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sychoanalysis

역사와 기억 : 홀로코스트의 그늘에서

Soyo_Kim 2023. 12. 5. 14:05

2021-1 역사트라우마의 이해

역사와 기억 : 홀로코스트의 그늘에서

 

 

1. 들어가는 글

코넬 대학교의 사학 및 비교 문학과 교수이자,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진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사유는 엄밀히 말해 전통적인 철학의 이론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각주:1] 그 이유는 그가 “철학, 역사학, 문학비평, 비판이론, 정신분석학 등이 가로지르는 학문적 접경에 거주하면서 역사 이론의 수립과 새로운 지성사의 가능성을 위해 고민”[각주:2]해왔기 때문이다. 라카프라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그는 혼성적(hybridized) 역사이론을 제안하는 지성사가이다.[각주:3] 하나의 이론이 혼성적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여러 학문들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체계적 정합성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 또한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어떤 이들은 라카프라의 이론을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에 대한 계승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데리다 등의 급진적 구성주의적 서술” [각주:4] 을 라카프라가 시도했다고 간주하기도 한다. 이에 더해, 혹자는 그의 사유가 내적인 일관성을 지니는 지조차 의심하기도 한다. 예컨대,

라카프라가 언어로의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표제 하에서 역사서술의 방향을 제시하다가, 그 이후로는 일종의 새로운 시도로서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트라우마 연구를 통해 윤리로의 전환(ethical turn)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이 상당히 지배적이다. [...] 윤리적 전환을 어떤 기존의 연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테제로 보는 것 역시 라카프라식 글쓰기의 혼성성 또는 난해성 때문에 야기된 오류일 것이다. 라카프라의 궁극적인 관심은 현재와 미래의 바람직한 기관과 실천을 위해 역사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있으며, 이는 그의 모든 저서에서 명시적 또는 암시적으로 강조된다. 그에게 역사란 현재, 특히 그 윤리, 정치적인 문제들과 결부되어 있다. 라카프라의 시간개념, 사회기제,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은 구체적으로 역사와 윤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라카프라의 윤리적 전환은 새로운 제안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가졌던 관심사를 반영하는 표현이다. [각주:5]

따라서 본고는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첫째, 라카프라의 역사이론이 어떠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존의 이론들과 그 이론들이 나타난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본다. 둘째,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라카프라식 글쓰기의 난해성과 혼성성을 걷어내고, 「역사와 기억」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장과 논거들의 타당성 및 건전성을 검토함으로써 라카프라의 사유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도모한다. 셋째, 홀로코스트의 기존 이론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역사 서술에 도입하는 라카프라의 전략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윤리적 전환(ethical turn)이 지니고 있는 함의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수행한다. 이러한 세 가지 작업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관한 라카프라의 사유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본고의 목표이다.

 

2. 홀로코스트(Holocaust)와 독일의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

2.1 홀로코스트에 관한 망각과 침묵의 시기

기억에 관한 라카프라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독일의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각주:6] 이 단어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때부터 널리 사용되었으며, 1978년 동명의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에는 거의 공식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cf. 최홍석(2017), 13-14쪽). 나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그저 유대 혈통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학살했던 제3제국의 반인륜적 범죄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학살에 “분명 신의 섭리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일종의 희생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각주:7] 이처럼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에는 비합리적인 광기에 의해 추동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학살을 이해하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자기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적 관점에서 홀로코스트를 이해하고, 히틀러와 나치즘을 배타적이고 예외적인 악으로 간주하려 했던 경향은 전후 독일 사회 내부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헤어(Friedrich Heer)에 의하면, 연합국의 승리 후 독일 국내에서 나치 지도부에게 ‘악마, 적그리스도, 사탄’의 칭호가 붙었다. 이런 주장은 특히 기독교와 보수진영에서 심하였는데, 이것은 나치의 잔악성에 대한 공동책임으로부터의 방어와 부담을 줄이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각주:8]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주도했던 히틀러 역시 반유대주의를 종교적 차원의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투쟁에 독일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가 그의 삶 속에서 보여준 다양한 모습 가운데 유독 혁명가적인 모습과 유대인에 대한 비판을 주목한 히틀러는 기독교를 투쟁의 종교로 보았고,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를 평생 유대인에 대항한 개혁가이자 혁명가로 해석했으며, 그러나 결국 유대인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순교자로 평가하고 있다. [...] 그리고 예수가 그의 삶에서 이루고자 했던 유대인에 대한 투쟁이 완성되지 않았으며, 바로 그 나머지 작업을 히틀러가 완성해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의해 탄생된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뒤따르고 이를 실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각주:9]

중요한 것은 히틀러의 이러한 궤변에 가까운 종교관이 당시 독일 사회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는 점이다. 히틀러의 메시아주의는 한편으로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중심으로 수행된 정치의 종교화로부터 정당화됐고[각주:10], 다른 한편으로 “19세기 반유대주의 조류의 공유재산”[각주:11]을 그 토양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전자를 가능하게 했던 나치의 선전, 선동 능력과 별개로, 후자는 독일을 넘어 당시의 모든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다는 음모론과 유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프레임은 히틀러와 나치만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의 멘토였던 디트리히 에크하르트는 유대인의 민족성과 여성성에 대한 체계적인 혐오 이론을 전개하고 자살했던 빈의 유대인 사상가 바이닝거를 ‘유일하게 괜찮은 유대인’으로 평가하였고, “나치 이데올로기는 바이닝거를 주된 예시로 사용함으로써 종교적 개종을 통해서도 유대인의 혈통은 극복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각주:12] 그리하여 여러 학자들은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일방적인 악마화가 오히려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 사회 전체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시도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곧, 전쟁, 패배, 그리고 악행의 책임을 몇몇 지도급 인사들에게만 묻고자 하는 경향조차 있었습니다. 나치범죄에 깊숙히 연루되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을 1945년 직후에 반성하고, 수용하며,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던 독일인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도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즘이 기본적으로 좋은 이념이었지만 그 시행이 잘못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각주:13]

 

동서독에서 새로 탄생된 두 독일당국은 점령국의 적극적인 동의 아래 단순가 가담자는 물론이고 적극적인 나치들에게까지도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동독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反)파시즘 이론이 공식 교리(敎理)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독일 파시즘은 대체로 자본가 및 군부 엘리트의 음모이자 수단이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파시즘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그 반면 대다수 대중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갔거나, 아니면 부분적으로 파시즘의 억압을 받은 희생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 책임을 져야할 바는 없었습니다. [...] 서독에는 이처럼 자화자찬으로 흐르거나 자기 죄를 사면하는 경향의 반(反)파시즘 이론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한편으로 이곳에서는 나치범죄에 대해 일종의 침묵을 지켰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르만 륍베(Hermann Lübbe)는 이처럼 나치독재의 범죄와 악행에 대한 책임에 널리 침묵을 지킨 것을 하나의 유용한 전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요컨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와 연루되어 있던 사회에서는 치유를 위해 이것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각주:14]

따라서 1945년부터 1950년 대 말까지 독일 사회에서 홀로코스트는 침묵의 대상이 되었다. “나치 체제의 등장과 범죄는 ‘운행 중에 일어난 사고(Betriebsunfall)’로 받아들여졌다.”[각주:15]이러한 인식 아래에서 동독과 서독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을 망각하였다. 이 침묵의 시기가 1960년을 넘어 도덕적 비난의 시기로 전환되기까지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우리는 세 가지로 나누어 파악해볼 수 있다.

