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도덕 형이상학 정초 (3) 제2절

Soyo_Kim 2019. 12. 12. 21:27

제2절 대중적 도덕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 이행

 

지금까지 우리가 의무 개념을 실천이성의 일상적 사용에서 끌어냈다고 해서 이 개념을 경험개념으로 다룬 것처럼 추정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거지에 관한 경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이 인정하듯 정당한 불평들과 마주치게 된다. 순수한 의무에서 행하려는 마음씨에 관해 그 어떠한 확실한 실례도 전혀 들 수 없어서 많은 것이 의무가 지시 명령하는 것에 합치하게 일어난다 해도, 이것이 본래 의무에서 일어났는지, 따라서 이것이 도덕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불평이 바로 그와 같은 경우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들에 이런 마음씨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세련된 자기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 철학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런 이유로 도덕성 개념이 정당함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인간 본성이 나약하고 순수하지 못한 것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물론 인간 본성은 이처럼 존경할 만한 이념을 자신의 수칙으로 삼을 만큼 충분히 고상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다. 그래서 인간 본성에 법칙을 수립하는 데 사용해야 할 이성을 단지 경향성들이 지닌 관심을-이들 관심이 개별적이든, 잘돼서 서로 최대한 조화를 이루든-돌보는 데만 사용할 뿐이다.

 

사실 대개 의무에 합치하는 행위의 준칙이 오로지 도덕적 근거와 자기 의무에 대한 표상에만 의거하는 단 한 번의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경험을 통해 완전히 확실하게 밝혀내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자신을 아무리 예리하게 살펴보아도 의무라는 도덕적 근거 말고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선한 행동을 하고 아주 큰 희생을 하도록 우리를 움직일 만한 힘을 충분히 가진 그 어떤 것도 도무지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이따금 있기 때문이다.(우리로 하여금 이러저러하게 선하게 행동하게 하고, 매우 큰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에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잇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의무가 도덕적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로부터 자기애라는 은밀한 충동이 의무의 이념인 척 가장해서 의무를 본래부터 결정하는 원인이 아니었다고 확실하게 추론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에 대해 우리는 감히 고상한 것처럼 가장된 기만적인 동인으로 기꺼이 흡족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하여 검토해보아도 우리는 이 은밀한 동기를 결코 완전히 간파해낼 수 없다. 도덕적 가치가 문제가 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는 행위가 아니라 보지 못하는 행위의 내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도덕성을 인간의 상상력이 자만에 빠져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것에 도움을 주는 길은 의무 개념들을 (사람들이 편리하여 나머지 개념들도 모두 그렇다고 기꺼이 시인하듯) 오직 경험에서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그들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애로 말미암아 우리 행위 대부분이 그래도 여전히 의무에 합치한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행위들이 의도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늘 두드러져 있는 '사랑하는[아끼는] 자기'와 마주친다. 사실 우리 행위의 의도가 기대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이지 빈번히 자기를 부정[희생/절제]하도록 요구하는 의무의 엄격한 지시명령이 아니다. (특히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한편으로는 경험을 하면서 기민해지고, 한편으로는 관찰을 하면서 날카로워진 판단력으로) 세상에서 또한 실제로 어떤 참된 덕을 만날 수 있을지 의심하기 위해 굳이 덕에 맞서는 적이 될 필요는 없다. 선을 강렬하게 소망하는 것이 곧 선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저 냉정한 관찰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의무에 관한 우리 이념에서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며 법칙에 대한 굳건한 존경을 우리 마음에 유지하도록 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명확한 확신뿐이다. 즉 그런 순수한 원천에서 생겨난 행위는 전혀 없다 해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이성이 모든 형상에서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무엇이 일어나야 할지 지시 명령한다는 점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험을 모든 것의 토대로 삼는 사람은 아마도 지금까지 세상에 하나의 실례도 존재한 적이 없던 행위가 실행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워할 수 있다 해도, 그럼에도 이 행위를 이성은 단호하게 지시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믿음직한 친구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해도, 그렇다고 우정에서 진정한 신의가 덜 필요할 수는 없다. 이 의무는 의무 일반으로, 모든 경험에 앞서 아프리오리한 근거를 통해 의지를 규정하는 이성의 이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도덕성이라는 개념에서 모든 진리성과 그 어떤 가능한 객관과 맺는 관계를 전부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면(즉 우리가 도덕성이라는 개념에서 이 개념이 전적으로 진리이고, 또한 이 개념이 가능한 대상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우리가 정말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 개념의 법칙은 의미가 너무나 폭넓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도 타당하며, 우연적인 조건들 아래서 예외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단연코 필연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다고 해보자. 그 경우 그 어떠한 경험도 그처럼 자명한 법칙들이 가능하다는 것만이라도 추론할 계기를 제공해줄 수 없음은 명백하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권리로 아마도 인간의 우연한 조건 아래서만 타당할 수 있는 것을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을 위한 보편적 수칙으로 무한히 존경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 의지를 결정하는 법칙이 단지 경험적일 뿐이고, 그래서 순수하지만 실천적 이성에서 완전히 아프리오리하게 기원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법칙을 이성적 존재자 일반의 의지를 결정하는 법칙으로 간주할 것이며, 또한 오직 이런 법칙인 한에서 그 법칙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간주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