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n Philosophy

유학의 관점에서 시행된 정치 부패 방지의 노력 -조선 초기의 불교 비판과 유교 이념의 대안적 수용을 중심으로-

Soyo_Kim 2023. 12. 5. 13:50

2020-1 동양사상과 현실문제

 

유학의 관점에서 시행된 정치 부패 방지의 노력

-조선 초기의 불교 비판과 유교 이념의 대안적 수용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니체(Nietzsche)도덕의 계보학에서, 인간에 관한 본래적 문제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각주:1] 그의 말처럼 인간의 행동은 본능을 통해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통해 예측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인간의 행동이 규범에 의하여 예측될 때, 그 규범에 대한 체계는 윤리학이며, 이 체계가 국가 권력에 의해 규정된다면 그것은 곧 법이 된다. 문제는 규범을 규정하고, 그것을 어길 때 처벌하는-다시 말해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동물로 기르는-권력이 통치자인 동시에 피통치자라는 점에 있다. 규범을 지키도록 강제하고 감시하는 국가 권력은 정작 그러한 강제와 감시에서 벗어나 있다. 권력이 스스로를 다른 이들만큼이나 공정하게 감시하기 위해서는 조지 오웰의 사회에 나오는 이중사고(Doublethinking)가 필요할지 모른다. 로마의 시인이었던 유베날리스는 이러한 역설을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라는 재치있는 문구로 표현한 바 있다.

이렇게 권력이 강제와 감시에서 벗어나 규범을 어길 때, 이것은 곧 부패가 된다. 그것은 스스로 정한 이치(理致)에 다스려 지지 않는 것, 곧 비리(非理).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사회는 후기로 이행하며 나타난 수많은 부패와 전횡에 의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비교적 오랜 시간을-5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정치 부패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 대안을 찾는 과정에 있어 한 사례로 고찰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려 시도했는지, 그 과정에서 유학이란 학문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살펴 보는 것이 이 발표문의 목적이다.

 

2. 국가 이념으로서의 유학 정립의 배경

불교를 국가 종교로 설정하였던 고려와 달리,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세운 조선의 권력자들은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그것은 물론 이념의 변화지만, 예컨대 철학에서 일어나는 논쟁과 논리의 파탄으로 인해 불교 이념이 몰락함으로 해서 생긴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청렴의 관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불교나 공자의 가르침을 따랐던 유교나 이상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성리학이 전래되기 이전은 물론, 전래된 이후의 고려 사회에서도 유교와 불교는 큰 대립을 보이지 않았다.[각주:2] 성리학 수용 1세대 학자들은 대개 유교에 해박한 지식인들이면서 동시에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불교의 승려들도 유교에 상당히 정통해 있었다.”[각주:3] 또한 고려 말기에 유학은 이미 국가 제도의 정비 차원에서 불교나 도교보다 더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선을 세운 혁명의 주역들 역시, 고려 사회를 유교 사상의 수용을 통해 개혁하고자 했던 지식인 집단의 일부였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각주:4]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유학의 관점에서 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이 그 자체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달리 말해, 적어도 이념적 차원에서 볼 때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그다지 큰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교 성리학의 이념적 명분을 따져보면 혁명은 변절로 간주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비록 맹자에 의해 긍정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인정될 뿐 혁명은 변절의 의미를 더욱 크게 남기는 것이 사실이다. 공자와 맹자의 영향력을 비교할 수는 없으나 유교 이념의 본질은 공자에게 있는 것이고, 공자의 정명(正名) 이론에 비추어보면 역성혁명은 쉽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다.”[각주:5]

