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n Philosophy

맹자의 性善說과 순자의 性惡說의 대립은 실제적인가?

Soyo_Kim 2023. 12. 5. 10:17

2021-2 중국철학과인성교육연구

 

맹자의 性善說과 순자의 性惡說의 대립은 실제적인가?

 

1. 동양 人性論의 분석적 이해를 위하여

오늘날 분석적 사유에 익숙한 철학자들은, 또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체득하고 그것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동양 人性論에 대해 일관된 의심, 더 나아가 모종의 불신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불신은, 人性論을 뒷받침하는 철학적 근거를 (적어도 고대 중국 사상가들의 사유 안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지적에서부터, 人性論이 현대 과학의 성과들과 모순되는 비과학적 이론에 불과하므로 현대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곤 한다. 전자의 경우, 분석 철학자들은 性善說을 정당화하는 맹자의 논거들이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므로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김영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은 순자의 소위 성악설과 대비되면서 인간에 대한 유학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지만, 그러나 환경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이기적 존재가 되고 비도덕적 존재가 된다. 착한 본성을 찾는 끊임없는 수행적 노력을 통해 우리는 환경이 주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 된다. 학문은 바로 이런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천적이며 도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주장인가? 그러나 동시에 매우 비현실적 주장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우리 인간이 선한 존재인가? […] 별로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자기 이익적 존재라는 주장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실제적 작용을 적절하게 해명해 주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자기 이익적임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서 자기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도덕적 행위를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지를 해명해 주어야만 하는 부담을 갖고 있다. 이런 종류의 철학적 부담은 맹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영건 2001: 341-342)

김영건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의 주장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레이첼즈 2006: 141)이라는 심리적 이기주의의 주장과 동일한 난점을 지니고 있다. 두 이론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배적인 가정을 전제하고 이를 통해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이 가정에 직관적으로 위배 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무력하다. 김영건의 지적처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의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본성적으로 착한 우리 인간이 좋은 환경 속에서도 비도덕적이고 이기적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김영건 2001: 342) , 인간의 본성을 이타적이고 선한 것으로 보든, 아니면 이기적이고 악한 것으로 보든 간에 인간이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또한,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심리적 이기주의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 또한 실은 이기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공허한 이론으로 전락하고 만다(레이첼즈 2006: 156). 이와 유사하게,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실질에 따른다면 선을 실현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선이다. 불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타고난 재질의 잘못이 아니다.”(孟子, 告子上)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타고난 재질에서 나온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또한, 그것을 어떻게 논증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김영건은 이러한 물음에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는 맹자가 性善說을 정당화하는 논거를 우리 인간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파악한다(김영건 2001: 343). 실제로, 맹자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느닷없이 보게 될 때 깜짝 놀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인데, 이는 의 단서인 동시에 사람의 조건이다(孟子, 公孫丑上). 그러나 김영건은 이 논거를 경험적 명제로 파악할 때 논변 전체가 건전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不忍人之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맹자의 주장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긴 하나 도덕적이지 않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경험적 사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김영건 2001: 343).

이러한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 우리는 맹자의 논거를 분석적 혹은 개념적 명제로 이해할 수 있다(김영건 2001: 345). 이 경우, 우리는 비록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도덕적 마음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이 마음이 인간됨이나 인간다움이라는 개념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김영건 2001: 345-346). 그런데 이렇게 不忍人之心인간의 조건이라는 맹자의 주장을 인간다움의 조건으로 변형시킬 때, 맹자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당위 명제로 파악되어야 한다. , 맹자의 주장은 도덕적 실천의 호소인 동시에 도덕적 인간의 기술로 파악되어야 한다. 반면, 맹자는 민둥산이 된 牛山의 사례를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흐려진 良心에 적용함으로써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김영건 2001: 350).

