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Early Modern

근대 철학에서의 무한성 사유- 데카르트 신 존재 증명 비판 : 게오르그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을 중심으로

Soyo_Kim 2018. 12. 26. 23:25

2018-1 서양근세철학

 

근대 철학에서의 무한성 사유- 데카르트 신 존재 증명 비판

: 게오르그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을 중심으로

 

 

【주제분류】 근대철학, 합리론, 집합론

【주요어】 무한성, 초한수, 칸토어, 데카르트

【요약문】 무한은 철학과 수학의 역사에서 오랜 시간동안 가장 난해하면서도 신비로운 개념으로 여겨져 왔다. 고대에서부터 엘레아 학파의 제논이 제시했던 제논의 역설은 무한의 개념을 활용한 악명 높은 난제였으며, 근대 철학을 이끌었던 (흔히 합리론자로 분류되는) 세 명의 철학자,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역시 그들의 사유에 있어 무한을 핵심적인 개념으로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신 존재 증명에 있어 무한의 개념을 결정적으로 활용하였고,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도 무한은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지며, 라이프니츠는 연속에 관한 무한 분할 문제에 관하여 사유한 바 있다. 당대 수학자들이 인간의 한계로 여기고 연구하기 꺼려했던 무한의 개념은 19세기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Georg Cantor)에 의해 비로소 그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본고는 게오르그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 즉 그가 연구했던 무한성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 철학에서의 무한성 사유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본고는 첫째, 칸트가 합리론자들에게 가한 결정적 비판 – 이성의 월권으로 인해 생겨난 형이상학이 무한의 개념이 엄밀하게 분석되지 못했기 발생하였음을 주장하고, 둘째, 현대 수학의 논의를 바탕으로 사유할 수 있는 무한과 사유할 수 없는 무한을 분석함으로써 무한의 개념을 정교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목차

1. 서론 – 철학사에서의 무한의 위상

2. 본론

가. 합리론에서의 무한성 사유 –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수용사를 중심으로

나. 『성찰』에 나타난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 분석

다. 게오르그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 – 집합론과 대각선 논법

라.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 비판 – 무한성 개념을 중심으로

3. 결론 – 무한성 분석을 통한 이성의 한계 비판과 연구 전망

 

1. 철학사에서의 무한의 위상- 근대 이전의 무한성 사유에 대한 개괄

철학과 수학의 역사에 있어, 오랜 시간동안 가장 난해하면서도 신비로운 상태로 남아있었던 개념은 무한(Unendlichkeit)이다. 무한은 대표적인 인간의 한계로, 만물의 근원이자 신의 가장 탁월한 속성 중 하나로, 철학사의 악명 높은 난제들이 발생하는 주된 원인으로 여겨져 왔다. 이는 수학에서도 다르지 않아 19세기에 게오르그 칸토어(Georg Cantor)가 무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수학자들은 무한이란 개념을 인간의 한계로 여겨 연구하기 꺼렸을 정도였다.

철학사의 시원에서부터 무한은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다. 대표적으로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to apeiron) 이론에서 무한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세계의 시원(archē )은 한정이 없다. 즉 무한하다.”라는 명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무한을 명시적으로 철학에 도입했던 철학자는 엘레아 학파의 제논(Zenon)으로, 그가 제시한 제논의 역설은 무한의 개념을 활용한 악명 높은 난제였다. 제논은 무한의 개념을 활용하여 운동이나 사물의 다수성 등을 부정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역설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논변이다. 제논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빠른 아킬레우스라 할지라도 느릿느릿한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이므로, 거북이를 출발선에서 10m 앞에 위치시킨다고 가정하자.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동시에 출발한 후, 아킬레우스는 금방 거북이가 위치했던 10m에 도달한다. 그러나 거북이도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동안 1m를 갔다고 가정하고, 다시 아킬레우스가 1m를 따라잡으면 거북이는 0.1m를 앞서가고, 0.1m를 따라잡으면 0.01m를 앞서가고....... 이러한 절차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제논의 역설의 내용이다.

