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Kant & German Idealism

도덕 형이상학 정초 (2) 제1절

Soyo_Kim 2019. 12. 10. 22:15

제1절 도덕에 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이행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 세계 안에서도, 심지어 세계 바깥에서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 뿐이다. 지성, 재치, 판단력 그리고 그밖의 정신적 재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 혹은 기질의 특성인 용기, 결연함, 끈기도 확실히 여러 가지 면에서 선하며 바람직스럽다. 하지만 의지-이것은 천성을 사용해야 하고, 그렇기에 그것의 고유한 성질이 성격이라고 불리는데-가 선하지 못할 때는 이것들도 극단적으로 악하고 해로울 수 있다. 행운의 선물(즉 우연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권력, 부, 명예, 건강마저도 그리고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갖는 전적인 안녕과 자기 처지에 대한 만족도, 이것들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올바르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행해야 할 원칙 전체를 바로잡아 이 원칙을 보편적이고 합목적적이도록 만드는 선의지가 없는 경우에는 용기를 부추기고 그로써 자주 오만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성적이고 공평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순수하고도 선한 의지의 그 어떤 특징도 전혀 갖추지 못한 존재자가 줄곧 안녕을 누리는 것을 보면 흡족해할 수 없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선의지는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불가결한 조건인 것 같다. 

 

