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2. 결혼
경제적으로 발전한 여성의 조건이 현재의 결혼제도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이제 결혼은 자율적인 두 개인이 합의한 자유로운 결합이 되었다. 배우자 간의 계약은 개인적이고 상호적이다. 간통은 쌍방 계약의 파기이며, 양자 모두 같은 조건으로 이혼할 수 있다. 여자는 더 이상 재생산 기능에 갇혀 있지 않다. 임신·출산의 재생산 기능은 자연이 부과한 의무라는 성격을 대부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수락한 임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생산노동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국가나 고용주가 임신·출산으로 인한 휴직 기간의 급여를 산모에게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몇 년 동안 결혼은 오로지 부부간의 자유에만 기초한 개인 상호 간의 계약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는 오늘날 국가가 두 사람에게 부과하는 공적인 의무인 것 같다. 그중 어느 경향이 미래 세계에서 주류가 될지는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에 달려 있다. 아무튼, 남자의 후견은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여성 해방의 관점에서 현대는 아직도 과도기다. 여성들 가운데 단지 일부만이 생산에 참여하고 있고, 이런 여성들조차도 낡은 구조와 가치가 잔존한 사회에 속해 있다. 현대의 결혼은 거기에 남아 있는 과거에 비추어 볼 때만 이해될 수 있다.
여자들은 남성 계급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환과 계약을 성립시키는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남자는 자율적이고 완전한 한 개인이다. 그는 무엇보다 생산자로 생각되며, 그의 존재는 그가 집단에 제공하는 노동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여자에게는 그녀가 갇혀 있는 생식과 가사의 역할이 어떤 이유로 동등한 존엄성을 부여해 주지 않는지 앞에서 이미 보았다.2 확실히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한다. 어떤 원시 부족들의 경우에 혼자서 자기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독신 남자는 일종의 천민이 되는 수가 있다. 농촌에서 농부에게는 여자 협력자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대다수 남자는 어떤 힘든 일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배우자에게 떠넘긴다. 개인은 안정적인 성생활과 자손을 욕망하며, 사회는 개인이 사회를 영속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의 사회가 구성원 각자에게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자기를 실현하도록 허용한다.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이 지배하는 가족 집단에 노예나 가신으로서 통합된 여자는 언제나 결혼을 통해 한 남자 집단에서 다른 남자 집단에게 주어졌다. 원시 시대에 부족이나 부계의 씨족은 여자를 거의 물건처럼 마음대로 처분했다. 여자는 두 집단이 상호 합의해 증여하는 제공물의 일부였다. 여자의 사회적 신분은 결혼이 진화되어 계약 형태였을 때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3 지참금이 부여되고 유산을 상속하게 되자 여자는 시민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참금과 유산은 여자를 더욱더 가족에 예속시켰다. 오랫동안 계약은 아내와 남편 사이가 아니라 장인과 사위 간에 성립되었다. 그때에는 오직 남편과 사별한 부인만이 경제적 자율성을 누렸다.4 젊은 처녀에게 선택의 자유는 언제나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독신생활 - 신성한 성격을 띠는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 은 여자를 기생적인 천민의 신분으로 떨어뜨렸다. 결혼은 여자에게 유일한 생계 수단이며, 자기 존재를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혼은 여자에게 이중의 지위를 부과한다. 우선 여자는 공동체에 아이들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러나 국가가 여자를 직접적으로 후견하고 여자에게 어머니 역할만 요구하는 경우 - 스파르타에서 그리고 얼마간 나치 치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 는 드물다. 아버지의 생식 역할을 모르던 문명에서조차 여자가 남편의 보호 아래 있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여자는 남자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가사를 돌보는 기능을 한다. 사회가 여자에게 부과하는 임무는 남편에 대한 봉사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선물을 하거나 사망 시 그 재산에 대한 아내의 권리를 인정하고, 아내를 부양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공동체는 남편을 통해 사회에 헌신하는 아내에게 그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다.
이처럼 젊은 처녀의 모습은 완전히 수동적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부모에 의해서 혼담이 이루어지고, 결혼이란 형식으로 남에게 주어진다. 총각은 스스로 결혼하고 아내를 얻는다. 남자들은 결혼 속에서 자기 존재의 확장과 확신을 구하지, 존재하기 위한 권리 자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임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나 중세의 풍자 작가들이 했던 것처럼 그 이점과 불리한 점을 자문해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결혼이 하나의 생활 양식이지 운명이 아니다. 독신생활의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허용되며, 어떤 남자들은 늦게 결혼하거나 혹은 결혼하지 않는다.