얼핏 봐도 위의 궤변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달리기 경주를 해봐도, 당연히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제논이 위와 같은 논변을 제시했던 까닭은 그의 스승이었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서였으나, 그의 논변에서 활용된 무한의 개념은 난해하면서도 악명 높은 난제를 낳았다. 과연 유한한 시간 안에, 무한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가? 이것이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역설의 핵심으로, 경험적으로는 당연해 보이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인다는 문제를 품고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한계로 오랜 시간 동안 여겨져 왔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무한은 고대에서부터 논리적으로 고찰될 적에 경험과 모순되는 결론을 끌어내며, 이러한 까닭에 논리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무한은 가무한(The Potential Infinite)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잠재적인 것으로, 유한에 대한 부정개념(Negative Concept)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각주:1] 따라서 실무한(The Actual Infinite)은 추상적으로만 존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자연 세계에서의 실무한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따라서 신에게만 온전히 귀속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각주:2] 이러한 생각이 정교화됨으로써 스콜라 철학에서는 무한을 두 가지 무한으로, 즉, 실무한과 가무한으로 구분하고 실무한을 신의 무한으로, 가무한을 인간의 무한으로 분리시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근대 철학을 이끌었던 (흔히 합리론자로 분류되는) 세 명의 철학자,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역시 그들의 사유에 있어 무한을 핵심적인 개념으로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신 존재 증명에 있어 무한의 개념을 결정적으로 활용하였다. 신학적 전통에 서있었던 데카르트가 그의 신 존재 증명에 핵심으로 생각했던 것은 추상으로서의 실무한, 즉, 무한한 관념을 Cogito가 스스로 산출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도 무한은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지며, 라이프니츠는 연속에 관한 무한 분할 문제에 관하여 사유한 바 있다. 당대 수학자들이 인간의 한계로 여기고 연구하기 꺼려했던 무한의 개념은 19세기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Georg Cantor)에 의해 비로소 그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본고는 게오르그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 즉 그가 연구했던 무한성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 철학에서의 무한성 사유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본고는 첫째, 칸트가 합리론자들에게 가한 결정적 비판 – 이성의 월권으로 인해 생겨난 형이상학이 무한의 개념이 엄밀하게 분석되지 못했기 발생하였음을 주장하고, 둘째, 현대 수학의 논의를 바탕으로 사유할 수 있는 무한과 사유할 수 없는 무한을 분석함으로써 무한의 개념을 정교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2. 합리론에서의 무한성 사유 –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수용사를 중심으로

우리는 근대 철학을 이끌었던 3명의 철학자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를 흔히 합리론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의 사유는 칸트가 이성의 월권으로 인해 발생한 철학으로, 즉,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 경험을 넘어섬으로써 빠지게 된 독단론으로 규정되기 이전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의 사유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힘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은 경험론을 택했을 때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회의론과는 달리,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함에 있어 매력적인 틀을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유관념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경험으로부터 동일한 종류의 지식을 가질 수 있고, 또 이 지식은 그 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식을 확장하고 인류가 진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러한 본유관념, 즉,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지식의 확실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이 탁월한 관념은 어디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따라서 이들 논의의 초점은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신 존재 증명에 그 핵심을 지니고 있다. 신의 존재가 증명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본유관념이 정당화되고 이로부터 지식의 확실성도 보장될 수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들이 신 존재 증명을 그들 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놓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이들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이루어진 5가지 증명을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고 각자의 방법 틀에 따라 정교하면서도 교유한 신 존재 증명을 제시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로부터, 스피노자는 필연성과 역량의 논변으로부터, 라이프니츠는 존재의 유한한 인식능력, 곧, 존재의 유한성으로 이러한 일을 수행하였다. 이들의 논의에 있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무한의 개념이다.

