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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영 (2013) (탈)분단과 국제이주의 행위자 네트워크: ‘여행하는’ 탈북 난민들의 삶과 인권에 대한 사례연구

Soyo_Kim 2024. 11. 23. 00:53

이희영. (2013). (탈)분단과 국제이주의 행위자 네트워크: ‘여행하는’ 탈북 난민들의 삶과 인권에 대한 사례연구. 북한연구학회보, 17(1), 355-393.

Yi, Hee Young. (2013). (Post)Division and Actor-Network of International Migration-Case Study on the Life and Human Rights of ‘Traveling’ North Korean Refugees- North Korean Studies Review, 17(1), 355-393.

 

1. 서론

이 글은 ‘탈북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상식에 대해 질문하면서 시작되었다. ‘탈북자’ 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탈북 과정에서 그들이 경험한 ‘인권침해의 사실’과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 정도’에 고정되어있다.필자의 초기 연구 또한 이 지점에서 시작되 었다.그러나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생애 체험들은 인권 침해의 피해자 혹은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북한주민이라는 틀 속으로 환원되지 않았다.이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인정투쟁을 수행하며, 분단장치의 안팎에서 삶을 기획하는 개인들이었다. [356]

‘탈남(脫南)’현상: 북한 을 이탈하여 다양한 경로로 남한으로 입국한 후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했던 북한주 민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남한을 떠나 제4,제5국으로 이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356]

2012 년 12월 현재 남한사회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은 2만5천여 명이다. [356]

해외 체류 탈북난민은 영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서구사회와 태국 등지에 1500여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됨. 미국 LA지역에 60-7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뉴욕 시카코 등의 한인커뮤니티가 형성된 곳에 흩어져 있음. 영국 출입국관리사무소 추산 영국 거주 북한 난민이 대략 850여명이며 캐나다 거주 북한 주민도 1,200여 명에 이른다. [356]

북한의 식량난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북한 국경을 넘었던 북한 주민들이 이어지는 국제 이주를 선택하는 배경에는 한국사회 내에서의 차별이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이주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 도식에 의하면 탈북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직,간접적인 차별과 배제가 탈남 현상의 밀어내는 힘 (push)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보장하 는 서/북유럽 국가들의 복지제도가 이들을 끌어당기는 힘(pull)이 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정착한 국가를 버리고 사선을 넘어 재이주를 시도하는 난민으로서 의 삶이 ‘물질적으로 잘 살기위한 시도’로만 환원될 수 있을까? [356-357]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 혹은 조국이었던 ‘북한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새로운 국적과 물질적 혜택을 준 ‘대한민국을 배신한 자들’이라는 주변의 이중적 질타와 낙인적 호명 [357]

 

2. 이론적 논의와 연구방법: ‘벌거벗은 생명’과 행위자-네트워크

1990년대 중반 식량난을 피해 월경하기 시작한 탈북자들이 중국 또는 제3, 제4국으로 재이주를 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의 삶에 접근할수록 식량만을 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주권의 ‘정당화된 폭력’이 집중된 국경을 오가면서 이들은 수시로 무(無)권력 의 상황을 체험하게 된다.국민이 아니면서 난민도 될 수 없는 생명체로서 무차별의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358]

아렌트는 근대사회의 개인이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할 때, 출생과 동시에 자연적 권리로 호명된 ‘인권’을 상실하게 되는 존재임을 간파하였다.즉 18세기에 양도할 수 없는 자연적 권리로 선언된 인권이 20세기 국민주권에 의해 보호받지 못할 때 한낱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따라서 근대국가의 현실에서 개인은 국적을 가진 국민인 한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59]

인권과 분단의 피해자라는 관점을 넘어서서 탈북이주민들을 사유한다는 것은 인권을 가진 주체를 국가-국적-국민의 틀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남한과 북한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체제의 틀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다. 식량권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북한, 북한보다는 낫지만 결국 사회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남한을 떠나서 좀 더 나은 복지국가인 북유럽으로 이주하는 북한 주민들을 당연하게 보는 목적-행위론적 사유를 중단하고, 이러한 사태가 갖는 의미를 새롭게 읽어보는 것이다. [361]

 

3.  사례 재구성: 두만강을 건너 본 사람은 어디든지 간다

여기서 두만강을 건너온 북한 여성들을 맞이하는 중국 쪽 뿌로커와 연철 이네,그리고 그 여동생들은 두만강 주변 국경지역에 살던 주민들로 도강하는 북한 여성들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부로커가 된 사람들로 짐작된다. 우연히 찾아온 북한 여성들에게 단기간의 거처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장기간 책임질 수 없는 중국인들 에게 인신매매 연결망이 부담을 더는 대안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불법으로 중국에 온 북한주민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이들을 숨겨주다가 발각될 경우 자신들이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인신매매 연결망의 동맹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어디까지가 단순 정보제공자이고 어디서부터 전문적인 인신매매 조직과 연결된 부로커인 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슬처럼 연결된 부로커 조직은 국가 영토의 배타적 지 배,즉 법적 폭력을 매개로 형성된 집단이다. 합법적인 절차 없이 국경을 통과하고자 하는 개인을 중개하며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비공식 조직’이다. 다양한 형태의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된 이 조직은 인종, 언어, 경제력, 지리적 인지, 젠더적 위계가 적나 라하게 작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국민국가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과 비인간의 이동을 매개로 이익을 추구하는 이 부로커 조직이야말로 국가 간 격차와 단절이라고 하는 구조와 공생하는 집단인 것이다. [365]