첫째, 동독과 서독 모두 냉전 시기의 체제 경쟁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망각과 침묵을 정당화하였다. 앞서 코카가 지적했던 것처럼, 나치스에 대한 과거 청산은 어디까지나 외부 세력인 연합국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마저도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고위층으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크게 두 가지 인식을 갖게 하였는데, 하나는 “정상적인 궤도를 걸어오던 독일국가가 갑자기 생겨난 히틀러 일당에 의해 ‘강점’됨에 따라 일반시민과 군도 탄압과 선동에 못이겨 체제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과거 청산과 전쟁 포로의 귀환으로 인한 피해의식의 심화였다.[각주:16] 냉전 시기의 체제 경쟁은 이러한 두 가지 인식을 더욱더 부채질하여, 동독에서는 파시즘을 자본주의와 연관짓는 동시에 나치의 강제 수용소를 희생당한 공산주의자들의 우상화 전략을 위해 사용하였고, 서독의 지식인들은 나치 치하의 독재를 공산주의 독재에 투영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해자의 기억을 교묘하게 회피할 수 있었다.[각주:17]

둘째, 생존자들의 자기 검열이다. 1948년 종전 직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여전히 25만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수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10분의 1까지 감소하였다. 또한 홀로코스트에 관한 보상문제로 인해 생겨난 반유대주의 물결은 생존자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의 경험에 대해 침묵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각주:18] 그 결과 이들이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와 억압이 심화되었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독일 사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셋째, 피해자와 가해자를 막론하고 공적 영역의 침묵이 사적 영역인 가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최호근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홀로코스트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생존자들은 자신의 모든 과거기억을 내면적으로 억압하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타인에게 엄청난 공격행동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한 가정 안에 사는 아들세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전해줄 수 없었다. 생존자의 가정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은 의사소통의 부재와 정신적 상흔의 전이였다. 대화를 통한 과거 경험의 전수는 가해자의 가정에서도 일어나기 어려웠다. ‘좋은 아빠’로 남기 위해서는 침묵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에서 나타난 세대 간 대화의 단절은 1960년대에 들어 여러 절멸 수용소에 관계자들에 대한 재판을 통해 과거의 진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들세대가 아버지세대에게 등을 돌리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각주:19] 

 

2.2 도덕적 비난의 시기와 역사가 논쟁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망각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전환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전범 아히이만에 대한 재판과 1963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우슈비츠 재판을 그 결정적 계기로 들 수 있다. 아들세대를 주축으로 진행되었던 68운동 역시 아버지 세대의 침묵을 비난함으로써 기성세대의 죄의식을 일깨울 수 있었다.[각주:20] “68운동의 기본적 성격이 기성의 권위를 불신하고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기성세대의 아킬레스건인 홀로코스트는 그들의 권위를 붕괴시키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각주:21]였기 때문이다. 다소 산발적이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난과 독일 사회의 집단적 책임의식에 대한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게 된 계기는 1979년의 NBC 드라마 <홀로코스트>였다. 서독 인구의 절반인 2000만명이 이 연속극을 시청하였고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나치 수용소 유적을 발굴하는 ‘자발적 고고학 운동’이 일어났다.[각주:22] 마침내 의회는 1969년 집단 학살에 관한 공소시효를 폐지한 것에 이어, 1979년 7월에는 나치 부역자의 개인 살인에 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와 1970년대가 기억(Erinnerung)의 역사화를 통해 서독인의 정체성을 재건시켰던 시대였다면,[각주:23] 1986년 시작된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인식을 감성적 차원에서 성찰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던 학술적 논쟁이었다.[각주:24]  이 논쟁은 1986년 6월 6일 베를린 자유 대학의 에른스트 놀테가 기고한 글에 의해 촉발되었다.[각주:25] 놀테는 이 기고문에서 ‘역사화’와 ‘상대화’를 통해 우파의 수정주의적 사관을 주장하였다.[각주:26]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히틀러는 어쩌면 그들 자신들을 오직 ‘아시아적asiatische’ 범죄행위의 잠재적인 혹은 실제적인 희생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을까? ‘수용소군도’는 아우슈비츠보다 먼저였지 않은가? 볼셰비키의 ‘계급학살’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종족학살’보다 논리적이고 실제적으로 우선한 것은 아니었는가? [...] 아우슈비츠는 어쩌면 그 근원으로 보았을 때 사라지지 않으려는 어떤 과거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니었는가?[각주:27]

인용문에서 보다시피 놀테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역사화의 방법을 통해 히틀러와 나치의 범죄 행위를 세계사의 인과적 사슬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화의 방법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그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범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산물”[각주:28]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의 범죄 행위 역시 ‘아시아적’ 범죄 행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한 선제 대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아시아적’이란 단어는 볼셰비키 혁명에 의한 러시아 공산주의 체제를 일컫는 것으로,[각주:29] 바로 이 ‘아시아적’ 범죄 행위에 대한 강조는 홀로코스트가 독일 민족이나 나치에게만 귀속되는 반인륜적 범죄 행위가 아니며, 세계사의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상대적인 사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나치즘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볼셰비즘의 사회적 절멸의지를 배경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 따라서 히틀러의 반볼셰비즘은 이해됨직한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정당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것은 한 민족을 완전히 절멸시켜 버리고자 했던 점에서 여타의 민족학살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지만, 이는 ‘볼셰비즘이 하나의 세계와 계급을 [...] 완전히 절멸시켜 버리고자 한 것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형태’인 동시에 ‘생물학적으로 변형된 사회적 원본의 복사물’이었다. 놀테는 이처럼 러시아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방어행위로 히틀러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좁게는 나치즘과 파시즘, 넓게는 독일인 일반을 과거의 범죄행위로부터 복권시키거나 사면시키고자 한다.[각주:30] 
세계사를 통틀어 인종학살의 예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 학살은 역사상 최초도 최후도 아니라는 것이 놀테의 상대주의적 시각의 근거이다. 그는 나치 시대의 야만을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그것을 상대화시키기 위해 비슷한 유형의 역사적 사건들을 끌어내어 그 야만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나치의 폭력성을 희석시키려 한다. 말하자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나치의 야만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기존의 역사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나치 과거를 비교의 지평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 예컨대 1915년 터키인들에 의한 아르메니아 민족 대학살이라든가 폴 포트 정권의 수백만 캄보디아인 살해, 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학살 등 아우슈비츠와 비견될 만한 수많은 사례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늘 승자의 시각에서 기술되어 왔다.[각주:31] 

