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Nietzsche

역사와 나

Soyo_Kim 2019. 10. 30. 18:53

2018-2 서양 현대 철학

 

역사와 나

 

1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철학에 대한 업적은 철학에 ‘가치’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의 니체 해석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으로 인해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으나, 적어도 이러한 평가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할만한 사람이 없으리라.

모든 존재자의 존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자체로 정당하기도 하고, 또 부당하기도 하다는 점. 그러기에 존재에 대한 정당화는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다만 도덕 내지 윤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존재의 가치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니체의 통찰은 존재의 가치에 대한 정당화가 언제나 특수한 관점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찰을 따르자면, 자명성이나 선험성에 의해 지탱되는 근대 철학의 근본 개념들 – 주체, 이성 등-조차도 특수한 역사적 조건들을 통해 구성되며,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니체에게서 계보학을 물려받은 푸코(Michel Foucault) 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회의하는 주체(Cogito)나, 칸트(Immanuel Kant)의 선험적 주체(선험-경험 이중체)도 모두 서구 사유의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발명품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도덕 내지 윤리는 그 정당성을 어디에서 부여받는가? 도덕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일까, 아니면 특정한 기원을 지니고 있을까? 그리고 특정한 기원을 지닌다면 그 기원의 가치는 무엇일까? 니체는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도덕이 어쩌면 특정한 관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다. 칸트는 철학이라는 학문에서의 인식이 공허하지 않은 동시에 맹목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가치의 인식에 있어 철학도 과연 그러할까? 모든 가치론의 제 1원리는 그것이 공허하면서 맹목적이라는 데에 있다.

니체는 모든 가치 전도의 시도라는 부제 아래, 서구 전반의 사유에 대한 전투를 시도한다. 지금까지의 서구 철학이 중심 주제로 삼아온 주체, 역사, 인식, 세계, 신 등을 그만의 관점으로 해체하고 비판함으로써 니체가 수행하고자 하는 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가치의 기원으로서의 계보학. 우리가 지금까지 의심조차 품지 못하고, 그렇기에 인간을 왜소화하고 삶을 부정하는 가치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를 검토함으로써 주류 가치의 위상에 대한 본질적인 의심을 제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원의 가치로서의 계보학으로 전도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것. 니체의 역사 철학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는 반시대적 고찰 2권은 지금까지 주류 철학의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위상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는 동시에, 역사란 언제나 개인의 삶과 결부될 때에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논한다.

 

2

역사 철학이란 무엇인가? 모든 철학의 물음이 그러하듯, 역사 철학의 근본 물음이란 역사의 본질에 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해 본질이란 무엇인가? 플라톤(Plato)의 개념 틀에 따르자면, 그것은 존재자를 존재자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그것, 모든 존재자에게 있어 공통적인 그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자들의 모든 노력이 소크라테스(Socrates)의 아포리아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실로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Xenophon)의 회상록에서 이에 관련된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들이 자신들을 위해 남겨둔 터라 인간에게는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농사를 잘 지은 사람은 그것을 수확할 사람을 알 수 없고, 집을 잘 지은 사람은 거기서 살 사람을 알 수 없으며, 유능한 장군은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한지 알 수 없고, 유능한 정치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지 알 수 없으며, (...)

이런 일들은 어느 것도 신들의 소관이 아니며 모두 인간의 지성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자들은 분별없는 자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1권 1장 (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처럼,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옳은 것과 참된 것(das Whare)을 구분하는 것이다.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시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은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아직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 사실로부터는 어떠한 가치도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 사실을 담는 그릇인 언어(die Sprache)에 가치를 담을 때는 가치는 언제나 그 그릇을 넘쳐흐른다는 것. 이것이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언급했던 통찰이다. 세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사건들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책을 한 권 서술한다면, 그 책은 오직 사실만을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의 가치적 위상은 언제나 동일하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가치에 대해서, 즉 빠르거나 편하거나, 풍경이 아름다운 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사실로서 환원될 수 있다. 반면 윤리가 말하는 당위적이면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길, 즉 모든 사람이 그 길을 필연적으로 걸어야만 하는 길에 대한 언어적 표현은 단적으로 말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언제나 필연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에, 동어반복(a v ~a)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윤리학에 관한 책을 서술한다면, 그 책은 다른 지상의 모든 책들을 폭음을 내면서 파괴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소위 실증주의적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객관적 글쓰기는 그 본질을 포착하는 데 있어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역사 서술의 목표는 언제나 특정 관점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봉사하며, 모든 역사가들은 자신의 가치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니체의 제안은 오히려, 그러한 관점의 채택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관점을 객관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은폐시키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 서술의 목표가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시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역사가가 목표로 삼는 것과 역사가가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생기는 효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가의 목표는 미래에 있는 반면에 역사 서술의 효과는 현재에 있다. 역사가가 경험을 통해 갖게 되는 역사의 최종적인 목표는 현재의 효과로부터 규정된다. 따라서 실증주의적 사관을 지닌 역사가가 실증과 객관을 통해 추구하는 진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오히려 가치의 일원화라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역사는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는 관점 아래에서 사유될 때에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삶의 고양이며,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 비판적 역사를 다룰 때 요구되는 근본 태도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가 선포를 통해 신성으로 여겨지게 될 때, 이를테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식의 변증법적 역사관이 역사를 절대정신의 거대한 전개 과정으로 만들어 도리어 구체적인 삶을 억압하고 짓누르게 될 때, 비로소 의도적인 가치 전도는 하나의 비판 정신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사 서술의 효과적 측면, 다시 말해 권력의 생산은 그것이 자체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적인 힘의 역학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며, “신성의 선포”에 의해, 즉 자아가 반성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신성화”(Heiligung)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시대적 고찰”로부터 이어지는 “도덕의 계보학”, “안티 크리스트”, “우상의 황혼” 등의 저작들은 모두 이러한 신성모독(Entheiligung)의 일환이자, 니체가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기독교, 바그너(Richard Wagner), 소크라테스 등에 대한 재해석을 담은 자기 극복의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불공정성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보고자 노력한다 할지라도,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즉 이러한 비판 대상들을 바깥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재해석하는 것. 기독교와 소크라테스의 정신에 숨겨져 있는 삶의 긍정을 찾아내는 것. 이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작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