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3. 어머니
여자는 자기의 생리적 운명을 모성에 의해 완전히 성취한다. 여자 몸의 모든 기관이 종種의 존속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으므로, 여자의 ‘자연적’ 소명은 바로 모성에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 사회는 결코 자연 그대로가 아니다. 특히 약 1세기 전부터 재생산 기능은 단지 생물학적 우연에만 지배되지 않고, 의지로 통제되어 왔다.93 몇몇 나라들은 ‘산아제한’의 적확한 방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가톨릭교의 영향 아래에 있는 나라에서도 불법이지만 행해지고 있다. 혹은 남자가 사정을 중단하든가, 관계가 끝난 뒤에 여자가 정자를 체외로 배출한다. 이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흔히 싸움과 원한의 원천이 된다. 남자는 자기의 쾌락을 자제해야만 하는 데 대해 분개하고, 여자는 세정의 번거로움을 싫어한다. 남자는 여자의 너무 다산적인 자궁을 원망하고, 여자는 남자가 자기 체내에 남겨둘 위험이 있는 생명의 씨를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걸려들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망연자실한다. 피임 방법이 초보적인 나라에서 그런 경우는 빈번하다. 그래서 반反 자연적 방법은 특별히 중대한 형태를 띤다. 그것은 낙태다. ‘산아제한’을 허용하는 나라에서도 이 방법은 금지되어 있어서 실행 기회가 아주 적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많은 여성이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으로, 여성 대부분의 연애 생활에 어른거리고 있다.
합법적 낙태에 반대하는 실제적 이유는 전혀 타당성이 없다. 도덕적 이유로 말하자면, 가톨릭교의 낡은 논법으로 귀착된다. 즉, 태아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세례도 받지 않고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때에 따라서 성인 남자의 살해를 허용한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전쟁이나 사형수의 경우가 그러한데, 태아에게는 대단히 인도주의적이다. 태아는 세례를 통해 정화되지 않았다. 이교도에 대항한 성전 시대에 이교도들 역시 정화되지 않았는데, 그들을 학살하는 것은 공공연하게 장려되었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은 아마도 모두 죄가 없지 않았고, 오늘날 사형당하는 범죄자들과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경우를 교회는 신의 은총에 맡긴다. 교회는 인간을 자기 수중에 있는 도구로, 한 영혼의 구제를 신과 교회 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신이 태아를 하늘로 맞아들이는 것을 막는 것일까? 종교회의가 그것을 허용한다면, 경건한 인디언 학살의 호시절과 마찬가지로 신은 항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여기서 사람들은 도덕과는 아무 관계없는 완고하고 낡은 전통에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남성의 사디즘도 고려해야 한다. 1943년 루아Roy 박사가 페탱Henri Philippe Pétain1856~1951에게 헌정한 책이 그 생생한 실례다. 그것은 악의적인 기념비다. 그는 낙태의 위험에 관해 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역설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제왕절개 수술만큼 위생적인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는 낙태를 경범죄가 아니라 중대한 범죄로 여기기를 원한다. 그리고 낙태는 치료 요법 형태하에서조차 금지되기를, 다시 말해 임신이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을 위험하게 할 때도 금지되기를 바란다. 즉, 한 생명과 다른 한 생명을 놓고 그중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선언하며, 이런 논법에 강한 그는 산모를 희생시킬 것을 권하고 있다. 태아는 어머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율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수적 생각의’ 의사들이 모성을 찬양할 때는, 태아는 모체의 일부분이지 모체를 희생시켜서 양육되는 기생물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와 같은 남자들이 여자를 해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격렬히 거부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안티페미니즘이 얼마나 활발한지 알 수 있다.
