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도덕 형이상학 정초 (1) 머리말

Soyo_Kim 2019. 12. 10. 19:45

임마누엘 칸트,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번역 김석수, 김종국, 한길사, 2019를 정리한 것이다.

 

머리말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 학문으로, 즉 자연학Physik, 윤리학Ethik, 논리학LogikLogik으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분류는 사태의 본성에 완전히 적합하다. 그래서 여기에 분류의 원리 정도만 덧붙이면 되지 달리 더 개선해야 할 점은 없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분류의 완전함을 확실히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하위 분류를 제대로 결정할 수 있다.

 

모든 인식은 질료적이거나 형식적이다. (즉 경험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그것의 형식을 담당한다.) 질료적 이성 인식은 어떤 한 객관Objekt(객관으로 번역된 Objekt는 라틴어 "ob...앞에"와 "iacio...던지다"가 결합된 "obicio, objic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Gegenstand와 구별되지 않는다. 칸트는 Objekt를 "그것의 개념에 주어진 직관의 다양이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 사용하며, Gegenstand를 "우리가 대상을 통해 촉발될 때, 이 대상이 표상능력에 미치는 결과는 감각이다. 감각을 통해 대상과 관계하는 직관은 경험적이라 한다. 경험적 직관의 규정되지 않은 대상은 현상이라 부른다"고 언급한다. 또한 Gegenstand는 "직관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자 지성을 통해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칸트도 이들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자주 사용한다. 칸트에게 Objekt는 주관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의식이 향해 있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을 고찰하는 반면, 형식적 이성 인식(즉 경험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인식)은 객관들(우리의감각을 촉발하는 원인들)의 차이는 고려하지 않고 오직 지성Verstand과 이성Vernunft 자체의 형식 그리고 사유Denken 일반의 보편적 규칙만 다룬다. 이 형식적 철학을 가르켜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글나 특정 대상들과 이것들이 따르는 법칙을 다루는 질료적(경험과 관계 맺으며, 경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철학은 또 다시 두 분야로 나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법칙이거나 자유법칙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학문은 자연학, 후자의 학문은 윤리학이라고 한다. 전자는 자연론으로도 후자는 도덕론(도덕으로 번역되는 Sitte는 sitte에 어원을 두고 있다. sitte는 mores, ethos와 더불어 관습, 풍습, 습속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칸트는 Sitte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즉 경험에서 유레하는 관습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선험적인 것에 기초한 당위의 원리로 사용한다.)으로도 명명된다.

 

논리학에는 어떤 경험적인 부분도 포함될 수 없다. 즉 논리학에는 사유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이 경험에서 가져온 근거에 의존하게 되는 부분이 포함될 수 없다. 논리학이 그런 부분을 포함하게 되면 그것은 논리학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지성이나 이성을 위한 규준, 이른바 모든 사유에 타당하면서도 동시에 입증되어야 하는 규준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자연철학과 도덕철학에는 각기 경험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철학은 경험 대상인 자연에 자신의 법칙을 규정해야 하지만, 도덕철학은 인간의 의지가 자연에 의해 영향을 받는 한에서 그 의지에 자신의 법칙을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모든 것이 일어날 때 따르게 되는 법칙이라면, 후자는 모든 것이 일어나야만 할 때 따르게 되는 법칙이다. 그렇지만 후자에서는 일어나야만 하는 것을 종종 일어나지 않게 하는 조건들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경험에 근거를 둔 모든 철학은 경험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단지 아프리오리한 원리에서만 학설을 이끌어내는 철학은 순수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철학이 순전히 형식적이기만 할 때 우리는 이를 논리학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철학이 지성의 특정 대상에 국한될 경우 우리는 이를 형이상학이라고 한다.(따라서 형이상학은 지성의 특정대상에 대한 아프리오리한 원리를 다루는 학문이다.) 

