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경. (2013). 북한이탈주민의 월경과 북·중 경계지역: ʻ감각ʼ되는 ʻ장소ʼ와 북한이탈여성의 ʻ젠더ʼ화된 장소 감각. 한국사회학, 47(1), 221-253.
Sung Kyung Kim (2013). North Koreansʼ Border Crossing and North Korea-China Borderland: ʻSensed Placeʼ and the ʻGenderedʼ Sense of Place, Korean Journal of Sociology, 47(1), 221-253.
1. 문제의식
북한에 대한 이해부족 + 탈북자의 극한의 상황 = 북한 주민 및 탈북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초래함
대다수의 북한이탈주민 관련 연구
"북한주민의 월경을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강압된 이주로 정의"
북한주민: "독재자에게 일방적으로 세뇌된 수동적인 존재", "최악의 경제 상황에 놓인 피해자", "인권 탄압의 정치적 희생자"로 암묵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북한주민을 북한정권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이데올로기적 존재(ideological dupe)로 상정함으로써 북한은 균질화된 공간이고, 북한주민은 이와 같은 균질화된 공간에 위치된 수동적이면서도 동일한 전체(passivehomogenous entity)로 이해" [191]
이와 같은 기존의 연구의 틀로는 많은 수의 북한이탈주민이 경제 위기 시 중국의 경계지역으로 월경한 후 단기간 동안 체류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는 점, 경계지역 출신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조선족 커뮤니티와 교류를 해온 함경북도 지역의 주민이 주로 월경을 반복하거나 중국으로 이주하였다는 점,그리고 아직도 상당수의 북한이탈주민이 남한으로의 이주보다는 중국에 정주하고 있다는 점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본 논문은 북한이탈주민의 이주를 단순히 북한 독재정권의 문제나 경제적 이유라고 한정짓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문화적 시각으로 북⋅중 경계지역이라는 공간을 주목한다.다른 말로 하면 법적 신분을 보장 받지 못하는 중국내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북한이탈주민이 아직도 북⋅중 경계지역에 정주하는 이유는 경계지역이라는 ‘공간’이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체성의 주요 한 ‘장소’로 작동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북⋅중 경계지역은 중국과 북한의 정치적 권력의 중심부와는 지리적⋅사회적으로 변방에 속하는 지역이다.이 때문에 두 국가의 공식적 관계나 영토로 분할되는 경계가 일상의 차원에서는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았고,문화와 언어를 공유했던 경계지역의 정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이 지역만의 커뮤니티 를 형성하고 서로 밀접하게 협력하고 교류해왔다 [191]
북한을 철저하게 닫힌 사회가 아닌 끊임없는 교류가 발생하고 있는 공간(spaces of flow)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단, 지금까지의 교류는 공식적이고 국가적 차원이 아닌 주민들의 일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
"북한주민은 중국/러시아와 강 하나를 두고 맞닿아 있는 경계지역에서 외부 세계와 끊임없는 교류와 소통을 지속해왔고,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확장된 이들 의 생활 세계는 이들이 경제난을 겪는 시기에 능동적으로 이주를 결정하게 하는 주요한 동인으로 작동 하였음" [192]
2. 북⋅중 경계지역: ‘일상의 공간(들)’ 혹은 ‘장소’
경계지역의 일상의 공간들은 자본이나 국가에 의해서 형성된 “주어진”개념적 공간에서 소외된 행위주 체들이 아래에서부터 만들어낸 “삶”의 공간이 된다 [193]
특히 북한의 독재 정권의 힘이 작동하는 공간과는 구별되는 북한주민이 살아가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삶의 공간은 경계 지역이라는 역사적/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중국의 조선족 커뮤니티와의 소통과 교류로 구성되는 공간이 되고,이 공간은 국가와는 다른 차원으로 작동하면서 행위 주체들의 일상을 가능하게 한다. 1990 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북한의 최악의 경제위기는 국가의 공간의 작동을 상당부분 약화시켰고,북한 정권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하에 각 지역별로 ‘자력갱생’할 것을 요구하면서 일반 북한주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구성하면서 위기를 타개하려고 한 점 등이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애기밭이라고 불리는 개인 텃밭을 가꾸는 것,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 중국에 살고 있는 친⋅인척 네트워크의 활성, 보따리 장수라고 불리는 밀수의 확대, 국가 권력과는 다른 차원 에서 이루어지는 뇌물과 인맥 등이 모두 일상의 차원에서 북한주민이라는 행위주체들이 만들어낸 공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3]
