker (2017), p. 209.[각주:2]

 

따라서 우리가 말하기/보이기의 구분을 논고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 중 하나로 받아들인다면,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진리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1. 물론, 형언 불가능성 해석의 주장은 단호한 해석으로부터 도대체 무의미한 진술들이 어떻게 그런[말할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진리들을 전달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설령 그럴 순 있다 치더라도 그렇다면 무의미한 진술들과 일반 진술들간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강진호 (2007), 130.)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비판은 형언 불가능성 해석에 대한 일반적 비판으로 분명 유효하지만, 적어도 본고의 논의 전개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절의 목표는 칸트적 해석이 형언 불가능성 해석의 형성 과정에서 그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었음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호한 해석의 비판은 두 해석이 공유하는 근본 전제가 건전하냐는 물음으로,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본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두 해석을 위의 비판으로부터 옹호하는 작업은 독립된 연구를 통해 수행될 것이다. [본문으로]
  2. 인용문에서 해커가 논고의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세계의 대물적 필연성들로 간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논고에 따르면,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직 논리적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TLP, 6.375.) 그런데 이 명제는 논고의 형이상학적 진리들이 필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우리의 앞선 주장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커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필연성이 논리적 필연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고에 대한 오독인데, 왜냐하면 결국 논고의 명제들 대부분은 그 자체로 현실(과 모든 가능한 세계)의 본성과 본질에 관한 비-우연적 진리들, 형이상학적 필연성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명제들이 사이비-명제들이라 주장했다. 엄격히 말해서, 그것들은 모두 말 그대로 무의미하다. 따라서 모든 표현 가능한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이다. 형이상학적 필연성은 형언할 수 없으며, 그러나 [] 경험적 명제들에 의해 보인다.”(Hacker (2021), p. 51.) 요컨대, 우리는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대언적(de dicto) 필연성을 표현하는 명제로, , ‘필연적으로,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지만, ‘윤리적인 것은 세계의 밖에 있어야만 한다.’는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해커에 따르면 우리는 이 명제를 대물적(de re) 필연성을 표현하려 시도하는 무의미한 명제로, , ‘윤리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밖에 있어야만 한다.’로 해석해야 한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로는 : 김현균, 김도식 (2021), 370-374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