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0. 성 입문
이러한 문제에 관해 생물학적·사회적·심리적 관점에서 동시에 살펴볼 때, 남자와 여자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자의 경우, 유아의 섹슈얼리티에서 성숙기에 이르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거기에는 에로틱한 쾌락의 객관화가 있는데, 이 에로틱한 쾌락은 내재적인 현전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에게로 지향된다. 발기는 이러한 욕구의 표현이다. 남자는 성기, 손, 입 등 온몸으로 상대를 향해 자기 자신을 내민다. 그러나 그는 이런 활동의 한가운데서도 자기가 지각하는 객체와 다루는 도구 앞에서 일반적으로 주체로서 머무르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자율성을 잃는 일 없이 타자를 향해 자신을 던진다. 여자의 육체는 남자에게는 먹이며, 남자는 자기의 관능이 모든 객체에 대하여 요구하는 특질들을 여성의 육체에서 포착한다. 확실히 그는 자기 소유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 특질들을 껴안는다. 애무나 키스는 반은 실패한다. 그러나 이 실패조차도 자극이며 기쁨이다. 사랑의 행위는 그 자연적 완성인 오르가슴에서 통일성을 발견한다. 성교는 명백한 생리적 목적이 있다. 남자는 사정을 통해 자기를 압박하고 있는 분비물을 쏟아낸다. 남자는 성적으로 흥분한 뒤에 반드시 쾌락이 수반되는 완전한 해방을 얻는다. 물론 쾌락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쾌락에는 종종 환멸이 뒤따른다. 욕구가 채워졌다기보다 그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해진 행위는 이행되었고, 남자는 다시 온전한 몸이 된다. 그가 종種에게 한 봉사는 자신의 향락과 통합되었다.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여자가 처한 상황의 복잡성을 반영하기에 훨씬 더 복잡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암컷은 종으로서의 힘을 자기의 개별적인 생활에 통합시키는 대신, 그 개별적 목적과 분리된 이해관계를 가진 종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은 인간 여자에게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특히 음핵과 질이라는 두 기관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유아 단계에서는 음핵이 여성 에로티시즘의 중심부이다.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여자아이들의 경우 질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의견이다. 아무튼 질은 부수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할 것이다. 음핵 체계는 성년기에도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일생 이 에로틱한 자율성을 보존하고 있다. 음핵의 경련은 남자의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거의 기계적으로 얻어지는 일종의 붓기와 가라앉기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성교에 간접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며, 생식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여자가 침투되고 수태되는 것은 질을 통해서다. 질은 남자의 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에로틱한 중심부가 되고, 이런 개입은 언제나 일종의 폭행 성질을 띤다. 옛날에 여자가 자기의 어린이 세계에서 뿌리 뽑혀 아내로 사는 삶에 던져진 것은 실제 또는 위장된 유괴에 의해서다. 그녀를 소녀에서 여자로 바꾸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처녀성을 ‘빼앗는다’거나 처녀의 꽃을 ‘꺾는다’거나 하는 말이 있다. 이런 처녀성의 상실은 지속적 발전의 조화로운 결말이 아니라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며, 새로운 시기의 시작이다. 쾌락은 이때 질의 내부 표면이 수축함으로써 일어난다.
정상적인 성행위는 사실상 여자를 남자와 종에 예속시킨다. 공격적 역할을 하는 것은 – 거의 모든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남자지만 여자는 남자가 껴안는 것을 감내한다. 보통 여자는 남자에게 언제나 잡힐 수 있지만, 남자는 발기 상태가 아니면 여자를 취할 수가 없다. 여자를 처녀막보다 더 확실하게 봉封하는 질 경련과 같은 강한 반항의 경우가 아니라면, 여자의 거부는 극복될 수 있다. 질 경련의 경우라도 남자에게는 아직 완력으로 좌우할 수 있는 육체를 상대로 해서 자기 욕구를 충족할 방법이 남아 있다. 여자는 객체이기 때문에, 그녀의 무기력은 그 본래의 역할을 심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많은 남자가,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자가 성교를 원하는지 혹은 그저 거기에 복종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죽어 있는 여자와도 동침할 수 있다. 성교는 남자의 동의 없이 일어날 수 없으며, 자연적 종료도 남자의 충족에 의해서다. 여자가 아무런 쾌감을 느끼지 않아도 수태는 이루어질 수 있다. 한편, 여자에게 수태는 성적 과정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반대로 종이 여자에게 요구한 봉사는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서서히, 고통스럽게 임신, 출산, 수유 속에서 실현된다.