더욱이 몇몇 성질은 이런 선의지 자체를 촉진하고 선의지가 행하는 일을 매우 손쉽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 성질에는 아무런 내적이고 무조건적인 가치가 없으며, 이들 성질은 언제나 변함없이 선의지를 전제한다. 이 선의지는 사람들이 그런데도 이들 성질에 당연히 가지게 되는 존중을 제한하여, 이들 성질이 자체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격정과 열정의 억제, 자제, 그리고 냉철한 숙고는 여러 면에서 선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격의 내적 가치 가운데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제한 없이 선하다고 말하기에는 보족한 점이 많다. (물론 고대인은 이것들을 무조건적으로 그렇게 찬양했지만 말이다.[각주:1]) 이것들도 선의지의 원칙이 없으면 지극히 악해질 수 있고, 또 악한 자의 냉혹함도 그런 것이 없을 때 그에 대해 악하다고 여겼던 것보다 훨씬 더 그를 위험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 눈에도 한층 더 가증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선의지는 자기가 실현하거나 성취하는 것 때문에, 혹은 설정한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의욕작용 때문에, 즉 그 자체로 선하다. 이 선의지는 자체적으로 고찰해볼 때 어떤 경향성을 위해, 아니 말하자면 경향성 전체를 위해 자신이 단지 매번 이루어낼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비록 특별히 혹독한 운명이나 계모 같은 자연의 인색한 제공으로 자기 의도를 관철할 능력이 이 선의지에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 의지가 최대한 노력하는데도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그저 선의지로만(물론 결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우리 역량이 닿는 한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보는 것으로서) 남는다 하더라도, 이 선의지는 자기 안에 자신의 완전한 가치를 간직한 어떤 것으로서 하나의 보석처럼 그 자체로 빛날 것이다. 유용성이나 무익함은 선의지라는 이 가치에 아무것도 덧붙이거나 덜어낼 수 없다. 그런 것은 흡사 일상 거래에서 보석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하거나 이 보석의 가치를 아직도 충분히 모르는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한 장식일 뿐이지, 보석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그것의 가치를 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의지를 평가하는 데 약간의 유용성도 고려하지 않는, 의지 자체의 절대적 가치라는 이 이념에는 아주 의아스러운 점이 있다. 그래서 평범한 이성조차 이 이념에 전적으로 동조함에도 다음과 같은 의혹이 솟아날 수밖에 없다. 곧 [이 이념에는] 원대한 환상이 은밀하게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의지에 이성을 부가하여 다스리도록 한 자연의 의도에서 우리가 자연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 이념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유기적인, 즉 생명을 위한 목적에 맞도록 꾸려진 존재자의 자연적 소질에서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하고 최대한 적합한 것 이외의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도 그 존재자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원칙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성과 의지를 지닌 존재자에게 자신의 보존과 안녕이,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행복이 자연의 원래 목적이라면, 자연은 피조물의 이성을 이런 자기 의도의 이행자로 선정하는 조치를 아주 잘못 취한 셈이다. 피조물이 이러한 의도에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행위와 행동규칙 전체는 언젠가 이성을 바탕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보다는 본능을 바탕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미리 정해질 수 있고, [행복이라는] 목적도 본능을 바탕으로 훨씬 더 확실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총애를 받은 피조물에게 이성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 이 이성은 단지 자연이 자신에게 준 행운의 소질을 관찰하고 경탄하고 기뻐하면서 이 소질을 심어준 자비로운 동기에 감사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피조물의 욕구능력을 이성의 허약하고 기만적인 지도 아래 예속시켜 자연의 의도를 어쭙잖게 다루기 위해 이 이성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자연은 이성이 실천적 사용으로 발전하여 보잘 것 없는 통찰로 행복과 그것에 이르는 수단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오만을 범하지 못하게 방지했을 것이다. 