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현대철학연습
『주체의 해석학』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상
― 아크라시아와 서구적 합리성 ―
1. 들어가는 글 : 미셸 푸코의 철학적 문제의식과 후기 사유의 연속성
미셸 푸코는 세 번의 사유 전환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고고학에서 계보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그의 사유는 보편적 회의주의나 총체적 상대주의에 불과하다는 강한 비판에서부터 1, 규범적으로 불명확하다는 약한 비판 2, 『주체의 해석학』 시기의 사유 전환이 “정치적 영역과 권력 비판의 장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윤리의 장으로 피신” 3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종류의 비판은 모두 푸코의 이론에 요구되는 규범적 주체의 존재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니며, 특히 세 번째 비판은 푸코가 기존에 전개했던 권력 이론과 『주체의 해석학』에서 제시되고 있는 규범적 주체 사이의 관계가 규명될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적어도 푸코와 그의 비판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점은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푸코의 생각이 종래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데 있다. 전통적으로 지식은 권력에 의해 억압되며 권력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반면에, 푸코는 지식이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권력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 따르면 지식인은 “생산장치가 아니라 정보장치에 접속되어 있는 사람” 4이며, 지식인의 역할은 노동자의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식이 “정보체계 안에 들어와 널리 유포되도록 돕는 것이다.” 5
따라서 전 생애에 걸친 푸코의 작업은 일종의 비판 이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푸코의 목표는 “법과 정치 철학자들에 의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이론적 평등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정치적 기술들과, 그것에 의해 구축된 불평등한 관계망을 고립시키고, 신원 확인하고, 분석하는 것” 6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푸코가 수행하는 비판은 근본적으로 자유를 위한 비판, “이런 식으로, 또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 7로 정의되며, 이 점에서 그는 주체에게 허용되는 저항의 가능성을 일관되게 천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을 단순한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간주하는 비판은 적어도 푸코 그 자신의 입장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이, 푸코의 이론이 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저항하는 주체와 권력 이론 사이의 양립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야 한다. 게리 거팅은 적어도 고고학에서 계보학까지의 시기에 푸코가 규범적 주체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성취하고자 하는 지식은 인간 해방의 대의를 전개시키고 다른 지식체들에 의해 부과된 임의적 제한과 구속을 제거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만일 그의 지식이 그가 비판하는 분야들에 대해 어떤 특권적 입장을 주장할 수 없다면, 왜 우리는 그의 지식이 반대하는 것들이 가져올 제한과 구속보다 그것(푸꼬가 성취한 지식)이 가져올 제한과 구속을 더 선호해야 하는가? 푸꼬의 주장, 즉 정신의학, 범죄학 및 인간과학 일반이 인간 해방에 이르는 주요 장애라는 주장은 완전히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야들이 다른 방식으로 인간 해방을 위해 기능했다는 것 - 푸꼬는 이 사실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 또한 사실이다. [...] 푸꼬가 고고학적 지식과 계보학적 지식이 해방과 지배 사이에서 비슷하게 양가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는 물론 고고학과 계보학이 지배에 대한 해방에 있어 적어도 순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가를 알기는 어렵다. 8
따라서 푸코가 주장하는 것처럼 계보학이 “바로 과학적이라고 간주된 담론에 고유한 권력 효과에 맞서 싸워야만” 9 한다면, 이제 저항의 자리는 고고학에서 다루어지는 일련의 담론들 사이의 비교와, 계보학에서 다루어지는 담론적 사건들의 효과로서의 주체화와는 다른 층위를 요구한다. 10 푸코는 이 세 번째 층위를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 배려하는 주체 모델에서 찾고 있다. 이 모델은 한편으로 데카르트, 칸트 등의 주류 서양 철학사에서 중심이 되어 온 자기 인식하는 주체와 대비되며, 진실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변형을 가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 이성을 그 본질로 갖는 선험적 주체와 대비된다.
