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Social & Political Phil

배영애 (2010) 제3장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 이후 여성의 역할과 의식 변화

Soyo_Kim 2024. 11. 22. 10:23

배영애. (2010). 제3장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 이후 여성의 역할과 의식 변화. 통일전략, 10(2), 93-188.

Bae,Young-Ae, A Study on the Change Women's Roles and Values after North Korea the Economic Crisis of the 1990s, Unification Stratrgy, 10(2), 93-188.

 

1. 서론

북한 당국은 여성이 노동에 참여시킴으로써 명시적으로 남녀평 등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지만,실제로는 가정에서의 역할을 더 강조함으로써 여성에 가정과 사회에서의 이중노동의 부담을 가중 시키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사회전반에 걸쳐 가부장적 가치관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북한 여성의 가치관은 북한 의 폐쇄적 사회구조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변화없이 정체되어 나 타났다.또한 여성들은 국가가 국민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회 주의의 특성과 수동적인 가치관을 지니게 되었다. [94] 
북한이 총체적 위기였던 1990년대 경제난 시기에 국가가 의식주 공급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의 생계를 일 정부분 책임져야 했던 것은 바로 여성이었다.북한 여성은 가족의 생계부양의 책임과 사회경제에서의 적극적 생산자로서 역할이 증 대되고 있다.또한 이런 상황에서 북한 여성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장마당이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었다.특히 중국의 상인들을 통한 외국 문물이 유입되면서 그들의 의식에 있어서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95]

 

2.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과 사회적 영향

북한의 경제위기

(1) 경제의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

(2) 무역규모의 위축과 외화부족의 심화

(3) 일반 주민들의 생활고

북한은 식량자급을 위해 전력을 다해 왔으나 절대농지의 부족, 영농방식의 비효율성,비료 및 영농자재의 부족,계속된 냉해 및 수해 등으로 주민들의 대다수가 굶주리고 있는 실정이다. 1990년 대 초반에는 400만톤 조금 넘는 수준을 유지해 왔으나 1993년부 터 연속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1995년 345만 톤으로 하락하 였다.이후 1990년까지 400만톤 미만을 유지하여 1990년대 중 반부터 주민 일부가 기아상태까지 가는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다. 북한의 공식적인 1인당 식량배급량 700g을 기준으로 볼 때,북한 인구에게 필요한 식량수요량은 대략 620-670만톤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400만톤 미만의 생산량은 해마다 200만톤 이상의 식량 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98]
계속되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체제이완 현상이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경제난이 주민들 사이에 체제부정 의식을 발생시키고 전반적인 사회통제 를 이완시키고 있다.식량난의 지속으로 인한 감량배급으로 생존 권마저 위협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은 농민시장이나 암시장 또는 농촌지역에 있는 친인척으로부터 부족한 식량을 조달 하고 있으며 불법 상행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또한 주민들은 식량구입과 장사를 위해 여러 지역을 이동하기도 하고 상품화할 수 있는 물건들을 절취하여 국경에서 식량 등으로 교환하기도 한 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가에 대한 불신과 개인주의적 경제행위 가 성장하게 되었는데,즉 암시장 및 지하경제의 발달,화폐에 대 한 가치 변화,개인소유주의,그리고 뇌물의 성행,국가 재산의 횡 령,절취의 일상화 등 의식변화와 일탈행위가 확산되었다. [99-100]

 

3. 경제난과 북한여성의 사회경제적 역할 변화

특히 가족 구성원들의 식생활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북한 여성들에게 식량난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막중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북한 여성들은 식량난 속에서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자녀들과 식구들의 식량을 해결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실제적인 생계부양자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가족부양의 주체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위치변동이 되었으나 남편들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 북한 여성은 더욱더 열악한 생활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02]

여성들은 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발병하는 펠라그라,결핵 등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102, 9번 각주]