흔히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을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은 또한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통념과는 달리, 데카르트 신 존재 증명의 핵심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관념을 산출해낼 수 있는가?”, “유한한 인간의 인식 한계에 있어 무한의 위상은 어떻게 여겨져야 하는가”에 있다. 다만 데카르트는 철저히 기존의 중세 철학에서 이루어졌던 무한에 대한 담론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데카르트가 그의 존재론의 두 전제로 삼은 res extensa와 res cogitans가 모두 스콜라 철학의 용어이고, 그의 철학이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와 중세 철학 사이의 근친성을 인식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위에서 개괄한 것처럼 데카르트에게는 가무한으로서의 무한만이 존재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한을 잠재적 무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스콜라 철학자들 역시 받아들여 연장으로서의 현실적 무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무한은 오로지 신에게만 귀속된 것이라고 구분하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있어 실체의 존재론,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 양태의 개념은 모두 무한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특이한 점은 스피노자의 경우 그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무한성을 부정으로(즉, 유한에 대한 부정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신의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속성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무한을 “어떤 본성의 실존에 대한 절대적 긍정”으로, 유한을 “이에 대한 부분적 부정”으로 규정한다.[각주:3] 따라서 스피노자는 칸토어 이전에 최초로 체계적이고, 긍정적으로 무한을 사유한 업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무한성은 실체(절대적 무한)-속성(유적 무한)-무한 양태(속성에 의한 무한)-유한 양태(유한)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그의 존재론의 절대적인 핵심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존재에 있어 무한을 최초로 내재화한 철학자이다.[각주:4] 또한 스피노자는 스콜라 철학자들과 데카르트에 반하여 실무한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그는 루이 메이어에게 보낸 『무한에 대한 편지』에서 실무한의 존재를 입증하려 시도한다.[각주:5]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무한이란 연속과 합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흔히 연속합성의 문제, 혹은, 무한분할의 문제로 일컬어지는 이 문제는 “연속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연속으로부터 나오는 “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각주:6] 따라서 이 논의는 당연히 무한의 개념을 다루게 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실체로 파악했던 연장된 사물이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공간은 분할될 수 있으므로, 연장하는 사물 역시 무한히 분할할 수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무한히 분할될 수 있는 연장하는 사물은 실체의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각주:7] 이것이 그의 모나드론(단자론)이 나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며, 이에 더해 운동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 이론을 연구하게 된다. 무한 이론에 있어 그는 스피노자의 실무한과 데카르트의 가무한을 모두 인정하는 절충적인 무한 이론을 제시한다.[각주:8]

이 3명의 철학자들의 무한 이론은 그 중요성에 비해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게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실상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의 철학과 존재론에 있어 무한의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따라서 무한을 체계적이면서 역사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긴 하나, 이 글의 범위와 주제를 고려해볼 때 이 3명의 철학자들을 모두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성찰』에 나타난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증명이 무한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이고, 칸토어의 무한론을 통해 이를 비판해본다. 이는 첫째로, 실무한을 주장했던 스피노자나, 실무한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다룰 경우, 너무 논의가 방대하고 복잡해지기 때문이며, 그에 반해 상대적으로 데카르트의 증명은 이해하기 쉬우며, 그 이전의 무한성 담론과도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무한 이론에 대한 소개와 기초적인 적용 정도에 그칠 것이며,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 척후병의 역할을 행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3. 『성찰』에 나타난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 분석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방법적 회의의 결론으로 Cogito의 확실성을 입증한 후에,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는 확실성을 찾기 위해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논리상으로는 신이 Cogito에 선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 존재 증명부터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논리적 선후 관계가 아닌 인식적 선후 관계에 따라 『방법서설』을 저술했기 때문이며, 논리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도 그것이 방법적 회의의 사고 실험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제에 따라 생각하는 존재의 확실성만 보장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해보자.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존재의 생각, 즉, 관념이 3가지 경로를 통해서만 올 수 있다고 본다. 먼저 관념은 그것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진 것이던지(adventitiae), 내부에서 산출된 것이며, 내부에서 산출된 것일 경우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본유 관념(innatae)이던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관념(factae)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 가운데 어떤 것은 본유적(innatae)이고 어떤 것은 외래적(adventitiae)이며, 다른 나머지는 내 자신이 만들어 낸 것(factae)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물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이며, 사유가 무엇인지를 내가 이해하고 있다면, 이것은 내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성찰』 [각주:9]