그렇다면 푸코는 자기 배려하는 주체 모델로부터 자신의 권력 이론에 요구되는 규범성을 성공적으로 부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그저 정치와 권력의 문제로부터 소극적인 윤리적 주체로 도피한 것일 뿐인가? 본고는 전자의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서, 후자의 비판에 맞서 푸코의 입장을 옹호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체의 해석학』 이전의 푸코의 작업과 이 시기의 푸코의 논의가 여전히 연속성을 띠고 있음을 논증한다. 왜냐하면 고고학에서 계보학, 윤리학으로 이어지는 그의 논의가 일련의 연속적인 확장 관계에 있는 것이 드러난다면, 설령 푸코가 자신의 계보학에 규범성을 부여하는 일에 여전히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후자의 비판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속성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 만약 『주체의 해석학』에서 나타난 자기 배려 시기의 고대 그리스가 데카르트적 순간에 이르러 소거되어 버린 윤리적 순간이라면, 또 그시기로 회귀해야 한다고 푸코가 주장한다면, 그가 소극적인 윤리적 주체로 도피했다는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배려의 모델이 하나의 서구적 합리성을 산출해 낸 다수의 합리성들이라면, 또 그 속에서 하나의 서구적 합리성이 산출되어진 과정을 기술할 수 있다면, 후기 푸코의 논의는 ‘합리성에서 합리성들로’라는 전기 푸코의 표어와 사상적 연속성을 갖는다.
실제로 푸코는 자기 배려가 서구적 합리성을 산출해 낸 순간을 데카르트적 순간이라 칭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고대의 예외로 언급하며 영성의 조건을 제거하려 했던 역사가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11 따라서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원이 된 서구적 합리성의 모델의 근원에 아크라시아(akrasia, 자제하지 못함)의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주체의 해석학』과, 그 이전 푸코 사유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주체의 해석학』에 나타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상
(1) 고고학과 계보학 시기에 나타난 주체와 지식의 문제
적어도 『주체의 해석학』 시기에 이르러, 푸코의 사유가 큰 변화를 겪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푸코가 자신의 진정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광기, 범죄, 섹슈얼리티 등에 대한 저작들” 12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가 항상 인간을 다루는 의혹이 가는 분야들을 다루며, 이를 통해 소위 인간과학이 비-담론적 실천의 장소들(“『광기의 역사』에서의 수용소, 『임상의학의 탄생』에서의 임상병원, 『감시와 처벌』에서의 감옥” 13)과 맺고 있는 관계를 분석한다는 점이다. 14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고고학이 담론 형성과 비-담론적 영역(기구, 정치적 사건들, 경제적 실천과 그 과정들) 사이의 연관을 드러낸다” 15고 주장한다. 즉, “어떤 것이 과학적 문제가 되고 사회가 관심 가져야 할 문제로 불쑥 나타난다는 사실이 사회적 절차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16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는 많은 분석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명제적 진리의 좁은 범위(the narrower domain of propositional truth)” 17를 넘어, “과학적 객관성과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하나의 담론 형성에 뿌리내린 학리(disciplines)가 가지고 있는 결합된 두 측면” 18임을 보여 준다.