자연은 목적의 선택뿐만 아니라 수단의 선택도 직접 떠맡아 현명하게 미리 배려하여 이 둘을 오로지 본능에만 맡겼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또한 개화된 이성이 삶과 행복을 누리려는 의도에 종사하면 할수록 인간이 그만큼 더 진정한 만족에서 멀어짐을, 그래서 이로부터 수많은 사람에게서, 그것도 이성을 가장 열심히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사실을 고백할 만큼 충분히 솔직하기만 한다면 이성혐오증, 즉 이성에 대한 증오가 어느 정도는 일어남을 목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일상적 사치를 위한 기술을 모두 발명하는 것에서 이끌어낸 이익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학문들(이것들도 도한 그들에게는 결국 지성의 호사스러움으로 보이겠지만)에서 얻은 이익 모두를 어림잡아 계산해보고는, 실제로 자신들이 행복을 얻었다기보다는 고통에 더 많이 시달렸을 뿐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들이 단순히 자연적 본능에 이글려 이에 더 친숙해져 자신의 행동 여부에 이성이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더 평범한 유형의 인간을 경멸하기보다는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마침내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한에서 우리는 삶의 행복이나 만족과 관련해서 이성이 우리에게 안겨준다고 하는 장점을 우쭐거리며 높이 찬양하는 것을 아주 많이 제한하거나 심지어 무가치한 것으로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결코 악의가 있거나 세계를 다스리는 자비로움에 고마워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 판단에는 이들 실존의 다른 그리고 훨씬 더 가치 있는 의도에 관한 이념이 근저에 놓여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 이성은 행복이 아니라 본래부터 바로 이런 의도에 완전히 부합하게 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적 의도도 대부분 최상의 조건인 바로 이 의도 다음에 위치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성은 의지의 대상과 (부분적으로는 이성이 스스로 배가하는) 우리의 모든 욕구 충족과 관련하여 의지를 확실하게 이끌기에 충분히 적합하지 못하다. 오히려 심어진 자연적 본능이 이 의지를 훨씬 더 확실하게 그러한 목적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싶다.(즉 자연적 본성인 경향성이 생명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훨씬 적합하다.) 그럼에도 이성은 실천적 능력으로서, 즉 의지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능력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의지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능력이 이성의 실천적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유일하게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성이 다른 능력들에 비해 우위를 갖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진정한 사명은 다른 의도에 [이바지하는] 수단으로서 어떤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선한 의지를 산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성은 꼭 필요했다. 이와 달리 자연은 어디에서나 자기 소질을 분배할 때 합목적적으로 진행했다. 따라서 이 의지가 유일하고 완전한 선일 수는 없지만 최고선이자 여타의 모든 선, 심지어 행복을 향한 모든 갈망에 조건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선의지는 행복을 추구하는 자연적 경향성과 대립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지는 행복을 향한 모든 갈망의 조건이다.)  이런 경우에 이는, 만약 우리가 다음을 알아차린다면, 자연의 지혜와 아주 잘 일치한다. 즉 제 1의 무조건적 의도에 필요한 이성의 개화는 언제나 제약된 제 2의 의도인 행복의 달성을 이 생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약한다는 점, 아니 아예 그런 달성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있지만(충분히 대립할 수 있으나), 거기서도 자연은 목적에 맞지 않게 처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이라는 점에서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선의지의 토대 마련을 최고의 실천적 사명으로 인식하는 이성은 이 의도를 달성할 때 경향성의 목적들에 발생하는 많은 피해와 결부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즉 자신만이 거듭하여 정한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 높이 평가되어야 하고 더는 [다른 무언가를] 의도하지 않는 이 선의지 개념은 우리의 타고난 건전한 지성과 이미 함께해서 배워야 하기보다는 단지 일깨워야 할 필요만 있다. 이 개념은 우리 행위의 가치 전체를 평가할 때 언제나 상위에 위치하여 다른 모든 가치의 조건이 된다. 이 개념을 진전하기 위해 우리는 의무 개념을 먼저 다루어보려고 한다. 의무 개념은 비록 어느 정도의 주관적 제한과 방해 아래 있기는 하지만 선의지 개념을 포함한다. 이때 이 주관적 제한과 방해는 선의지 개념을 덮쳐 가려서 알아볼 수 없게 하기보다는 대조를 통해 이 개념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주며, 그만큼 더 밝게 빛나도록 해준다. 

