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해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존 해석에 대한 비판이라는 예비작업이 필요하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문헌학자들”의 작업은 창조하는 자의 발자취를 따라갈 뿐이라는 점에서, 열등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니체 역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문헌학을 거쳐야만 했다는 사실은 다음의 점을 시사한다.
즉, 학문에 있어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소극적인 “~이 아님”의 규정이며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임”의 규정이다. 플라톤은 후자를 철학 탐구에 있어 가장 탁월한 방식인 정의(Definition)라 부르는데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궁금한 것은 대상의 개별적인 사례들이 아니라 그 존재자들을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던진 물음은 ‘어떤 것들에 대한 앎인가’나 ‘얼마만큼의 어떤 앎들이 있는가’하는 그런 게 아니었네. 우리는 그것들의 수효를 헤아리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 앎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거든. (...) 그러므로 ‘앎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어떤 기술에 대한 이름으로 대답할 경우, 그런 대답은 우스꽝스런 것이네.”
이러한 탁월한 정의는 단순히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진리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정의는 그 본질에 있어 가치 지향적이며, 니체는 이를 또한 위대함의 입법이라 부른다. “일종의 이름짓는 것”, 그것은 대상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맹목적이고 무절제한 인식 충동의 욕망을 딛고 일어서게 한다. 철학은 위대함의 개념을 통해 대개는 사물의 본질과 핵심에 관한 가장 위대한 인식이 성취될 수 있으며 또 성취되었다고 간주함으로써 인식충동을 제어한다.”
탈레스의 “만물은 물이다.”는 이러한 관점에서 덜 발전된 인식도, 더 유아적인 인식도 아니다. “만물은 물이다.”라는 선언은 인간을 낮은 단계의 인식에서부터 궁극적 인식으로 도약시키는 예감이다. 철학은 “세계의 전체의 음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다시 울리도록 하며, 이 음을 자신에게서 꺼내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하여 후자가 예감함과 관련한다면 전자는 철저함과 관련한다. “~이 아님”은 비록 물음에 있어서 탁월하지는 않으나, 그러한 위대한 입법의 조건으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예감이 독단에 빠지게 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사유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아무리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다.(When you have eliminated the impossible, whatever remains, however improbable, must be the truth.)”
이로부터 우리는 비로소 “철저한 사유 끝에 예감해야할 것이 스스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위대함의 입법”을 거친 철학적 주장은 그 주장에 대한 지엽적이면서도, 단순히 “~이 아님”을 주장하는 반론들에 의하여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치의 입법이 이미 첫 주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론들의 가치 역시 이에 종속되어 단순한 부정으로서는 그 주장이 지닌 힘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 칸트, 헤겔, 맑스 등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기준을 제시했다. 그들에게 제시되는 무수한 반론마저도 그들이 세운 체계 내에 포섭되어 그 주위를 공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선 한 사상이 지닌 힘을 흡수하는 동시에 그것을 견뎌내, 그와 동등한 힘을 가진 주장을 통해 맞부딪쳐야 한다. 결국 철학자는 위대한 철학자와, 아무것도 아닌 철학자로 나뉘어진다. 1
그렇기에..과학적 세계관의 가공할 힘 역시 결국은 사유에서부터 비롯하고 있는 것이다. 자프란스키가 철학의 전성시대라고 표현했던 칸트와 그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은 과학을 이해관계에 따라 재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과학에 섣불리 적대감을 가지거나, 막연한 외경심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이해 관계에 좌우되기에는 철학에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철학적 물음을 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여기면서 보다 진지한 태도로 이 물음과 대결했었기 때문이다.
괴테와 칸트는 비록 뉴턴 물리학에 대해 극단적으로 상반된 태도를 보였지만, 사유의 지반에서만큼은 서로 유사한 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철학은 그 영역에 있어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태도에 있어 자립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말이다. 그러나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와 숙고적인 사유(das besinnliche Denken)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철학자들이 “철학만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철학으로 할 수 없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할 때 철학은 몰락한다.(이는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과 유사하다.) 계산적 사유가 생활세계을 압도하면서,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추극하는 것을 더 이상 진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지하지 못한 사랑은 이제 교양으로 편입된다. 과학에 대한 적대감을 바탕으로 철학의 남은 영역을 사수하려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에 대한 외경심을 바탕으로 철학을 과학화하려는, 혹은 철학의 무의미함을 밝히려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적 세계관의 주위를 공전하며 “있을 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있을 법한 것이란 달리 말해, “없어도 무방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두 사유를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마지막 시도는 질 들뢰즈의 철학이었다. 그 작업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이 작업은 진지했고 과거의 철학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위대함을 품고 있었다. 그는 1995년에 자살했고, 25년째 새로운 시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위대하다”다는 표현은 여기서 타자와의 비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비교, 곧 자기 극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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