이러한 놀테의 견해는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1986년 7월 11일 디 자이트Die Zeit지에 기고된 하버마스의 글을 통해 수정주의적 역사관에 관한 본격적인 논쟁이 촉발하게 되었다.[각주:32]  하버마스는 기고문을 통해 수정주의 역사관이 품고 있는 태도를 ‘핵폐기물 처리심성’이라 불렀다. “그것은 도덕적 짐으로 남아 있는 과거라는 핵폐기물을 땅에 묻어버렸으면 하는 망각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었다.”[각주:33]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치 범죄는 적어도 (오늘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볼셰비즘의 절멸 위협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그 유일무이성을 상실한다. 또 아우슈비츠는 기술혁신의 부산물 쯤으로 축소되고, 그것은 아직도 우리 집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적의 ‘아시아적’ 위협 때문이었던 것으로 설명된다.[각주:34]

즉, 하버마스는 놀테의 역사관을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다시 한번 희생양 삼아 독일의 역사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의도의 발현으로 보았다. 하버마스는 놀테의 주장에 맞서 반성적 기억(reflexive Erinnerung)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각주:35] 이후 이 논쟁은 “페스트(J. Pest), 힐데브란트(K. Hildebrand) 등의 우파 학자들과 [...] 벨러(H. U. Béla) 등 진보적인 입장의 좌파 학자들 사이에서 수년에 걸쳐 진행된 논쟁으로 발전했다.”[각주:36] 결론적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수정주의적 연구의 명분은 [...] 고착적인 기억을 통해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문제의식”[각주:37]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비판하고자 하는 라카프라의 문제의식 역시 ‘기억과 역사의 관계를 어떻게 정초할 것인가’에 그 방점이 찍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3 홀로코스트와 근대성, 기능주의적 역사관

기능주의적 역사관은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앞서 살펴 본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둘러싼 논쟁에서의 핵심은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할 것인가?’의 여부였다. 그런데 우리가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면, 기존의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역사관에는 무언가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각주:38] 아우슈비츠는 분명 인류의 역사가 계몽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관점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라는 명제에 간명하게 응축되어 있다. 이에 대한 기능주의의 입장은 “홀로코스트의 대량 살인을 관료 내의 정상적인 사람들이 명령에 따르고 의무를 이행한 결과로 보는”[각주:39] 것이었다.

기능주의는 일차적으로 홀로코스트에 관한 상대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수정주의 입장과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양자는 아우슈비츠를 “현대 산업사회의 합리적 관료주의와 과학적 이데올로기, 탈개인화, 그리고 극단적인 기능적 전문화에 매몰된 근현대적 생활방식과 조직문화가 만들어낸 부산물”[각주:40] 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히이만에 관한 재판을 관찰하면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했던 한나 아렌트의 관점 역시 이러한 기능주의 입장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카프라는 기능주의적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가 구조적으로 내포할 수도 있는 폭력성을 인정한다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었는가? 또는 료타르처럼 근대의 구조 자체에 눈을 돌려 그 보편적인 특성으로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지적한다면, 역사적인 사건이자 극한사례로서의 홀로코스트가 갖는 특수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보편적 테제는 기억되는 사건으로서의 홀로코스트, 역사적 트라우마로서의 홀로코스트를 반영하는 서술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라카프라는 홀로코스트가 극한사례로서의 특수성을 갖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능주의적 설명의 한계를 크게 강조하지 않고도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관료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절차적인 대량 학살의 측면은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터 지속된 일련의 극심한 폭력의 측면들까지 일종의 비인격적인 기계로서의 사회구조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각주:41]

따라서 과거에 대한 기억이 미래를 위해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에 반대하여, 또한 기능주의적 설명으로 포착할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을 포착하기 위하여, 라카프라는 「역사와 기억」에서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역사-기억 이론을 제시한다.

 

3. 「역사와 기억」에 관한 분석적 이해

3.1 역사 서술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적용 가능성

라카프라는 「역사와 기억」을 시작하면서 기억에 관한 다음과 같은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기억에 집착하는 것은 때로는 건설적 의지가 없음을 의미하며, 우리의 관심을 현재의 삶이 요구하는 것과 미래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우려가 되는 것은 감상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윤색된 과거로 회귀하려는 경향인데, 이는 흔히 입맛에 꼭 맞는 안일하고 상투적인 서사 형식을 취한다. [...] 하지만 최근에 일고 있는 기억에 대한 전향적 관심은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의 징후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여기에서는 또한 우리 자신이 우리가 다루려는 문제와 뗄 수 없이 얽혀 있음을 자기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도 포함된다. [...]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역사는 기억을 비판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과거를 성찰적으로 극복하려는 포괄적인 시도의 준비과정이다.[각주:42]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라카프라가 서술하고 있는 ‘최근에 일고 있는 기억에 대한 전향적 관심’은 바로 1960년대 이후 촉발된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억을 일컫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라카프라가 이 관심의 원인을 (1) 트라우마의 중요성과, (2) 문화적인 것으로서의 기억의 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각주:43] 달리 말해,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트라우마를 역사 연구에 도입한 것이 라카프라의 독창적인 지점이다. 그는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도입하여 개인 단위의 치료 대신 역사적, 사회적 사건의 연구를 시도한다."[각주:44] 그러나 개인 단위의 치료를 위해 고안되었던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별다른 수정 없이 역사와 사회적 차원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가 시도했던 사회적 차원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하버마스가 표명했던 비판에 맞서, 정지민은 라카프라의 시도를 다음과 같이 옹호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정신분석학을 비판이론에 도입하는 것에 회의적인 시선을 표명한 바 있는데, 그 근거는 첫째로 정신분석가와 환자 사이에 치료에 대한 동의가 있는 반면 사회에는 치료의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 둘째로 기존 사회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환자가 치료를 원하듯이 변화를 원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라카프라는 정신분석가와 환자가 증상의 치료라는 것을 항시 공통적인 목표로 삼았다고 볼 수도, 분석가가 환자에 대해 갖는 권위라는 것을 당연시할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가 고백했듯 정신상담은 항상 환자의 저항과 적대감에 부딪혀야 했고, 복잡하고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이었다. 분석가와 환자간의 이러한 관계는 역사가와 역사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그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각주:45] 

 

이를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형식화할 수 있다.