남자와 여자의 ‘해부학적 운명’은 이처럼 완전히 다르다. 도덕적·사회적 상황 역시 다르다. 가부장제 문명은 여자에게 순결을 강요했다. 남자에게는 성욕을 채우도록 다소 공공연하게 그 권리를 인정했지만, 여자는 결혼 속에 갇혀 있게 된다. 그녀에게 육체적 행위는 법이나 의식에 의해 신성화되지 않으면 과실이고 타락이며, 패배이자 약점이다. 그녀는 자기의 정조와 명예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그녀가 ‘몸을 허락’하거나 ‘타락’하면 그녀는 멸시당하게 된다. 그녀를 정복한 남자에게 가해지는 비난에는 찬탄도 들어 있다. 원시 문명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잠자리는 여자에게 ‘봉사’이며, 그에 대해서 남자는 여자에게 선물로 혹은 그녀를 부양하는 책임으로 감사를 대신해 왔다. 그러나 봉사한다는 것은 주인을 갖는다는 것이며, 이런 관계에는 어떤 상호성도 없다. 결혼의 구조가, 매춘부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로 상호성 없는 관계의 증거다. 여자는 자신을 주고, 남자는 여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녀를 취한다. 남자가 열등한 존재들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일을 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젊은 처녀의 첫 경험은 사실상 강간이며, 남자는 추악하고 난폭한 모습을 드물지 않게 드러낸다. 특히 풍습이 거친 시골에서는 농부의 딸들이 반승낙, 반강제로 후미진 구석에서 수치심과 공포 속에서 처녀성을 잃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계층과 계급에서든 자기의 쾌락을 허겁지겁 구하는 이기적인 애인에게, 혹은 결혼의 권리를 방패삼아 신부의 저항을 모욕처럼 불쾌하게 여기고 목적을 이루기 어려우면 분통을 터트리기까지 하는 남편에게, 처녀성을 난폭하게 빼앗기는 일이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더욱이 남자가 공손하고 정중하다 할지라도 최초의 삽입은 언제나 겁탈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입술, 유방을 애무해 주기를 바라고, 어쩌면 허벅지 사이에서 이미 알고 있거나 혹은 예감하고 있는 쾌락을 갈망하고 있는데, 이제 남자의 성기가 젊은 처녀를 찢고 초대받지 않은 곳에 침입하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애인의 품 안에서 마침내 자기의 관능적인 꿈이 성취된다고 믿는 순간, 성기의 은밀한 부분에 예기치 않은 통증을 느끼며 멍해진 처녀의 고통스러운 놀라움은 그동안 많이 묘사되었다. 꿈은 자취를 감추고 흥분은 사라진 자리에 사랑이 외과적 수술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현실의 경험에서 예전에 처녀의 상상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통증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삽입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남자는 성교에서 외부 기관만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자는 내부까지 침범당한다. 물론 남자 쪽에서도 여자의 비밀스러운 암흑 속으로 위험을 무릅쓰며 들어가는 것을 불안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들은 동굴의 입구나 무덤 앞에서 느끼는 어린이의 공포를, 또는 톱니바퀴나 낫, 늑대 함정 앞에서 느끼는 공포를 또다시 느낀다. 그들은 자기의 부푼 페니스가 점막의 칼집 속에 박힌 채 있게 될 거라고 상상한다. 여자는 일단 관통당하면 위험의 느낌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자기가 육체적으로 소외된 것처럼 느낀다. 지주는 자기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주부는 ‘출입 금지’라고 선언함으로써 자기 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특히 여자들은 초월성이 박탈당했기 때문에 사생활을 조심스럽게 보호한다. 그녀들의 침실, 장롱, 함函은 신성한 것이다. 콜레트는 어느 날, 한 늙은 창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부인, 내 방에는 어떤 남자도 절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내가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파리라는 도시는 아주 큽니다.” 나이가 들어 몸을 쓸 수 없었지만, 그녀는 적어도 타인에게 금지된 땅 한 평쯤은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젊은 처녀는 자기 몸 외에는 자기만의 소유가 거의 없다. 그래서 몸은 그녀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다. 그녀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그녀에게서 그 보물을 빼앗아간다. 앗아간다는 통속적인 말은 산 경험으로 확인된다. 그녀가 강하게 느꼈던 굴욕감, 그녀는 그것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그녀는 지배당하고 굴복되며 패배당한다. 거의 모든 암컷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교하는 동안에 남자 밑에 있다.137 아들러는 거기서 결과하는 열등감을 매우 강조했다. 유년 시절부터 상위·하위의 관념은 지극히 중요하다.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다. 하늘은 땅 위에 있고, 지옥은 땅 밑에 있다. 떨어지고 내려가는 것은 실추하는 것이고, 올라가는 것은 고양하는 것이다. 레슬링에서의 승리는 상대의 어깨를 바닥에 닿게 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여자는 침대에서 패배의 자세로 누워 있다. 만약 남자가 고삐나 재갈이 물린 짐승을 올라타듯 여자 위에 올라탄다면 한층 더 나쁜 상황이다. 아무튼 그녀는 자기를 수동적으로 느낀다. 그녀는 애무를 받고 침투당하며, 남자가 능동적으로 자기를 소비하는 동안 성교를 참아 내고 받아들인다. 물론 남자의 성기는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가로무늬 근육이 아니다. 그것은 쟁기도 검도 아닌 살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는 그 살덩이에 임의의 운동을 부여한다. 남자는 가고 오고,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데 반해, 여자는 그 임의의 운동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인다. 사랑의 체위를 선택하고 성교의 시간과 횟수를 결정하는 것은 - 특히 여자가 무경험자면 – 남자다. 그녀는 자기를 도구로 느낀다. 자유가 전적으로 상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에게 관능의 양상은 남성의 경우와 전혀 같지 않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질의 쾌감이 결정적 오르가슴에 도달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여성들의 고백이 흔치 않고, 정확성을 기하려는 경우에도 그녀들은 지극히 모호한 채로 있다. 