이러한 까닭에, 일부 학자들은 조선건국이 토지 소유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산물이며[각주:6], 불교에서 유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역시 정신적 변혁이라기보다, 단순한 도구로서의 정치이데올로기 교체[각주:7]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에도 일견 타당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왜 불교는 더 이상 국가 이념으로서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했으며, 조선을 세운 건국자들이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태조 이성계마저도 한양 도성 내에 불교 사찰들을 새로이 건립했고, 이는 연산군 때까지 이어진다.[각주:8] , 건국 이후 약 100년 간 도성 안에는 불교 사찰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각주:9] 이처럼 조선 건국 직후의 개혁가들은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를 내세우고 불교가 고려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부터 서민까지 불교에 대한 믿음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였다.”[각주:10]

우리는 생활종교이자 문화로서의 불교가 조선사회에서도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개혁자들의 의식적 노력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국가 이념으로서의 불교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배경에는, 종교와 정치의 결탁으로 인한 불교의 타락과 부정부패의 문제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즉 유교 이념의 수용은 부정부패로 인해 더 이상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정신사적, 제도사적 개혁의 일환이다.

당시의 불교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의 크기는 당대 불교의 영향력에 비례하는 것이었는데, 정치적 측면에서는 문벌 귀족 가문과 결탁하여 정치권력을 행사했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고리대금업을 자행하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등 불교 자체가 가진 종교적 이념으로서의 역할이 쇠퇴되고 사회에 기생하는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각주:11]

 

3. 고려 말, 조선 초 개혁자들의 불교 비판

당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혁했던 이들이 불교 중심의 고려 사회에서 청산해야할 과제로 여겼던 것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세속불교, 풍수지리설, 비기도참설의 기복론과 운명주의, (2) 사장(詞章) 유학의 탐미주의와 니힐리즘, (3) 불교의 반세속성.”[각주:12] 이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여겼던 불교의 특징은 비주체성, 관조성, 비정치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3.1 불교의 비주체성 비판

조선 초기, 불교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비판을 시도했던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불교의 비주체성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씨는 사람의 바름과 바르지 않음, 옳음과 그름을 따지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여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비록 열 가지 악행을 범한 악인이라 하더라도 불교에 귀의하면 화를 면하고, 비록 도를 가진 선비라 하더라도 불교에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그 설이 헛되지 않다 하더라도 모두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공도(公道)는 아니다.

불교의 기복 신앙적 사고는 인간의 운명이 인간 외적인 존재에 의해 결정[각주:13]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운명에 귀속시키고 개인의 주체성을 빼앗는다. 이렇게 주체성이 소거된 자리를 대신하여 무엇이 올바른 규범인지를 판단하고 규제하는 불교가 정치와 결탁하면서, 광범위한 부정부패가 고려 말 성행하게 된다. 불교는 자신의 규범의 정당성을 인간으로서는 결정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는 내세로부터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국가 운영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정도전의 비판이다. “고려 말의 불교는 사후 세계에서 받을 고통을 내세워 현세의 윤리를 강요하고, 그 중심에 윤회설이 자리[각주:14]하고 있었다.

반면 주자학은 에 기반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구축함으로써, “하늘이 하늘된 이치가 정해져 있고, 사람의 사람된 이치가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 만물엔 가 구비되어 있고, 그것은 모두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인간의 길은 모두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하다는 것이 주자학의 결론이다.[각주:15] 이러한 이성적 세계관은 역사적으로 부패하여 가톨릭을 종교개혁(Reformation)의 대상으로 삼았던 프로테스탄트와, 그 이념을 이성의 한계 안에서 규명하고자 했던 칸트(Kant)의 노력과도 유사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도전은 불교의 인과설을 비판하면서, 果의 근거가 되는 因이 현세에서 벗어나 있음을 부정하려 한다. 이에 따르면 불교는 인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지만, “기로 구성되는 현실세계는 직선적 필연을 상정할 수 없다."[각주:16] 현실은 무수한 원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집합체로부터 다양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7]

3.2 불교의 관조성 비판

다른 한편으로 불교는 세계에 대해 관조적 태도를 보인다. “이 시대의 정신적 특징은 염세와 관조, 즉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를 멀리서 응시하면서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각주:18] 니체는 이러한 까닭에 불교가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자들과 투쟁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각주:19]고 지적한다.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한 지점 역시, 불교가 추구하는 세속을 넘어선 초월이 현실적 삶의 구원을 부정하고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규범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기에 정도전은 이른바 형이상학적 허구에 기반하여 귀족들의 기득권을 지탱하고 배타적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합리성을 폐기한 불교를 비판한다.[각주:20]