 

여기에서 나는 이미 의무에 반하는 것으로 알게 된 모든 행위를, 비록 그것들이 이러저라한 의도에 유용하다고 해도 무시한다. 이런 행위들은 의무와 충돌하기조차 하므로 이것들이 의무에서 일어난 것일 수 있는지는 애초부터 이들 행위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무에 합치하는 행위이지만, 사람들이 이 행위를 하려는 직접적인 어떤 경향성도 갖고 있지 않은데도 다른 경향성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내몰리게 되어 하게 된 행위도 나는 무시한다. 의무에 합치하는 행위가 의무에서 일어났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기적 의도에서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쉽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후자는 그럴 수 있지만, 전자에는 오히려 숨은 의도가 있다고 밝혀지는 경우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행위가 의무에 합치할 뿐 아니라 주체에 이런 행위로 향하는 직접적 경향성이 있을 때, 이런 구별을 알아차리기가 훨씬 어렵다. 예를 들어 가게 주인이 자신에게 찾아온 세상물정 모르는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은 것은 의무에 합치하는 행위다. 또 거래가 빈번한 곳에서 영리한 상인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일정하게 보통 가격을 유지함으로써 아이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에게서 안심하고 구매하게 하는 경우도 그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사람들은 정직하게 대접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상인이 의무에서 그리고 정직의 원칙에서 그렇게 처신했다고 믿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상인은 이익 때문에 그런 처신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또한 이 경우 그가 고객들에게 쏠리는 직접적 경향성이 있어, 그 결과 사랑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고객에 비해 가격에서 특혜를 주지 않는다고 여기서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행위는 의무에서도, 직접적 경향성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순전히 이기적인 의도에서 일어났을 뿐이다.[각주:2]

 

이에 반해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나 각자는 모두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는 직접적 경향성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주 기울이는 근심 어린 신중함에는 아무런 내적 가치도 없으며, 신중함의 준칙에도 아무런 도덕적 내용이 없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의무에 합치하게 보존할 뿐 의무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극심한 불운과 절망적 슬픔으로 삶에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는데도 이 불행한 사람이 영혼이 강해서 자기 운명에 소심해지거나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격분하여 죽고 싶어 하는 와중에도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경향성이나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의무에서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의 준칙은 도덕적 내용을 갖는다.