남자들은 낙태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의 간교함이 여자에게 가하는 여러 가지 사고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즉, 거기에 관련된 가치를 헤아리지 못한다. 남자의 윤리가 가장 철저하게 이의 제기될 때, 여자는 여성성이나 자기의 가치를 부정한다. 그녀의 모든 도덕적 미래는 그것으로 인해 흔들린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여자는 아기를 낳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모성을 찬양하는 노래도 들어왔다. 여성 조건의 불리한 점 – 월경·질병 등 -과 가사 임무의 지겨움, 이 모든 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놀라운 특권으로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제 남자는 자기의 자유를 지키려고, 자기 장래를 불리하지 않게 하려고, 자기 직업상의 이익을 지키려고 여자에게 여자로서의 승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이는 전혀 보배로운 존재가 아니며, 아이를 낳는 것은 더 이상 신성한 일도 아니다. 여자의 몸에 생긴 이 조그만 살덩어리는 우연적이고 성가신 존재다. 또한 여성성의 여러 가지 결함 중 하나다. 그에 비하면 매달 있는 월경의 고역은 축복인 것처럼 보인다. 어린 소녀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그 붉은 피가 다시 흐르기를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다. 전에 사람들은 그것이 아이를 낳는 기쁨을 가져다준다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낙태에 동의하고 원하면서도 여자는 그것을 여성성의 희생처럼 느낀다. 여자는 결정적으로 자기 성 속에서 저주와 일종의 불구, 위험을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부정의 끝까지 가면서 어떤 여자들은 낙태의 트라우마로 인해 동성애자가 된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자기 운명을 더욱 성공시키려고 여자에게 육체적 가능성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남자는, 같은 시간에 남자의 도덕적 규범이 위선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규범은 낙태를 보편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특별히 편리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경솔하고 파렴치하게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자는 이러한 모순을 상처 입은 자기 몸속에서 느낀다.
그러나 임신은 특히 여자에게 자기와 자기 사이에 거행되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는 임신이 자기를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손상하는 것처럼 느낀다. 태아는 자기 몸의 일부이며, 자기 몸을 잠식하는 기생물이다. 그녀는 태아를 소유하고 있으며, 또 태아에게 소유당하고 있다. 태아는 미래 전체를 압축하고 있어서, 임신해 있는 동안 여자는 자기를 세계와 같이 드넓게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조차도 그녀를 무無로 돌려버려서 그녀는 자기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다. 새로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 그녀의 존재를 정당화해 주려 한다. 그녀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어두운 힘에 농락당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녀는 휘둘리고 괴롭힘당한다. 임신한 여자에게는 그녀의 몸이 초월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내재로서 파악되는 특이함이 있다. 즉, 구토와 불편함 속에서 몸은 자기 안에 움츠러든다. 몸은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기를 멈추고, 일찍이 그래본 적이 없었던 큰 부피를 갖게 된다. 장인이나 행동하는 남자의 초월은 주체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장래의 어머니에게서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사라진다. 그녀는 자기의 몸을 팽창시키는 이 아이와 함께 생명에 휩싸인 모호한 한 쌍을 이룬다. 자연의 올가미에 걸려든 그녀는 식물이자 동물이고 아교질의 저장소이며, 알을 품은 암탉이자 알이다. 그녀는 이기적 몸을 가진 아이들을 겁먹게 하고, 젊은 사람들을 비웃게 만든다. 왜냐하면 한 명의 인간이자 의식이고 자유인 그녀가 생명의 수동적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은 통상 존재의 한 조건일 뿐이다. 잉태에서 생명은 창조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연과 사실성 속에서 실현되는 기묘한 창조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진정으로 아이를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녀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녀의 몸은 오로지 아이의 몸만을 낳을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축해야 할 하나의 실존을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유로부터 유래하는 창조는 대상을 하나의 가치로 설정하고, 그 대상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태내에서 아이의 존재 이유는 정당화되지 않았고, 아직 무상의 번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우연성은 죽음의 우연성과 대칭을 이루는 순수한 사실일 뿐이다. 어머니는 한 아이를 원하는 자기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장래 존재하게 될 이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자기 몸의 일반성 속에서 낳는 것이지, 자기 실존의 개별성 속에서 낳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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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남아냐 여아냐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진다.