전통적으로 북한에서 여성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적극적 사회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희생적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순종적 부인으로서의 역할 모두를 강요되고 있다. [...] 더욱이 1990년대 경제난이 겹치면서 북한여성의 이중노동에 대한 부담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기업소와 공장 가동률이 30%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남편들이 돈을 벌어오지 못하자, 부인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북한 여성들은 가족부양을 위해 직접 장마당에 나가 물건을 팔거나 또는 배낭을 메고 시골과 타지방으로 돌아다니면 장사를 하고 있다. 또한 북한 여성들은 심각한 식량 문제 때문에 산과 들을 돌아 다니거나 나아가 풀뿌리,나무껍질,들풀 등을 채취하고,산비탈을 개간하여 뙈기밭을 만들어 농작물을 경작해야 했다 [102]

여성들은 생계유지를 위해서 밤낮 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03]

주부는 새벽 3시 30분부터 4시에 일어나 서둘러야 한다. 출근이나 동원은 5-7시 사이에 해야 한다. 6월 20일까지는 농촌지원에 빠지면 정치적으로 걸고 들거나 감투를 쉬우니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야 한다. 남편들이 도와주는 집은 10%미만 이고 앉아서 투정질하고 까박을 붙이는 세대가 대부분이니 주부들은 더욱 속상하다. 직장 일을 한든 부양가족이든 이 기간 에는 다 같이 바쁜데 아침을 준비해서 식사를 하고 치우고 아이들을 학교나 유치원,탁아소까지 보내자면 눈코 뜰 새없다. 점심을 먹든지 마는지 들어와서는 오후 시장시간에 맞추어 장사하러 나갔다가 저녁 8시 반이 되어야 집에 온다.집에 가자 마자 강냉이 국수라도 해야 식사를 보장한다.설거지하고 빨래 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밤 11시가 된다 [104]

 

(1) 가내작업반

특히 경제난 이후 북한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의 강인한 생활력을 형성하게 하였으며,자생적인 단순 농업상품 거래가 아니라 수천 종류의 일상생활용품 거래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가내 작업반 때문이다. 가내작업반은 애초에 도시와 노동자구의 노동자,사무원의 부양 가족(전업주부)들로 구성되어 공장에서 원료,자재,반제품,폐설 물들을 가져다가 일상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생산단위로 출발하였다. 노동수단은 개인이 소유한 간단한 도구들이 대부분이나 공장에서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었다.노동형태는 반원들이 개별 가정 에서 일하거나 공동장소에서 함께 일하기도 하였다.노동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보수는 생산량에 따라 받는다.그리고 반원들은 공장,기업소의 재적종업원 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공식 노동부문에 속한다. [105]

1990년대 중반 경제난 이후 현재까지 북한에서는 가정을 중심으로 여성이 움직이면 먹고 살고 여성이 가만있으면 굶어 죽는다고 까지 한다. 이렇듯 경제난과 식량난 속에서 북한 여성이 남성 보다 적극적으로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경제적 이유는 북한 여성들이 각종 부업 및 가내 작업반을 통한 생산과 이 생산 품과 재원을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재투자하는 방법을 통해 식량 및 일상생활의 재원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106]

대개 가내작업반 에서 생산한 상품을 국가 상업망에서 수매할 때,생산자가 상품대 가의 60-90%를 가지고 나머지 10-40%는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지역과 시기,그리고 생산품의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평균적으론 생산자가 생산량에 따라 70-80%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고 국가에 20-30%를 납부하였다.이 과정에서 특히 재봉기술이나 생산능력이 뛰어난 여성들은 상당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 다.또한 가내 작업반과 그 생산품을 시장에서 거래하고,사적 재산을 늘리는 과정에서 형성된 다양한 협조와 연계망은 북한 하층 간부들의 온정주의와 비리구조와 맞물려 북한 여성들의 생존능력을 강화하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동시에 경제난 이후 북한의 ‘시장 사회화’의 기초가 되었다. [106-107]

 

(2) 시장 사회화의 주도자는 왜 북한 여성이었는가?