3. 북⋅중 경계지역이라는 감각되는 ‘장소'
호스트만(Horstmann)은 경계지역의 역동성을 강조하면서 이 지역을 구성하는 내러티브는 두 가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첫 번째는 국가와 국경이라는 정치적 주권이 작동하는 층위이고,두 번째는 경계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이다(Horstmann, 2002:7). 국경으로 나뉜 경계지역은 각 국가와의 유사성이나 문화적 유대감보다 경계지역만의 지역⋅문화적 동질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빈번하고,이 때문에 경계지역은 두 국가가 이웃으로 맞닿아 있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공통의 사회공간이며,이 공간은 이 경계지역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공통의 사람”들의 “공통의 장소”로 이해해야 한다(Baud and van Schendel, 1997:216; Brednikova and Voronkov, 2000). [195]
북⋅중 경계지역내 위와 같은 경계지역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은 북한의 함경북도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이르는 지역이다. 19세기 조선인들이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 지역은 근대의 국경이 구축된 이후에도 조선족과 북한 주민이 혈연, 언어, 민족,문화로 교류하고 연결되어 있는 경계지역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약 200만여 명에 달하는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힘입어 조선어와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두만강 이북으로 이주해온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함경북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함경북도 주민과는 혈연적 관계 및 일상적 교류를 계속해왔다(리흥국 외, 2010:14). 중국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70년대 초반에는 많은 수의 중국 조선족이 북한으로 넘어와 물건을 팔고 북한의 자연광물이나 식품을 구입해가는 방식으로 조선족과 북한 주민의 교류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었고, 이후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되자 많은 수의 북한 주민이 중국 조선족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확인된다(김성경, 2012). 즉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족과 함경북도 주민은 이들만의 일상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이는 동일 문화와 언어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동일문화지대로 작동하고 이로 인해 경제위기시기에 많은 수의 북한이탈주민이 감행한 월경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가를 등지고 ‘국경을 넘어’ 이주한 것으로 일반화하기 보다는 이들과 조선족이 오랫동안 구축한 일상의 공간의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5-196]
함경북도의 경우 지리학적으로 압록강보다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르지 않아 조선족과의 교류 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이었고,백두산 자락이 완만해지는 지역이어서 산새가 험하지 않아 거주민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지역이다.실제로 조선족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물건을 교환 하거나,어린 아이들의 경우 두만강에서 조선족과 수영을 한다든지,조선족 친척이 방문했던 경험이 있다든지,마을에 조선족 보따리 장사가 왔다거나,북한 주민이 중국으로 장사를 다닌다던지 등을 보는 것,듣는 것,느끼는 것 등을 감각하는 것은 이들의 생활세계를 경계지역이라는 이들만 의 특수한 일상의 장소로 지각하게 한다 [197-198]
J씨는 두만강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서 북한을 떠날 때까지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J씨가 결혼을 고민할 때 재산은 별로 없지만 중국을 드나들면서 장사를 했던 I씨(지금의 남편)와 결혼을 하면 적어도 가난하게 살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결혼하였다고 한다.그 만큼 중국을 드나들면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함경북도 지역에서는 꽤나 똑똑하고 날쌘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남편은 한번 나가면 한 달씩 소식이 없다가 중국에서 돈을 가져오거나 물품 등을 사왔다고 하였다. J씨는 북에서 지낼 때 ‘중기’라고 하는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은 모두다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었을 만큼 유복하게 지냈다.