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남아가 더 ‘힘들다’ 할지라도 더 잘 적응한다. 여자가 인정해 주는 위력 때문에, 그리고 남자들이 구체적으로 쥐고 있는 특권 때문에 많은 여자가 아들을 원한다. “남자 한 명을 낳는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라고 그녀들은 말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여자들은 ‘영웅’을 낳기를 꿈꾸고 있고, 영웅은 당연히 남성이다. 아들은 우두머리, 지도자, 군인, 창조자가 될 것이다. 그는 지상에다 자기 의지를 관철할 것이며, 그 어머니는 그의 불멸성에 함께할 것이다. 그녀가 세우지 못한 집, 탐험하지 못한 나라, 읽지 못한 책, 그것들을 아들이 주게 될 것이다. 그녀는 아들을 통해 세계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단, 자기 아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여기서 그녀에게 태도의 역설이 생긴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야말로 양면성이 가장 덜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과 사랑에서처럼 모성에서도 남자의 초월성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만약 부부 생활이나 애정 생활에서 남자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면, 유아 모습으로 축소된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녀는 장차 아이가 뽐낼 성기를 빈정거리는 친숙함으로 대할 것이다. 때로는 얌전히 굴지 않으면 사람들이 성기를 떼 버릴 것이라며 아이를 두렵게 한다. 그보다 더 겸손하고 온화한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미래의 영웅을 소중히 다루더라도, 아들을 진정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를 그의 내재적 현실에 가두려고 노력한다. 남편을 아이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아기로 취급한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거세하려 한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단순하다. 그녀의 꿈은 더 모순적이다. 즉, 아들이 무한하기를 원하지만 자기 손안에 있기를 원하고, 세계를 지배하기를 원하지만 자기 앞에 무릎 꿇기를 원한다. 그녀는 아들이 여리고 잘 먹고 이기적이고 수줍어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도록 장려한다. 그에게 운동을 금하고 친구와의 교제를 금하며, 그가 자신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아들을 자기의 것으로 갖고 싶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모험가나 챔피언이나 천재가 되지 못하면 실망한다.
여자아이는 그보다 더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넘겨진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주장은 강해진다. 그녀들의 관계는 훨씬 더 극적인 성격을 띤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선택된 계급의 일원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분신을 찾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모호성을 딸에게 모두 투사한다. 이 분신의 이타성異他性이 확립되면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앞에서 이야기한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이 극단적 형태를 취한다.
대다수 여자는 자기의 여성 조건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동시에 그 조건을 혐오한다. 그녀들은 적개심 속에서 여성 조건을 경험한다. 자기 성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딸들에게 남성적 교육을 하도록 부추길 수 있을 것이다. 딸에게 관대한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다. 여자를 낳은 데 대해 화가 난 어머니는 “너도 여자가 되어야 해”라는 애매한 저주로 딸을 맞이한다. 그녀는 자기의 분신으로 여기는 딸을 우월한 존재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열등함을 보상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자기를 괴롭힌 결점을 딸에게도 과하려고 한다. 때로는 자신의 운명을 아이에게 똑같이 강요하려고 한다. “나에게 좋았던 것은 너에게도 좋은 것이야. 내가 그렇게 자랐으니 너도 나와 운명을 같이해야 해.” 때로는 이와 반대로, 딸이 자기를 닮는 것을 맹렬히 금한다. 어머니는 자기의 경험이 경종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반동이다. 품행이 좋지 않은 여자는 딸을 수녀원에 집어넣고, 무지한 여자는 딸에게 교육받게 한다.
남자가 여자들에게서 맛보는 쾌감, 즉 자기가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 이런 쾌감을 여자는 자기 아이들, 특히 딸들을 통해서만 경험한다. 자기의 특권이나 권위를 단념해야 한다면 그녀는 욕구 불만을 느낀다. 정열적인 어머니든 적의에 찬 어머니든 간에 아이의 독립은 그녀의 희망을 좌절시킨다. 그녀는 이중으로 질투한다. 즉, 자기에게서 딸을 빼앗아 가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세계의 일부분을 쟁취하면서 자기에게서 그것을 훔쳐 가는 딸에게 질투한다. 이런 질투는 우선 딸아이가 아버지와 갖는 관계로 향한다. 때때로 어머니는 남편을 가정에 묶어 두기 위해 아이를 이용한다. 술책이 실패할 경우에 분해하지만, 성공하면 반대로 재빨리 자기의 유아적 콤플렉스를 되살아나게 한다. 즉, 예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딸에게 화를 낸다. 토라지고, 자기가 버림받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내아이가 그런다면 어머니는 기꺼이 용서한다. 사내아이들은 남자의 특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불가능한 경쟁을 단념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왜 자기에게 거부된 특권을 더 많이 누리려고 하는가? 근엄함의 함정에 갇힌 어머니는 가정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을 잊게 해 주는 딸의 모든 활동과 놀이를 부러워한다.
