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n Philosophy

『莊子』 「齊物論」의 首尾相關 구조-吾喪我와 物化를 중심으로-

Soyo_Kim 2023. 12. 5. 07:43

2023-1 유가철학연구

莊子』 「齊物論首尾相關 구조

-吾喪我物化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글: 호접지몽에 관한 새로운 독해의 가능성

 

소위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물화(物化)에 관한 논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민감한 구절[각주:1]로 평가받곤 한다. 이러한 평가를 반증하듯, 호접지몽에 관한 연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방대하며, 동시에 만물제동(萬物齊同)을 함의하는 삶의 변용으로 물화를 파악하는 해석[각주:2], ‘사물의 변화에 구애됨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물화를 파악하는 해석[각주:3], 심지어는 본문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주장[각주:4]에 이르기까지 오늘날까지도 해석상의 이견을 보이는 상황이다. 호접지몽이 장자내편(內篇)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편 중 하나인 제물론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그 내용에 대한 적확한 해석을 제시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1) 호접지몽의 해석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 쟁점이 무엇인지를 일별하고, (2) 이러한 쟁점을 제물론의 전체 체계와 연관 지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먼저, (2-1) 호접지몽의 일화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 않다는 앨리슨의 해석을 살펴본다. 우리는 앨리슨이 비록 호접지몽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인식론적 장애물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긴 하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앨린슨 자신의 해법은 자의적 해석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이어서, (2-2) 호접지몽을 일관되게 이해하는 방편으로써 물화에 대한 부정적 해석을 제시하는 이택용의 해석을 살펴본다. 이택용은 앨린슨이 제기한 호접지몽의 논리적 비일관성이라는 문제가 물화의 교훈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처럼 물화를 부정적으로 이해할 경우, 장자의 철학은 차이를 담보하는 객관적 타당성이 소거된 상대주의 철학, 또는 수양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보수주의적인 철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본고는 (2-3) 호접지몽의 해석적 쟁점 중 하나인 周與胡蝶, 則必有分矣의 문제가 해당 구절의 발화 주체를 파악하는 것과 연관 되어 있음을 밝히고, 이것이 제물론의 처음을 장식하는 오상아(吾喪我)의 논의와 수미상관(首尾相關)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하는 가설을 제기함으로써 (2-1), (2-2)에서 제기된 난점을 해결하는 동시에 물화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강화하는 새로운 독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2. 호접지몽의 구조와 그 쟁점들

 

잘 알려져 있듯이, 호접지몽 우화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각주:5]

 

(1)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적이 있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기분 좋게 느낀 나머지 장주는 자기 자신인지를 몰랐다. 昔者莊周夢為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2) 갑자기 깨어보니 놀랍게도 장주 자신이었다. 俄然覺則蘧蘧然周也

(3) 장주가 꿈꾸어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꾸어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不知周之夢為胡蝶與胡蝶之夢為周與 

(4)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을 것이니,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5) 이를 일러 물화物化라고 한다. 此之謂物化

 

2.1 앨린슨의 문제 제기 : 호접지몽의 논리적 비일관성

 

장자라는 텍스트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한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꿈에 관한 일화와 철학적 반성으로 나누어 해석된다.[각주:6] 이에 따르면 장주가 꾸었던 나비의 꿈은 (a) “자신이 참된 실재적 존재이지 않을 수 있다는[각주:7] 자각 내지는 객관적 실재론에 대한 회의로 해석되거나, (b) 인생에 대한 허무주의적 관점을 함의하거나, (c) 꿈과 깨어남을 죽음과 삶, 주체와 객체에 등치시킴으로써 萬物齊同의 이치를 전달하는 일화로 파악되곤 한다.[각주:8] 요컨대 장자가 나비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도 그것이 꿈임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 (1), 그러한 경험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교훈 (a), (b), (C)를 도출해내는 상황 (2)-(5)는 각각 인식적 미망과 깨달음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접지몽이라는 텍스트를 적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곧 (2)-(5)가 전달하고 있는 깨달음, 즉 교훈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파악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앨린슨은 (2)(3)의 순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각주:9] 앞서 살펴본 교훈 (a), (b), (c)는 모두 공통적으로 장자가 실재와 가상, 죽음과 삶, 인간과 사물,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을 넘어서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장자는 호접지몽의 일화를 통해 이러한 구분을 해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물화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며, 앨린슨 또한 장자 철학의 근본 주제를 영혼의 변화로 보는 만큼[각주:10], 다른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물화를 바로 이러한 긍정적 의미로 해석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해석을 전제로 호접지몽을 살펴볼 경우, (1)-(3)의 논의 흐름과 달리 (4)는 도리어 을 강조함으로써 앞의 구절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5)가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 必有分이라면, 物化는 오히려 萬物齊同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될 여지가 생긴다. 요컨대, “물화가 제물과 부합하는 의미라면 당연히 고정된 본질적 속성을 극복한 개념이어야 할 듯한데, 직전에 나오는 분자는 역으로 개별 존재자의 본질성을 함축하는 것처럼[각주:11]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앨린슨의 해법은 (2)(3)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구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물화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1)-(3)의 논의 흐름과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호접지몽 전체를 불가해한 텍스트로 만들어 버린다. [각주:12] 왜냐하면, (2)-(3)의 흐름대로라면 장자는 꿈에 깨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이 장자인지, 나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미몽 상태에 있다는 것이니, 장자가 이로부터 갑작스레 사물들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도출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기 때문이다.