 

(1) 정신분석가와 환자 사이에 치료에 대한 동의가 있는 반면 사회에는 치료의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2) 기존 사회에서 권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환자가 치료를 원하듯이 변화를 원할 이유가 없다.
(3) 따라서 정신분석학에서의 환자-정신분석가의 관계와 비판이론에서의 이론가-사회의 관계는 다르다. ((1)과 (2)로부터)
(4)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비판이론에 도입할 수 없다. ((3)으로부터)
(5) 정신분석가와 환자가 증상의 치료라는 것을 항시 공통적인 목표로 삼았다고 볼 수도, 분석가가 환자에 대해 갖는 권위라는 것을 당연시할 수도 없다
(6) 따라서 (1)과 (2)는 모두 옳지 않다. ((5)로부터)
(7)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비판이론에 도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논증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결론 (7)은 불만족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7)이 말하는 것은 단지 정신분석학을 비판이론에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일 뿐, 그러한 도입을 정당화할 실질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카프라의 실질적인 도입 근거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개인에게 적용하는 방식과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 간에 유사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라카프라는 이 유사관계를 자동적인 것, 즉 개체로부터 계통이 발생하는 확대와 환원의 관계에 기인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한 사람 또는 불특정 다수의 성장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을 그대로 확대시켜 사회적 현상에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식의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인간을 사회적인 전체 속에서 개체화된 단위로 보아 정신분석학의 적용 가능성을 찾는다. 라카프라는 한 개인이 “종종 인지되지 않는 보다 큰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과정들”과 연계된다고 설명하며, 흔히 서구의 사상적 바탕으로 이해되는 완전한 개인으로서의 위상을 의문시하는 동시에 역사적 사건, 특히 트라우마적 사건이 그룹 단위의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들이 있음에 주목한다. 동시에 역사 그 자체를 정신분석학의 대상과도 같은 특징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심리사 류의 연구가 정신분석학의 대상으로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을 본다면 라카프라식의 정신분석학적 역사는 역사 자체가 대상이다. 역사의 간지(cunning)를 논했던 헤겔과 대조적으로 라카프라는 모든 것이 합을 이루어 의미를 갖게 되는 대신에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사건들이 난무하는 것으로 역사를 보아 정신분석학의 적용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 속에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사학 그리고 무의식에 대한 연구로서 난제에 봉착하는 정신분석학과의 통합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개인의 치료를 위한 정신분석학을 도입하여 역사적 현상에 적용시킬 근거는 크게 이 두 가지에 있다.[각주:46]

 

이를 논증화하여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트라우마적 사건은 그룹 단위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2) 한 개인은 “종종 인지되지 않는 보다 큰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과정들”과 연계된다.
(3) 따라서 인간을 완전한 개인 혹은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여서는 안 되고, 사회적인 전체 속에서 개체화된 단위로 보아야 한다. ((1)과 (2)로부터)
(4) 역사는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사건들이 난무하는 것으로, 역사 속에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무의식적 차원)이 있다.
(5)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 차원의 난제들을 다룬다.
(6) 따라서 역사 그 자체를 정신분석학의 대상과도 같은 특징을 가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4)와 (5)로부터)
(7) 그러므로 정신분석학을 비판이론에 도입할 수 있다. ((3)과 (6)으로부터)

 

결론적으로 라카프라의 핵심 논제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정신분석가와 환자가 증상의 치료라는 것을 항시 공통적인 목표로 삼았다고 볼 수도, 분석가가 환자에 대해 갖는 권위라는 것을 당연시할 수도 없다.
(2) 인간을 완전한 개인 혹은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여서는 안 되고, 사회적인 전체 속에서 개체화된 단위로 보아야 한다.
(3) 역사는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사건들이 난무하는 것으로 역사 속에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무의식적 차원)이 있으며,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 차원의 난제들을 다룬다.

 

3.2 트라우마와 기억의 장

그렇다면 라카프라는 어떤 방식으로 트라우마 개념을 역사에 적용하는가? 그는 트라우마의 중요성을 크게 다음의 네 가지 요소로 파악한다. 첫째, 트라우마는 과거에 일어난 일련의 참혹한 사건을 사후에 의미 있게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째,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참혹한 사건은 피해자는 물론 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접한 가해자, 부역자, 방관자, 저항자,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셋째, “트라우마는 특히 피해자들에게 과거와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기억의 지연과 분열을 가져와 정체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는 피해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홀로코스트로 인한 서양 문명 자체의 이미지 손상을 들 수 있다. 넷째,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은 억압되거나 부인되다가 일정한 잠복기를 거친 뒤에야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각주:47] 

다른 한편으로, 라카프라는 피에르 노라가 제시한 ‘기억의 장(memory sites)’ 개념을 차용한다. 라카프라는 이 개념을 트라우마와 구별하는데, 그 이유는 피해자나 가해자에게 귀속되는 트라우마와 달리 기억의 장은 문화적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카프라가 파악하는 문화적인 것으로서의 기억의 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기억의 장은 일반적으로 트라우마의 장이며, “기억의 장이 트라우마에 의해 규정되는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기억이 효과적으로-특히 애도의 양식을 통해-트라우마와 화해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둘째, 기억의 장 안에서는 애도의 필요성을 없애 버리는 편향적 합리화가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우리가 앞서 살펴 본 놀테의 수정주의적 견해가 이러한 편향적 합리화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셋째, 기억의 장 안에서, 과거의 참혹한 장면에 대한 반복 경험과 재현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한편으로 예술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환각이나 플래시백, 몽상, 신경쇠약과 같은 절제되지 않은 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기억의 일시적 망각 속에서 부인되고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단지 변형되거나 위장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각주:48]  

라카프라가 파악하기에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기억의 장 안에서 애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그들의 증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체험 증언은 보통 사후에-때로는 여러 해가 지나서-일어나는데, 그것은 참혹한 사건을 어떻게 체험했고 그런 체험이 언어와 몸짓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증언과 목격자 진술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아주 강해서 어떤 분야에서는 역사를 대치하거나 그와 동일시하는 일마저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등치는 기만적이다. 진술은 사료이면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술은 역사에 도전한다. 역사학자나 다른 사료 분석자들이 이차적 증인이 되어 증인과 전이적 관계를 형성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주체 위치를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이는 증인과 그의 증언에 대해 감정적으로 개입하여 정서적 반응을 표출하려는 경향성을 수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반과 반응은 증인과 기록자, 역사학자, 분석자들의 주체 위치에 따라,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입장을 재연하고 변형하기 위해 주체 위치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각주:49]

 

진술은 능동적 행위agency를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로, 어떤 경우에는 극한 사건을 체험한 사람에게서 사실상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다. 겁에 질렸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자신 속으로 움츠러든 트라우마의 희생자가 자신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무감각과 수동성을 극복하고 다시 사회적 실천과 관여하여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예컨대 법정에서의 증언처럼-하는 데 증언은 지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렇지만 증언을 역사와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능동적 행위를 단순히 목격자 진술과 혼동하거나 진술 자체만으로 한정해서도 안 된다. 현상을 바람직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동적 행위가 진술을 넘어서 좀 더 포괄적인 사회 정치적 실천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각주:50]