 

할 수 있는 한 선행하는 것은 의무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동정심이 아주 많은 사람도 여럿 있다. 이들은 허영심이나 사사로운 이익 같은 다른 동인 없이도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확대하는 것으로 내심 즐거워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만족-그것이 자기들의 덕택인 한에서-에서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도 그런 행위가 비록 의무에 합치해서 정말로 사랑스럽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참된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경향성, 즉 명예를 향하는 경향성과 짝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경향성이 다행스럽게도 실제로 공익적이고 의무에 합치해서 명예로운 가치를 지니는 것과 맞아떨어지면, 칭찬과 격려를 받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존경받을 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따라서 존경은 오직 의무로부터만 도출할 수 있다.) 이 준칙에는 도덕적 내용, 즉 그러한 행위들을 경향성이 아니라 의무에서 행하려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박애자의 마음에 자신의 비탄으로 먹구름이 끼어 다른 사람 운명에 참여하는 모든 동정심마저 사라져버렸다고 해보자.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 능력이 아직 있는데도 자기 곤궁에 지나치게 몰두해 다른 사람의 곤궁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고 해보자. 그래서 이제 어떤 경향성도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더는 자극하지 못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냉담에서 벗어나 그 행위를 어떤 경향성도 없이 오로지 의무에서만 수행한다면, 그 행위는 이제야말로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령 자연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마음에 동정심을 거의 심어놓지 않았을 경우 그 (다른 점에서는 정직한 사람)는 기질적으로 냉정하고 다른 사람의 곤궁에 관심이 없을텐데, 이것은 어쩌면 그가 자신의 곤경을 참고 견디어내는 강인함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갖추어서 이와 같은 것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전제하거나 심지어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자연이 그런 사람을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자연이 낳은 피조물 가운데 최악은 아니겠지만) 원래 박애자로 만들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그는 마음씨 고운 기질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자신에게 부여할 원천을 자기 안에서 찾아내지 않겠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도덕적이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 가치인 성격의 가치가 시작된다. 즉 영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에서 선행하는 일이 시작된다.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의무다. 왜냐하면 그가 많은 걱정거리에 떠밀려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 한 가운데서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그것이 의무를 위반하도록 하는 큰 유혹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행복의 의무는 도덕적 의무의 수호에만 봉사할 뿐 직접적인 의무는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의무를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모든 사람은 이미 저절로 행복으로 향하는 아주 강렬하고도 간절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행복이라는 이념에 모든 경향성도 합해져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행복의 수칙이 지닌 성질에 따르면, 이 수칙은 대체로 몇몇 경향성에는 큰 장애가 되며, 그럼에도 사람은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있는 모든 경향성의 만족 전체에 관해서 확정적이고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경향성이 약속하는 것과 이런 경향성의 만족이 유지될 수 있는 시간과 관련해서 어떤 하나의 특정한 경향성이 흔들리는 행복이라는 이념을 능가할 수 있다 해도 놀랄일이 아니다. 또 사람이, 예를 들어 어떤 통풍 환자가 맛있는 것을 먹고 자신이 겪을 수 잇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적어도 여기에서 그는 어림잡아 계산해보고 건강에 깃들어 있다고들 하는 행복을 아마도 근거 없이 기대하다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즐거움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때도 행복으로 향하는 일반적 경향성이 그의 의지를 규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즉 건강이 그에게는 적어도 이렇게 행복을 헤아리는 데 꼭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다른 모든 경우에서처럼 하나의 법칙은 남는다. 즉 자신의 행복을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에서 촉진해야 한다는 하나의 법칙은 남는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만 그의 태도는 비로소 제대로 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마저도 사랑하도록 지시 명령하는 성경의 구절들도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경향성으로서 사랑은 지시 명령될 수 없고, 설혹 경향성이 선행하도록 전혀 몰아대지 않는다 해도, 심지어 자연스럽고도 억제할 수 없는 혐오가 선행을 결코 못하게 해도, 의무에서 행하는 선행은 실천적 사랑이지 정념적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천적 사랑은 의지에 존재하지 감각의 성벽에 존재하지 않으며, 행위의 원칙에 있지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동정심에 있지 않다. 오직 이런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 명령될 수 있다.