반면, 앨린슨의 해석대로 텍스트의 편집 순서를 바꾼다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다. , 장자는 꿈속에서 자신이 나비인지 모르는 미망의 상태에 빠져 있다가, 꿈을 깨고 나서는 나비인 듯한 의식으로부터 장주의 의식으로 바뀌는[각주:13] 영혼의 변화라는 인식적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러한 영혼의 변화가 바로 물화라는 것이 호접지몽에 관한 앨린슨의 해명이다.

그러나 앨린슨의 해명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적절하다. 첫째, 앨린슨은 정작 원본 텍스트의 순서가 뒤바뀐 이유를 문헌학적으로 명료하게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이택용의 지적처럼, “있는 그대로의 원문을 단순하게 반영하는 해석은 곧 해석자의 주관성이 최소화된 해석[각주:14]이라는 점에서 앨린슨의 해석은, 적어도 추가적인 근거가 제시되기 전까지는, 자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둘째, 앨린슨은 꿈과 깨어남이 인식론적 미망과 깨달음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유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역시 장자의 원문에서는 지지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장자는 제물론에서 꿈속의 꿈이 가능함을 거론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나비 혹은 다른 존재의 꿈속에서 나비가 깨어나서 장주가 되는 꿈을 꿀 수 있[각주:15]는 경우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앨린슨의 전제와 달리, 장자가 꿈과 깨어남을 미망과 깨달음으로 보았다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2)-(3)의 순서야말로 앨린슨의 전제에 대한 반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2 이택용의 대답 : 물화에 대한 부정적 독해

 

이택용은 앨린슨이 제기한 호접지몽의 논리적 비일관성이라는 문제가 물화의 교훈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호접지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옛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자유롭게 나는 나비였다. 스스로 기분 좋게 뜻대로 날고 있었고, [자신이] 임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깨어나자, 황황히 가 되었다. [그렇지만] 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가 된 것인가를 알 수 없다.[C7.1] 장주와 나비 사이에 혹 분명한 구분이 있다[고 여긴다][C7.2], 이를 에 따라 변화함’[物化]이라 한다.[각주:16]

 

이택용의 해석은, 앨린슨과 같이 원문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자의적 해석으로 귀결되지 않으면서도, (2)-(5)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독해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라는 사태를 매개로 하는 존재하는 나비와 장주는 특정 존재를 확인함에 있어 객관적 타당성 부재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이지 변화[또는 변화 가능성]의 아이콘이 아니다.”[각주:17] , 이택용은 꿈과 깨어남의 유비를 미망과 깨달음의 변화, 혹은 나비의 의식에서 장주의 의식으로의 변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대주의의 종지로 이해함으로써 (2)-(3)의 순서가 애초에 바뀔 필요가 없음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고 있다.

이처럼 꿈과 깸의 유비를 앨린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택용은 물화 역시 상대주의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분별지의 구속으로 해명한다. 장주는 장주, 나비는 나비라는 인식은 실상 양자의 구분이 세계의 운행 원리인 외적 변화 때문에 불가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분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직된 인식, , 사물에 의해 구속된 상황을 지시한다. [각주:18] 요컨대, “‘物化는 사물에 경계를 둠으로써 의 변화에 따라 內心이 변화한다[구속된다]’라는 부정적인 의미인 것이다.”[각주:19]

그러나 이택용의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 그의 주장처럼 물화를 부정적으로 이해할 경우, 장자의 철학은 차이를 담보하는 객관적 타당성이 소거된 상대주의 철학, 또는 수양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보수주의적인 철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장주는 장주, 나비는 나비라는 것을 구분하는 어떠한 객관적인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양자의 질적 차이 역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상호 간의 변용은 그저 세계의 운행 원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뿐, 이러한 변용들 사이의 위계는 애초에 성립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해석은 곽상의 소요유逍遙遊해석을 연상시킨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곽상은 참새와 대붕 사이의 질적 차이 또는 위계를 전제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독화론(獨化論)을 제시한다. 곽상의 해석에 따르면, 세계 안의 존재자들은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몫을 다하고 그럼으로써 소요할 수 있다.[각주:20] 이택용의 호접지몽 해석 역시, 참새와 대붕과 같은 존재자들의 차이를 소거하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바로 이러한 곽상의 생각과 조응한다.