18세기 말에 성립된 임상의학의 사례를 들어 보자. [임상의학의 탄생과] 동시에,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 경제적 현상들, 그리고 제도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들과 병원 의학의 설립 사이에서, 우리가 몇몇 확실한 연결 고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적어도 누군가가 이 제도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할 경우엔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연결고리들이 분석될 수 있는가? 상징적 분석들은 임상의학의 조직화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수반하는 역사적 과정들 속에서 양자가 서로의 거울 역할을 하는, 그리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반영하고 상징화하는 두 개의 동시적 표현들을 보여 준다. 반영의 끝없는 놀이 속에서 그것의 의미들은 [서로를] 따라 잡는다 : 두 표현들은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고, 단지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형식만을 표현한다. 19
고고학은 (주체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의식/ 지식(connaissance)/ 과학의 축을 탐구하는 대신에, 담론적 실천/ 지식(savoir)/ 과학의 축을 탐구한다. 20
두 번째로, 푸코는 지식-권력에 의한 주체화의 과정을 다룬다. 그가 『감시와 처벌』 시기에 본격적으로 정립한 계보학의 문제의식은 담론이 생산해내는 정치적 효과와, 이로부터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실천들(주체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 할 수 있다. 21
우리는 푸코의 철학과 다른 전통적인 철학(예컨대 비판이론 등) 사이의 접점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푸코는 이를 통해 지식과 인식 주체에 관한 전통적 관계를 전복시키고 자유로운 주체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유익한 지식이든 불복종하는 지식이든 간에 하나의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인식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권력-지식의 상관관계이고, 그것을 가로지르고, 그것이 조성되고, 본래의 인식형태와 가능한 인식영역을 규정하는 그 과정과 싸움이다.” 22 다시 말해 푸코는 역사의 목적론적인 필연이 지식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근대적 역사관에 대립하여, 그러한 대의 아래에서 정당화되어 온 소수자의 희생을 고발하고, 투쟁의 장소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근대의 형벌제도는 더 이상 감히 죄를 벌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범죄자를 사회에 재적응시킨다고 말할 뿐이다. 형벌제도가 ‘인간과학’과 이웃하게 된 지도 벌써 2백년이 되어 간다. 인간과학은 형벌제도의 자부심이며, 형벌제도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나는 물론 완벽하게 정의롭지는 않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내가 학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라’ 이런 식이다. 그러나 심리학 · 정신의학 · 범죄학 등이 오늘날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인체의 정치학의 역사로부터 근대 도덕의 계보를 만들 수 있을까? 23
푸코는 또한 계보학을 통해 정립한 목표를 이전까지 수행했던 고고학과의 연계 속에서 다룬다. 이에 따르면, “계보학은 작업의 목표와 목적을 정의하고, 고고학은 계보학을 하기 위해 다루는 영역을 지시” 24한다. 거팅은 이를 통해 푸코가 고고학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고 지적한다. 즉, 고고학은 이제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 양자를 기술하며,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과 권력의 본질적인, 그러나 우연적인 연관을 드러낸다. 25 “담론적 실천들(범죄학처럼 범죄자들의 이해로 인도하는 것들)과 비담론적 실천들(감옥체계처럼 범죄자들의 통제로 유도하는 것들)에 대한 고고학의 동시적 적용은 푸꼬로 하여금 지식과 권력 사이의 본질적 공생관계를 확립할 수 있게 한다.” 26 이러한 푸코의 기획은 근본적으로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제시한 목표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필연성의 약속이 실은 우연적이라는 것을 보이고, 둘째, 그러한 약속이 인간을 특정한 합리성 속으로 포섭하거나 배제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권력 효과를 폭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우리들은 도덕적 가치에 대한 하나의 비판을 필요로 하며, 이제 이 가치들의 가치가 처음으로 문제 제기 되어야만 한다(der Werth dieser Werthe ist selbst erst einmal in Frage zu stellen). [...] 사람들은 “가치”의 가치를 그저 주어진 것으로, 사실인 것으로, 모든 문제-제기의 너머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27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푸코의 이론에는 심각한 난점이 존재한다. 주체가 그저 권력 관계의 장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체의 인식행위가 지식-권력과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면, 이제 저항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기껏해야 새로운 억압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푸코가 현대 사회를 쇠창살로 만든 감옥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감옥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왈저의 비판은 이러한 이유에서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28
푸꼬가 『광기와 비이성』으로부터 『지식의 고고학』에 걸쳐 전개시킨 고고학적 접근이 그의 철학적 기획이 요구하는 비판적 분석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고고학은 푸꼬의 후기 철학적 기획이 어떤 자리도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중립적이고 비역사적인 이론적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9
푸코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2년의 강의에서 주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 강의에서 “성적 행동들의 체제와 관련된 특수한 기제로부터 벗어나 거기로부터 ‘주체와 진실’이라는 문제의 보다 일반적인 용어들을 추출” 30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그의 권력 이론 속에서 소거되었던) 주체의 문제를 어떻게 복원하는지, 또한 이 복원이 그 이전의 입장과 어떻게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고대의 예외? 푸코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