그런데 이러한 관념은, 실재와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참되거나 거짓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2+2=4임에도 악마의 장난으로 2+2=5로 계산하게 되었다면 나는 거짓된 명제를 믿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병을 바라보고 그것을 콜라병이라고 인식했는데 그것이 사이다 병이었다면, 나는 거짓된 명제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관념은 그 자체로는 본래 거짓일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콜라병이 사이다병인 상황이 일어날 수는 있어도, 즉 “내가 보고 있는 저것은 콜라병이다.”가 거짓일 수는 있어도, 현상적 믿음- “내가 보고 있는 저것은 콜라병처럼 보인다.”은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념은 실재와 일치하거나 불일치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과는 항상 일치하며 그러므로 참이다. 그러므로 완전성과 무한성, 신에 대한 관념 역시 그 자체로는 참이다. 그런데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이러한 관념에 역시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외래적이거나 본유적이거나 내 자신이 산출한 경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유한하고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관념은 외래적인 것이고 또 신으로부터 유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당연히 당대에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가장 보편적이면서 상식적인 반론은 나보다 더 완전한 사물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관념이 나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할 권리는 없으며, 그것의 실재성이 보증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데카르트의 논증이 존재론적 착각에서, 그것도 가장 기초적인 실수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긴다. 데카르트의 논증대로라면, 분홍 유니콘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분홍 유니콘이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혹은 완전한 섬에 대한 관념이 있으면 그 섬이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비판하면서 말이다.

내가 『성찰』이라는 텍스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데카르트가 『성찰』의 서문, 『독자를 위한 서언 Praefatio ad lectorem』에서 이 반론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자신의 논증에 대한 조야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재반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이때 관념이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관념을 질료적으로(materialiter), 즉, 지성의 작용으로(pro operatione intellectus)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관념이 나보다 더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관념을 표상적으로(objective), 즉 지성의 작용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pro re per istam operationem repraesentata)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표현된 것은 비록 내 외부에 현존한다고는 가정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그 본질로 인해 나보다 더 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완전한 사물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에서 이 사물이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 같은 책[각주:10]

따라서 데카르트의 논증은 나보다 더 완전한 관념이 실재성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증은 아니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논증은 무한성을 바탕으로 한 표상적 실재성에 관한 논변을 담고 있다. 첫째로, 관념은 그 자신과는 항상 일치하며 그렇기에 확실한 참이라고 논증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확실한 참인 하에서 그 자신만큼의 실재성을 지닌다. 다시 콜라병의 예시로 돌아가자면, 실제로는 사이다 병인 어떤 사물을 보고, 우리는 그것을 콜라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콜라병이던 사이다 병이던 간에 그것으로 인해 산출된 관념은 실제로 존재하며, 따라서 표상적인 실재성을 지닌다. 그것이 내부에서 산출된 관념, 본유관념이나 만들어진 관념일 경우 표상적인 실재성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만, 외래관념일 경우 그것을 산출한 원인, 다시 말해 표상적 실재성을 산출한 원인이 반드시 외부에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덜 실재하는 것으로부터 더 실재하는 것이 당연이 결과로서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원인은 최소한 표상적 실재성만큼의 실재성을 지녀야만 한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형상적 실재성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내가 가지고 있는 콜라병의 관념만큼의 실재성이 있다면, 그것을 산출한 실제 사물(그것이 콜라병이던,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이던 간에) 역시 최소한 그 관념만큼의 실재성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형상적 실재성은 표상적 실재성보다 적어도 같거나 크다.