그러나 정세근의 지적처럼, 곽상의 해석은 장자의 원의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평등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결정론으로 전락한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각주:21] 소지(小知)와 대지(大知)를 구분하고 소지가 대지에 미치지 못한다(小知不及大知).”[각주:22]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장자는 참새의 비웃음을 대지를 지니지 못한 소지의 어리석음으로 파악하고 있다.[각주:23] 이러한 대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곽상의 장자 해석은 평등으로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성인은 성인의 본성을, 악인은 악인의 본성을 타고났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각주:24] 이는 결국 수양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짐으로써 실천을 거세한 보수주의적인 장자 독해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이택용의 해석은 비록 앨린슨의 해석보다는 진일보한 것이긴 하나, 곽상이 받는 비판과 유사한 종류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3. 물화에 대한 긍정적 독해의 가능성

 

물화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견지하고자 하는 기존의 해석자들은 (3)-(4)가 실상 논리적 단절을 함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박원재는 장자 철학의 근본 전제 중 하나가 만물은 존재론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구분된다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사물들은 상호 간에 분명한 구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상호 간의 변용이라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구분되는 것들 사이의 상호 변용이야말로 호접지몽의 일화가 전달하는 바라는 것이다.[각주:25]

우리는 이러한 박원재의 주장에 일차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박원재의 주장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앨린슨과 이택용의 해석이 처했던 난점들이 먼저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 꿈과 깸의 유비 관계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토대로 물화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견지할 수 있는 必有分에 대한 해명을 제시하여야 하며, 동시에 물화가 소요유에 나타난 수양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 즉 실천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다.

먼저 꿈과 깸의 유비에 관해 살펴보자. 앨린슨은 꿈과 깸을 인식론적 미망과 깨달음의 상태로, 이택용은 객관적 기준의 부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택용의 해석을 따른다고 할 때조차, 장자의 깨달음은 (표면상의) 깨어남을 통해 드러난다. 왜냐하면, 장자는 꿈과 깸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객관적 기준이 부재하다는 상대주의적 결론을 도출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양자는 모두 꿈과 깸의 유비를 인식적 미망과 깨달음으로 이해하되 그 교훈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식론적 미망) (인식론적 깨달음)
앨린슨 나비의 의식과 장주의 의식이 상호 변용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함.

나비의 의식으로부터 장주의 의식으로의 이행을 깨달음 (=물화)

이택용 꿈과 깸의 구분이 불가함 = 나비와 장주를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은 애초에 부재하다는 사실을 깨달음
(물화란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인식론적 장애물)

결국 양자는 꿈과 깸이 각각 인식론적 미망과 인식론적 깨달음의 상태를 대변한다고 바라보고 있는 셈이며, 동시에 꿈과 깸의 주체가 모두 동일한 장주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周與胡蝶, 則必有分矣에서의 대상인 장주가 깨달음의 주체인 장주와 동일한 인물로 간주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꿈에서 깸과 미몽으로부터의 깨달음은 유비 관계로 엮어있다는 점에서 얼핏 꿈에서 깨어난 장자를 깨달음을 얻은 장자와 동일한 인물로 여기는 해석이 자연스러워 보이긴 한다. 그러나 앨린슨이 지적하듯이, 장자가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 나오는 구절은 不知周之夢為胡蝶與胡蝶之夢為周與?」로서 깨달음을 얻은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반면,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은 분명, 胡蝶夢의 일화로부터 얻은 장자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한 구절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와 분명한 구분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매 순간 다른 존재로 변용되는[物化하는] 장자와 구분되는 사물 간의 변용을 의식하는 장자는 애초에 다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양자를 동일한 인물로 간주했던 까닭은, 꿈과 깨어남이 인식론적 미망과 깨달음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유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별다른 근거 없는 가정에 불과한 것으로, 꿈을 꾸고 깨어난 장주와 깨달음의 주체인 장주를 구분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해석은 앨린슨이 제기했던 의문, , 꿈에 깨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이 장자인지, 나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미몽 상태에 있는 장자가 어떻게 이로부터 갑작스레 사물들 사이에 반드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도출했냐는 의문에 대한 해명을 제공한다. 齊物論의 처음을 장식하는 吾喪我, 를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따라서 齊物論의 전체 체계를 忘我를 통한 萬物齊同의 사상을 견지하는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파악해본다면, 호접지몽의 우화 속에서 꿈과 현실을, 사물들 사이의 상호 변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장주는 그러한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일상적 의식과 분별지에 젖어 있는 로 이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우화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장주는, 나비로부터 장주로의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는 주체로서 를 대변하는 것으로, 내가 상호 변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잊어야만 하는 주체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해석을 보완하는 장점을 지닌다. 첫째, 우리의 해석에 따른다면, 앨린슨의 주장과 달리 호접지몽의 우화는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앨린슨의 해석은 꿈과 깸, 미몽과 깨달음이 유비 관계에 있다는 근거 없는 전제에서 성립할 뿐, 그러한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호접지몽의 우화는 꿈과 깸, 그리고 미몽의 주체와 깨달음의 주체가 구분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해석은 必有分을 분별지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지닌다. 必有分은 경험의 주체인 장자의 코멘트로, 예컨대 장주의 의식, 나비의 의식과 같이 경험의 대상들이 구분됨을 의미한다. 오히려 경험의 대상들이 이처럼 구분되기 때문에 가 유일한 경험의 대상이라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를 잊을 수 있는 것(忘我)이다. 이에 따라 물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한다. 셋째, 이처럼 를 잊어야만 소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에게는 忘我坐忘과 같은 수양이 요구된다. , 우리의 해석은 장자 철학이 수양론의 필요성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실천성을 지니는 까닭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넷째, 우리의 해석은 吾喪我胡蝶之夢을 수미상관 구조로 이해함으로써 齊物論에 체계적으로 접근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 우리의 해석을 통해 胡蝶之夢物化 개념을 吾喪我의 논리적 근거로 이해할 수 있고, 齊物論을 일관된 사상을 전달하고 있는 으로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장자, 장자1, 이강수, 이권 옮김, , 2005.