그 스스로도 “주체의 선험성 · 초월성을 부정하고, 주체를 인식론적 장(場) 내에서의 배치에 의해 파생되는 하나의 효과로 간주” 31했던 미셸 푸코가 새삼스레 주체의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사람들은 이러한 당혹스러운 변화를 크게 두 갈래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고고학-계보학 시기의 주체를 담론의 효과로 간주하였던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 이르러 근본적인 전환을 감행하였다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푸코의 윤리학적 작업을 고고학-계보학과의 연속성 아래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이들은 푸코가 여전히 주체를 담론의 구성체이자 권력 효과로 여겼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 “담론 효과로서의 주체는 담론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진실의 의지를 통해 담론을 구성할 수 있는 자유를, 또한 그 담론을 통해 자신을 형성할 자유를 가진다.” 32 따라서 푸코가 주체의 문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선험적, 초월적 주체로의 복귀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담론 구성의 자유를 가지고 “담론 질서 내부에 균열을 내는 전복적 기능을 수행하는” 33 주체화의 절차들(예컨대 파레시아)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
양자의 이해 중 어떤 것이 옳던 간에, 담론에 균열을 내는 주체화의 과정이 존재할 뿐 아니라 분석될 수 있다는 주장은 『주체의 해석학』의 고유한 주제이자, 권력-지식과는 차별화되는 새로운 축이 있음을 암시한다. 언제나 근대성의 철학자로 남고자 했던 푸코가 마지막으로 발견한 윤리의 축은 “서양 철학사 내에서 [...] 어떤 특정한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 epimela heautou, 다시 말해 자기 배려 개념” 34이다.
자기배려에 대한 선동은 헬레니즘 · 로마의 긴 여름을 거치면서 아주 폭넓게 확산되어 총체적 문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 한정된 폭을 갖는 한 문화 현상이 실제적으로 근대적 주체의 존재 양식에까지 관여하는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순간을 사유의 역사 내에서 포착하는 바로 이 일이 모든 사유의 역사가 도전해야 할 핵심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35
푸코는 자기 배려 개념을 재론하면서 자신의 문제제기가 가지고 있는 함축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그는 자기 배려 개념이 근대의 지식 개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자기 인식보다 우월하다거나, 혹은 회귀해야할 문화현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이 개념이 문제시되는 까닭은 오히려, 근대적 주체의 존재 양식에 자기 배려 개념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푸코가 자기 배려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는 윤리의 축을 여전히, 지식-권력의 축과 마찬가지로 담론 형성의 조건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와 자기 인식(gnothi seauton)은 모두 담론 형성의 상이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금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cogito), 또는 칸트의 초월적 통각(die transzendentale Aperzeption)으로의 회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데카르트나 칸트의 (앎의 조건으로서의) 주체 개념이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의 형태로 제시되는 반면, 푸코의 주체 개념은 언제나 진실을 얻기 위한 대가라 할 수 있는 존재 변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에서 제시되고 있는 주체 이해는 (그것이 심지어 주체에 관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주체에 관한 서술이기에) 주체와 무관한 진릿값을 갖는다. 반면에 후자의 주체 개념에서 주체와 무관한 진릿값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푸코가 제시하는 영성(spiritualité)의 개념의 정의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에 대해 질의하는 게 아니라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질의하고, 또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바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형식을 ‘철학’이라 명명하도록 합시다. 이것을 ‘철학’이라 명명한다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 실천 ·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é)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주체는 그 자체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영성은 전제합니다. 36
주체는 그 자체로서 진실의 능력이 없으나 진실은 그 자체로서 주체를 변형시키고 구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실천의 형식을 영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주체와 진실이 맺는 관계의 근대는 주체는 그 자체로 진실의 능력이 있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없다고 우리가 가정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37
푸코는 이러한 영성의 문제가 근대의 학문들(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38 따라서 엄밀한 과학화를 통해 소수자의 앎을 박탈하고자 하는 근대적 지식(connaissance)에 대항하고자 하는 계보학의 목표는 39, 『주체의 해석학』에 이르러서도 소거되지 않고 ‘다르게 존재하기’의 실천이라는 보다 넓은 기획 속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40
따라서 이제 주체의 존재 변형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푸코의 모호한 언급을 이해할 수 있다. 푸코가 1981-1982년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단독으로 언급하는 단락은 세 군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위상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적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푸코는 1981년 1월 6일의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모호한 언급을 남긴다.