관념이 어떤 특정한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면, 이는 그 관념이 갖고 있는 표상적 실재성과 적어도 동등한(tantumdem)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는 원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원인 속에 있지 않은 것이 관념 속에 있다고 상정한다면, 관념이 이것을 무로부터 받았을 터인데, 그러나 어떤 것이 관념에 의해 지성 속에 표상적으로 있게 되는 존재 방식이 비록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명백한 무는 아니며, 따라서 무로부터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같은 책[각주:11]

이제 데카르트가 신 존재의 실재성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신의 특수한 속성 중 하나가 온전히 외래적인 것임을, 즉, 인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거나 만들어낼 수는 결코 없는 것임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신의 관념의 특징으로 데카르트는 무한성, 비의존성, 전지전능 ,창조성의 4가지를 거론한다. 이러한 관념들은 데카르트의 생각에서는 결코 Cogito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관념들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관념은 물론 무한성에 대한 관념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다. 실로 이런 것은 내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서 나온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나 자신이 실체인 한 나는 실체의 관념을 갖고 있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 관념은 무한 실체의 관념일 수 없으며, 따라서 무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래해야 하기 때문이다. - 같은 책[각주:12]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중세 신학의 입장을 계승하여 무한을 현실에서 가무한의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며,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무한성으로서의 실무한은 오로지 신에게만 귀속되는 것이라고 본다. 무한은 잠재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품고 있는 무한에 대한 관념은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으로부터만(그리고 신의 속성인 실무한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무한성이 외래관념이라는 것으로부터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입장처럼, 무한은 정말 가무한의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이 사유할 수 없는 것일까? 위의 논증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무한성에 대한 관념과 관념의 무한함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즉, 무한성에 대한 관념은 그것이 무한하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사유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음 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성에 대한 관념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석해볼 것이다.

 

4. 게오르그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 – 집합론과 대각선 논법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무한에 대한 일반적 통념으로부터 시작하겠다. 로크는 무한과 유한을 양의 양태로 여기며 끝없이 더하는 절차를 반복함으로서 얻어진다고 정의한다.

“1피트와 같은 공간의 어떤 정해진 길이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그 관념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관념을 그 앞의 관념에다 합하여 2피트의 관념을 만들고, […] 그가 원하면 그의 덧셈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더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 그 이상의 더하기에 의해서도 공간에 대한 그의 관념을 확대하는 힘은 여전히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그는 여기서 무한 공간의 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각주:13]

따라서 로크는 유한을 계속해서 더하면 그것이 무한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유한을 아무리 더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한이라는 바로 그 이유에서 무한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오히려 현대 수학에서 자연수론의 기초로 여겨지는 페아노 공리계 정의에 적합한 것이다. 페아노(G.Peano)는 세 개의 기본개념(Undefined concept)와 다섯 개의 공리를 통해 자연수론의 기초 공리계를 정의한다. 페아노의 기본 개념 3가지는 0(zero), 수(Number), 후자(Successor)[각주:14]이며, 그의 공리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0은 하나의 수이다.

(2) 어떤 임의의 수의 후자도 또한 하나의 수이다.

(3) 두 개의 수가 같은 후자를 같지 않는다.

(4) 0은 어떠한 수의 후자도 아니다.