게다가 중국 조선족에게 시집을 가서 연길에 정착한 여동생이 음식이며 기타 생활용품을 보내 주기도 해서 이미 강 너머 공간에 대한 친밀감이 상당했다.동생이나 남편이 중국에 갔다 오는 편 에 고춧가루,젠치(향채가루)등을 가져다주면 그것으로 김치를 만들어 먹으면서 지냈고,중국의 물 품을 많이 쓴다는 이유로 동네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경제난이 가중되자 어머니와 언니도 중국으로 순차적으로 이주를 하였고,이 때문에 북에 남편과 아이만 의지하면서 혼자 지내 던 J씨는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월경할 계획을 세웠다.북한 측 경비대에는 뇌물을 주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혹시나 중국 공안에 잡힐까 걱정했었다.하지만 강을 넘어가 자마자 어머니가 보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무사히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보면 저기. 중국이 저기 정도 밖에 안되요. 저기 불빛 보이는 곳 만큼이요. 그렇게 가까워요. 여기는 전기도 없어서 깜깜하지만 저쪽 저렇게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거든요. 중국이 잘살기 시작하면 서 그쪽은 하루하루 변하는 게 보였어요....거기서 뭐라도 있으면 폭죽이 터지고 그러는데, 다 보이거든 요. 그럼 우리들 다 두만강변에 나가서 그 폭죽 보고 좋다고 뛰어다니고 그러면서 살았지요’(참여관찰 사례 J씨, 전언). [198]
반면에 경계지역이라는 문화적 배경이나 자원과 거리가 있었던 사례들의 이주의 경험은 감각되는 경계지역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한다.또 다른 사례 K씨는 군인으로 복무하던 중 에 남한 쪽 친척들에게 연락을 한 것이 발각되어 처벌 받을 위기에 처하자 월경을 하였다.경계지 역에서 살아본 경험이나 중국을 감각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 았다고 하였다.
‘일단 중국쪽으로 나가려면 두만강 강가로 가야 할 것 같아서 군대에서 나와서 그쪽으로 가있었어. 그 런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거야. 그래서 일주일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강가에 그냥 앉아 있었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군복을 입고 그쪽에 앉아 있으니까 경비대들이 이상하게 생각해 서 잡으러 왔더라고. 그래서 잡혔는데, 그때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고.[...중략...] 거기서 도망치고 나서는 도무지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밤에 강을 넘었지(인터뷰 사례 W씨)’
중국으로 넘어온 W씨는 중국에서 머무르지 않고,곧바로 남한의 친척들에게 연락을 하였고 부 유했던 친척의 도움으로 가짜 여권을 만들어 남한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W씨는 중국에 머무르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북한에 거주하거나 그것이 어렵게 되었을 때는 남한으로의 이 주만을 고려하였다.북⋅중 경계지역이 낯설었던 W씨에게 있어서 강을 넘는다는 것은 곧 남한으로 의 이주를 의미하는 것이었고,이 때문에 경계지역에서 오랫동안 망설였음을 알 수 있다. [199-200]
4. 젠더화된 북⋅중 경계지역
한편 북한이탈주민의 이주의 또 다른 특징은 약 70%가 넘는 여성의 비율이다.배고픔이나 정치 적 이유로 대량 탈북의 동인을 일반화 할 경우 과반이 훌쩍 넘는 북한여성의 비율을 설명하기 어렵고,이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의 젠더적 특성을 밝히는 것은 이들의 이주의 성격을 기존의 시각과 다른 각도로 조명하는데 중요하다. 아래 표에서 설명하듯이 탈북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기 (1948-98)에는 여성 탈북자의 비율은 12.2%에 머물렀다.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으로 탈북한 사람들 은 대부분 남성 군인이나 정부 관료였고,이와 같은 성비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인 대량 탈북 시기까지 지속되었다.하지만 98년을 기점으로 탈북 여성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2002년에는 과반수를 넘긴 이후 70%를 훌쩍 넘겼다. 이를 볼 때 북한이탈주민의 이주는 젠더화되 었고,이들이 처음으로 정주하는 공간인 북⋅중 경계지역 또한 젠더화된 관계의 공간/장소 틀 안에 서 재규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즉 대다수의 탈북자가 여성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 지 사회/문화/경제적 요소들이 존재할 것이고,이 요소들이 북⋅중 경계지역이라는 공간내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200]
98 (~12%), 01 (46%), 02 (55%), 03~05 (60%대), 06-11 (70%대), 07-08년 78%였음.