① 남성 노동자는 일감이 없어도 일단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107]

② 농민의 다수로 식량생산을 책임질 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의 생산품도 대부분 생필품으로 장마당 등에서 수요가 많은 것들이었다.북한 여성들은 농업생산을 주도하며 경공업과 지방산업,그리고 가내 작업반 노동을 통해 생필품을 만드는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또한 생필품을 만들기 위한 각종 원료와 자재가 있는 현장에서 노동을 하였다. [107]

③ 생산현장이나 기혼여성에게는 생산에서의 혁명성과 능동성을 요구 된다.이러한 혁명성과 능동성은 경제위기가 진행되면서, ‘억척스 러움’과 ‘대담성’으로 발전하였다.특히 기혼 여성들은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나들고 장사를 하는 과감성과 강인함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107-108]

④ 시장을 통한 이윤증대 원리를 터득한 북한 여성들은 생산품을 국가 상업망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장마당에서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 거나 판매하는 비율이 증대하였다 나아가 이들 중 자금력과 배포가 있는 여성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 상인과 사적 무역에 나섰다.특히 1990년대 경제난 이후 중국과의 거래는 쌀 이외에 소비용품과 공업생산품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108-109]

 

(3) 생계유지를 위한 성의 상품화

여성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방법 모색이 극히 어려워질 때 매춘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난 이후 북한 여성들 사이에는 생계유지를 위한 매춘이 성행했으며, 조직적으로 사업화된 여성 매춘도 성행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부모가 딸에게 또는 남편이 부인에게 매춘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으며,미성년의 어린 여자 아이들이 매춘에 나서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탈북자들의 증언하고 있다. [109]

매춘 여성이 북한 당국의 단속에 걸렸을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노동단련대에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수용되었다가 풀려나오는 것 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이할만한 것은 생계유지를 위해 주부가 매춘을 했을 경우,그 정상을 참작하여 수용을 면제해 주거나 수용 기간을 보다 단축시켜 주며 미혼여성이 매춘을 하였을지라도 그 신분이 확실하다면 수용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가족의 생계를 위한 매춘이 아닌,가정을 버리고 매춘 행위를 한 경우에는 최장기간 수용당하는 처벌을 내리고 있다. [110-111]

 

4. 경제난 이후 북한 여성의 의식 변화

(1) 가부장제의 약화

특히 북한 의 정치사상에는 그들이 그토록 지우고자 노력했던 가부장적 봉건 사상이 그대로 잔존하며,오히려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을 모호하고 책임진다면 자식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 를 섬겨야 한다는 온정적 가부장제가 수령과 인민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북한 주민들은 북한 당국 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적 가치관에 지배되어 자식과 부모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부부관계에서도 남편의 지배와 부인의 복종 을 당연시 여겼다.즉,국가의 가장인 수령이 인민을 책임지고 보 호한다는 명분 아래 인민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것처럼 한 가족의 가장인 남편이 가족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가족을 지배한다는 것이다.그리고 북한 당국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성 에게 가정에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철 저히 사상교육을 실시하였다. [112]

한편 경제난으로 인해 생계곤란이 발생하자 남편의 경우,공장 과 기업소가 가동되지 않는다고 해도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면에서 여성보다 자유스러운 측면이 많지 않고,장사를 하러 나간다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 적으로 장사하기를 기피하여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 그런데 여성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일을 나가면서 장사를 하러 돌 아다니던 중 날씨의 영향과 교통사정으로 며칠씩 차편이 연착되거 나 도중에 물건을 도둑맞은 경우,심지어 다른 남자를 집을 떠나는 경우 등 여러 이유로 장기간 집을 비우게 되자,이전처럼 여성이 살림을 도맡아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들도 집에서 가사를 도 울 수밖에 없었다.실제로 남성들은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할일 없 이 집에서 ‘멍멍이’31)처럼 집을 지키면서 노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따라서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미안한 마음에 아침에는 장사를 하러 나가는 부인을 시장에 데려다 주고,저녁에는 거둬서 같이 들어온다.또한 가끔 몇몇 개인 남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여자를 도와준다고 한다. [113-114]