초월을 구현하는 것은 남자다. 여자는 종種의 유지와 가정을 돌보는 일, 즉 내재에 바쳐지고 있다. 사실 모든 인간 존재는 초월인 동시에 내재다. 자기를 초월하기 위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합시켜야만 하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자기 내부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해야만 한다. 두 순간은 살아 있는 모든 움직임에 내포되어 있다. 결혼은 남자에게 바로 두 순간의 행복한 통합을 가능하게 해 준다. 남자는 직업과 정치적 생활에서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고, 시간과 우주를 통해 자기의 발현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방황에 싫증 날 때, 가정을 꾸리고 정착해서 세계 속에 닻을 내린다. 저녁이면 아내가 가구와 아이들을 돌보고 또 소중히 간직해 둔 과거를 지키는 가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다진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의 순수하고 동일한 일반성 속에서 삶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그녀는 불변의 종을 영속시키며, 매일 매일의 같은 리듬과 자기가 문을 닫고 지키는 가정의 항구성을 보장한다. 그녀에게는 미래나 세계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점유도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는 남편의 중개에 의해서만 자기를 넘어 집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결혼은 일반적으로 사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남편은 말하자면 사랑하는 남자의 대용품이지, 사랑하는 그 남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분리는 조금도 우연이 아니며, 결혼제도의 성격에 내포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이고 성적인 결합은 집단 이익을 향해 초월하는 게 관건이지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보장하는 데 있지 않다. 족장 체제 안에서는 – 어떤 회교도 집단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 부모의 권위에 의해서 선택된 약혼자들이 결혼 당일까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회적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개개인이 감정이나 성적 자의恣意에 기초해 자기의 삶을 설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자가 여자를 ‘얻기’ 때문에 – 그리고 특히 여성의 공급이 많을 때는 - 남자에게 좀 더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성행위가 여자에게 부과된 봉사로 여겨지고 그 봉사를 통해 여자의 이익이 성립되기 때문에, 여자의 고유한 선택을 무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혼은 남자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하여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개성도 없으므로 한 남자의 보호를 일생 보장받기 위해서 여자는 한 개인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한다. 나는 신앙심이 두터운 한 가정의 어머니가 딸들에게 “사랑이란 남자들이나 갖는 천한 감정이므로, 조신한 여자들은 그런 것을 몰라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헤겔이 『정신현상학』 제2권에서 표현하는 이론을 소박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관계나 아내의 관계에도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쾌락에 속하는 자연적인 무엇과 같은 개별성을, 또 부분적으로는 쾌락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소멸을 관조하는 부정적인 무엇과 같은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이런 개별성은 부분적으로 다른 한 개별성에 의해 항상 대치될 수 있는 우연적인 무엇이다. 성애가 지배하는 가정에서는 바로 이 남편이 아니라 일반적인 어떤 남편과 일반적인 아이들이 관건이다. 여자의 이런 관계는 감수성이 아니라 보편성 위에 세워진다. 여자의 윤리적 생활이 남자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은 바로 여자가 개별성에 따른 자기의 구별 속에서나 자기의 쾌락 속에서 직접적으로 보편적이며, 욕망의 개별성과는 무관하다는 데 있다. 이에 반해 남자의 경우에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남자는 시민으로서 자기를 의식하는 힘과 보편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는 욕망의 권리를 사는 동시에 이 욕망에 대한 자기의 자유를 지킨다. 이렇게 해서, 만약 여자와의 이런 관계에 개별성이 섞여 있다면 윤리적 성격은 순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윤리적 성격이 그러한 이상 개별성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며, 여자에게는 자기에 대한 의식도, 타자 속에서의 자기의식도 결여되어 있다."
즉, 여자는 개별성 속에서 선택된 남편과의 관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반성 속에서 여성적 기능의 행사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개별화된 형태가 아니라 오로지 종의 형태하에서만 쾌락을 알아야 한다. 이로부터 여자의 에로틱한 운명에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온다. 우선, 여자는 결혼 이외의 성적 활동에 어떤 권리도 없다. 부부에게 육체적 거래는 제도화되어 있으므로 욕망과 쾌락은 사회적 이익을 위해 희생된다. 그러나 노동자와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것을 향해 초월하는 남자는 결혼 전에도, 부부 생활 밖에서도 우연적인 쾌락을 맛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욕망을 채운다. 반면에 여자가 본질적으로 암컷으로 규정된 세계에서 여자는 어디까지나 온전히 암컷으로서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한편, 이미 보았듯이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르다. 남자는 남편 및 생식자로서 종種의 임무를 실행하면서 확실하게 쾌락을 얻는다.11 이에 반해 여자는 대개 생식 기능과 관능적 쾌락 사이에 분열이 있다. 그래서 결혼은 여자의 성생활에 윤리적인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여자의 성생활을 말살한다.