두만강을 건너 온 북한 주민들은 중국사회에서 시민권은 물론 아무런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위치에서 생활하게 된다.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북한 정부와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이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오래된 사회주의 ‘형제국가’로서의 동맹뿐만 아니라,미국과 경쟁하며 동북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은 스스로 협약 당사국인 국제난민법 및 국제인권조약 등의 이행보 다 북한 정부의 ‘탈북자 북송 요청’에 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중국은 자신이 당사국으로 되어 있는 5개 인권조약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이행감독장치에 대한 비준을 하지 않음으로써 국제인권 통보 혹은 진정 제도에 따른 의무 이행 요청을 원천봉쇄하는 정책을 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권으로 선언된 인권보장은 개별 국가의 정책에 의해 구체화되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다.탈북자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의 태도가 구체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중국사회의 탈북자들은 비(比) 국민이자 비(比)난민,즉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불법월경자에 대한 북한당국의 처벌 때문에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면서, 현재 체류국인 중국에서는 언제든지 누군가의 모의나 밀고로 매매되거나,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될지 모르는 처지인 것이다. 식량난을 피하기 위해 불법 월경한 사실로 인해 국적국인 북한에 돌아갈 경우 정신적,신체적 ‘속죄(처벌)’를 감수 하거나, 아니면 중국 땅에서 발생할 유형,무형의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366]

이처럼 박은주 씨는 자신과 가족의 질병과 사망을 연이어 경험하던 중 2005년 살길을 찾아 친척이 있는 중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생계를 위해 구술자는 국경 지역의 식당 주방에서 2년간 일하였다.앞의 1세대 탈북자인 김 순남,황금이 씨와 달리 박은주 씨는 북한에 있을 당시 이미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를 시청한 경험이 있었다.30)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적대감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 만 아니라,이미 ‘남한행’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박은주 씨가 한국행 선을 잡게 된 것은 같은 동네에 살던 북한 여성의 남편 이 자신의 아내를 데려가기 위해 연결한 ‘부로커’를 통해서였다(박은주 구술녹취록, 2012/7).먼저 한국으로 갔던 한 남자가 이미 다른 여자와 함께 살면서,중국에 남아 있던 본처와 다른 북한 여성들을 데려오고자 부로커를 연결한 것이다.이런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국경을 건너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온갖 종류의 자본과 상품이 거래되는 것을 경험한 탈북자 들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거래를 매개하는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즉 탈북자들은 ‘부로커 조직’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면서,동시에 스스로 부로커가 되 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370]


위의 텍스트에서 주목할 점은 구술자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을 ‘죽을 각오’로 선 택한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한 것은 무엇일 까?이들이 또 다시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오고자 했던 것은 중국에서 불법체류자 의 처지로 겪었던 ‘무권리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즉 더 이상 자신들을 ‘짐승처럼’ 학대,매매,밀고,체포,북송하지 않으며,가족이 함께 모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371]

 

4. (탈)분단 장치와 국제이주의 행위자 네트워크

위의 텍스트에서 구술자가 언급하는 ‘박정숙 씨와 젊은 부부’는 탈북 후 한국에서 살다가 2012년 갑자기 북한으로 돌아가 공개 기자회견을 한 사람들이다.구술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곳에 살던 탈북자가 북한으로 돌아갈 경우 북한 당국이 그 주변의 탈북자들에 대한 정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탈북자로 가장해서’남한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의 주변에 접근할 경우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게 될 뿐만 아니라,이로 인해 북한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정치적 위험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들은 적극적으로 개명을 하고 있다.다시 말해 한국 사회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분단장치가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으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과 가족들이 정치적 위험에 빠질 수 있 는 반면,새로 증식된 자기로 살아갈 수 있는 유럽의 국가들은 이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한국이 아닌 외국은 자신 들을 ‘조국을 배신한 자’들로 규정한 북한 당국과 화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다.결국 이들은 불법 월경을 계기로 북한사회와 연대하기를 거부하며,더 많은 인간적 권리를 가지고 살기위해 이주를 시도하는 ‘잡종적 이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381]


첫째,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오는 1차 이주의 과정은 북한의 식량난을 피하기 위 한 자구책 행위이며,단기간 내에 귀향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중국 체류 동안 이들은 한편으로 매매,학대,밀고,체포,구금 등 ‘비인간’의 경험에 직면한다. 다른 한편 중국 자본주의 사회의 실상을 경험하며,대한민국의 ‘탈북자 지원법’등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인지하게 된다.둘째,중국에서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게 되는 2차 이주의 과정은 1차 이주와 달리 목적의식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중국에서 경험한 무권리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애초에 원하지 않았으나 ‘대 한민국 국민’이 되기로 하고,갖은 위험이라는 속죄를 치르며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된다.43)셋째,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후 한국 사회 내에서의 분단장치로 인해 생명 의 위협을 느끼거나 신자유주의적 ‘생명정치’에 의한 차별을 겪으며, ‘새로운 삶’을 위해 유럽 등의 국가로 재이주를 시도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북한이주민들은 이 어지는 이주의 과정에서 국경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남한,북한,유럽 국 가의 서로 다른 제도 및 생활양식(각국의 생명정치 양식들)을 직접 겪으며,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세계시민적’시선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이런 관점에서 이들의 재이주를 추동하는 힘은 두만강을 건너본 ‘벌거벗은 생명’의 ‘충만한 삶’에 대한 열 망,혹은 인간으로서의 생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383-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