철학의 테마(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것인가?)와 영성의 문제(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주체의 존재 내에 어떤 변형을 가해야 하는가?)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예외는 고대에서 유일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절대적인’ 철학자라 불리는 자의 예외입니다. 철학자들 중의 철학자인 그에게 영성의 문제는 거의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적 의미에서 철학의 창시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의 정점이 아니라 고대의 예외입니다. 41
아리스토텔레스를 고대의 예외로 간주해야 한다는 푸코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철학적 담론이 지식의 도구로서 지닌 한계를 분명하게 의식했던” 4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러한 급진적인 평가가 과연 타당한 것일까? 43 푸코는 1982년 2월 3일의 강의에서 이에 대한 보충적 질의를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아마 첫 강의에서 나는 신학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였던 것 같습니다. 신학은 주체-합리적 주체의 자격으로, 또 오로지 합리적 주체의 자격으로-가 영성의 조건 없이도 신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합리적 구조를 갖는 일정한 유형의 인식입니다. 다음으로는 여러 경험과학(관찰과학 등)이 있었습니다. [...]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이미 스콜라철학(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고대철학 전반과 기독교 사상 전반에 놓여 있던 영성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내가 의미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44
필자는 푸코가 제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근대성(영성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아크라시아(akrasia, 자제하지 못함)의 문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5 즉, “거의 서양 윤리학의 역사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46 아닌 아크라시아의 문제가 서구적 합리성의 주요 특성 중 하나를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아크라시아(akrasia)와 서구적 합리성의 문제
아크라시아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 다시 말해 “어떤 행위가 더 좋은 것, 더 가치 있는지를 알면서도 행위자가 그 행위를 하지 않게 되는 상황” 47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자제력 없는 행위의 원인으로 오직 무지(無智)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무엇이 행복을 위한 길인지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면 그 지식과 반대되는 행위를 결코 하지 않으리라고 주장한다. 48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지의 부족으로 인해 자제력 없는 행위를 하는 상황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주변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는 “아크라시아가 실제로 발생한다는 경험적 사실” 49과 명백히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제력 없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상식 사이의 대립을 아포리아(aporia)로 여기고,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7권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50 아포리아(aporia)라는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상식에 의해 반박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실로 이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정확하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갈리고 있는데, 이는 그가 한편으로 ‘현상들(ta phainomena)’을 조사한다는 그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아크라시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아크라시아에 대한 탐구가 결과적으로 타당해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51 종합적으로 미루어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크라시아적 행위는 주로 앎의 결핍에서 일어나지만, 감정이나 욕구 역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52
우리는 아크라시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푸코가 제시한 영성의 조건들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는가에 관해 주목하고자 한다. 푸코는 보편적 인식 주체의 원리를 기초하려 했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의 신학을 “오직 인식 주체를 통해 시행되는 진실 접근” 53으로 정의하고, 이를 영성과 대립시킨다. 왜냐하면 영성이 근본적으로 “모든 영적 인식의 수련의 개화와 모든 비교적(秘敎的) 지식들의 발달, 주체 존재 내에서의 심층적 변형 없이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54고 전제하는 반면, “오직 인식만이 진실의 접근을 허용하는” 55 근대적 지식은 주체의 변형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조건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인식에 내재하는 조건이고, 후자는 인식 행위의 밖에 있는 조건들이지만 주체의 존재와는 연관이 없습니다. [...] 이제 진실은 그 자체로서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56
