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11) 레즈비언

Soyo_Kim 2024. 12. 30. 18:48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11.  레즈비언

동성애 여자와 남자 같은 여자를 혼동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회교국 하렘의 여자, 특히 터키 황제의 처첩이나 창부들처럼 가장 ‘여성적인 여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동성연애자가 있다. 역으로 다수의 ‘남성적인’ 여자들은이성애자들이다. 성과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은 흔히 관찰되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즉, ‘저주받은 여자들’의 대다수는 생리적 구조가 다른 여자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어떤 ‘해부학적 운명’도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를 결정하지 못한다.

물론, 생리적인 여건이 특이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경우들도 있다. 남녀 양성 사이에는 엄밀한 생물학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체세포가 원형적으로 방향이 결정된 호르몬 작용 때문에 변화된다. 그런데 그 방향은 태아가 성장하는 동안에 빗나갈 수 있다. 그 결과 남자와 여자의 중간적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남자들은 남성적 기관의 성숙이 늦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성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여자아이가 – 특히 운동을 좋아하는 – 소년으로 변하는 것을 때때로 볼 수 있다. H. 도이치는 결혼한 여자에게 열렬한 구애를 하고, 그녀를 납치해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 했던 한 젊은 처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처녀가 어느 날 사실은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 아이들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동성애 여자가 모두 거짓된 외관 아래 ‘숨겨진 남자’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양성의 생식 체계를 희미하게 나타내고 있는 남녀양성구유자는 대개 여성 섹슈얼리티를 갖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나치에 의해 빈에서 추방되었는데, 그녀는 자기가 남자밖에 사랑하지 않지만,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남자에게 호감을 주지 못한다고 가슴 아파했다. 남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남성화한’ 여자들은 남성적인 이차성징을 나타낸다. 또 어린애 같은 여자들은 여성 호르몬이 부족해서 그 발달이 불완전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다소간 레즈비언 성향을 초래하는 직접 원인이 될 수 있다. 

생리적으로 정상적인 여자들에게서도 때때로 ‘음핵형’과 ‘질형’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자가 동성애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미 본 바와 같이, 여자아이의 성감은 모두 음핵과 관계되어 있다. 그 성감이 이 단계에 고정되느냐 혹은 변화하느냐 하는 것은 해부학적 조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어린아이의 자위행위는 나중에 음핵 체계가 특권을 갖게 되는 원인이라고 흔히 주장됐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성과학은 어린이의 자위행위가 완전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현상임을 인정하고 있다. 여성 에로티시즘의 발달은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 생리적인 요인들이 포함된 하나의 심리적인 역사이지만, 존재 앞에서 주체의 포괄적인 태도에 달려 있다. 마라뇽은 섹슈얼리티가 ‘일방통행’이며, 그것이 남자의 경우 완성된 형태에 도달하는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중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레즈비언만이 남자의 리비도만큼 풍부한 리비도를 소유할 것이며, 따라서 여성의 ‘탁월한’ 전형일 것이라고 한다. 사실상,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독창적인 구조로 되어 있고, 남자와 여자의 리비도를 서열화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적 대상의 선택은 여자가 지닌 에너지의 양과 아무 관련이 없다.

정신분석학자들이 동성애를 신체기관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 현상으로 본 것은 커다란 공적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 역시 동성애를 외부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을 그다지 연구하지도 않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 에로티시즘의 성숙은 음핵 단계에서 질 단계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이런 이행은 여자아이가 처음에 어머니에게 느낀 사랑을 아버지에게로 옮기는 그런 추이와 유사한 것이다. 다양한 원인이 이런 발달을 막을 수 있다. 여자는 자기가 거세되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페니스가 없는 사실을 자신에게 숨기며, 대체할 만한 대상을 추구하면서도 어머니에게 마음을 고정한 채 머물고 있다. 아들러에게 이런 정체 상태는 수동적으로 겪는 사고가 아니다. 즉, 권력에 대한 의지로 인해 자기의 거세 상태를 단호하게 부정하며, 남자의 지배를 거부하면서도 그 남자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주체인 여자가 원한 것이다. 어린이의 고착이든 남성적 항의든 간에 어쨌든 동성애는 하나의 미완성으로 보일 것이다. 사실 레즈비언은 ‘월등한’ 여자도 아니고 ‘모자람이 있는 여자’도 아니다. 개인의 역사란 숙명적 발전이 아니다. 매 순간 과거는 새로운 선택으로 재파악되고, 선택의 ‘정상성’이라는 것은 선택에 어떠한 특권적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즉, 그 진정성에 의하여 선택을 판단해야만 한다. 여자에게 동성애는 자기가 처한 조건을 피하는 한 방법이거나 받아들이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의 커다란 오류는 도덕주의적 순응주의에 따라 동성애를 결국 비본질적 태도로만 고려한 데 있다.