김권환, 신정근, 「『장자 에서의 호접지몽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 철학논집42,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

박원재, 「『장자나비꿈[胡蝶夢]’ 우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물화(物化)’의 의미에 대한 근래의 해석들을 중심으로, 孔子學34, 한국공자학회, 2018.

앨린슨, 로버트,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김경희 옮김, 그린비, 2014.

이택용, 「『莊子』 「齊物論胡蝶之夢 우화의 物化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동양철학42, 한국동양철학회, 2014.

정세근, 곽상과 지둔의 소요유 논변, 중국학보52, 한국중국학회, 2005.

정우진, 장자의 물화에 대한 해석, 孔子學45, 한국공자학회, 2021.

  1. 정우진, 장자의 물화에 대한 해석, 孔子學45, 한국공자학회, 2021, 7. [본문으로]
  2. 박원재, 「『장자나비꿈[胡蝶夢]’ 우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물화(物化)’의 의미에 대한 근래의 해석들을 중심으로, 孔子學34, 한국공자학회, 2018, 73쪽 참조. [본문으로]
  3. 이택용, 「『莊子』 「齊物論胡蝶之夢 우화의 物化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동양철학42, 한국동양철학회, 2014, 148쪽 참조. [본문으로]
  4. 로버트 앨린슨,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김경희 옮김, 그린비, 2014, 173-174쪽 참조. [본문으로]
  5. 장자, 장자1, 이강수, 이권 옮김, , 2005, 164-165. [본문으로]
  6. 정우진, 장자의 물화에 대한 해석, 7쪽 참조. [본문으로]
  7. 위의 논문, 8. [본문으로]
  8. 김권환, 신정근, 「『장자』에서의 호접지몽우화 해석에 관한 연구, 철학논집42,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 409-410쪽 참조. [본문으로]
  9. 로버트 앨린슨,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173쪽 참조. [본문으로]
  10. 위의 책, 17쪽 참조. [본문으로]
  11. 정우진, 장자의 물화에 대한 해석, 9. [본문으로]
  12. 로버트 앨린슨,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173쪽 참조. [본문으로]
  13. 위의 책, 185. [본문으로]
  14. 이택용, 「『莊子』 「齊物論胡蝶之夢 우화의 物化에 대한 새로운 해석, 123. [본문으로]
  15. 위의 논문, 142-143. [본문으로]
  16. 위의 논문, 143. [본문으로]
  17. 위의 논문, 142. [본문으로]
  18. 위의 논문, 146쪽. [본문으로]
  19. 위의 논문, 148쪽. [본문으로]
  20. 정세근, 곽상과 지둔의 소요유 논변, 중국학보52, 한국중국학회, 2005, 403쪽 참조. [본문으로]
  21. 위의 논문, 403-405쪽 참조. [본문으로]
  22. 장자, 장자1, 55. [본문으로]
  23. 정세근, 곽상과 지둔의 소요유 논변, 403쪽 참조. [본문으로]
  24. 위의 논문, 405쪽. [본문으로]
  25. 박원재, 「『장자나비꿈[胡蝶夢]’ 우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물화(物化)’의 의미에 대한 근래의 해석들을 중심으로, 69-73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