(5) 어떤 성질을 0이 가지며, 또 그 성질을 가지는 임의의 수의 후자도 가지면, 그 성질은 모든 수가 갖는다.[각주:15]

먼저 1을 0의 후자로 놓으면 (2)에 의해 1이 하나의 수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또 이렇게 나온 1은 하나의 수이므로 그것의 후자인 하나의 수를 갖는다. 또한 (3)과 (4)에 의해 이러한 후자는 같은 수이거나 0일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은 절차가 한없이 되풀이된다. 마지막으로 (5)는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로써, 임의의 수 n이 이 계열의 속할 경우 그것의 후자도 모두 이 계열에 속하게 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 수열을 정의할 수 있으며, 산술의 기초 정리 모두를 쉽게 유도해낼 수 있다.[각주:16] 다만 이러한 방식으로 무한수열이 정의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음의 공리계는 한없이 되풀이되는 것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귀납적 수 자신의 집합을 생각해보자. 귀납적 수란 0에서 출발하는 수학적 귀납법에 따르는 수로서 페아노 공리계를 만족시킨다. 공리 (3)에 의하여 n이 임의의 귀납적 수면 n은 n+1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n = n+1 일 경우, n-1과 n이 같은 후자인 n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귀납적 수란 기수[각주:17] 중에서 n+1에 대한 n의 관계에 대한 0의 후예에 속하는 수로 정의된다. 풀어쓰면, 0에 속하고 그 성질을 갖는 수의 후자에 반드시 속하게 되는 성질 모두를 갖는 수를 말한다. 이렇게 하여 귀납적 수의 집합을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집합의 원소의 수는 “그 집합과 대등한 모든 집합”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각주:18]

그런데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귀납적 수의 집합”의 집합을 “귀납적 수”의 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n을 귀납적 수라 할 때 0에서부터 n까지의 수는 n+1이므로 귀납적 수의 수는 어떠한 귀납적 수 n보다도 크다. 따라서 귀납적 수의 수는 하나의 새로운 수이고, 어느 귀납적 수와도 다르며, 귀납적인 성질 중 어느 것도 갖지 않는다.[각주:19] 이 수가 바로 칸토어가 정의내린 초한기수(transfinite cardinal number)이다. 이 수는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거나 나누거나 등의 어떤 연산을 해도 그 수가 변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무한집합, 혹은 무한기수란 귀납적이지 않은 집합이나 기수를 말하는 것이다.[각주:20]

칸토어는 가무한(잠재 무한집합)만을 고수한 이전 철학자들의 견해를 논박하면서, 무한을 절대적 무한, 수학적 무한, 물리적 무한으로 나누고 이 모두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칸토어에 있어 모든 종류의 무한은 실무한이다. 절대적 무한은 초월적 존재, 신에 의해 실현되는 무한이며, 물리적 무한은 물리적 세계와 관련된 실무한, 수학적 무한은 마음이 추상적으로 수학적 양이나 수로 이해하는 실무한이다.[각주:21]

그는 대각선 논법을 통해 무한의 개념에 접근했는데, 여기에는 “크기”라는 개념과 “일대일 대응 관계”가 기본 원리로 사용되고 있다. 두 집합이 일대일 대응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두 집합을 동등하다고 표현하며, 이러한 집합은 서로 크기가 다를 수 있다. 두 집합 M가 N에서 N이 M의 어떤 적당한 부분집합과 일대일대응 관계를 맺지만 M은 N의 어떤 부분집합과도 일대일대응 관계를 맺지 못할 때, M이 N보다 크다고 표현한다.[각주:22] 이를테면 {1,2}와 {3,4}라는 집합이 있을 때 이 집합은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으므로 크기가 같다. 칸토어는 이러한 생각을 확장하여 무한에도 크기가 다르다는 점을 보였다.

이를테면 유리수를 다음과 같이 배열한다.