 

둘째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의무에서 한 행위는 그 행위로 성취해야 할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결심할 때 따르게 되는 준칙에서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그 행위는 행위 대상의 현실성에 의존하지 않으며, 욕구능력의 모든 대상과 상관없이 오직 그 행위가 일어날 때 따르는 의지의 원리에만 의존한다. 우리가 행위를 수행할 때 지닐 수 있는 의도 그리고 의지의 목적이나 동기인 행위의 결과가 행위에 무조건적이고 도덕적인 어떤 가치도 부여할 수 없음은 이미 앞서 설명한 것에서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도덕적 가치가 행위에서 기대되는 결과와 관계하는 의지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가치가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가치는 그런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목적과는 상관없이 의지의 원리 안에가 아니고는 다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의지는 자신의 형식적인 아프리오리한 원리와 질료적인 아포스테리오리한 동기 사이에, 말하자면 이들이 갈라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의지는 동기적인 측면을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럼에도 의지는 어떤 무언가를 통해서 규정되어야 하므로 행위가 의무에서 일어난다면, 이 경우 의지에서 모든 질료적 원리는 제거되기 때문에 의지는 의욕작용 일반의 형식적 원리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앞의 두 명제에서 도출되는 셋째 명제를 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자 한다.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나오는 행위의 필연성이다. 내가 의도한 행위의 결과인 대상에 대해 나는 경향성을 가질수는 있지만 결코 존경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객관이야말로 그저 의지의 결과일 뿐이지 의지의 활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경향성 일반에 대해서 그것이 단지 내 것이든, 다른 사람 것이든 존경심을 가질 수 없다. 나는 기껏해야 처음의[내경향성의] 경우, 그것을 시인할 수 있을 뿐이며, 두 번째[다른사람의 경향성]의 경우 이따금 그것을 좋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나는 다른 사람의 경향성이 나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여길 수 있을 뿐이다. 결코 결과가 아니라 오직 근거로서 내 의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이, 즉 나의 경향성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경향성을 압도하는 것만이, 적어도 선택할 때 이런 경향성을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만이, 따라서 법칙 자체만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이로써 법칙은 지시명령일 수 있다. 그런데 의무에서 한 행위는 경향성의 영향을, 이와 더불어 의지의 모든 대상을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 따라서 의지를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의지에 남아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법칙 자체뿐이며, 주관적으로는 이 실천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뿐이다. 그러므로 내 모든 경향성을 끊어내고라도 이러한 법칙을 따르려는 준칙([무언가를 하려는] 의욕작용의 주관적 원리다. 객관적 원리(즉 만일 이성이 욕구능력들에 대해 온전히 지배권을 가진다면,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주관적으로도 실천적 원리로 이바지하게 되는)는 실천법칙이다.) 

 

따라서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행위에서 기대되는 결과에 놓여 있지 않으며, 또 이러한 기대되는 결과에서 행위의 동인을 얻어와야 할 필요가 있는 원리에 있지도 않다. 이런 모든 결과(자신의 쾌적한 상태, 게다가 타인의 행복)는 또한 다른 원인으로도 성취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이를 위해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 필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조건적인 최고선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연유로 오직 법칙 자체에 대한 표상만이 우리가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주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물론 기대된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이 의지를 규정하는 근거가 되는 한, 이 표상은 이성적 존재자에게서만 발생한다. 이 탁월한 선은 이미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격 자체에 현재하므로 무엇보다 결과에서 이 선을 우리는 기대해서는 안 된다.[각주:3]

 