다른 한편으로, 이승종은 中庸에서 말하는 天命之謂性에 대한 과학적 논박을 고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명제[天命之謂性]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현대인들은 소수의 유학 추종자들 말고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대한 전통적 믿음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데다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생명과학의 학설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용』의 명제와 생명과학의 명제는 상호 양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생명과학이 말하는 인간의 본성과 『중용』이 말하는 인간의 본성은 그 내포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중용』의 문맥에서는 하늘과 연관되어 있고 생명과학의 문맥에서는 유전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중용』과 생명과학은 인간의 본성을 서로 다른 층위와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종 2010: 296-297)

이승종에 따르면, 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1) “인간과 침팬지는 서로 다르다라는 명제와 생명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2) “인간과 침팬지는 98.4% 같다라는 명제기 동일한 층위에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 (2)에 의해 (1)이 그른 명제로 판명되는 것도, (1)(1*) “인간과 침팬지는 1.6% 다르다로 수정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1)(2)는 각각 유학의 관점에서유전자의 관점에서를 생략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不忍人之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맹자의 주장을 (3) “유학의 관점에서, 不忍人之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다라는 주장으로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4)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생물학적 요인은 인간다움의 조건이다라는 명제는 (3)을 반박하지 않는다. (3)(4)는 유학과 자연과학의 차원, 더 나아가 당위와 존재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맹자의 논변 속에 자연주의의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맹자의 주장 자체는 자연주의의 오류와 무관하게 철학적으로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2. 맹자의 性善說과 순자의 性惡說의 대립은 실제적인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고찰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동일한 유학의 관점에서, (3) “不忍人之心이 인간다움의 조건이다를 부정하는 순자의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이들의 대립은 과연 실제적인가? 또는 동일한 입장을 다르게 표현에 불과한가? 나는 이 글에서 바로 이러한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먼저, 순자는 性惡에서 그의 性惡說을 다음과 같이 논변하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 선한 것은 僞다. 이제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 이득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이를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 그래서 사람의 본성대로 따르고 사람의 감정대로 따른다면 반드시 쟁탈하는 데 나아가 범절을 어기고 도리를 어지럽히는 데 알맞아 포악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師法의 교화와 예의의 지도가 있은 연후라야 사양하는 데로 나아가 도리에 알맞고 다스려지는 데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로 사람의 본성이 악함은 분명하다. 그 선한 것은 僞이다.(『荀子』, 「性惡」)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그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사람의 성을 바로 아는 데 미치지 못하고 사람의 성과 위의 구분을 살피지 못하는 자다’라고 할 것이다. 무릇 性이라 하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요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예의라 하는 것은 성인이 만들어낸 바요 그것은 사람이 배워서 능히 할 수 있는 바이며 일삼아서 이룰 수 있는 바이다.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 없어도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을 가리켜 性이라 한다. 배울 수 있어서 능히 할 수 있고 일삼을 수 있어서 이루게 되는 기능이 사람에게 있는 것을 가리켜 僞라 한다. 이것이 바로 性과 僞의 구분이다.(『荀子』, 「性惡」)

인용문에서 순자는 맹자의 性善說을 논박하고 인간의 이 본래 하며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까닭은 다만 (또는 )에 의한 것, 더 구체적으로는 성인이 제정한 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은 우리에게 일견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맹자 역시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 없어도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을 가리켜 이라고 한다는 순자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 분명할뿐더러, 인간이 자신의 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 있어 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도 마찬가지로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맹자와 순자는 동일한 사태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환경에 의해 그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고 악한 행위를 한다. ‘인간이 특정한 종류의 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현상을 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반면, ‘인간이 특정한 종류의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현상을 맹자는 본성의 발현으로 설명할 것이다.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악하지만, 를 통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인간이 특정한 종류의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현상을 순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반면, ‘인간이 특정한 종류의 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현상을 순자는 본성의 발현으로 설명할 것이다. , 이들의 대립은 중에 어느 것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하냐는 논의로 보일 뿐, 실제적인 대립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대립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대립은,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동기주의 윤리와 결과주의 윤리의 대립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일반적인 유학의 天論과 차별화되는 순자만의 독특한 天論을 분석함으로써 확인하고자 한다. 순자는 天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의 움직임은 일정한 법칙성을 갖는다. 요를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걸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응하여 잘 다스리면 길하고 대응하여 어지럽히면 흉하다. […] 그러므로 天과 人의 구분을 명확하게 할 줄 안다면 가히 至人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荀子』, 「天論」)