반면 주자학이 추구했던 것은 “‘세계내적 초월’(transcendence-in-the-world)”[각주:21]로서, 언제나 일상적 삶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상적 삶 역시 세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태종은 불교를 증험성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귀신과 부처의 일은 내가 감히 알지 못하지만, 증험이 없다는 것은 또한 심히 명백하니 어떠한 도움이 있겠으랴[각주:22] 이는 물론 공자의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과 상통하는 것이다. 공자는 천하무도(天下無道)를 자신과 시대가 당면한 문제로 여겼고, “이름을 바로세움으로써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했다.”[각주:23]

이러한 공자의 正名論은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 사회의 구체적 문제에 맞서는 개혁 정신의 표명이다. 조선을 건국했던 개혁가들이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며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수용하였던 데에는 공자의 이러한 개혁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3.3 불교의 비정치성 비판

이러한 개혁가들의 문제의식은 불교가 가지고 있는 비정치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교가 단순히 비정치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치를 주도적으로 행해야할 지배 권력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상 비정치성을 표방한 것을 이들은 비판했던 것이다. 반면에, “주자학에서 일상생활은 단지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이다.”[각주:24]

정도전은 유교 이념의 수용을 통해 현실 지배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유학의 개혁적 정신을 국가 차원의 제도로 편입시킨다. 그에 따르면, “임금 자신의 도덕성 확보는 임금 지위라는 정치권력의 형성과 유지에 필수적[각주:25]이며, 이를 위해서라도 임금은 개인의 윤리적 수양을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조선 초기의 관료들은 부정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이념적 차원과 제도적 차원의 노력을 경시하지 않았다. 도덕 국가 건설의 과제를 위해, 국가 운영의 주체인 관료들은 언제나 충절과 청렴을 요구 받았다.[각주:26] 조선은 이러한 가치의 강조를 위해, 심지어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정몽주와 길재마저도 충절의 상징으로 우대할 정도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각주:27] 다른 한편으로 조선은 제도적 측면에서도 부패 방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청백리를 매우 우대하여 그 자손들을 관직에 천거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 숫자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200명에 불과할 정도로 굉장히 엄격한 기준에 의하여 평가받았다.[각주:28]  또한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1년에 두 차례의 정기 평가를 시행했으며, 공개적, 비공개적 감찰 기구를 운용하였다.[각주:29] 이러한 정신적, 제도적 노력을 통해 초기 조선은 부패 감시의 내면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이는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4. 유가의 수양론과 도덕적 이상사회: 정치철학과 윤리학의 결합

유가 사상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수행하고자 한다. 하나는 교육과 수양을 통한 이상적 인간상의 구현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이상적 인간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상적 공동체의 구현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양자는 어느 쪽이든 버릴 수 없다. 유가가 단순히 개인적 이상향의 도달에만 치중한다면, 그것은 불교나 도교처럼 현실정치에서 멀어질 것이다. 반대로 국가의 통치술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법가처럼 법()과 술()에 의한 효율적 통치만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이상향의 구현과 정치적 공동체의 구현은 유가 사상의 핵심이자 그 고유성을 드러내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수양으로부터 도덕적 사회로의 확장을 지향하는 유가의 특징은 大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物格而后知至至而后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身脩身脩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國治而后天下平

따라서 유가는 불교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비주체성, 관조성, 비정치성의 문제에서 벗어난다. 주체는 수양을 통해 인욕을 제거하고 자신의 선한 본성을 보존해야 하는(存天理去人欲) 실천적, 능동적 주체이며 세계를 소극적으로 관조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또한 주체의 수신(脩身)은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정치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5. 나가는 말