반응은 개개인에 따라서 매우 다른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남자에게 성교는 명확한 생물학적 목적인 사정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복잡한 수많은 다른 의도를 통해 이 목적이 조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은 결말처럼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욕망의 충족이나 적어도 그것의 소멸처럼 보인다. 이와 반대로 여자에게는 목표가 처음에는 불확실하고, 생리학적이라기보다 심리학적 성격을 띤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흥분과 관능적 쾌감을 원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사랑 행위의 어떤 명확한 결론도 투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여자에게 성교는 결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목적을 수반하지 않는다. 남자의 쾌감은 화살처럼 상승하다가 어떤 일정한 문턱에 다다르면 완성된다. 그리고 오르가슴 속에서 불시에 죽어 버린다. 성행위의 구조는 완결되고 중단된다. 여성의 쾌락은 생식 체계에 늘 집중된 것이 아니라 온 육체에 퍼져 있다. 진정한 오르가슴보다는 오히려 질의 수축이 리듬에 맞추어 사라졌다가 다시 형성되고, 때때로 극점에 도달했다가 그다음 헝클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죽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파동 체계를 형성한다. 여성에게는 어떤 최종 단계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쾌락이 무한을 겨냥한다. 여성 에로티시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뚜렷한 만족감보다는 흔히 신경이나 심장의 피로 혹은 심리적 포만 상태다. 만족하거나 또한 기진맥진하더라도 여자는 결코 완전히 해방되는 일이 없다.
정신분석학자들은 프로이트의 학설에 따라서 마조히즘을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고통과 성적 쾌감의 결합에 이루어지고, 다음은 여자가 성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수락하는 경우며, 마지막은 자기 징벌의 메커니즘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쾌감과 고통이 처녀성의 상실과 분만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여자가 자기의 수동적 역할에 동의하고 있어서 마조히스트라는 것이다.
고통에 에로틱한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서, 곧 수동적인 복종의 태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통은 그것을 겪고 있는 개인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흥분과 쾌락의 격렬함으로 인해 마비된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육체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예리한 빛이다. 그 빛은 연인이 실신해 있던 명부冥府에서 구출해 내어 다시 그곳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 준다. 고통은 정상적으로는 성적 흥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서로에게 환희를 주는 육체임을 기뻐하는 두 사람의 육체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만나고 결합하고 대결하고자 한다. 에로티시즘에는 자기 망각과 격정과 황홀이 있다. 고통 역시 자기의 한계를 파괴하는 것이어서, 일종의 초월이며 극도極度다. 고통은 언제나 요란한 연회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섬세한 것과 고통스러운 것이 서로 인접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애무가 고문이 될 수 있고 형벌도 쾌락을 줄 수 있다. 껴안는 것은 깨물고 꼬집고 할퀴는 것을 쉽게 끌어들인다. 이런 행동들이 전반적으로 사디즘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행동들은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견디는 주체도 자기를 부인하고 굴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합하기를 바라고 있다. 게다가 이런 행동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고통이 예속의 표명으로서 파악되고 원해진 경우에만 마조히즘적 의미가 있다. 처녀성 상실의 고통에는 정확히 말해 쾌락이 수반되지 않는다. 모든 여자는 분만의 고통을 무서워하는데, 현대적 의술이 그 고통을 없애 주는 데 대해서 행복해한다. 여자들의 섹슈얼리티에서 고통은 남자들의 섹슈얼리티에서와 똑같은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한편, 여자의 성적 역할이 대부분 수동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의 정상적인 공격성이 사디즘적인 게 아닌 것처럼, 이런 수동적인 상황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 마조히즘적인 것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 주체성의 확립을 유지하면서 애무나 흥분이나 삽입을 자신의 쾌락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또한 연인과의 결합을 추구할 수도 있고 그에게 자신을 맡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자기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지,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타인의 의식意識을 통해 자기를 순수한 물체로 만들고, 또 자신에게도 물체로 표상하며 물체인 척할 때 마조히즘이 나타난다. “마조히즘은 나의 객체성으로 타자를 매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나의 객체성에 나 스스로가 매혹되기 위한 시도다.”147 사드의 쥘리에트148나 『규방철학』149에서 젊은 처녀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남자에게 몸을 내맡기지만,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전혀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채털리 부인이나 케이트150는 전적으로 자기를 상대방에게 내맡기는 데 동의하고 있으므로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마조히즘을 말할 수 있으려면 자기가 자기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하고, 이 소외된 제2의 자기가 타인의 자유에 의해 확립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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