북한주민의 북⋅중 경계지역내 이주는 중국 측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은 1990년대 이전까지 각 지역의 거주민 이동을 정책적으로 제한하였고 이 때문에 97%의 조선족이 동북3성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권태환&박광성, 2007:538).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정주하였던 조선 족은 그 만큼 북한쪽의 주민들과 계속적인 교류와 연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하지만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양국간의 경제교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조선족과 한국인 의 이동이 늘어나기 시작한다.2001년에 20여만 명이었던 남한 이주 조선족의 수는 2010년에는 약 43만 여 명으로 두 배 넘게 늘어났고,2011년에는 약 49만여 명의 조선족이 남한 사회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 난다.8)조선족이 남한으로 경제이주를 떠난 후 그 빈자리로 인해 북한이탈주민이 중국내로 이주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특히 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화된 조선족의 남한 이주는 글로벌 경제이주의 특징인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의 성격을 보여준다.남 한 사회의 서비스 산업의 확대와 남한 여성의 사회진출로 가사도우미,보모,간병인등의 수요 증가와 여성의 결혼 기피로 인한 결혼 이주자 증가 등의 이유로 남성 조선족에 비해 더 많은 여성 조선족이 남한으로 이주를 하였다(이혜경 외, 2006: 259;Sassen, 1991)
남한으로 이주한 여성의 자리를 메운 것은 북한에서 이주해온 북한여성이었다.이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최소한 10만에서 많게는 30만 정도까지 중국내 탈북자를 예상 했을 때 이들 중 과반수가 넘는 북한 여성이 남한으로 떠난 조선족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남한 여성들이 기피하는 ‘여성’의 직업을 조선족 여성이 채웠다면,그 빈자리를 더 값싸고 어떤 부당한 대우도 감당할 수 있는 불법적 지위에 있는 여성,즉 북한 여성들이 채우고 있는 형국이다.글로벌 경제 시스템내의 불평등의 구조가 작동하는 ‘재생산(노동)의 국제분업’이 북한 여성의 이주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Sassen, 1991;이혜경, 2006).
북한여성들은 국경을 넘어 이주하여 정착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중국내 친척의 도움을 받는다거나, 식량을 구한다거나,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단기적 이동을 목적으로 한다.경계지역으로 묶여있었 던 중국 측 조선족 커뮤니티와 북한 주민들은 ‘강을 두고 왕래하는 이웃마을과 같았기 때문에 국경선을 넘는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국가인권위원회, 2009:69).중국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 사회의 도시화와 남한으로의 이주가 본격화 되고,이로 인한 조선족 사회의 성비 불균형은 북한여성들 이 이주를 가능하게 하였다.북한여성들의 이주 사례는 농촌지역에 조선족이나 한족과 결혼하여 정착 하거나 도시에서 식당,마사지 숍,술집 등에서 싼 임금을 받는 일을 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그 중에서 농촌지역에 정착한 북한여성들은 돈을 벌러 한국이나 대도시로 이주한 조선족 여성을 대신해서 가부장제내의 ‘어머니’, ‘아내’, ‘며느리’등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가부장제와 글로벌 경제는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북한 소식을 전하는 <임진 강>에서는 중국 농촌지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북한여성 관련 기사를 여러 번 게재하였는데,북한여성이 정착하게 되면서 중국 농촌마을이 변해가는 것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201]
Care Drain