"세상이 받아들인 생활 규칙을 여자들이 거부한다 해도 전혀 잘못이 없다. 그것은 남자들이 여자들과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우리 남자들 사이에는 당연히 음모와 다툼이 있다. 우리는 여자들을 다음과 같이 경솔하게 다룬다. 여자들이 우리보다 사랑의 효과에 월등하게 더 유능하고 더 열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 우리는 절제를 여자 특유의 것으로, 그것도 극형으로 위협하면서 강요해 왔다. (…) 우리는 여자들이 건강하고 튼튼하고 원기 왕성하고, 알맞게 영양이 공급되고 아울러 순결한, 즉 뜨거우면서도 차갑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타오르는 것을 억제할 의무가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결혼은, 우리의 풍습에 따르면 여자들을 별로 시원하게 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 모권제 사회에서는 신부의 처녀성이 요구되지 않았다. 게다가 비의적인 여러 이유로 신부는 보통 결혼 전에 처녀성을 상실해야만 했다. 프랑스의 어떤 시골에서는 이런 낡은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거기서는 젊은 처녀에게 혼전 순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을 맡긴’ 처녀, 심지어 미혼모들이 다른 처녀보다 더 쉽게 남편감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편, 여자의 해방을 수락하는 사회에서는 젊은 처녀들에게 청년들과 똑같은 성적 자유를 인정한다. 하지만 부권사회의 윤리는 약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처녀로 넘겨지도록 엄격히 요구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의 씨를 품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 한다. 남편은 자기 것으로 삼은 이 육체의 완전하고 독점적인 소유권을 원한다.22 처녀성은 도덕적·종교적·신비적 가치를 띠고 있었고, 이 가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우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몇몇 지방에서 신랑이 의기양양하게 피 묻은 시트를 보여 줄 때까지 신랑의 친구들이 신방 문 뒤에서 웃고 노래하면서 머물러 있거나, 혹은 부모가 아침에 그 시트를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이 정도로 적나라한 형태는 아니지만, ‘첫날밤’의 관습은 아직도 매우 널리 퍼져 있다. 그런 관습과 온갖 외설 문학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분리는 필연적으로 외설을 낳는다. 휴머니즘의 도덕은 모든 살아 있는 경험이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 경험에 자유가 깃들어 있기를 요구한다.
이런 독창성이나 특이한 완벽성을 탐구하는 데 여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 이것이 여자의 노동에 ‘한도 끝도 없이 자질구레하고 무질서한 일’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점이라고 샤르돈은 지적했고, 가사노동의 진정한 부담을 평가하기도 몹시 어렵게 만든다. 최근의 설문조사C. 에베르의 서명하에 1947년 잡지 『전투Combat』에서 발표한에 의하면, 결혼한 여자는 평일에 약 3시간 45분, 휴일에 약 8시간으로, 주당 약30시간을 집안일에 바친다. 이는 여성 노동자나 여직원의 주간 노동시간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일은 직업에 추가된다면 막대한 것이고, 만약 여자가 다른 할 일이 없다면 대단치 않은 것이다 (여자 노동자나 여직원이 장소 이동에 시간을 버리지만, 가정주부는 그렇지 않으므로). 자식이 많으면 돌봄 노동은 여자의 피로를 엄청나게 가중한다. 가난한 가정의 어머니는 온종일 무질서한 노동에 힘을 소모한다. 이에 반해 일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부르주아 여성은 거의 한가하다. 이런 여가의 대가는 무료함이다. 많은 부르주아 여성은 무료하므로 자기들의 의무를 무한정 복잡하게 만들고 그 양을 늘린다. 그 결과 숙련 노동보다 더 과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신경쇠약에 걸렸던 한 여자 친구가 말하기를, 자기가 건강했을 때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살림했고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일도 할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신경쇠약증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집안일에만 매달렸으나 온종일 꼬박 일해도 완전히 끝마치기가 힘들다고 했다.