라카프라는 역사의 기능을 사실주장들을 판별하는 것과 비판적으로 검증된 기억을 전달하는 것으로 파악하며, 트라우마 개념을 통해 역사와 기억의 균형을 이루려 시도한다.[각주:51] 그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역사학자들의 기존 연구들을 고찰하는데, 이에 따르면 기존의 많은 역사가들은 기억을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기억과 역사를 이항 대립적으로 보는 사고방식”[각주:52]이 사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대한 라카프라의 비판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A) 찰스 마이어는 기억에 대한 전향적 관심을 병리학적 현상으로 파악하며,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멜랑콜리처럼 빠져드는 기억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라카프라는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기억을 ‘현상학적 의미에서의 기억’이라 칭하며, 이를 희생자의 참혹한 체험을 신성시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집착을 심화시키고 미래지향적 태도를 억제하는 기억으로 파악한다. 마이어는 또한 홀로코스트 애도의 배후에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동질성의 강조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결론적으로, 마이어는 역사 서술에 있어 ‘자기 탐닉적이고 정치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특정한 종류의 기억’을 경계한다.[각주:53]

라카프라는 기억에 관한 마이어의 비판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이어가 비판하는 기억이 “역사와 이항 대립적으로 고착되어 있거나 반대로 역사와 마구 뒤섞여 있다”[각주:54]고 주장한다. 전자의 경우는 기억을 역사의 안티테제, 혹은 타자로서 파악하는 관점이고, 후자의 경우는 기억을 역사의 근거나 본질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B) 실증주의는 기억을 역사의 안티테제 혹은 타자로 간주하며, 역사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냉정한 사실과 분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기억은 무비판적이며 신화와 유사한 것이다. 이들은 역사를 “세계를 탈신화하는 세속적 계몽의 형식”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기억에는 객관적인 사료로서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각주:55]

(C) 기억을 역사의 근거나 본질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역사는 좀 더 진실하고 실존적으로 풍요롭고 생생한 기억의 파괴자가 된다.” 노라는 근원적인 기억과 후세의 인위적 역사를 분리하고 그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라카프라는 이러한 노라의 역사관이 레비 스트로스가 이미 수행했던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의 이분법적 대립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이러한 접근법은 기억을 역사와 대립시키고 낭만화함으로써 오히려 트라우마를 교묘히 감추고 배제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각주:56]

라카프라는 (A), (B), (C)를 모두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정신 분석의 이론을 활용한 기억 이론을 제창한다. 그에 따르면 마이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대립하지 않는, 역사와 상호적으로 관계맺는 기억이 존재한다. 그는 이것을 프로이트를 따라 기억작용memory-work을 요구하는 기억이라 부르며, 과거를 성찰적으로 극복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3.3 라카프라의 기억 이론

라카프라는 기억과 역사의 이원론적 구도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혹자는 기억과 역사는 동일하지 않다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하고 싶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가 서로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둘의 관계는 시간에 따라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의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만약 기억과 역사를 극명한 대립 구도를 통해 바라보게 되면 양자 간의 바람직한 상호 작용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버린다.[각주:57]

라카프라는 기억이 역사와 온전히 대립되지 않으며, 오히려 양자의 긍정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카프라는 기억과 역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명하고 있다. 첫째, 기억은 그 자체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설령 그 객관성을 의심받는다 할지라도 풍부한 정보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억은 그 사건에 대한 당사자의 감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은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경험한 주체들의 감성적 인식을 드러낸다.[각주:58]

둘째, 비판적 정보에 입각한 기억과 역사는 상호 간의 규범적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비판적 정보에 입각한 기억은 일종의 규범과거사에서 무엇을 비판하고 반복하지 말아야 할지, 무엇을 전통의 일부로 존중하고 보존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데 필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기억의 내용 중 무엇이 사실과 일치하고 그렇지 않은 지, 혹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기억이 어떤 역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에 관해 비판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평가한다.[각주:59]

셋째, 따라서 역사와 기억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으며 서로가 규명할 수 없는 요소들을 규명한다. 예컨대 한 사건에 대하여, 기억은 어떤 경험에 대한 느낌, 강렬함 등의 질적 측면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반대로, 역사는 인구 통계학적, 생태적, 경제적 요소 등의 사실적 측면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넷째, 또한 라카프라는 기억을 1차 기억과 2차 기억으로 구분한다. 이에 따르면, 1차 기억은 “어떤 사건을 몸소 체험하고 그 사건을 특정한 형태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2차 기억은 “1차 기억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쳐 형성된 것”을 말한다. 1차 기억의 경우, 체험자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의 강렬한 기억은 거의 항상 부인, 억압, 금지, 회피와 같은 착오를 동반한다. 2차 기억의 경우, 기억의 주체는 단순히 체험자로 한정되지 않고 분석자나 관찰자, 역사학자와 같은 간접목격자들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역사가는 1차 기억과 1차 기억을 보완하는 추가적인 근거들을 활용함으로써 형성한 2차 기억을 통해 1차 기억의 체험자들이 겪었던 사건을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한다.[각주:60]

다섯째, 트라우마에 관한 한 기억은 항상 2차적일 수밖에 없다. 라카프라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혹한 사건을 통해 일어난 것은 바로 경험 속으로 통합되거나 직접적으로 기억되지 않는데 하나의 사건은 그것이 일으킨 여러 가지 효과와 그것이 남긴 자취를 통해 재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차 관찰자나 역사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최초의 목격자조차도 경험 그 자체에 아무런 매개 없이 완벽하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역으로 사건의 재체험이나 행동화에 의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접근이 가능할수록 기억은 더 억제되어 성찰적 극복을 위해서는 행동화가 이차 기억과 다른 관련절차-예컨대 구술, 분석, 육체적 제스처, 노래 등-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한다.[각주:61]

여섯째, 라카프라는 역사와 기억의 상관관계가 ‘행동화(acting out)’와 ‘성찰적 극복(working through)’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양자는 모두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 라카프라는 이를 자신만의 개념으로 변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먼저 행동화란, “트라우마를 겪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악몽에 시달리거나 환각 등의 증상을 통해 과거의 경험이 재생되는 것처럼 느끼는 강박적인 증상을 일컫는다.” 반면 행동화와 대립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성찰적 극복이란, “기억에 의해 괴로워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실된 것 또는 망자를 애도(mourning)하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두는 상태가 되는 것을 뜻한다.” 라카프라는 기억을 과거에 고착화하는 것을 행동화로, 과거를 과거로서 기억하는 것을 성찰적 극복으로 이해함으로써 마이어의 비판을 벗어나고 있다.[각주:62]

일곱째, 라카프라는 기억의 성찰적 극복이 주체 위치의 선정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주체 위치(subject-position)란 역사서술의 주체가 고정적인 정체성 또는 주관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라카프라가 차용한 용어로서, 역사가의 주관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복합되어 얽혀 있음을 의미한다.[각주:63] 그리하여 역사가가 그 자신의 주체위치를 설정함에 있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역사서술에서 성찰적 극복은 과거 속의 특정한 입장-피해자, 가해자, 방관자, 구조자 등-과 동일시하지 않는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동시에 자기 비판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주체위치를 선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할 때에 역사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을 일종의 거대서사 또는 자신의 특정한 주체위치에 의미를 갖는 내러티브 속으로 억지로 통합해 넣으려는 욕심을 자제할 수 있다. 이것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감정적인) 행동화의 과정에 대해 역사가가 지속적으로 대상 및 자신에 대한 비판의 성찰적 극복으로 균형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각주:64]