여자는 객체가 될 것을 요구받는 존재다. 주체로서의 그녀는 남자의 육체 위에서는 충족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관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그녀의 에로티시즘이 극복해야만 하는 충돌이 생겨난다. 그녀를 한 남자에게 먹이로 넘겨 주고 그녀의 품에 아이를 안겨줌으로써 여자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체제를 세상 사람들은 정상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 ‘자연주의’는 그럭저럭 이해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된다. 이성애도 다른 해결책들이 가능하다. 여자의 동성애는 여자의 자주성과 육체의 수동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여러 시도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자연을 원용한다면, 본래 모든 여자가 동성애자라고 말할 수 있다. 레즈비언은 확실히 남성을 거부하고 여성의 육체를 좋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사춘기 소녀는 남자의 성기 삽입이나 지배를 두려워하며, 남자의 육체에 대하여 어떤 혐오감을 느낀다. 반면에 여자의 몸은 남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서도 욕망의 대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남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서 설정하면서 동시에 분리된 존재로서 설정한다. 다른 남자를 취해야 할 하나의 물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남자 안에서 그리고 그와 맞물려 자기 안에서 남성적 이상을 해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을 객체로 인정하는 여자는 같은 여자들 안에서나 자기 안에서 일종의 먹잇감을 보고 있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성애 남녀에게 적대감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성애 남녀는 남자가 지배적 주체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반 남녀는 자발적으로 레즈비언들을 너그럽게 대한다.

 

흔히 – 존스Alfred Jones(1879~1958)154와 헤스나드Angelo Hesnard(1886~1969)155의 설에 따라 – 레즈비언을 두 타입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남자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남성형’ 레즈비언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를 무서워하는’ ‘여성형’ 레즈비언이다. 동성애에서 대체로 두 경향을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여자들은 수동성을 거부하는 반면에 어떤 여자들은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서 여자의 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서로 반응한다. 선택된 대상과 거부된 대상의 관계는 서로를 통해서 설명된다. 언급된 구분은 우리에게 상당히 자의적으로 보이는데, 지금부터 그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남성적’인 레즈비언을 ‘남자를 모방’하려는 의지로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진짜가 아닌 것으로 규정짓는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현 사회가 정의하는 대로 남녀의 범주를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애매함을 초래하는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오늘날 남자는 적극적인 것과 중립적인 것, 다시 말해서 남성과 인간을 나타내지만, 여자는 단지 소극적인 것과 여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인간으로 행동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와 동일시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스포츠적·정치적·지적 활동이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욕망은 ‘남성적 항의’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자가 자기를 초월해 여러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고려하기를 거부하며, 이것은 당연히 여자가 주관적 태도로 비본질적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런 해석 체계가 근거하고 있는 커다란 오해는, 인간 여성은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세상이 인정하는 데 있다.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인 것으로도, 어머니인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진정한 여자’는 예전에 거세된 남자들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 산물이다. 교태나 온순함 같은 이른바 여자의 ‘본능’은 남근의 자존심이 남자에게 불어 넣어진 것처럼 여자에게 불어 넣어진 것이다. 남자가 언제나 남성적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듯이 여자는 자기에게 지정된 소명을 그보다 한층 덜 순종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런 반항심이 동성애의 숙명을 내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부분의 어린 소녀들은 자기 몸의 우연적인 구조가 자기의 취향과 희망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똑같은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 콜레트 오드리는 열두 살 때 자기가 결코 선원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단히 분노했다. 미래의 여자가 자기의 성이 강요하는 제한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녀에게 그런 제한을 왜 거부하는지 이유를 묻는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보다 문제는 그녀가 왜 그런 제한을 받아들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녀의 순응주의는 유순함이나 소심함에서 온다. 그런데 이런 체념은 사회가 보상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쉽게 반항심으로 돌아간다. 사춘기 소녀가 자기를 여자로서는 볼품없다고 생각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해부학적 조건이 중요성을 띠는 것은 특히 이런 우회에 의해서다. 못생기거나 체격이 안 좋거나 혹은 그렇다고 믿으면서 여자는 자기가 소질 없다고 느끼는 여자의 운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여성성의 결여를 보상하기 위해 남성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틀린 말일 것이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남성적 특권의 대가로 부여된 가능성이 그녀에게는 너무 빈약해 보이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모두 남자아이들의 편리한 복장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나 거기서 추측되는 미래의 약속들이 여성복의 지나친 장식을 점차 귀중하게 만든다. 만약 거울이 일상적인 얼굴을 메마르게 반사하고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면, 레이스와 리본은 거추장스럽고 게다가 우스꽝스러운 징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사내아이 같은 여자아이’는 언제까지나 사내아이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다.