가장 서글픈 것은 이런 노동이 지속적인 창조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 거기에 더 많은 정성을 쏟기 때문에 – 자기 일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싶어 한다. 그녀는 오븐에서 케이크를 꺼내 바라보면서 한숨을 쉰다. 먹어 버리기에는 정말 아깝다! 왁스로 닦아 놓은 마루 위를 남편과 아이들이 흙 묻은 발로 다니는 것은 정말 유감스럽다. 사물들은 사용되는 즉시 더럽혀지거나 파괴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여자는 그런 사물들을 일체 어떤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여자는 곰팡이가 필 때까지 잼을 보존한다. 또 어떤 여자는 거실을 자물쇠로 잠가 둔다. 그러나 시간을 멈출 수 없다. 식료품에는 쥐가 모여들고 벌레도 생긴다. 이불과 커튼, 의복은 좀먹는다. 세계는 돌로 만들어진 꿈이 아니다. 세계는 분해 작용의 위협을 받는 석연치 않은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다. 식자재는 달리Salvador Dali(1904~1989)의 고기로 된 괴물만큼 불확실하다. 그것은 무기물처럼 죽은 듯이 보이지만 숨어 있던 유충이 시체로 변신시킨 것이다. 사물에 자기를 투영한 주부는 사물이 온 물질세계에 의존하듯 거기에 의존한다. 빨래는 눌어붙고 로스구이는 불에 타고 도자기는 깨진다. 그것은 절대적 재난이다. 사물은 한번 망가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을 통해서 영속성과 안전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탈과 폭탄을 수반하는 전쟁이 장롱과 집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의 산물은 소비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파괴를 통해서만 끝나는 일을 하는 여자에게는 끊임없는 체념이 요구된다. 이 같은 현실을 미련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찮은 희생들이 적어도 어디에선가 하나의 기쁨,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 활활 타올라야만 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현상 유지를 확보하는 데만 이바지하기 때문에, 집에 돌아온 남편의 눈에 무질서와 태만은 쉽게 드러나지만 질서와 청결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남편은 잘 차려진 식사에 더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다. 요리사는 식탁 위에 성공한 요리를 놓는 순간 승리한다. 남편과 아이들은 말로만 칭찬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 먹으면서 열렬히 그 음식을 받아들인다. 요리의 연금술은 계속되고, 음식은 유미乳縻가 되고 피가 된다. 신체의 보존은 마루의 보존보다 더 구체적이고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의미가 있다. 요리하는 여자의 노력은 분명 미래를 향해 초월되었다. 하지만 타인의 자유에 의존하는 것이 사물에서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보다 덜 헛되다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음식을 만드는 여자의 노동이 그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오직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의 입속에서뿐이다. 그녀는 그들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고 더 먹기를 바란다. 식욕이 없어 보이면 그녀는 화를 낸다. 감자튀김이 남편을 위해 마련된 것인지 남편이 감자튀김을 위한 것인지 더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애매함은 가정주부의 태도 전체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남편을 위하여 집안을 정돈한다. 그러나 남편이 버는 돈을 모두 가구나 냉장고를 사는 데 내어 주기를 요구한다. 그녀는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남편의 활동 중에서 그녀가 만든 행복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 말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여자가 가정에서 하는 노동은 그녀에게 자율성을 부여하지 않고 집단에 직접적으로 유익하지 않으며,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노동은 생산이나 행동 속에서 사회를 향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들에게 통합될 때에만 의미와 존엄성을 갖는다. 즉, 가사노동은 주부를 해방하기는커녕 남편과 아이들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그녀는 그들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녀는 그들의 인생에서 비본질적 매개자에 불과하다. 민법이 아내의 의무에서 ‘복종’을 지워 버렸다고 해도 그녀의 처지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아내의 처지는 부부의 의지가 아닌 부부 공동체의 구조에 기초한다. 여자에게는 긍정적인 일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그 결과 완성된 한 사람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는 아무리 존중받는다고 해도 예속되고 부차적이며 기생하는 존재다. 그녀를 짓누르는 무거운 저주는 자기 존재의 의미가 자기 수중에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부부 생활의 성공과 실패가 남자보다 여자에게 훨씬 더 중대성을 띤다. 남자는 남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이며 생산자다. 여자는 대개 전적으로 아내다. 여자의 노동은 여자를 여자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되레 그 신분에서 대가를 끌어내기도 하고 혹은 끌어내지 못하기도 한다.
