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 서양 철학 원전 강독
니체(Nietzche)의 《반시대적 고찰 3: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읽고
사람을 먹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 .
3년 전의 일이다. 이 글에서 고백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고통 속에 빠져 지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삶의 의미와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내가 한번도 의도하거나 선택해본 적이 없건만, 어느새 사회에서 비주류의 위치에 놓여 철저한 이방인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한 상황에 분개하면서, 너른 땅이라도 무작정 파는 심정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읽기 시작했던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갖게 된 것은 군대에서 읽게 된 《전쟁 일기》라는 책 덕분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종전 후 불 태우려다 실패하고 만 일기장, 그것이 세계를 한 바퀴 돌아 한국에까지 번역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일기를 읽자 마자 그가 어찌하여 일기를 없애려고 했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지나치게 내밀하고 민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일기엔 세계와 파열음을 내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방인의 의지가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흔히 《논리 철학 논고》를 논리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에서만 해석하는 분석 철학의 조류와 달리, 《논고》의 토대가 된 《전쟁 일기》의 내용은 이방인으로써 주체가 세계와 어떻게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는가를 모색한 저작으로 보인다.
나와 많은 점에서 유사한 환경에 처해있던 이 위대한 철학자도 비슷한 문제에 대한 고민과 좌절로, 즉 육체의 불편함보다 마음의 불편함이 삶에 있어 훨씬 큰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몸부림으로 일기를 가득 채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튼 일기가 살아남았던 것처럼 나도 무사히 전역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 역시 비슷한 종류의 책을 한 권 쓸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위대한 체계나 기발한 생각이 담긴 철학 책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 책, “교과서가 아니기에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에게만 의미를 지니는” 책을 말한다. 2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교육이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검토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너의 영혼을 이러저러하게 돌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육자이자 스승으로서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무지를 자처하며 배우는 이에게 스스로의 영혼을 돌보라고 촉구할 뿐이다.
나는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내 능력의 한계와 아둔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철학에 있어 몇 가지 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 그 하나는 사유를 할 때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라도 타협하지 말고 정직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시대의 도덕과 권위에 순응하기보다, 비주류의 위치에서 잊혀지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의 모범과 이상이 하나라면 그 모범과 이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리하여 치안의 논리에 의해 배제되는 삶은 수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주류 논리에 부합하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철학자라면 그 자신의 지적 정직성에 대해 의심을 한번쯤 품을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니체가 쓴 《반시대적 고찰 3권》 역시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니체가 파악한 당시 독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그와 쇼펜하우어의 만남에서 볼 수 있었던 영혼과 영혼의 조응, 그저 먼저 사유의 길을 떠났던 사람이 펼쳐 놓은 여정의 지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당시 독일 교육은 이러한 방향에서 거꾸로, 어리석음으로 후퇴했다고 니체는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국가는 인류의 최고 목표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 의무라는 학설” 아래에서 반시대적 교육이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3
특정한 의무는 인간의 활동 범위를 그 틀 안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이 그 밖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게 만든다. 이리하여 정신은 왜소해지고, 독일의 교육은 진정한 교육자가 아닌 강단의 한심한 철학 교수들을 생산할 뿐이라고 니체는 비판을 가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강단에서 소크라테스와 스피노자를 가르치면서도 실로 그들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은 텍스트만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아테네의 세태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나, 진리를 위해 파문마저 불사했던 스피노자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들이 세운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까닭에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후계자를 자처하면서도 소피스트들의 행색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교육을 흔히 아이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어른으로, 다시 말해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성숙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할 수 있는 법이니, 여기에서부터 교육 철학이, 다시 말해 교육의 본질적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학계와 대학은 이러한 교육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니체가 품고 있는 독일 대학에 대한 불만마저, 우리가 처한 현실에 비하자면 지극히 복에 겨운 푸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점점 공고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대학까지 침투한 자본 때문에? 아니면 물질주의와 과학 기술의 끝없는 발전 때문에? 그도 아니면 한국인이라는 언어적, 지리적 한계 때문에 서양 철학을 배우기 힘들어서?
