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History of Analytic

『논리-철학 논고』의 말할 수 있는 것

Soyo_Kim 2024. 7. 1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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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중요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요성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논고의 가치론의 측면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할 나위없이 중요하다(가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논고에서 규명하려 하는 중심 질문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며, 이런 의미에서 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즉 뜻을 결여한(sinnlos) 명제와 무의미한(unsinnig) 명제의 근본 성격을 규명하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비중의 측면에서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논고 안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고 파악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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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이것에 대해 대개 더 구체적인 해명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자연과학의 명제들”이며, “뜻을 지닌 명제”(sinnvolle Satz)이고 “요소명제의 진리함수”이다(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참 혹은 거짓의 진리치를 갖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의 철학적 의미를 진정으로 확고하게 붙잡고 있는가? 달리 말해 그것은 언어의 본질적 기능에 충실하다는 이유에서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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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 속에 언표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지점에 있다. 논리(Logik)와 윤리(Ethik)는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Bedingungen)이며, 말할 수 있는 것 속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zeigt sich). 즉, 문장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현실화한다는 점에서 도식(Schema)의 기능을 수행한다. 문장은 논리적,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논리와 윤리는 그것의 현실화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떤 사태를 발설(aussprechen)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어떤 사태를 묘사(darstellen)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묘사의 절차를 나는 칸트를 따라 도식론(Schematismus)이라 부르며, 이제 “말한다(sagen)”라는 개념은 도식의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