 

이런 방식을 거쳐 두 가지 형이상학에 관한 이념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즉 자연을 인식하는 데 있어 인식의 선험적 원리를 다루는) 자연형이상학과 (즉 도덕을 인식하는 데 있어 인식의 선험적 원리를 다루는) 도덕형이상학의 이념이다. 자연학에는 경험적인 부분이 있지만 이성적인 부분(초월철학의 이념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그 자신은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들을 다루는 부분)도 있다. 윤리학도 마찬가지다. 윤리학에서 경험적인 부분은 특히 실천적 인간학(이것은 응용윤리학, 즉 윤리적 법칙들을 개별 경험에 적용시키는 경우라 이해해야 할 것 같다.)이라고 하지만 이성적인 부분은 본래적 도덕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산업, 수공업, 기술은 분업을 통해 성장해왔다. 이것은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지 않고 각자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비추어 다른 일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정한 일만 함으로써 일을 최대한 완벽하고 더욱더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들이 이렇게 구별되지도 나뉘지도 않아서 각자가 모든 일을 다 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산업은 여전히 대단히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순수철학이 자신의 모든 부분에서 특수한 전문가가 필요한 지 묻는 것 또한 그 자체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중의 기호에 영합해 자기 자신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갖가지 비율로 경험적인 것을 이성적인 것과 뒤섞어 팔아먹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또 스스로 사유하는 자임을 자처하면서 이성적인 부분만 다루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일컫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할 수 있다. 즉 두 가지 일은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달라 아마도 각자에게 특별한 재능이 필요할 것 같고, 그래서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함께하면 단지 서투른 자가 되고 말 것 같아 두 가지를 동시에 처리하지 말라고 경고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학문 작업 전체를 위해서 좀더 나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도 역시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학문의 본성상 우리가 경험적인 부분을 이성적인 부분에서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 분리해내야 하고 본래의 (경험적인) 자연학에 앞서 자연형이상학을, 실천적 인간학에 앞서 도덕형이상학을 미리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만 묻고자 한다. 이 두 경우에서 순수이성이 일을 얼마나 많이 수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원천에서 이 이성이 자신의 이 아프리오리한 가르침을 길러내게 되는지 알려면 이 두 형이상학에서 경험적인 것을 꼼꼼히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도덕형이상학과 관련해서는 이 같은 일을 모든 도덕교사(그들은 무수히 많다.)가 추진할 수도 있고, 그 일에 소명을 느끼는 단지 몇몇 사람만 추진할 수도 있다.

 