여자는 때로 싸우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대개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싫든 좋든 간에 남자가 대신 생각한 것을 받아들인다. 남편이 부부의 의식意識이 되는 것이다. 수줍음, 서투름, 태만으로 인해 그녀는 모든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에 관해 공동 의견을 만드는 수고를 남자에게 일임한다. 그녀는 자신도 똑똑하고 교양 있고 독립적이지만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남편을 15년 동안이나 존경했다. 그래서 남편이 죽고 나서 자기 스스로 신념과 행동을 결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아직도 남편이 매사에 어떻게 생각하고 결정했을지 짐작하려고 애쓴다. 보통 남편은 이런 멘토와 지도자의 역할을 좋아한다.64 온종일 동료들을 상대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윗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했던 남편은 저녁에 집에 돌아와 절대적 우월자라 느끼며, 이론의 여지없는 여러 가지 진실을 쏟아내기를 좋아한다.65 그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반대자들이 아닌 그가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감을 확고하게 해 주는 아내에게서 또 하나의 자아를 발견하고는 행복해한다. 그는 신문 기사나 정세를 설명해 주고, 문화 전반에서 아내가 자율성을 갖지 못하도록 큰 소리로 기꺼이 신문을 읽어 준다. 남편은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까닭 없이 여자의 무능을 과장한다. 그녀는 다소 순종적으로 이 종속적인 역할을 받아들인다. 남편의 부재를 진심으로 아쉬워하면서도 그 기회를 통해 자기 안의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아내들이 얼마나 놀라며 기뻐하는지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녀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일을 처리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결정하고 관리한다. 여자들은 남편이 돌아오고 다시 무능력해져 버릴 때에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균형 잡힌 남녀 한 쌍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런 커플은 때로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할 수도 있으나 대개는 그 밖에서 존재한다. 어떤 커플은 커다란 성적 사랑에 의해서만 결합되어 있고, 우정과 일에서는 서로 자유롭다. 또 어떤 커플은 각자의 성적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우정으로 맺어져 있다. 더 드물게는 연인인 동시에 친구인 커플도 존재하지만, 각자가 상대 속에서 자기의 배타적인 삶의 이유를 찾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 속에는 수많은 뉘앙스가 가능하다. 우정, 쾌락, 신뢰, 애정, 공모, 사랑에서 그들은 각자 서로에게,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희열, 풍요, 힘의 가장 비옥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결혼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개인들에게 있지 않다. 그것은 – 보날드, 콩트,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 제도 자체가 근원적으로 타락한 것이다. 서로 선택조차 하지 않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온갖 방법으로 서로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선포는 필연적으로 위선, 거짓, 적의, 불행의 결과를 낳는 끔찍한 것이다.
현대의 가정에서, 특히 미국에서는 통념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노예 상태에 몰아넣었다고 말한다.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부터 남자들은 크산티페의 횡포를 하소연하였다. [...] 즉, 사람은 억압함으로써 피억압자가 된다. 남자들은 자기들의 지배력을 통해서 예속된다. 아내가 수표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만이 돈을 벌기 때문이고, 아내가 남편에게 성공하라 강요하는 것은 그들만이 직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의 계획이나 성공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남자들에게서 초월성을 훔치려고 하는 것은 남자들만이 초월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여자의 횡포는 여자의 예속성을 나타낼 뿐이다. 그녀는 부부 생활의 성공, 자기의 미래와 행복, 정당화가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악착같이 남자를 자기 의지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남자 속에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기의 약점을 무기로 삼는다. 하지만 여자가 약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부간의 노예 상태는 남편에게 더 일상적이고 더 화나는 일이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더 심각한 것이다. 자기가 무료하므로 남편을 몇 시간씩 자기 곁에 붙들어 놓는 아내는 남편을 구속하는 것이며 그에게 짐이 된다. 요컨대 아내가 남편 없이 지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남편은 아내 없이 지낼 수 있다. 그가 아내를 떠나면, 아내의 삶은 파멸하게 된다. 남녀 간의 커다란 차이는 여자에게 의존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자유를 가지고 행동할 때조차 여자는 노예이다. 반면에 남자는 본질적으로 자율적이고 구속을 외부로부터 받는다. 남자가 희생자는 자기 쪽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견뎌 내는 부담이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기생충처럼 남자가 먹여 살린다. 그러나 기생충은 자신감 넘치는 주인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수컷과 암컷은 결코 상대의 희생물이 아니라 다 같이 종種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부 역시 본인들이 만들지 않은 제도의 억압을 함께 견디고 있다. 누가 남자들이 여자들을 억압한다고 말하면 남편은 분개한다. 억압받는 쪽은 자기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억압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남성적 민법, 즉 남성에 의해 남성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가 오늘날 남녀 모두에게 고통의 원천이 되는 형태로 여성의 조건을 규정해 버린 것이다.
남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결혼이 여자에게 하나의 ‘직업’이 되는 것을 지양하면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안티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자들은 ‘여자는 이미 충분히 넌더리 나는 존재다’라는 구실로 당치않은 이론을 늘어놓고 있다. 결혼은 여자를 ‘사마귀 암컷’으로, ‘거머리’로, ‘독’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결혼의 형태를 바꾸고 여성의 조건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세상이 여자의 자립을 금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그토록 무거운 짐이 된다. 여자를 해방함으로써, 다시 말해 여자에게 이 세계에서 할 일을 부여함으로써 남자는 해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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