모성 본능이란 말은 어떤 경우에도 인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태도는 그녀의 상황 전체에 의해서, 그녀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해서 정해진다.
H. 도이치 역시 내가 자주 인용한 저서에서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녀는 정신의학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모성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그녀는 모성의 기능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여자가 전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모성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다만 모성이 자유롭게 수용되고 진심으로 원했을 때라는 조건이 붙는다. 젊은 여자는 반드시 심리적·도덕적·물질적으로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는 상황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처참해질 것이다. 특히 우울증이나 신경병을 앓는 여자에게 치유책으로 아이 갖기를 권하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여자와 아이를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 균형 잡히고 건전하며 자기 책임을 의식하는 여자만이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결혼을 짓누르는 저주는 대개 두 사람이 그들의 힘이 아닌 약함 속에서 결합해 있다는 것이고, 서로 상대에게 주는 것을 싫어하고 받기만을 원했을 때라고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자기 자신이 창조할 수 없었던 충만함, 열정, 가치를 아이를 통해 얻겠다고 꿈꾸는 것은 기대에 한층 더 어긋나는 환상이다. 아이가 안겨주는 기쁨은 타인의 행복을 사심 없이 바랄 수 있는 여자만 얻을 수 있고, 자기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기 존재를 초월하려고 노력하는 여자만이 누릴 수 있다. 확실히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여자가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이미 만들어진 정당화를 나타내지 않고, 확실치 않은 이익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바람직해야 한다. 이에 대해 슈테켈이 아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사랑의 대용품이 아니다. 그들은 망가진 인생의 목표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 인생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마련된 물질도 아니다. 아이들은 책임이며 무거운 의무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가장 관대한 꽃무늬 장식이다. 부모의 장난감도 아니고, 삶에 대한 부모의 욕구 실현도 아니며, 충족되지 않은 부모의 야망을 대신하는 대용품도 아니다. 아이들은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의 책무다.
그와 같은 책무에는 자연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즉, 자연은 도덕적인 선택을 결코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도덕적인 선택은 약속을 내포한다. 아이를 낳는 것은 맹세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어머니가 그것을 회피한다면, 그녀는 인간존재에 대해, 한 자유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부모가 자식과 갖는 관계는 부부 관계처럼 자유롭게 원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는 여자에게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특권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한 여자에 대해 ‘아이가 없어서’ 애교가 많다느니, 사랑에 빠졌다느니, 동성애자라느니, 야심적이라느니 하는 말을 쉽게 한다. 그녀의 성생활, 그녀가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아이를 대신할 거라고 한다. 사실 그런 말에는 원래 명확한 것이 없다. 사랑도 없고, 일도 없고, 자기의 동성애 성향을 만족시킬 수도 없어서, 여자가 아이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사이비 자연주의 아래 숨어 있는 것이 사회적·인위적 도덕이다. 아이가 여자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광고의 슬로건 같은 의미만 있다.
