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 서양고중세철학
아우구스티누스(2) - 마리우스 빅토리누스의 철학과 삼위일체 논쟁
“플라톤주의자들의 교리에 젖어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신앙과 일치하는 무엇을 발견했던 때는 언제든지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신앙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발견했던 것은 수정했다.” - 토마스 아퀴나스
모든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 교리의 전문적 형성은 신플라톤주의의 두드러진 영향을 드러낸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성립에 있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은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에서 나타난다. 마리우스 빅토리누스는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Enneades)”를 포함하여 신플라톤주의의 기록들을 번역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인이면서 또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빅토리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빅토리누스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에 신플라톤주의를 도입한 것인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신앙의 엄격한 한계 속에서 유지한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주가 되는 것은 빅토리누스에게 있어서는 신플라톤주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어디까지 기독교 신앙에 있었다.
빅토리누스는 아리우스주의 신학자인 칸디누스(Candidus)라는 주목할 만한 적수가 있었다. 아리우스주의(Arianism)란 알렉산드리아 교회 장로인 아리우스(Arius)에게서 유래한 계파로,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1)그리스도는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존재자이다. 2)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된다. 3) 성자가 창조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성자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4)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초로 무(Nichts)로부터 창조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삼위일체의 부정, "성자가 성부와 본질은 비슷하나(Homoiousios, like substance) 동일(Homoousios, one substance)하지는 않다"로 요약된다. 아리우스로 인해 촉발된 삼위일체 논쟁은 325년 소집된 제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기에 이른다. 회의에는 아리우스파와 알렉산드로스파, 오리게네스주의파가 나누어져 토론을 벌였는데, 아리우스파는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말씀(Logos), 혹은 성자(그리스도)가 아무리 그 위치가 높다 하더라도 결국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많은 이들의 격분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단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회의는 성경 구절만을 제한하여 사용할 경우 아리우스파를 명확하게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 신앙을 표현할 신경(信經)을 작성하는데 합의한다. 결국 신경 안에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즉 “동일 본질”이라는 단어가 삽입되면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추방되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분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거나, 다른 히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우시아(ousia)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발생에 대하여(On the Generation of Divine Word)”라는 논문에서 칸디누스는 플라톤주의의 존재 개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태어나신 하나님이라는 교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 27d에서 결코 태어나지 않으므로 언제나 존재인 것과 언제나 태어나는 것이므로 결코 존재가 아닌 것을 대립해 두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이시면 그는 어떤 발생 때문에 생성하실 수 없다. 따라서 말씀(Logos)가 태어나신 분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칸디두스는 어떻게 이 증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하나님은 변할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는 태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본질(ousia)이시니 본질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실존이시므로 그는 생성할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오직 존재이실 뿐이다. 그래서 그의 본질은 그 자신에게 그가 존재하는 원인이 된다. 만일 사정이 이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낳으실 수도 나실 수도 없다. 말씀은 발생의 결과가 아니라 산출의 결과다.
빅토리누스는 이러한 칸디누스의 주장에 대하여 플로티노스의 교리에 의존했다. 존재와 불변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 플라톤주의 견해를 따르면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그는 존재도 단일성보다 열등하다는 플로티노스의 관점을 따랐다. 성부 하나님과 일자는 같은 것이지만, 일자는 존재 이전에 나타나므로 하나님께서는 존재라기보다 존재 이전(pro-being)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래서 존재 이전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앞선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는 존재이시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는 비존재라고 말해야 하는가? 확실히 우리는 그를 존재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되는 것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동안에는 존재가 아니시다. 반면에 비존재는 존재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심지어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원인은 언제나 결과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존재다. 그리고 그를 비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가장 높으신 자로서이다. 즉,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를 결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존재이기도 하시는 존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의 보편성과 구별되셔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존재하기 위하여) 태어나야 하는 것과 비교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존재이시다. 존재하는 것의 발생 원인으로서 하나님은 존재이시다.”
- “하나님의 말씀의 발생에 관하여”, 빅토리누스
빅토리누스는 존재를 4가지로 구분한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 단순히 존재하는 것, 참으로 비존재가 아닌 것, 존재하지 않는 것.
1)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가지적 실재(intellectibilia)로서 영(pneuma), 지성(intelect), 영혼(psyche), 사고(noema), 교육(paidia), 덕(arete), 담론(logos)이다. 같은 계급에 속하지만 이보다 위에 있는 것은 실존성(existentiality), 활력(vitality), 예지성(intellectuality) 그 자체이다.
2) 단순히 존재하는 것은 지적인 실재들(intellectualia)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스스로 유지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 영혼 속에 있다. 인간 영혼은 가지적 대상들로부터 구별되며 이 대상에 종속되어 있지만, 이 영혼의 본질은 가지적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영혼 속에서 지성이 각성하면 이 지성(nous)은 영혼을 조명해주고 영혼에 지식을 준다. 이것이 영혼이 실체(Sub-stantia)인 이유다. 즉, 영혼은 지성 혹은 nous 아래에서 서기(stand under) 때문에 이해한다(understand). 영혼이 지성(nous)의 빛을 받아들일 때, 영혼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 가지적 실재들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런 정도에서 영혼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의 하나가, 인식활동에 의하여 존재가 된다.
3) 참으로 비존재가 아닌 것은 질료로 발생되고 감각에 지각되므로 실재라기보다는 참된 실재의 상인 것들이다. 하늘들, 우주를 형성하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동시에 존재이면서 비존재다. 영혼도 지성의 빛에 영향을 받지만 질료의 측면에 있는 만큼은 비존재다. 잠재태, 질적인 무규정성, 다라서 변화 가능성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질료가 있다. 영혼을 가지적 대상을 인식하는 활동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는 정도에서 실체이고, 자기 인식을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질료이다. 하지만 질료가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는 아니다. 순수한 잠재태는 여전히 무엇이며, 순수한 무규정은 절대적인 무(Nichts)는 아니다. 참된 비존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참된 비존재는 모순적이며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중적인 존재 구분을 넘어서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실존들 위에, 모든 생명 위에, 모든 지식 위에, 존재 위에, 모든 존재의 존재 위에 계신다. 파악할 수 없고 무한한하고 불가시적이고 지성이 없고 실체가 없고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비존재이지만 그것은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가 된다는 것’이 ‘오직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 바로 그 경우에만’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안에 은폐되어 존재의 보편성을 포함하시는 비존재이다. 은폐되었던 것의 바로 그 현현(顯現)이 발생이다. 존재 이전에 감추어져 있던 맨 처음의 존재는 바로 말씀(logos)이다. 그는 성부 안에 영원히 현존하며, 성부에 의해 태어났다. 빅토리아누스는 출애굽기 3:14를 주해하면서, 야훼가 모세에게 한 대답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비존재인 하느님은 누스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말씀을 낳았다.
빅토리누스는 아리우스파와 달리 말씀(logos)을 피조물로 보지 않는다. 말씀은 성부의 자기 현현으로 성부로부터 낳은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말씀 역시 빅토리누스에게 있어 참된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러한 로고스로서 존재의 외적 계시이다. 이 계시는 성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성자 하나님 안에 스스로를 계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신 성자의 원인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빅토리누스는 이것을 삼위일체의 신비라고 규정하고 이해가 아닌 믿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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