이 표에서 사선방향으로 분모들을 모두 더한 값과 분자들을 모두 더한 값은 같다. 1/1에서 출발하여 화살표를 따라가면서 1/1에는 1을 매기고, 2/1에는 2를 매기고 1/2에는 3을, 1/3에는 4를 매기는 방식으로 숫자를 매기면 모든 유리수에는 자연수를 매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으로 모든 유리수를 양의 정수의 집합에 일대일 대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유리수의 집합은 자연수의 집합과 크기가 동일하다.[각주:23] 또한 이것은 유리수의 무한집합은 셀 수 있는 가산집합(Countable set)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양의 정수 집합은 가장 작은 무한집합이기 때문에, 유리수의 집합 역시 가장 작은 무한 집합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며 자연수와 정수, 유리수의 집합의 크기는 모두 같다.[각주:24] 반면 칸토어는 실수 집합이 비가산집합(uncountable set)이라는 것 역시 증명하였는데, 이는 실수의 무한집합이 유리수의 무한집합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0과 1사이에 실수들이 가산이라고 가정하자. 실수들을 소수로 쓰되 1/2같은 수를 .4999......으로 나타낸다. 만일 실수들이 가산이라면 각각에 정수 n을 매길 수 있다.

1 <-> 0. a₁₁ a₁₂ a₁₃

2 <-> 0. a₂₁ a₂₂ a₂₃

3 <-> 0. a₃₁ a₃₂ a₃₃

...............................

을 얻게 된다. 이제 0과 1 사이의 실수를 하나 골라내어 b= 0.b₁ b₂ b₃......로 놓는데, akk는 1이면 bk는 9로, akk가 1이 아니면 b=1로 놓는다. 그러나 이 실수는 위의 표에 나열된 어떤 실수에도 해당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실수가 가산일 경우 모순이 성립된다. 따라서 실수는 비가산집합이다.[각주:25]

 

5.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 비판 – 무한성 개념을 중심으로

칸토어가 제시한 무한 이론을 통해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난제로 여겨왔던 무한과 관련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제논의 역설의 경우,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과정이 무한하다는 것, 즉, 유한한 시간 안에 무한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냐가 문제시되었다. 칸토어는 직선의 어떤 부분에 존재하는 점, 혹은 유한의 시간을 구성하는 한 순간은 비가산집합이라는 것을 증명했는데, 이는 다시 말해 직선 위의 점들은 셀 수 없는 무한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직선 위의 점이 셀 수 있는 무한이라면 유한 시간 안에 무한의 절차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셀 수 없는 무한이기 때문에 도달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의 논의를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논증에 따르면 무한성에 대한 관념은 그 자체로 산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이는 무한이 가무한으로서만 여겨져 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무한을 외래관념으로, 신에게서 찾아온 관념으로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칸토어의 논의를 수용할 경우, 우리가 어떤 직선의 관념을 품을 경우 우리는 셀 수 없는 무한의 관념을 산출한 셈이고, 따라서 무한성의 관념이 반드시 외래관념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데카르트는 셀 수 있는 무한의 경우만을 고려하여 이러한 관념을 인간 한계로 여겼기 때문에 외부의 존재가 필요했지만, 직관의 형식인 시간과 공간은 셀 수 없는 무한으로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가 합리론에 가했던 결정적 비판- 이성의 무분별한 월권은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도 적용가능하며, 우리는 데카르트가 셀 수 있는 무한과 셀 수 없는 무한을 혼동함으로써 섣불리 이성의 초월을 요구하였다고 비판할 수 있다.

 

6.나가는 말

본고는 분량과 능력상의 한계로 인해 철학의 무한성 논의의 극히 일부분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실제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무한 이론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상이하며, 실무한의 가능성을 논하였다는 점에서 보다 방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 수학의 논의 아래에서 형이상학에서의 무한성 개념을 분석할 경우, 우리는 무한성 개념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다시 씀으로써 보다 가치 있는 고찰들을 얻을 수 있다. 무한이 현대 철학의 형이상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무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사유했던 칸토어가 무한을 신을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동시에 신을 결코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여겼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연구 과제가 될 수 있다. 칸토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무한보다 더 궁극적인 절대무한(absolute infinity)의 존재를 긍정했으며, 이것은 온전히 신에게 귀속된 것으로 파악하였다.[각주:26] 이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개념이라 여겨 치워버릴 수도 있겠으나, 칸토어와 신학의 연관성, 무한과 신학의 연결고리에 대해 사유해보는 일 역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비록 그러한 무한의 개념은 칸트 식의 비판을 거친 후에야 요청으로서 존재하는 희미한 연관으로서만 존재할 것이겠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1. 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철학의 10가지 쟁점, 창비, 2004