이렇게 조선이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추구했던 반부패를 위한 노력은, 후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의 득세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몰락한다. 다른 한편으로 타 종교와 사상을 배격하고 교조주의의 면모를 보였던 유학자들의 한계도 우리는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건국자들이 부패 방지를 추구하기 위해 유교의 이념을 수용하고, 또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유교의 근본 이념, 즉 어디까지나 현실에 머물면서 삶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의 문제가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직시하고, 그 해결을 위해 비판과 논쟁을 병행하며, 때로는 임금에 맞서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유학자들의 모습에서 현대 정치의 만연한 부패에 대한 한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물론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정치는 유동적 생물이며 정치적 무관심은 그 생물을 괴물로 만든다는 평범한 진실이다.

 

참고문헌

大學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儒敎思想文化硏究 第75, 한국유교학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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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프리드리히, 『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논박서』,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2011.

니체, 프리드리히,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조남욱, 조선 태종의 탈불교의식과 그 한계, 동양철학연구. Vol. 63, 동양철학연구회, 2010.

조남욱, 조선시대 부패방지책에 대한 철학적 검토와 그 현대적 수용, 윤리연구 55, 한국윤리학회(구 한국국민윤리학회), 2004

풍우란, 『중국철학사 上』, 박성규 옮김, 까치, 2008.

  1.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하나의 논박서』,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2011, 73쪽 참조. [본문으로]
  2.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儒敎思想文化硏究 第75, 한국유교학회, 2019, 71쪽 참조. [본문으로]
  3. 같은 책, 71-72. [본문으로]
  4. 같은 책, 72쪽 참조. [본문으로]
  5. 같은 책, 73쪽. [본문으로]
  6. 김영수, 조선건국의 정신적 기원: 14세기 주자학 수용의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1집 제2,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0, 7. [본문으로]
  7. 같은 책, 8. [본문으로]
  8. 김윤주, 조선 초기 수도 한양의 불교 사찰 건립과 불사 개설 - 태조 이성계의 사찰 건립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66,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7, 44. [본문으로]
  9. 같은 곳. [본문으로]
  10. 같은 책, 43. [본문으로]
  11.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74쪽. [본문으로]
  12. 김영수, 조선건국의 정신적 기원: 14세기 주자학 수용의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19-20. [본문으로]
  13. 같은 책, 21. [본문으로]
  14.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79. [본문으로]
  15. 김영수, 조선건국의 정신적 기원: 14세기 주자학 수용의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22. [본문으로]
  16.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80쪽. [본문으로]
  17. 같은 곳 [본문으로]
  18. 김영수, 조선건국의 정신적 기원: 14세기 주자학 수용의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10. [본문으로]
  19.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3, 51. [본문으로]
  20.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82. [본문으로]
  21. 김영수, 조선건국의 정신적 기원: 14세기 주자학 수용의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7. [본문으로]
  22. 조남욱, 조선 태종의 탈불교의식과 그 한계, 동양철학연구. Vol. 63, 동양철학연구회, 2010, 134쪽 재인용. [본문으로]
  23. 풍우란, 『중국철학사 上』, 박성규 옮김, 까치, 2008, 103. [본문으로]
  24. 김영수, 조선건국의 정신적 기원: 14세기 주자학 수용의 내적 계기를 중심으로, 24. [본문으로]
  25. 金世宗, 지식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고찰 - 삼봉의 불교 비판과 심성론을 중심으로 -, 91. [본문으로]
  26. 조남욱, 조선시대 부패방지책에 대한 철학적 검토와 그 현대적 수용, 윤리연구 55, 한국윤리학회(구 한국국민윤리학회), 2004, 8쪽 참조. [본문으로]
  27. 같은 책, 9쪽 참조. [본문으로]
  28. 같은 책, 9-10쪽 참조. [본문으로]
  29. 또한 조선시대에 운용했던 반부패 관련법과 엄벌주의에 관해서는, 조남욱, 같은 책, 12-19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