강경훈에 따르면, “선진 유학부터 송명 이학까지 유학에서의 은 주재적 을 의미한다.”(강경훈 2015: 13) 잘 알려져 있듯이, 유학의 기본 전제는 인간이 모두 하늘로부터 그 본성을 부여받았으며, 이 본성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 우리 마음이 지닌 도덕적 본성의 원류인 동시에 우리에게 도덕적 행위를 강제하는 명령자이기도 하다(안영석 2009: 102). 마찬가지로, 맹자가 性善說을 말할 때, 그는 바로 이 선한 본성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함께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性善의 가장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강경훈 2015: 58)

반면, 순자는 유학의 전통적인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유학의 윤리학이 지닌 근본적 성격을 함께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영석에 따르면, “순자는 중국고대의 유학사상사에 있어서 천()을 인간의 도덕의식과 분리시켜 자연현상 자체로서 제기한 최초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안영석 2009: 102) 순자는 을 도덕의 근원자로도, 또한 명령자로도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은 나름의 법칙에 따라 운행하는 존재일 뿐이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일삼는 존재인 인간의 본성과 무관한 존재자이다(안영석 2009: 102-103).

통념과 달리, 순자는 을 인간과 완전히 무관한 존재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 감정, 감각기관, 마음 과 연관지어 이해한다(김광민 2019: 29-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의 개념에는 그 형이상학적 의미가 배제되어 있거나 약화되어 있다(김광민 2019: 32). 따라서 우리는 순자가 인간과 을 분리하려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을 자연화함으로써 道德을 분리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化性起僞를 강조하는 순자의 입장이, 동기주의 윤리학을 특징짓는 윤리의 선험적 차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는 어디서 생겨났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이 있는데, 바라면서도 얻지 못하면 곧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추구함에 일정한 기준과 한계가 없다면 곧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투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궁해진다. 옛 임금들께서는 그 어지러움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예의를 만들어 이들의 분계를 정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인간이 원하는 것을 공급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반드시 물건에 궁해지지 않도록 하고, 물건은 반드시 욕망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 이 두 가지가 서로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가 생겨난 이유이다. ( 『荀子』 「禮論」, 김광민 2019: 31에서 재인용.)

요컨대, 김광민의 지적처럼 순자에게 있어 예는 한편으로 인간다움을 회복시키는 도구이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에서 존재의의를 갖는다(김광민 2019: 31). 그리고 여기에서 순자는 옛 임금들께서는 그 어지러움을 싫어하셨기 때문에 예의를 만들어 이들의 분계를 정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인간이 원하는 것을 공급하게 했던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예를 일종의 도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결과주의 윤리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맹자의 윤리와 비교할 때 더욱 명백해진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을 우리가 목격했을 때, 느닷없이 생기는 不忍人之心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의 존재를 추론한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러한 마음이 아무런 조건 없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특정한 행위를 느닷없이 명령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를 더 명료하게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을 목격했을 때, 그 아이의 부모와의 교분을 생각해서 아이를 구한다면, 이는 진정으로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위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孟子, 公孫丑上).