2. 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 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번역 이현복, 문예출판사, 1997

3. 버드란트 러셀, 《수리철학의 기초》, 번역 임정대, 경문사, 2002

4. 존 로크, 《인간 지성론 1》, 번역 정병훈, 이재영, 양선숙, 한길사, 2014

5. 모리스 클라인, 수학 사상사 제 3권, 41장 실수와 초한수의 기초, 번역 심재관, 경문사, 2016, p.1394

6. 현우식, 칸토르의 수학 속의 신학, 2. 칸토르의 무한수학, 한국수학사학회지 The Korean Journal for History of Mathematics 제 24 권 제 3 호 (2011 년 8 월 ) , 13–21,

7. 김은주, 스피노자에서 양태의 무한성과 유한성, 서론, 서울대학교 철학과 간행물 : 철학논구 30권0호, 2002년 12월, 77-94

8. 이상명, 연속 합성의 미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에 있어 무한 분할의 문제, 哲學 제111집, 2012년 5월, 61-85

 

  1. 현우식, 칸토르의 수학 속의 신학, 2. 칸토르의 무한수학, 한국수학사학회지 The Korean Journal for History of Mathematics 제 24 권 제 3 호 (2011 년 8 월 ) , 13–21, p.17 [본문으로]
  2. Ibid, p.19 [본문으로]
  3. 김은주, 스피노자에서 양태의 무한성과 유한성, 서론, 서울대학교 철학과 간행물 : 철학논구 30권0호, 2002년 12월, 77-94, p.77 [본문으로]
  4. Ibid, p.78 [본문으로]
  5. Ibid, p.81 [본문으로]
  6. 이상명, 연속 합성의 미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에 있어 무한 분할의 문제, 哲學 제111집, 2012년 5월, 61-85, p.61 [본문으로]
  7. 서양근대철학회, 서양근대철학의 10가지 쟁점, 창비, 2004, p.182, [본문으로]
  8. 이상명, 연속 합성의 미로, p.61 [본문으로]
  9. 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 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번역 이현복, 문예출판사, 1997, p.60-61 [본문으로]
  10. Ibid, p.24-25 [본문으로]
  11. Ibid, p.65-66 [본문으로]
  12. Ibid, p.69-70 [본문으로]
  13. 존 로크, 《인간 지성론 1》, 번역 정병훈, 이재영, 양선숙, 한길사, 2014, p.311-313 [본문으로]
  14. 후자란, 크고 작은 순서로 배열된 자연수열 중에서 어떤 수의 바로 다음에 오는 수를 말한다. [본문으로]
  15. 버드란트 러셀, 《수리철학의 기초》, 1장 자연수열, 번역 임정대, 경문사, 2002, p.7 [본문으로]
  16. Ibid, p.7 [본문으로]
  17. 기수란, 서로 대등하면서 그것 이외의 집합과 대등하지 않은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다. [본문으로]
  18. Ibid, 8장 무한기수, p.89 [본문으로]
  19. Ibid, p.90 [본문으로]
  20. Ibid, p.101 [본문으로]
  21. 현우식, 칸토르의 수학 속의 신학, p.15 [본문으로]
  22. 모리스 클라인, 수학 사상사 제 3권, 41장 실수와 초한수의 기초, 번역 심재관, 경문사, 2016, p.1394 [본문으로]
  23. Ibid, p.1395 [본문으로]
  24.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25. Ibid. p.1396-1397 [본문으로]
  26. 현우식, 칸토르의 수학 속의 신학, p.1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