내 의도는 원래 '도덕철학'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앞서 제기한 질문을 '경험적일 뿐인, 그래서 인간학에 속하는 것(고로 인간학은 경험적 학문에 속한다.)을 모두 떨어낸 순수도덕철학을 한번 작업해보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라는 문제에만 한정하려고 한다. 그런 도덕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은 의무와 도덕법칙에 관한 통상적인 이념으로부터 자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법칙이 도덕적으로, 즉 구속성의 근거로 타당하려면, 누구나 그 법칙이 절대적 필연성을 지녀야 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명령Gebot(칸트는 Imperativ와 Gebot를 구분하여 사용하며, Imperativ는 명령으로, Gebot는 지시명령으로 번역된다. Imperativ는 "일어나야만 하는 당위와 관련된 자유의 객관적 법칙"을 의미하며, Gebot는 "도덕법칙이 공허한 환상으로 머물지 않게 하는 경우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로, 이성이 예지적 세계에서 통치자를 상정하여 도덕법칙이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 '도덕법칙을 지시명령Gebot로 여긴다.' 이러한 지시명령이 구속성을 가지는 까닭은 '그 행위가 신의 지시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내적으로 행위에 구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신적 명령이라 여긴다.')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이 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이들에게도 적용됨을, 또한 이외의 모든 본래적인 도덕법칙도 그러함을 누구나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구속성의 근거를 인간 본성이나 인간이 처해 있는 세계 상황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순수한 이성의 개념에서만 아프리오리하게 찾아내려고 해야 한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단순한 경험 원리에만 기초한 다른 모든 수칙은, 심지어 어떤 면에서 볼 때 보편적인 수칙조차도, 그것이 극히 적은 부분에서라도, 비록 동인Bewegungsgründe(칸트는 이 단어를 경험적 동인, 사변적 동인, 도덕적 동인 등 다양한 형태로 사용하며, 이 경우 동인은 "인간의 생각과 의욕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 내지는 근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와 구별되는 동기Triebfeder는 "어떤 존재자의 이성이 객관적 법칙에 반드시 따르지 않는 자신의 의지의 주관적 규정근거"를 의미한다.)과 동기의 경우라도 경험적인 근거에 기대는 한 실천적 규칙이라 불릴 수는 있어도 결코 도덕법칙이라 불릴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실천적 인식 가운데 도덕법칙은 물론 그 원리도 경험적인 것을 담고 있는 다른 모든 법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도덕철학은 전적으로 실천적 인식의 순수한 부분에만 근거한다. 그리고 도덕철학은 인간에게 적용되는 경우에도 인간에 관한 인식(인간학)을 조금도 빌려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도덕철학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에게 아프리오리한 법칙을 제공한다. 물론 아프리오리한 법칙에는 경험으로 예리해진 판단력이 필요하다. 이는 한편으로는 아프리오리한 법칙이 어떤 경우에 적용되는 지 식별해내기 위해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법칙이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여 이 의지로 하여금 실행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무나 많은 경향성Neigung(칸트가 보기에, 경향성은 감정에 기초하는 것으로 감성적 충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는 "습관적인 욕구", "의지의 정념적 근거", "이성을 약화시키는 것" 등으로 경향성을 파악한다.)에 영향을 받아서 실천적인 순수이성의 이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형이상학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이성에 아프리오리하게 놓여 있는 실천적 원칙Grundsatz들의 원천을 탐구하기 위한 사변적 동인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도덕 자체가 자신을 올바르게 판정할 실마리와 최상의 규범을 갖추지 못하는 한 온갖 종류의 타락에 빠져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고로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행위가 도덕법칙에 합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도덕법칙 자체 때문에 일어나야 한다.(칸트는 이를 '의무에 합치하는pflichmäßig'과 '의무에서aus Pflicht' 행하는 것을 구분하여 전자를 '합법성Legalität'에, 후자를 '도덕성Moralität'에 연관짓는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법칙에 합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아주 우연적이고 불확실할 뿐이다. 도덕적이지 못한 근거가 이따금 법칙에 합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종 법칙에 반하는 행위들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수하고도 진정한(실천철학에서는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도덕법칙은 순수철학 이외의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철학(형이상학)이 앞서 있어야 하며, 순수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어떤 도덕철학도 존재할 수 없다. 저 순수 원리를 경험적 원리에 뒤섞은 것에는 철학이라는 이름마저 붙일 수 없다.(왜냐하면 철학은 평범한 이성 인식이 그저 뒤섞어서 파악하는 것을 분리된 별도 학문에서 개진함으로써 바로 이런 인식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는 도덕철학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붙일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뒤섞음으로 그것은 도덕 자체의 순수성마저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도덕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도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서 요구된 것이 볼프(볼프는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이라 일컬어지는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대표적 인물로, 칸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완전성 개념은 칸트가 당대의 감정주의 윤리학의 주관성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볼프는 지성주의적 접근을 통한 도덕적 선에 대한 지성적 인식을 강조했고, 이는 엄격한 윤리학을 확립하려 하는 칸트의 기획으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적 선에 대한 인식이 의지로 하여금 도덕적 선을 반드시 행하도록 한다는 볼프의 견해에는 따르지 않았다.)의 유명한 도덕철학 예비서에, 즉 그가 명명한 『일반실천철학』(1738-1739에 출판한 볼프의 저서로 보편적인 실천철학, 자연법, 정치학, 도덕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그는 보편적인 실천철학에서 완전성이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인간이 도덕적 선을 실현하여 완전성에 이른다고 주장한다.)에 이미 들어 있다고 해서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도덕철학은 곧 '일반실천철학'이어야 해서 어떤 특별한 종류의 의지에 관해서는 고찰하지 않았다. 즉 그의 철학은 경험적 동인도 전혀 없이 전적으로 아프리오리한 원리들에서 규정되어 우리가 순수한 의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의지에 관해서는 전혀 고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철학은 의욕작용Wollen 일반을 고찰하면서 이런 일반적 의미의 의미의 의욕작용에 속하는 모든 활동과 조건을 연구했다. 따라서 그의 도덕철학은 도덕형이상학과는 구별된다. 이 구별은 일반논리학이 선험철학과 구별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일반논리학은 사유 일반의 활동과 규칙을 개진하지만, 선험철학은 순수 사유의 특수한 활동과 규칙만 개진한다. 이른바 선험철학은 대상을 완전히 아프리오리하게 인식하는 사유의 활동과 규칙만 개진한다. 도덕형이상학은 가능한 순수 의지의 이념과 원리만 탐구해야지 인간의 의욕작용 일반의 활동과 조건을 탐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 활동과 조건은 대부분 심리학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일반실천철학에서도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도덕법칙과 의무를 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내 주장을 반박하는 어떤 이의제기가 될 수는 없다. 이 학문의 저자들 역시 이 학문에 대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에 여전히 충실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자체가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 완전히 아프리오리하게 표상되는, 원래부터 도덕적인 동인지성이 단지 경험들을 비교해서 일반적인 개념으로까지 끌어올린 경험적 동인과 구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동인들의 근원에 대한 차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총합의 크고 작음에 입각해서만 (모든 동인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동인을 고찰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구속성Verbindlichkeit 개념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 구속성 개념은 전혀 도덕적일 수 없다. 그런데도 이 개념은 가능한 실천적 개념들 모두의 근원과 관련하여 이것들이 아프리오리하게 생겨났는지, 아니면 아포스테리오리하게 생겨났는지를 전혀 판단하지 않는 철학에서는 바랄 수도 있는 성질이다.