이러한 이유로, 이명휘는 맹자의 윤리학을 칸트적인 자율윤리학으로 이해한다(이명휘 2012: 64) 물론, 맹자와 칸트를 일대일로 대응하여 비교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맹자와 그를 이은 유학의 윤리학이 동기주의 윤리학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명백해 보인다. 첫째,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아무런 조건 없이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이다. 둘째, 그러한 도덕적 행위의 결과는 윤리적 가치판단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다. 셋째,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경험적 차원이 아닌 선험적 차원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넷째, 명제의 형태로 표현된 도덕적 명령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참인 진리치를 지니는 필연적 명제라는 점에서이다. 다섯째, 그러한 도덕적 명제의 명령자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칸트에게 있어 그것이 무제약적으로 선한 선의지라면, 맹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이다. 그렇기에 도덕의 근원자이자 명령자인 개념은 유학의 동기주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순자의 윤리학이 동기주의 윤리학과 결별하고 결과주의 윤리학으로 나아가고 있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순자는 개념을 자연화하고 性惡說을 주장함으로써 단순히 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는 모두 인간의 욕망 충족 및 사회 혼란의 극복이라는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는 성인이 다툼으로 인한 어지러움을 싫어했기 때문에 제정한 것이다. 따라서 의 효용은 그러한 어지러움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는 인간이 지닌 욕망의 충족과 분배에 기여한다. 물론, 순자가 말하는 는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욕망의 충족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히려 통제의 개념을 수반한다(안영석 2009: 114). 윤태양은 이러한 순자 윤리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자가 특히 ‘악하다’고 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사람의 본성’이 하나이고 ‘어지러움’이 다른 하나이다. […] ‘어지러움은 악하다. 당연히 그 반대편인 다스려짐[治]은 선하다.’ 어쩌면 순자에게 이 판단은 이론 이전의 즉각적인 것이었을지 모른다. 당시는 어지러웠고 분명히 선한 상태는 아니었다. 순자가 생각하는 선한 상태는 잘 다스려지는 세상인데 당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선하지 않은 상태, 즉 악한 상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순자에게서 이른바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라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공리(公利)’라고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순자에게 ‘공리’란 개개인의 이익의 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좁게는 한 나라, 넓게는 인간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그 대상의 전체적인 이익을 의미한다. […] 순자에게 있어서 의에 맞지 않는 이익이란 혼란을 야기하는 무분별한 추구의 결과이거나 무지의 소행일 뿐이다. (윤태양 2011: 16-17)

따라서 순자에게 있어 예를 통해 충족되는 욕망은 당연하게도 절제된 욕망이다. 그러나 이와 무관하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순자의 윤리학이 결과주의 윤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순자는 의 효용을 평가할 수 있는 일종의 기준을 전제한다. 그것은 바로 공리(公利)이다. 이러한 공리는 도덕적 행위를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로 격하시킨다. 도덕적 행위는 무제약적으로 선한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둘째, 따라서 순자에게 있어 도덕적 행위의 결과는 윤리적 가치판단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따라서 도덕적 행위는 경험적 차원에서 정당화되며, 그 내용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진리치가 변할 수 있다. 넷째, 앞서 살펴본 맹자의 윤리와 달리, 순자의 윤리는 (이명휘가 지적했던) 칸트적 자율도덕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인이 혼란을 막기 위해 제정한 것이며, 무제약적으로 선한 명령자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맹자와 달리, 순자의 윤리는 칸트의 자율 개념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3. 나가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순자의 性惡說은 맹자의 性善說과 실제적으로 대립한다. 그 까닭은 본질적으로 양자의 天論에서 비롯한다. 순자는 유학의 전통적인 개념을 급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도덕적 근원자이자 명령자의 개념을 그의 윤리 체계 안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자가 다른 종류의 무제약적 명령자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순자의 윤리학은 결과주의 윤리학으로, 맹자의 윤리학(그리고 전통적인 유학의 윤리학)은 동기주의 윤리학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다. 순자의 사상이 유학자들에게 있어 환영보다는 경계의 대상이 된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를 통해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孟子(동양고전연구회 역주, 믿음사, 2016.)

荀子(이운구 옮김, 한길사, 2006.)

강경훈 (2015), 관념의 내용과 변천: 유학의 역사 속에서 하늘을 증명하기, 성균관대학교 철학과 석사학위 논문,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김광민 (2019), 순자의 : 욕망()과의 관련, 도덕교육연구, 31권 제3, 한국도덕교육학회.

김영건 (2001), [밖에서 본 동양 철학] 맹자의 성선설은 타당한 논변인가, 오늘의 동양사상, 4, 예문동양사상연구원.

레이첼즈, 제임스 (2006), 도덕철학의 기초, 노혜련 · 김기덕 · 박소영 옮김, 나눔의집.

안영석 (2009), 荀子心性說에 관한 연구, 민족문화논총, 41,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윤태양 (2011), 순자의 정치론과 인성론, 건국대학교 철학과 석사학위 논문, 건국대학교 대학원.

이명휘 (2012), 유교와 칸트, 이기훈, 김기주 옮김, 예문서원.

이승종 (2010), 다산의 사유에 대한 현대적 접근- 분석적 해석학, 사유의 위상학, 역사현상학, 다산과 현대, 3,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