슬프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내부에 있는 무능과 비겁에 비하면 지극히 방만한 이유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구조적 모순은 개인의 비겁함을 결코 포섭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우리가 《철학적 탐구》와 같은 저작을 낼 수 있다면, 철학을 이어갈 재능과 의지가 세대를 거쳐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시대의 어두움이 어찌하여 두렵겠는가? 내일 핵폭탄이 지구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을 걱정해 오늘 철학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진리가 우리 자신에게도 참을 수 없이 저열하다는 것…우리가 가진 철학 책 100권 보다 핵폭탄 한 발의 파급이 더 클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한국 사회의 교육이 지난 100년 동안 생산해낸 교육의 본질적 의미는 두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도태로부터의 두려움과 사유의 식민성이다. 우리는 주류를 설정해 놓은 후에 끝없이 경쟁을 요구한다. (이것을 고대 그리스의 경쟁에 비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니,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뒷글자가 같다는 이유로 둘의 같음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주류에서 한번 밀려난 이에게 두번의 기회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는다. 지방보단 서울에서 살아야만 하고, 노동자보단 사자 들어간 직업을 가져야 하고, 학문 연구는 서울대는 나와야 누릴 수 있는 사치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고등학교에서의 수능 성적이 이후 약 40년 간의 학문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데 있어 제 1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들의 서열 나누기는 끝이 없다. 의사 판에서는 서울대 의대와 아주대 의대를 나누고, 검사 판에서는 경기고와 비경기고를 나눈다. 그래서 승리자는 나오는가? 아니, 당신은 모든 경쟁에서도 승리하였음도 바로 그 때문에 패배하였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로 경쟁에 의해 사육된 학생이 스스로의 관점을 확립할 것이라는 기대는 감나무에서 배가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일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결국 이러한 경쟁의 악무한은 사유의 식민성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이들은 외국에 나갔을 때, 서양 철학을 하는 동양인이라는 이방인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류를 지향해온 자신이 명백한 한계에 부딪혔다는 사실, 이제 피부색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랄 수는 있으나 지금의 과학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니, 이들은 결국 외국을 하나의 이데아이자 유령으로 세우기에 이른다.
텍스트에 대한 존중은 지극히 훌륭한 학문적 태도이지만, 나는 이들이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 다음과 같은 의심이 먼저 생긴다: 그런데 번역은 왜 천시하는가? 우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철학을 부러워하지만, 프랑스에서 박사논문을 제출하기 위해서는 부논문으로 번역 논문을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엔 귀를 닫아버린다. 독일에서 번역이 어엿한 작업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엔 눈이 먼 시늉을 한다. 사르트르, 들뢰즈, 푸코 같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독창적인 작업물을 낼 수 있었던 데는 헤겔을 소개했던 이폴리트, 후설을 소개했던 레비나스 등의 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번역이 일종의 소일거리로 전락했다는 사실, 이것을 “나는 외국 원전 텍스트 읽을 능력이 있어요.”라는 선언 외에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외국어를 다루는 능력이 권력이 되었다는 것, 이는 사유의 식민성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표이다.
사태가 이러하기에, 연구자의 평가 기준은 그가 나온 학부와, 논문의 양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다. 연구의 질적 측면은 외국 저널의 개제 여부로 평가된다. 이러한 위탁이 20년만 이어지더라도 한국어로 쓰인 논문은 대공황 시절 독일 화폐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것을 읽을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기준점인 외국 학계에서 한국어로 쓰인 논문을 읽을 이유가 없으며, 원전 읽기가 물신으로 숭배되는 분위기에서 한국인 연구자는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아닌 일반 대중들? 스마트폰과 미디어와 페이스북이 있는데 어찌하여 철학 논문을 읽겠는가?
물론 지금까지의 묘사가 학계의 연구자들, 특히 번역과 독자적 토양 마련에 힘쓰고 있는 연구자들의 관점에선 지극히 불공정해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연구자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나, 이들이 학계의 다수를 차지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배가 기울어지고 있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 더 이상은 예의와 겸손으로 교육에 대한 충언을 할 때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말할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이들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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