 

3.4 트라우마와 홀로코스트

이제 지금까지 살펴 본 라카프라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가 홀로코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 지에 대해 확인하도록 하자. 라카프라는 기존의 역사 이론에서 전제하고 있는 선형적 시간관과 달리, 프로이트의 이론을 수용한 비선형적 시간관을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강박적 증상과 꿈이 반복성과 비선형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라카프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억압된 것의 회귀로 이해하며 홀로코스트 역시 이러한 맥락 아래에서 파악한다.[각주:65] 라카프라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기능주의적 역사관이 어려움을 겪었던 문제, 즉 계몽과 홀로코스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문제에 보다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더해, 그는 “치료사가 환자와의 관계 속에서 환자의 트라우마 증상을 이해하고 그 원천을 분석하기 위해 일종의 역할대행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전이 개념을 역사 이론에 도입한다. 라카프라는 역사가가 역사 서술의 대상과 전이 관계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객관주의적 역사 서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기억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왜냐하면, “정신분석가가 모든 정보를 가능한 한 기억하여 나중에 의미 있는 가설을 만들어 치료를 시도하듯,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역사에 접근하는 연구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모든 정보들을 무시하지 않고 [...] 판단 보류를 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야”하기 때문이다.[각주:66]

라카프라는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을 기반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첫째, 홀로코스트는 일차적으로 상실(loss)로 인해 일어난 역사적 비극(historical tragedy)에 속한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둔 비극이며 이로 인해 특정한 가치들을 상실하게 된 비극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유한성과 절대자의 부재(absence)로 인해 발생하는 초역사적 비극(transhistorical tragedy)과는 차이가 있다.[각주:67]이라 비판한다.

둘째, 라카프라는 프리들랜더를 따라 홀로코스트가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극한 사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프리들랜더는 현대사에서 나치 정권만이 유일하게 하나의 외적 한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 한계는 “한번 거기에 이르면 이전의 상태로부터 근본적으로 일탈하고 그것과는 상응할 수 없는 무엇이 등장하게”되는 것으로, 역사 속에는 여러 극한 사례가 있을 수 있어도 그 자체는 각각 고유한 것으로 남아 있다.[각주:68] 프리들랜더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을 주장했던 히믈러의 연설을 인용하면서 나치가 겪었던 도취에 관한 분석을 수행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정말로 심각한 문제 하나를 솔직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밖에서는 물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지요. 1934년 6월 30일 우리가 주저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반역 동지들을 처단했듯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현명합니다. 우리 모두 몸서리를 쳤지만 다시 그런 명령이 내려오고 또 필요하다면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 유대인 말살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말살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백 구 아니 오백 구, 천 구의 시체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입니다. 이런 것을 견뎌 낸 것-인간적 취약함으로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다시 말해 우리의 성실성을 지켜낸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단련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쓰이지 않은, 또한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영광의 한 페이지입니다.[각주:69]
프리들랜더는 위 구절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기괴함의 연원을 두 가지에서 찾았다. 하나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금기-한 종족을 지구상에서 말끔히 쓸어 없애는 것-와 “이 어려운 임무를 아무런 도덕적 손상을 입지 않고 성취했다는 선어”이 주는 부조화와 관련한 가치의 전도다. 다른 하나는 히믈러와 엘리트 나치 친위대원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후세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에 쓰이지 않은 채 비밀로 남겨져야 한다는 인식이다.[각주:70]

라카프라는 히믈러의 연설을 숭고 개념을 통해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라는 극한 사례를 구성하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요소는 종교의 세속화와 근대 사회에 억압된 성스러운 것의 회귀이다.[각주:71]  그는 히믈러의 연설을 “숭고(의 추구)가 타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전도되고 부정적인 형태, 즉 세속적인 맥락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드러난 예”[각주:72]로 파악하고 있다.

라카프라는 숭고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것으로 설명한다. 첫째, 칸트의 주장에 따라, “숭고란 다른 것과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는 절대적으로 위대한 그 어떤 것으로서, 감관의 모든 표준을 넘어서며 마음에서 유래하여 외부의 자연에 투사되지만 거친 무질서와 황량함의 정경에 의해 촉발된다.” 둘째, 숭고는 근본적으로 초월적인 신성과 관계 맺고 있으며, 죽음과 파멸에 관한 체험에 의해 환기된다. 셋째, 숭고에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의 요소가 들어가 있으며 전쟁 그 자체는 그 안에 숭고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특히 에른스트 융어의 저작들은 숭고된 고양을 만들어내는 전투 경험과, 영웅적 남성이 밟는 희생 의식의 절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넷째, “나치의 인종말살은 유대인들을 민족공동체를 오염시키는 위험하고도 때로는 매혹적인 존재로 파악하여 그들을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탈선된 희생주의와 관련”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희생 자체는 다시금 억압의 회귀로 해석될 수 있다.[각주:73]

라카프라는 히믈러 연설문의 위 문구에 칸트의 숭고 개념을 적용시켜 보고 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의 논의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의식을 초월하는 거대한 또는 극심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의 이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숭고이다. 즉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은 후의 인간이 스스로를 보전할 때를 가리킨다. 실제로 히믈러의 묘사대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그 시체들이 쌓여가는 광경을 보고 난 후에도 스스로가 갖고 있던 신념과 도덕성, 사회적 관계들을 유지한 인간은 칸트의 숭고 개념, 정확히 말하면 그 전도된 형태가 역사적으로 현현한 것으로 보기에 매우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여러 저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치의 미학화(aestheticization)라는 주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논의에서 라카프라는 구체적으로 칸트의 숭고 개념의 적용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초월적 요소인 숭고는 본래의 개념이 전도된 형태이기 때문에 부정적 숭고 또는 “성스러운 것의 세속화(secularization of the sacred)”이다.[각주:74]

라카프라는 그러나 이러한 희생주의를 반문명적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런 희생주의가 관료화, 형식적 합리성, 제도화된 살인과 같은 근대 특유의 조건과 맺고 있는 혼란스러운 결합”에 주목한다.