한편 경제난 이후 여성들의 가족 부양책임 증대로 인해 발생하 기 시작한 여성 자아의식의 움직임은 가출,이혼,출산 및 육아기 피,독신 선호 등으로 반영되어 나타났다.가출은 기아의 고통과 과도한 노동,남편의 폭력 등으로 인해 나타난 수동적,비의도적 가출과 자신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가정을 떠나간 능동적,의도적 가출로 나타났다.33)이러한 여성들의 선택도 억눌려 있던 자아에 대한 의식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북한에서 부부간의 이 혼은 법적인 절차의 복잡성과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려는 왜곡 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거의 발생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경 제난 이후 남편의 외도와 무능함,가정폭력을 이유로 여성들의 이혼제기가 많아졌다고 한다. [114-115]

(2) 물질주의와 배금주의

물질주의와 배금주의 성향이 북한 사회 전반에 지배하게 되면서 북한 주민들은 돈을 모든 가치 중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특히 북한여성들은 장사를 통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장사를 하면서 자본주의를 체득하였다. 그 결과 북한 여성들 사이에의 물질주의 가치관이 확산되었다 [116]

2003년 이후 시장이 공식 적으로 허용되면서 장사를 매체로 한 물질주의 경향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어 소설과 기관지 등을 통해 여성의 비 도덕적 모습과 물질주의 경향을 부정적 인물로 그리면서 이러한 인물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이 급증하고 있는 실정이다.37)이 에 북한 당국은 『조선녀성』등의 기관지를 통해 물질주의와 개인 주의적 요소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검소’와 ‘절약’을 계속적으로 강조․반복하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차단하고자 하였다.장사를 통한 수입과 소비는 황색바람을 불게 하여 ‘사치’와 ‘향락’을 가져오 며,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는 당국의 말 을 신뢰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117]

북한 여성들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여성들의 배우자 선택기준 에 있어서도 나타났다.종전에는 당원이나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배우자가 인기였으나,최근에는 외화를 벌 수 있는 외교관이나 무역 회사 직원,선원 같이 외국에 많이 나가는 직업을 가진 남자나 외 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관련 직업과 요리사 등의 서비스업종 종사자들이 인기라고 한다.[117]

(3) 자유주의적 가치관으로 성(性)에 대한 인식 변화

심지어 1990년 이래 북한 젊은 여성들 사이에는 사랑과 결혼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풍조가 번지고 있고,혼전․혼외 임신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북한 당국의 통제에 의해 북한의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 연애가 허락되지 않으며,여학생은 결혼을 할 수 없다.또한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는데,따라서 대 부분의 연애는 공개되지 못하고 비밀리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문화는 연애에 대한 제한이 198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한 탈북자의 말에 의하면 대학 생활에서 연애 안하는 학생 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이와 같이 북한에는 1990년대부터 ‘자유연애’바람이 불고 있다.이제는 과거와 달리 부모가 반대 하면 집을 뛰쳐나가면서까지 사랑을 불태우는 청춘남녀도 적지 않다.이처럼 자유연애가 확산됨에 따라 연애결혼이 60%를 넘는다고 한다 [118-119]

또한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 여성들은 정조관념을 중요시 했으나 10년이 지난 이후 그들의 생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북 한 여성들은 장사를 하면서 자본주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 고,먹고 살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성을 살기위한 방편으로 여기 게 되었다. 배고픔에는 사상도 정조도 없었다.따라서 기존의 순결의식은 자연스레 약화되었고,성을 생계유지를 위한 도구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확산,심화되어 갔다.이와 같은 성의식의 변화는 경제난 이후 급증한 여성의 매춘,동거 내지 사실혼의 관계 등으로 반영되고 있다. [119-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