농촌에서 농사일과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가족을 꾸려가는 가부장제의 여성의 역할을 북한여성이 수행하고 있고,이는 쇄락해가는 북⋅중 경계지역내 농촌지역이 유지되는데 북한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이곳에서 북한여성은 ‘출산’, ‘가사노동’, ‘농사’, ‘부모공양’을 수행하는 주체가 된다.하지만 이들이 가부장제의 불평등한 관계(남편 혹은 시부모)를 순응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들의 불법적 신분에서 기인하는데, 수차례의 월경이나 북송을 경험한 여성일 경우 안 정적인 정주 공간을 찾게 되고, 농촌마을은 도시와 떨어져 있고 마을 공동체가 발달되어 이들에게 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의 북한여성이 인신매매를 통해 농촌지역에 결혼이주자로 팔려가는 경우도 많은데,그 과정에서 상당한 (성)폭력을 경험하기도 하고 인권 유린이 발생하기도 한다(이화진, 2011;이금순, 2006).즉 브로커들에게 매매되는 북한여성들은 ‘중국사회에서 최하위의 계층으로 매매되고 거래되는 성으로 취급되’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노출되 어 있다(조정아 외, 2010:341)11). [202]
Intersectionality
북한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K씨는 생전 해보지 않은 농사일을 하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마을에서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여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착경험으로 인해 K씨는 한국으로의 이주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데,그 만 큼 정착한 농촌마을을 자신이 살아가야 할 장소로 의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K씨가 정착한 농촌마을이 경계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북한과의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도 K씨가 현재 의 생활을 만족하는 주요한 요인이다.K씨는 북한에 딸을 남겨두고 왔는데, K씨를 대신해서 조선 족 남편이 여러 차례 딸을 방문하여 돈이나 필요한 물건 등을 전해주었다고 하였다.게다가 딸에게 전해준 핸드폰을 이용하여 정기적으로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농촌마을에 정주하면서 조선족 농부의 아내로 사는 것에 불만이 없다고 하였다. [202-203]
하지만 이와 같은 초국적 공간을 경험하는 북한주민 중 북한여성의 경험은 남성과는 상당한 거 리가 있다.북한 남성들은 주로 단순 노무 등의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면,북한 여성들은 유흥업소 나 성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흔하다.가령 청도의 경우 300여개에 이르는 조선족 대상 직업 소개소에서는 구직자를 “남자”, “아줌마”, “아가씨”로 구분한다.남자들은 고용의 기회가 적지만 여성의 경우 “아줌마”는 식당이나 주방에서 일하는 직업으로, “아가씨”의 경우에는 서비스업종 중 유흥업과나 성관련 업종에 종사한다(권태환&박광성, 2004:84).한국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의 이주에 따른 서비스 업종의 수요 증가는 그 만큼 많은 이주여성의 수요를 발생시켰고,더 큰 문제는 조선 족 여성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과 불법적 지위에 놓여 있는 북한여성에게 있어 직업 선택의 폭은 그 만큼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식당에서 일을 한다는 것으로 알고 월경한 북한여성이 성매매 산업에 넘겨진 사례,북한에서부터 ‘팔려가는 것을’알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강을 넘는 사 례,농사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해 도시로 도망친 이후 유사 성매매를 하게 된 사례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매매 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국가인권위원회, 2009)15). ‘몸을 파는 일’을 하는 북한여성은 탈북주민들 사이에서 이미 새로운 사실이 아닌데,중국에서 상당기간 머물렀던 여 성의 경우 중국인(조선족 혹은 한족)과 결혼 생활을 했거나,서비스 업종에서 일을 한 것으로 이해 하고 있다.