이런 근대적 조건 아래에서 억압은 억압 그 자체로, 혹은 완전히 부적절하고 기괴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으로 되돌아온다. [...] 냉소적 이성은 나치의 인종 말살을 이해하는 데 고려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요소다. [...] 여기서 냉소적 이성의 개념을 관료적 합리성과 결합해서 생각해보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긍정하고, 특정 희생주의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정식화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으리라. <우리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해충들처럼 희생시킬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들을 희생시키고야 말겠다.> 나아가 냉소적 이성은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전통적 이데올로기와 상호 작용을 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치의 인종 말살은 유대인을 제거함으로써 위대한 지도자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는-혹은 그의 신성한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는-믿음에서 오는 도취와 무아경에 의해서도 지탱될 수 있었을 것이다.[각주:75]

결론적으로, 라카프라가 파악하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치의 인종말살은 이데올로기와 희생주의, 그리고 냉소적 이성의 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둘째, 히믈러의 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홀로코스트는 가해자인 나치 당원들에게도 커다란 트라우마를 야기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트라우마를 근대 사회에서 억압되었던 성스러운 것의 회귀를 통해, 즉, 종교의 세속화를 통해 극복하였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부정적 숭고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해자들은 부정적 숭고를 통해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즉 성스러운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나 가해자에게 있어 트라우마를 극복한 결과인 부정적 숭고는 오히려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다.[각주:76]  넷째,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세계사의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극한 사례인 동시에 수많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유발한 역사적 비극(historical tragedy)에 속한다. 다섯째, 이러한 한계 사건으로 유발된 트라우마를 기억의 장 아래에서 애도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를 단순히 행동화하려는 차원에만 머물거나 다른 사람의 참혹한 한계 사건을 자신이 재경험하거나 전유할 의도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도 안 된다.”[각주:77] 이에 더해, 라카프라는 트라우마의 ‘성찰적 극복(working through)’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있다.

첫째, 성찰적 극복하기가 지향해야할 것은 가해자와 동조자, 피해자와 방관자, 그리고 저항자와 간접목격자, 특히 역사가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비극적 격자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각주:78] 둘째, 가해자의 트라우마를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윤리적, 정치적으로 동질화하려는 시도를 지양하여야 한다. 놀테의 수정주의적 역사관은 현대 독일 국민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로 인해 발생한 행동화의 결과이며,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반복하고 심화시킨다.[각주:79] 셋째, “역사학자는 자신의 주체 위치를 설정하고 자신이 비극적 격자에 참여자로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전통적인 역사학자의 태도는 대상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방관자나 구경꾼의 입장에 너무 근접해 있다.”[각주:80] 역사가는 역사 서술의 성찰적 극복을 위하여 그 자신의 주체위치를 설정함에 있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4. 나가는 글 : 비판적 평가