첫 번째 편견에 직접적으로 내포된 두 번째 편견은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확실한 행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모성애란 하등 타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에 어긋난’ 어머니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나쁜 어머니들이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정상적인’ 부모가 아이에게 위험을 만들어 낸다는 중요한 진리를 밝혀냈다. 어른들이 고통받는 콤플렉스, 강박관념, 신경병은 그 뿌리를 가족의 과거에 두고 있다. 그들 자신의 갈등, 분쟁,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부모는 아이를 위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동반자다. 자기가 태어난 가정생활로 인해 강한 인상을 받은 그들은 콤플렉스와 욕구 불만을 통해 그들의 아이들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의 사슬은 한없이 계속된다. 특히 어머니의 사도마조히즘적 행위는 딸에게 죄의식을 만들어 내고, 이 죄의식은 딸이 자기 아이들에게 사조마조히즘적 행위를 드러내게 하므로 그 악순환은 끝이 없다. 여자에게 보내는 경멸과 어머니를 에워싸는 존경심이 양립하는 것에는 기상천외한 기만이 있다. 여자에게 모든 사회적 활동을 금하고 남성의 직업에 접근조차 못하게 하여, 모든 영역에서 여자의 무능함을 공언하면서도 여자에게 ‘인간 형성’이라는 가장 섬세하고 가장 막중한 일을 맡기는 것은 모순으로 가득 찬 범죄 행위다. 풍습과 전통은 아직도 많은 여자가 남자들의 특권인 교육, 문화, 책임, 활동을 취하지 못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러고도 세상은 여자들의 품에 거리낌 없이 아이를 안긴다. 예전에 남자아이와 비교해 여자아이의 열등함을 여자아이에게 인형을 쥐여 주며 위로했던 것처럼, 여자들에게 삶을 허용하지 않고 그 보상으로 살과 뼈로 된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한다. 이것으로 여자는 완전히 행복할 것이라든가, 혹은 자기의 권리를 남용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성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에게 가정 살림을 맡기는 것보다는 국가의 통치를 맡기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몽테스키외의 말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즉시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즉, 여자는 추상적 사고나 협의에 기초한 활동에서 자기 성을 가장 쉽게 극복한다. 현재로서는 여자로서의 과거에서 해방되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감정의 안정을 발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남자 역시 가정에서보다 자기 일을 할 때 훨씬 더 균형 잡히고 합리적이다. 그는 수학적 정확성으로 계산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여자 곁에서는 비논리적이고 거짓말쟁이이며 변덕쟁이가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아이에게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안이함은 여자가 남편에게보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자기방어하기가 더 어려우므로 한층 더 위험하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머니가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 한 인격체이고, 일에서 그리고 집단과 갖는 관계 속에서 자기실현을 하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야 아이를 통해 그것을 포악하게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이는 지금보다 더 부모를 떠나 있고,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순수한 관계만 갖는 어른의 감독하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업과 오락을 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행복하거나 적어도 안정된 삶의 한가운데서 아이가 자신을 풍요롭게 해 주는 존재로 보이는 경우조차도, 아이는 어머니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를 그 내재성에서 끌어내 주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이의 육체를 만들고 양육하고 돌본다. 그녀는 단지 하나의 사실적 상황밖에 만들 수 없으며, 아이의 자유만이 그 사실적 상황을 초월할 수 있다. 그녀는 아이의 미래에 기대를 걸 때 또다시 대리인을 내세워 공간과 시간을 통해 자기를 초월한다. 즉, 다시 한 번 그녀는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아들의 배은망덕뿐만 아니라 실패도 그녀의 모든 희망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는 그녀가 결혼이나 사랑에서처럼 자기 삶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유일하게 진정성 있는 행위는 그 책임을 스스로 자유롭게 인수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처음부터 여자의 열등함은 반복되는 삶에 여자 스스로 국한한 데서 근원적으로 기인한다. 반면 남자는 실존 그대로의 사실성보다 자기 눈에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되는 삶의 이유를 창조해 왔다. 여자를 모성에 가두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영속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오늘날 인류가 자기 초월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에 참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녀는 삶이 의미가 있지 않은 한 아기를 낳는 데 동의할 수 없다.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생활에서 한 역할을 하려는 시도 없이 어머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남자와 구체적으로 동등해진다는 주장은 하나의 기만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아이가 여자에게 페니스의 등가물을 가져다준다고 증명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아무리 부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한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다거나 혹은 그 소유가 최고 목적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사람들은 여자의 신성한 권리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떠들어 댔다. 그러나 여자들이 어머니로서 투표권을 쟁취한 것은 아니다. 미혼모는 여전히 멸시당하고 있다. 오직 결혼 속에서만 어머니는 찬양받는다. 즉, 여자가 남편에게 종속된 한해서다. 여자가 훨씬 더 많이 아이들을 돌보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가정 경제의 우두머리로 남아 있는 한 아이들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더 많이 의존한다. 그 때문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그녀가 남편과 갖는 관계에 따라 긴밀하게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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