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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요성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논고의 가치론의 측면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가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논고에서 규명하려 하는 중심 질문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며, 이런 의미에서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즉 뜻을 결여한(sinnlos) 명제와 무의미한(unsinnig) 명제의 근본 성격을 규명하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비중의 측면에서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논고 안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고 파악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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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것에 대해 대개 더 구체적인 해명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자연과학의 명제들”이며, “뜻을 지닌 명제”(sinnvolle Satz)이고 “요소명제의 진리함수”이다(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참 혹은 거짓의 진리치를 갖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의 철학적 의미를 진정으로 확고하게 붙잡고 있는가? 달리 말해 그것은 언어의 본질적 기능에 충실하다는 이유에서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진 않은가?
3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 속에 언표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지점에 있다. 논리(Logik)와 윤리(Ethik)는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Bedingungen)이며, 말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zeigt sich). 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현실화한다는 점에서 도식(Schema)의 기능을 수행한다. 문장은 논리적,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논리와 윤리는 그것의 현실화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떤 사태를 발설(aussprechen)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어떤 사태를 묘사(darstellen)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묘사의 절차를 나는 칸트를 따라 도식론(Schematismus)이라 부르며, 이제 “말한다(sagen)”라는 개념은 도식의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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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어와 연관된 몇 가지 근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말해질 수 있는 것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둘째, 상황, 사정이 그러한 것, 뜻, 사태 등은 어떻게 모두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블랙의 지적처럼 같은 뜻을 지닌 다른 용어일 뿐인가? 더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이 프레게에게 보낸 편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셋째,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것은 배타적인가? 즉, 보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말해질 수 없되 보일 수만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명제는 뜻을 보여주고 뜻을 말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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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말하는 것(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진 것(말해질 수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란 표현은 엄밀히 말해 다의적이다. 예컨대, 철수가 ‘이 상자 안에는 사과 두 개가 들어 있다.’라고 말할 때, ‘이 상자 안에는 사과 두 개가 있다’는 명제는 말해진 것(말해질 수 있는 것)이며, 철수는 ‘이 상자 안에는 사과 두 개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할 때, 우리가 규명하고자 하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 혹은 말해진 것이다.
둘째, 말하는 것은 논고에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man)이며, 다른 하나는 명제(Satz)이다. 우리는 ~를 말한다. 또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말할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명제이며, 또한 이 명제는 기호로서의 명제와 상징으로서의 명제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반면, 명제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이것은 명제가 무엇인가를 뜻한다(besagen)는 것이며, 말하는 것으로서의 명제는 언제나 상징으로서의 명제이다. 또한, 양자의 차이는 명제가 무언가를 말하며,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반면에, 우리는 무언가를 말할 수는 있어도 무언가를 보여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명제가 그 뜻을 보여 준다고 했을 때, 이는 엄밀히 말해, 명제의 뜻에 대응하는 사태를 보여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가 뜻을 보여 준다고 하지 않았으며, 만약 명제가 참이라면, 그 뜻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만약 한 요소 명제가 참이라면, 그 요소 명제가 묘사하는 뜻은 그 요소 명제에 대응하는 사태와 일치하며 따라서 그 뜻은 한편으로는 상황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치하는 사태이다. 이때, 요소 명제가 말하는 것은 언제나 상황이며, 요소 명제가 보여 주는 것은, 그것이 참일 때만 가능한 사태이다. 또한 만약 한 복합 명제가 참이라면, 그 복합 명제가 묘사하는 뜻은 그 복합 명제에 대응하는 사실이며, 이것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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