잘나고 예쁘다 하더라도 개별적인 계획에 몸담거나 일반적으로 자기 자유를 주장하는 여자는, 다른 한 인간에게 이익이 되도록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는 내재적 상태에서가 아니라 행위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그녀를 육체의 한계 내에 축소하려는 남자의 욕망은, 젊은 남자가 그런 지경을 당한다면 불쾌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불쾌하게 만든다. 순종적인 여자 동료들에 대해서 그녀는 남성적인 남자가 수동적인 동성애 남자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혐오를 느낀다. 그녀가 남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여자들과의 모든 복잡함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랑 속에는 – 성적 사랑이든 모성적 사랑이든 – 탐욕과 관대함, 타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레즈비언은 양자가 모두 어린아이와 여자 애인 속에서 자기들의 연장된 부분이나 반사된 모습을 애무하는 나르시시스트라는 범주에서 특별히 만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이 언제나 동성애로 인도되는 것도 아니다. 마리 바시키르체프의 예가 이를 증명한다. 그녀의 글에서는 여자에 대한 애정 어린 감정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관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이고 극도로 허영심이 강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남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일 것을 꿈꾸어 왔다. 그녀의 명성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전적으로 자기만을 우상화하고 추상적인 성공을 노리는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따뜻한 공모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에게서 경쟁자와 적밖에는 보지 못한다.

사실 어떤 요인도 결코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복합적인 전체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자유로운 결정에 근거한 선택이 관건이다. 어떠한 성적 운명도 개인의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 개인의 에로티시즘은 오히려 실존에 대한 그의 포괄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동성애에 갇힌 여자들에게 남성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그녀들의 에로틱한 생활이 아니다. 에로틱한 생활은 도리어 그녀들을 여성적인 세계 속에 가두어 둔다. 그녀들에게 남성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그녀들이 남자 없이 지내는 이유로 인해 수용해야만 하는 모든 책임 때문이다. 그들의 상황은 남자들 가운데서 살아야 하므로 때로 남성적 정신을 갖기도 하는 고급 창녀 – 예를 들면, 니농 드 랑클로 같은 - 의 상황과는 반대다. 이런 여성은 남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레즈비언들 주위를 맴도는 특이한 분위기는 그녀들의 사생활이 펼쳐지는 규방적 풍토와 공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남성적인 독립성 사이의 대비에서 유래한다. 그녀들은 남자 없는 세계에서 남자들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은 아주 흔하게 남장을 하는데, 취향 때문인지 혹은 방어적 반응 때문인지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은 분명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자 옷을 입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물론 남자 옷 역시 인공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더 편리하고 간단하다. 행동을 방해하지 않으며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사실 동성애는 심사숙고한 성도착도,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맞게 선택된, 다시 말해 정당한 이유가 있는 동시에 자유롭게 채택된 하나의 태도다. 주체가 이러한 선택 때문에 받아들이는 요인들 – 생리적 조건, 심리적 역사, 사회적 상황 – 이 모두 그런 선택을 설명하는 데 이바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동성애는 여자에게 일반적으로 그녀가 처한 조건, 특히 에로틱한 상황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동성애는 기만과 나태와 허위 속에서 사느냐, 아니면 명석함과 관대함과 자유 속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희극과 불균형, 실패와 환상을 초래하기도 하고, 반대로 풍요로운 경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