나는 정신분석학을 역사 서술에 도입하고 역사가의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는 라카프라의 역사 이론이 놀테의 수정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을 넘어 역사를 인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라카프라가 이러한 이론을 수립하는 데 있어 받아들인 몇몇 전제는 그 자체로 정당화되기에 매우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의심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라카프라의 글에는 주장에 대한 근거와 논증이 대부분 결여되어 있으며 라카프라 자신도 어떤 논증을 의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라카프라가 정신분석학의 몇몇 개념들(행동화, 성찰적 극복, 전이, 트라우마, 억압된 것의 회귀와 비선형적 시간관)을 그의 역사 이론의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나는 앞서 이러한 도입을 정당화한 라카프라의 핵심 논제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1) 정신분석가와 환자가 증상의 치료라는 것을 항시 공통적인 목표로 삼았다고 볼 수도, 분석가가 환자에 대해 갖는 권위라는 것을 당연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1)이 정신분석학을 비판이론에 도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성립한다 할지라도, 하버마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바로 그 지점이 정신분석학적 역사학의 난점이라고 공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라카프라의 주장은 정신분석가와 역사가의 분석이 어떻게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지에 관한 아무런 전망도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해 분석가가 어떠한 권위도 가지고 있지 않고 양자의 공통적인 목표를 치료라고 볼 수조차 없다면, 분석가(역사가)의 분석이 옳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우리가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다시 말해, 환자에게 있어 억압된 것을 환자 자신은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분석가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역사가가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라는 명제를 분석의 틀로써 사용하고, 그로부터 유의미한 역사적 인식을 도출해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카프라의 이론은 2차 기억의 전달자로서의 역사가의 지위를 매우 모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제시하는 부정적 숭고에 관한 설명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둘째, 라카프라는 역사를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사건들이 난무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역사 속에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무의식적 차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라카프라가 정신분석학을 역사 서술에 도입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근거를 포함한 라카프라의 몇몇 전제들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다. 예컨대 역사가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사건들이 난무한다는 사실로부터, 역사 속에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들(무의식적 차원)이 있다라는 주장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는 귀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가설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구조를 인간 마음의 구조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그러나 별다른 근거는 없는) 또 다른 가설을 전제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시간이 비선형적이라던가, 홀로코스트가 극한 사례에 속한다거나, 나치가 시도했던 종교의 세속화를 근대 사회에 억압되었던 성스러운 것의 회귀로 볼 수 있다거나, 분석가와 환자의 관계가 역사가와 역사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등의 주장들은 구체적인 논증보다 피상적인 직관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단적인 예로 나치가 행한 종교의 세속화를 억압된 것의 회귀 이론으로 설명했던 라카프라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라카프라 그 자신도 인용하듯이 정치의 미학화라는 관점에서 나치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벤야민이 제시한 바 있다.[각주:81] 그런데 벤야민은 나치의 이항 대립항으로 공산주의를 설정하고 공산주의가 시도했던 미학의 정치화에 주목하였는데, 라카프라의 설명대로라면 왜 억압된 것이 제3제국에서는 회귀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회귀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라카프라는 두 나라 사이의 여러 가지 차이를 바탕으로 이러한 난점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둔 비극을 설명함에 있어, 정신분석학의 보편적인 이론들을 어떻게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라카프라는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는 역사에 무의식적 차원이 존재하며, 개별 환자들이 겪는 심리적 억압과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 속에서도 억압된 것이 반복해서 돌아온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별다른 근거없이 되풀이해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나는 라카프라의 난해한 이론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 함의가 놀테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보다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지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라카프라가 제시하는 난해한 개념들에 비해, 정작 그 개념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라카프라가 제시하는 주체 위치(subject-position)의 개념은 역사가의 주관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복합되어 얽혀 있음을 의미하며, 그가 이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역사가가 역사의 대상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역사학계의 논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역사가의 주관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인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거나 혹은 역사가가 역사의 대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사학계에서 주장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역사 서술의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을 강조하며 피해자의 성찰적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라카프라의 주장이 반성적 기억(reflexive Erinnerung)의 필요성을 제시한 하버마스의 주장과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요컨대, 라카프라의 윤리적 전환은 적어도 그 결론만 보아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견 정당화되기 어려운 여러 형이상학적 가설들에 의존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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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육영수, 「기억, 트라우마, 정신분석학 - 도미니크 라카프라와 홀로코스트」, 『미국학논집』, 제36집, 한국아메리카학회, 2004, 172-173쪽 참조. [본문으로]
  2. 육영수(2004), 173쪽. [본문으로]
  3. 정지민,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역사적 트라우마 연구 :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08, 1쪽 참조. [본문으로]
  4. 정지민(2008), 1쪽. [본문으로]
  5. 정지민(2008), 1-2쪽. [본문으로]
  6. 홀로코스트(Holocaust)란 본디 ‘종교적 희생’을 뜻하며, 이스라엘 정부는 이 단어를 1948년 정부 수립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최홍석, 「역사가의 홀로코스트 논쟁과 그 역사화」,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과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17, 13-14쪽 참조. [본문으로]
  7. 최홍석(2017), 14쪽. [본문으로]
  8. 백용기, 「히틀러 세계관의 비판적 연구 - 『나의투쟁』에 나타난 종교관을 중심으로」, 『신학과 사회』, 제31집, 21세기기독교사회문화아카데미, 2017, 122-123쪽. [본문으로]
  9. 송희영, 「히틀러의 종교 언어와 대중 현혹」, 『카프카연구』, 제39집, 한국카프카학회, 2018, 98-99쪽. [본문으로]
  10. 송희영(2018), 104쪽 참조. [본문으로]
  11. 김종영, 「히틀러의 연설에 나타난 반유대주의」, 『독어학』, 제20집, 한국독어학회 2009, 45쪽. [본문으로]
  12. Barbara Hyams, “Weininger and Nazi Ideology”, in: Jews and Gender. Responses to Otto Weininger. Nancy A. Harrowitz and Barara Hyams (Eds.),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5, 160쪽. [본문으로]
  13. 위르겐 코카, 「불편한 과거사의 처리: 1945년 및 1990년 이후 독일의 집단기억과 정치」, 『독일연구』, 제7집, 한국독일사학회, 2004, 115쪽. [본문으로]
  14. 코카(2004), 117-118쪽. [본문으로]
  15. 최호근, 「부담스러운 과거와의 대면- 독일에서의 홀로코스트 기억」, 『서양사론』, 제84집, 한국서양사학회, 2005, 278쪽. [본문으로]
  16. 최호근(2005), 277, 280쪽. [본문으로]
  17. 최호근(2005), 279-280쪽. [본문으로]
  18. 최호근(2005), 281-282쪽. [본문으로]
  19. 최호근(2005), 284쪽. [본문으로]
  20. 코카(2004), 120쪽 참조. [본문으로]
  21. 최호근(2005), 288쪽. [본문으로]
  22. 최호근(2005), 289-290쪽 참조. [본문으로]
  23. 코카(2004), 120쪽 참조. [본문으로]
  24. 최호근(2005), 294쪽 참조. [본문으로]
  25. 김성희, 이덕형, 「역사의 정상화, 국가의 정상화 –독일 ‘역사가 논쟁’(1986)을 중심으로」, 『독일어문학』, 제29집, 한국독일어문학회, 2005, 2쪽 참조. [본문으로]
  26. 김성희, 이덕형(2005), 2쪽; 최호근(2005), 293쪽 참조. [본문으로]
  27. Ernst Nolte, Vergangenheit, die nicht vergehen will, in: FAZ vom 6.6.1986, quoted in : 김성희, 이덕형(2005), 3-4쪽. [본문으로]
  28. 최호근(2005), 293쪽. [본문으로]
  29. 김성희, 이덕형(2005), 4쪽 참조. [본문으로]
  30. 김성희, 이덕형(2005), 9쪽. [본문으로]
  31. 김성희, 이덕형(2005), 4-5쪽. [본문으로]
  32.  김성희이덕형(2005), 7쪽 참조. [본문으로]
  33.  김성희이덕형(2005), 7쪽. [본문으로]
  34. Jürgen Habermas, Eine Art Schadensabwicklung- Die apologetischen Tendenzen in der deutschen Zeitgeschichtsschreibung, in: Die Zeit vom 11.7.1986, quoted in : 김성희, 이덕형(2005), 7쪽. [본문으로]
  35. 최호근(2005), 293쪽 참조. [본문으로]
  36. 최홍석(2017), 50쪽. [본문으로]
  37. 정지민(2008), 5쪽. [본문으로]
  38.  정지민(2008), 7-8쪽 참조. [본문으로]
  39. 정지민(2008), 8쪽. [본문으로]
  40. 김성희, 이덕형(2005), 12쪽. [본문으로]
  41. 정지민(2008), 12-13쪽. [본문으로]
  42. 도미니크 라카프라, 「역사와 기억: 홀로코스트의 그늘에서」,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 김택균 옮김, 육영수 엮음, 푸른역사, 2008, 65-66쪽. 강조는 필자의 것. [본문으로]
  43. 라카프라(2008), 66-68쪽 참조. [본문으로]
  44. 정지민(2008), 19쪽. [본문으로]
  45. 정지민(2008), 19쪽. [본문으로]
  46. 정지민(2008), 19-20쪽; 19쪽의 50번 각주. [본문으로]
  47. 라카프라(2008), 68-69쪽. [본문으로]
  48. 라카프라(2008), 68-69쪽. [본문으로]
  49. 라카프라(2008), 70-71쪽. [본문으로]
  50. 라카프라(2008), 71-72쪽. [본문으로]
  51. 정지민(2008), 21쪽 참조. [본문으로]
  52. 라카프라(2008), 78쪽. [본문으로]
  53. 라카프라(2008), 73-76쪽 참조. [본문으로]
  54. 라카프라(2008), 77쪽. [본문으로]
  55. 라카프라(2008), 77-78쪽 참조. [본문으로]
  56. 라카프라(2008), 78, 81쪽 참조. [본문으로]
  57. 라카프라(2008), 82쪽. [본문으로]
  58. 라카프라(2008), 82쪽. [본문으로]
  59. 라카프라(2008), 83쪽. [본문으로]
  60. 라카프라(2008), 84-85쪽. [본문으로]
  61. 라카프라(2008), 85-86쪽. [본문으로]
  62. 정지민(2008), 22-23쪽. [본문으로]
  63. 정지민(2008), 25쪽 참조. [본문으로]
  64. 정지민(2008), 25쪽. [본문으로]
  65. 정지민(2008), 26쪽 참조. [본문으로]
  66. 정지민(2008), 31-32쪽. [본문으로]
  67. 정지민(2008), 37-38쪽.[/footnote] 따라서 라카프라는 홀로코스트라는 이름 자체에 담겨 있는 희생의 서사를 거부하고 “부재와 상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행동화에 머무는 서술은 구조적 비극 속에 역사적 사건을 가두는 것”[footnote]정지민(2008), 40쪽. [본문으로]
  68. 라카프라(2008), 93-94쪽. [본문으로]
  69. 라카프라(2008), 95-96쪽. [본문으로]
  70. 라카프라(2008), 96-97쪽. [본문으로]
  71. 정지민(2008), 42쪽 참조. [본문으로]
  72. 정지민(2008), 47쪽. [본문으로]
  73. 라카프라(2008), 103-109쪽. [본문으로]
  74. 정지민(2008), 47-48쪽. [본문으로]
  75. 라카프라(2008), 109-110쪽. [본문으로]
  76. 정지민(2008), 49쪽 참조. [본문으로]
  77. 라카프라(2008), 111쪽. [본문으로]
  78. 라카프라(2008), 111-112쪽 참조. [본문으로]
  79. 정지민(2008), 24쪽; 라카프라(2008), 112쪽 참조. [본문으로]
  80. 라카프라(2008), 113쪽. [본문으로]
  81. 라카프라(2008), 105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