그러나 의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법칙을 표상할 때 이로부터 기대되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표상하는 것이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법칙이 그런 법칙일 수 있겠는가? 어떤 버칙을 준수할 때 의지에 일어날 수도 있는 모든 충동을 나는 그것에서 빼앗았다. 그래서 이제 남아 있는 것이라곤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이며, 이것만을 의지의 원리로 사용해야 한다. 즉 나는 또한 '내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바랄 수 있도록 오로지 그렇게만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단순한 합법칙성 일반은 (어떤 행위를 하도록 규정하는 법칙을 기초로 삼지 않고) 의지가 원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가 공허한 망상이나 기괴한 개념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면, 의지는 이 합법칙성만 원리로 사용해야 한다. 평범한 인간 이성도 실천적 판단을 할 때 이 점에 완전히 동의하며, 언급한 원리를 언제나 염두에 둔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만약 내가 궁지에 빠졌을 때 지킬 마음도 없으면서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가? 나는 여기서 거짓 약속을 하는 것이 영리한 것인지, 아니면 의무에 합치하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이 물음이 지닐 수 있는 의미 차이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처음의 물음은 의심할 바 없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런 구실을 핑계로 현재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오히려 이런 거짓말 때문에 지금 모면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이 뒤에 일어나지 않을지 잘 숙고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영악했다고 해도 결과를 예측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아서, 한번 신용을 잃어버리면 내가 지금 피하려고 생각하는 모든 해악보다 훨씬 더 불리한 일들이 나에게 벌어질 수도 있다. 이 경우 보편적 준칙에 따라 행동하고 지킬 의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더 영리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 이 준칙도 언제나 걱정스러운 결과들에만 기초한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린다. 그러나 '의무에서 정직한 것'은 '불리한 결과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데에서 정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는 행위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나에 대한 법칙이 포함되어 있다. 반면 후자에는 이 행위에 결부되어 어떤 결과들이 나에게 일어날지 먼저 다른 곳을 둘러보아야 한다. 내가 의무의 원리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전적으로 확실하게 악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리함이라는 내 준칙을 어긴다면, 물론 이 준칙을 지키는 것이 더 안전하다 해도, 때론 그것이 내게 아주 이로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거짓 약속이 의무에 합치하는지, 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간결하고도 솔직하게 답하려고 다음과 같이 자문해본다. 나는 (진실하지 못한 약속으로 곤경에서 벗어나려는) 내 준칙이 (나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보편적 법칙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만으로 과연 만족하는가? 그리고 곤경에서 달리 벗어날 길이 없을 경우, 누구나 거짓 약속을 해도 된다고 정말로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려고 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는 없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된다. 거짓말하는 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삼을 경우, 애당초 그 어떤 약속도 전혀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미래 행위와 관련하여 나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맹세해도 그들이 이러한 맹세를 믿지 않아 헛수고가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이 맹세를 경솔하게 믿는다 해도 나에게 똑같은 값으로 되돌려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내 준칙은 보편적 법칙이 되자마자 자멸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내 의욕작용이 도덕적으로 선하고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려고 할 때 두루 캐묻는 그 어떤 예리함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세상살이에 경험이 없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처할 능력이 없어도 나로서는 단지 '너 또한 네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원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에 이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지 못할 경우, 나는 그 준칙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는 이 준칙으로 너나 다른 사람에게 닥치게 될 손해 때문이 아니라 이 준칙이 가능한 보편적 법칙의 수립과 관련해서 원리로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은 내가 이런 보편적 법칙 수립에 직접적인 존경심을 갖도록 요구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이 존경심이 어디에 기초를 두는지 (이는 철학자가 연구할 수 있는 것인데) 통찰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이것만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즉 나는 이 존경이 경향성 때문에 칭찬받게 되는 모든 가치를 훨씬 능가하는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 정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실천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에서 내 행위를 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바로 의무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이 의무가 가치 면에서 다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선한 의지의 조건이 되므로 다른 모든 동인은 이 의무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로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나오는 행위의 필연성이며, 이 의무가 그 자체로 선한 의지의 조건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평범한 인간 이성의 도덕적 인식에서 이 인식의 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 이성은 이 원리를 보편적 형식으로까지 추상하여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늘 실제로 이 원리를 염두에 두고 판정의 척도로 사용한다. 여기서 이 평범한 인간 이성이 새로운 것을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지만(즉 분석적이지만),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이 이성에 자신의 원리에 주의를 기울이게만 만든다면, 이 이성이 나침판을 손에 들고 다가올 모든 경우에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무엇이 의무에 합치하거나 반하는지를 구별하는 일에 아주 정통함을 보여주는 일은 쉬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정직하고 선하게, 심지어 현명하고 덕스럽게 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를 알기 위해 굳이 어떤 학문이나 철학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일도 쉬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고 알아야 하는지, 이를 인식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가장 평범한 사람에게도 일이 되리라는 것은 물론 이미 앞서 예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기서 평범한 인간 지성에서 실천적 판정 능력이 이론적 판정 능력을 훨씬 더 앞서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결국 여기서 '실천적 판정 능력'의 입증은 경험으로써, 즉 도덕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이론적 판단 능력의 경우, 평범한 인간 이성이 경험의 법칙들이나 감관의 지각들에서 벗어나는 일을 감행한다면, 이성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어 자기와 모순에 직면하거나(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아니면 최소한 불확실하고 어둡고 안정되지 못한 혼돈 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지만 실천적인 일에서 판정 능력은 평범한 지성이 모든 감성적 동기를 실천적 법칙들에서 제거하게 될 때 제대로 자기 장점을 드러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판단의 근원 형식을 고찰할 경우, 경향성은 모두 제거된 채로 의무의 원리만이 남는다는 이야기인가?) 바로 이때 평범한 인간 지성은 치밀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지성은 과연 무엇이 옳다고 해야 하는지와 관련해 자기 양심이나 다른 요구와 더불어 따져보기도 하며, 또 자기 자신을 바로잡고자 행위의 가치를 제대로 규정하려고도 한다. 그리고 대체로 후자의 경우 평범한 지성은 철학자가 언제나 기대할 수 있는 정도만큼, 그 정도로 행위의 가치를 규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아니 이런 일은 평범한 지성이 철학자보다 거의 더 확실하게 해내기도 한다. 철학자가 평범한 지성과는 다른 원리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철학자의 판단은 매우 낯설고 사태에 제대로 맞지 않는 것들을 고려하다 쉽게 혼란에 빠져 똑바른 방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일에서는 평범한 이성판단 정도로 끝내고, 철학은 고작해야 도덕의 체계를 더욱더 완벽하게 서술할 뿐만 아니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고, 또한 도덕의 규칙을 좀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훨씬 더 편리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서술하기 위해서만 도입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실천적 의도에서마저 평범한 인간 지성이 지닌 행운의 단순성을 빼앗아서 이 지성이 철학을 통해 탐구와 가르침이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는 것이 더 권할 만하지 않은가?