 

나는 장차 도덕형이상학을 저술하려고 하며, 이런 계획 아래서 먼저 이 『도덕형이상학 정초』[각주:1]를 내놓는다. 물론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로는 원래 순수실천이성비판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다. 이는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로 이미 출판된 순수사변이성비판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순수실천이성비판은 순수사변이성비판처럼 그렇게 대단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도덕적인 것에서는 가장 평범한 지성으로도 상당한 정확성과 세밀함에 이를 수 있지만, 이 이성이 이론적이고 순수한 사용에서는 완전히 변증적이기 때문이다.(칸트는 『형이상학의 진보』에서 도덕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의 제 3단계로, 곧 독단적 실천적 형이상학으로 파악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순수실천이성비판을 완성하려면,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의 통일을 하나의 공동 원리에 의거해서 동시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결국 하나의 동일한 이성이 있을 뿐이고, 이 이성은 적용될 때에만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와 같은 것을 아직 완벽하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완전히 다른 방식의 고찰을 도입해야 하는데, 이는 독자를 혼란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순수실천이성비판이라고 명명하는 대신 도덕형이상학 정초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셋째로 또한 도덕형이상학은 그 어마어마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도로 대중성이 있고 평범한 지성에도 합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초를 놓는 이 예비작업을 도덕형이상학에 분리해내는 것이 유용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면 예비 작업에서 불가피하게 까다로운 것들을 장차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학설에는 첨가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이 정초는 도덕성의 최상 원리를 찾아내고 확립할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정초가 의도하는 바를 전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며, 다른 모든 도덕적 탐구와도 구별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이 중요한, 그럼에도 이제껏 아직 충분하게 해명되지 못한 문제에 대한 내 주장은 도덕성의 최상 원리Prinzip를 전체 체계에 적용함으로써 아주 명료해질 것이며, 어디에서나 알아차릴 수 있는 이 원리의 충분함으로 아주 확실한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근본적으로 공익적이기보다는 나에게 더 많이 유익할지도 모를 이점을 포기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한 원리를 손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이것이 외관상 충분해 보인다고 해서, 이것들이 이 원리가 옳다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확실한 어떤 증거도 제시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들은 특정한 편파성을 불러일으켜 그 원리를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매우 엄정하게 탐구하고 숙고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저술에서, 내 생각에 가장 적절한 방법을 채택했다. 그것은 1) 우리가 평범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2) 이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기 위해 분석적으로 나아가고 3) 다시 돌아와서 이 원리를 검토하고 4) 이 원리의 원천들에서 시작해서 이것이 사용되는 평범한 인식으로 종합적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 [저술의 목차] 구분은 다음과 같다.

 

1. 제1절: 도덕에 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이행

2. 제2절: 대중적 도덕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 이행

3. 제3절: 도덕형이상학에서 순수실천이성비판으로 가는 최종적 행보

 

  1. "도덕형이상학 정초"는 1785년 초판, 1786년 재판이 나왔으며, "도덕형이상학"은 1797-1798년에 나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