푸코가 새로운 진실 접근의 양식의 토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고 진단할 때 57, 이는 달리 말해 서구적 합리성의 근간을 이루는 진실에의 의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영향으로 현상에 기반을 둔 실증적 탐구의 정신, 인간의 본질로 여겨진 합리성 등의 요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영향은 아크라시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EN Ⅶ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실천적인 앎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 사이의 간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좋은 행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에 내포된 기이함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그 간격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크라시아의 가능성도 부정되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EN Ⅶ 3에서 하고 있는 일의 핵심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전적으로 부정된 개념적 공간, 앎과 행위 사이의 간격을 확보하는 일이다. 58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크라시아의 문제를 통해 ‘실천적인 앎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 사이의 간격’을 인정할 때, 존재 변형으로서의 주체와 이에 따르는 진실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주체의 존재 변형을 통해 접근한 지식이 아니면서, 동시에 그 지식을 통해 실천할 수 없는, 행위와 유리된 앎의 사례가 최소한 하나 이상 존재함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주체는 그 자체로 진실의 능력이 있지만 진실은 그 자체로 주체를 구원할 수 없다” 59는 가정은 그 가정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바로 이 간격 속에서 성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푸코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고대의 예외로 취급할 때, 이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근대적 지식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인식에 내재하는 합리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 동시에 그러한 조건들이 주체의 존재와 무관할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영성의 조건을 제거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가는 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푸코는 자기 배려 시기의 고대 그리스를 현대성과 단절된 것으로도, 회귀해야할 지점으로도 파악하지 않는다. 첫째, 고대 그리스 전통의 자기 배려의 개념은 망각되었을지언정 근대적 앎 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20세기의 지식 체계 속에서도 영성의 문제는 계속해서 발견되며, 이는 푸코가 추구했던 계보학의 목표와 조응한다. 따라서 자기 배려의 개념은 근대적 주체의 존재 양식에 여전히 관여하고 있다. 둘째, 『주체의 해석학』에서 담론의 세 번째 축인 윤리적 축이 제시된다고 해서, 이것이 지식-권력의 축과 양립 가능하지 않다고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푸코의 작업을 면밀히 고찰해 볼 때, 담론의 조건이 되는 세 가지 축은 ‘다르게 존재하기’의 실천이라는 기획 속에서 상보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배려의 주체 모델은 푸코가 그간 거부해왔던 초월적, 선험적 주체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가 『주체의 해석학』에 이르러 근본적인 전환을 감행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크라시아의 문제에서 고찰된 바와 같이,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 속에서도 근대적 형태의 앎이 예비 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푸코의 의도는 진실에 접근하는 두 가지 유형의 양식 중 어느 하나가 질적으로 우월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지식-권력에 대응할 수 있는 ‘다르게 존재하기’의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고학에서 계보학, 윤리학으로 이어지는 푸코의 논의는 일련의 연속적인 확장 관계에 있으며, 푸코에게 있어 윤리적 주체는 여전히 정치적 담론의 영역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 이르러 정치와 권력의 문제로부터 소극적인 윤리적 주체로 도피하였다는 비판은 필자가 보기에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는 여전히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현재의 역사가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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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후기 작업에 영향을 끼쳤던 아도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철학은 생활 양식이자 담론의 양식이었다.” (피에르 아도, 위의 책, 159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223쪽. [본문으로]
- 물론 푸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성의 문제는 특히 그의 철학과 스콜라 철학 사이의 연속성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면과 능력의 제한 상, 필자는 이러한 작업을 후속으로 미루어 두고자 한다. [본문으로]
- 전헌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크라시아론」, 『철학사상』 제30권, 서울대학교 철학연구소, 2008, 38쪽. [본문으로]
- 전헌상, 위의 책, 38쪽. [본문으로]
- 손병석, 「소크라테스의 아크라시아 불가능성 논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철학』 제72집, 한국철학회, 2002, 126쪽 참조. [본문으로]
- 전헌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크라시아론」, 42쪽. [본문으로]
- 편상범, 「아크라시아와 무지.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 3장을 중심으로」, 『철학사상』 제52권, 서울대학교 철학연구소, 2014, 101쪽 참조. [본문으로]
- 최도빈, 「아크라시아의 두 원인」, 『철학사상』 제62권, 서울대학교 철학연구소, 2018, 127쪽; 손병석, 「소크라테스의 아크라시아 불가능성 논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98쪽 참조. [본문으로]
- 최도빈, 「아크라시아의 두 원인」, 99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65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위의 책, 65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위의 책, 61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위의 책, 62-63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위의 책, 65쪽 참조. [본문으로]
- 전헌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크라시아론」, 47쪽. [본문으로]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6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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