 

순진무구하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잘 보존할 수 없으며 쉽게 유혹에 빠지기 때문에 매우 좋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물론 이것은 대개 지식보다는 행동거지 중에 존재한다-에조차 학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의 훈계를 수용하고 지속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이성이 자신에게 매우 존경할 만한 것이라고 제시해주는 의무의 모든 지시명령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을 자기 욕구와 경향성에서 느낀다. 인간은 이런 욕구와 경향성의 충족 전체를 모두 합쳐 행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성은 여기서 경향성에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으며 단호하게, 마치 아주 강렬하면서도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어떤 지시명령에도 제거되지 않으려는) 저 경향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경멸하듯, 자신의 훈계를 지시 명령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연스러운 변증론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 저 엄격한 의무의 법칙들에 맞서 궤변을 일삼고 그리고 이 법칙들의 타당성을, 최소한 이 법칙들의 순수함과 엄격함을 의심하여 이 법칙들을 우리 소망이나 경향성에 더 맞게 만들려는 성벽, 즉 이 법칙들을 근본적으로 못 쓰게 만들어 법칙들의 위엄을 전부 파괴하려는 성벽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결국 실천적인 평범한 이성조차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평범한 인간 이성은-이 이성이 그저 상식적인 이성임에 만족하는 한 결코 사로잡히지 않을-사변의 그 어떤 필요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이유에서라도 자신의 활동 범위를 벗어나 실천철학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도록 자극받는다. 이는 거기서 욕구와 경향성에 토대를 둔 준칙들과 대조하여 이성 원리의 원천에 대해 그리고 이 원리를 올바르게 규정하기 위해 조사해서 분명한 지침을 얻기 위해서다. 이로써 평범한 인간 이성은 양쪽 주장 때문에 생겨나는 곤경에서 벗어나, 자신이 쉽게 빠져드는 애매모호함 때문에 모든 진정한 도덕적 원칙을 상실할 위험에 처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실천적인 평범한 이성도, 이것이 계발되면 거기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변증론이 서서히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이 변증론은 이성의 이론적 사용에서 이성에 일어나듯이, 철학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평범한 이성도 이론적 이성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우리 이성에 대한 완벽한 비판에서만 안식처를 얻는다.

 

 

 

 

 

 

  1.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덕arete을 세웠던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 따라서 이 지점에서 칸트는 '의무에 합치하는 행위'의 동기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1)의무, 2) 직접적 경향성, 3) 이기적인 의도. 칸트는 1)과 3)을 구분하여, 당연히 이 경우 3)에서 나오는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1)과 2)의 경우는 그 행위의 동인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칸트 역시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1)의 의도에서 일어난 행위만을 도덕적이라 인정할 것이다. 이는 다음절에서 자세히 예증된다. [본문으로]
  3. 사람들은 내가 이성의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서 빠져나갈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기보다 존경이라는 말을 내세워 단지 애매모호한 감정 속으로 달아나 버리려고 한 것처럼 비난할 수도 있다. 존경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감정이지만, 결코 [외부] 영향으로 받아들인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 개념을 통해 자체적으로 일어난 감정이다. 그래서 존경이라는 감정은 경향성이나 공포에 기초하여 일어날 수 있는 첫째 종류의 모든 감정과는 구별된다. 나에 대한 법칙으로 직접 인식하는 것을 나는 이 존경과 더불어 인식한다. 이때 존경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감관에 미치는 다른 영향을 매개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내 의지를 하나의 법칙 아래 예속한다는 의식을 뜻한다. 법칙을 통해 의지를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이 규정함을 의식하는 것을 우리는 존경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존경은 법칙이 주체에 미친 영향의 결과로 여겨지지 법칙의 원인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원래 존경은 나의 자기애에 대해 단절을 행하는 가치들을 표상하는 것이다. 존경은 경향성이나 공포와 비슷한 어떤 것을 동시에 지니기는 하지만, 이들 경향성의 대상으로도, 공포의 대상으로도 간주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존경의 대상은 법칙뿐이다. 게다가 존경의 대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과하고 그것도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으로 부과하는 법칙일 뿐이다. 우리는 자기애에 물어보지 않고 법칙으로서 그것에 복종한다. 이 법칙은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부과한 것으로 우리 의지에서 뒤따라 나오게 되는 결과다. 이 법칙은 첫 번째 고려, 즉 복종 대상이라는 점에서 공포와 유사하며, 두 번째 고려, 즉 스스로 부과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경향성과 유사하다. 인격에 대한 모든 존경은 원래 단지 (정직 등과 같은) 법칙에 대한 존경일 뿐이다. 이 인격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하나의 실례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재능을 확장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기므로 재능들을 소지한 어떤 한 인격을 대면하게 될 때 마치 그를 (나 역시 연습으로 이 점에서 그와 비슷하게 되도록 해야 하는) 법칙의 한 실례인 것처럼 표상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로부터 우리는 존경이라는 감정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 모든 도덕적 관심은 오로지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만 성립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