‘그 아이는 중국에서 결혼했어요?...[중략]...아무래도 중국에서 그런 곳(성매매 산업)에서 일한 것 같은 데요. 북한 여자들 중에 중국에서 결혼했거나 아니면 애를 낳았거나 하지 않으면 정말 다 몸 판거에요. 내 하나원에 있을때도 어쩜 그렇게 괜찮고 얼굴도 곱고 그런애가 하나 있었는데 난 정말 그 애가 그럴 꺼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요. 워낙 참해서. 그런데 결혼도 안하고 애도 없고 친척집에 있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다 아니더라고. 그러고 살았던 거에요.(참여관찰 사례 J씨의 전언)’
가난하면서 불법적 신분인 북한 여성들이 중국 쪽 경계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이렇듯 글로벌 경제내에서 소외된 하류계층의 남성들과 결혼하여 가부장제 내에서 최소한의 안정감을 구 축하거나,초국적 민족 경제의 확장의 일환으로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 기업과 자영업자들,그리고 도시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만들어낸 초국적 민족 공간내에서 서비스 산업 특히 유사 성매매 산업 에 종사하는 것이다.북한 여성의 경험과 신체를 통해 구성되는 경계지역은 남성의 경계지역과는 구별되는 것이고,공간내에서 북한여성의 위치는 ‘어머니’,‘아내’,‘며느리’로 살아가거나,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경제력 있는 남성의 성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만큼 북한여성이 경험하고 신체화하는 경계지역은 젠더화되어 있고,북한여성은 중국과 북한의 사회내에서 한계 지 워진 여성의 자리에 일방적으로 위치되는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북한여성의 경계지역 장소 감각은 가부장제 관계의 틀이나 성적 대상화된 관계들을 통해 구축될 가능성이 높고,다양한 사회관계의 흐름으로 구성된 경계지역에서 그들은 가장 소외된 소수자이며 공간내 권력관계의 최하위층에 놓 여있다.다시 말해 북한여성들이 감각하고 신체화하는 경계지역이라는 장소는 불균등하고, 혼란스럽고, 착취구조가 작동하는 불평등한 공간이다. [204-205]
탈북민으로서의 억압: 경제적, 법적 불안정성 + 여성으로서의 억압: Care drain, 돌봄 노동의 전담, 가부장제 관계: 어머니, 아내,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여겨짐, 성적 대상화된 관계 (성노동자)
5. 결론
이와 같은 논리로는 북한이 탈주민 중 많은 수가 불법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중국내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대다수의 북한이탈 주민이 경계지역 중 함경북도 출신이라는 점,상당수의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으로의 재입국을 반복 하고 있다는 점 등을 설명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본 논문은 북한이탈주민의 월경이 즉자적이거나 단일한 원인으로 인한 이주가 아닌,오랫동안 일상에서 구축 된 경계지역이라는 공간과 문화적 자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남한입국 북한이탈주민 중 약 70%에 이르는 함경북도 출신의 탈북자들은 북⋅중 경계지역을 국경이라는 경계로 구분되고 구획 화된 공간으로 지각하기 보다는 국경을 넘어 조선족 사회와 함께 경계지역을 가로지르는 커뮤니티 를 구축하고 있었고,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다양한 교류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큰 고민 없이 월경을 감행하였다. [205]
특히 경험되고감각되는 북⋅중 경계지역은 단순히 일상에서 소통과 교류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가능성의 공간인 동시에 그 흐름의 구조에서 소외된 몇몇에게는 불평등,폭력 그리고 착취가 가능한 공간이 된다.다시 말해 북⋅중 경계지역의 커뮤니티는 북한여성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며 이들이 일상에서 경험하고 감각하여 친밀함을 구성하는 장소이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가부장제의 여성 혹 은 성적 대상으로의 여성의 역할만을 강요하는 불평등한 장소이다.특히 2000년대 이후 중국과 한 국의 경제교류가 급속도로 확장되고 조선족의 남한으로 이주와 한국인의 중국으로 이주가 빈번하 게 교차되는 상황에서 북한여성은 한국으로 혹은 한국기업을 따라 중국 대도시로 돈 벌러 간 조선 족 여성의 자리를 대신하거나,한국인과 조선족이 만들어낸 중국내 초국적 민족공간에서 한국인과 조선족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업종(유사 성매매업)으로 흘러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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