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guilhem, G. (1991). The Normal and the Pathological. translated by Carolyn R. Fawcett, New York: Zone Books.
캉길렘 (2018).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여인석 옮김. 그린비.
1부 병리적 상태는 정상 상태의 양적인 변화에 불과한가?
1. 문제의 도입
무언가에 작용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범위를 국한시켜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어떻게 지진이나 태풍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49]
행동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범위를 국한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떻게 지진이나 허리케인에 맞서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To act, it is necessary at least to localize. For example, how do we take action against an earthquake or hurricane? [39]
질병에 대한 모든 존재론적 이론을 이끌어 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치료에 대한 필요성이다. [49]
질병에 대한 모든 존재론적 이론 뒤에 있는 충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치료에 대한 수요로부터 파생된다.
The impetus behind every ontological theory of disease undoubtedly derives from therapeutic need. [39]
모든 병자에게서 어떠한 존재의 증감을 보면 부분적으로는 안심이 된다.사람은 상실한 것을 보충할 수 있고 사람의 내부로 들어온 것은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 [49]
병든 이에게서 그 존재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안심하는데, 이는 그가 잃은 것은 회복될 수 있고, 그에게 들어온 것은 또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When we see in every sick man someone whose being has been augmented or diminished, we are somewhat reassured, for what a man has lost can be restored to him, and what has entered him can also leave. [39]
비록 질병이 마술이고 매혹이고 사로잡힘이라 하더라도, 다시 그것을 극복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모든 희망을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사람이 질병을 앓는다고 생각해도 좋다. 마술은 치료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서 약과 주술적 의식에게 갖가지 수단을 제공한다. [49]
우리는 질병이 설령 마력이나 마법, 또는 홀림 상태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정복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질병이 모든 희망을 앗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을 상기하면 된다. 마법은 약물과 주문 의식에 치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생성하기 위한 무수한 자원을 제공한다.
We can hope to conquer disease even if it is the result of a spell, or magic, or possession; we have only to remember that disease happens to man in order not to lose all hope. Magic brings to drugs and incantation rites innumerable resources for generating a profoundly intense desire for cure. [39]
이집트의 의학은 질병이 사로잡힘이라는 관념을 기생충 감염에 대한 동방의 경험들에 결합시키고 이를 일반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지거리스트Sigerist는 지적했다 [본문누락] [107, 1 20]. 질병은 문을 통해 드나들듯이 사람에게 들어왔다가 나간다. [49-50]
지거리스트는 이집트 의학이 아마도 기생충 질병에 대한 동양적 경험을 그 경험과 질병-홀림의 관념을 결합함으로써 보편화했으리라고 지적했다: 벌레를 토해내는 것은 건강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7, 1 20]. 질병은 문을 통해 인간에게 들어왔다가 나간다.
Sigerist has noted that Egyptian medicine probably universalized the Eastern experience of parasitic diseases by combining it with the idea of disease-possession: throwing up worms means being restored to health [107, 1 20]. 1 Disease enters and leaves man as through a door. [39]
질병들 간의 천박한 위계질서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는데, 이는 어떤 증상이 어느 정도로 손쉽게 그 범위가 국한될 수 있는지-또는 없는지-에 근거한다. 이에 따라 파킨슨 병은 흉부의 대상포진보다 더 [상위의] 질병이며, 대상포진은 종기보다 더 [상위의] 질병이다. 파스퇴르주의의 위엄을 폄하할 의도 없이, 우리는 망설임없이 전염병에 관한 세균 이론이 그것의 성공을 분명하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빚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이론은 아픔의 존재론적 표상을 체현하고 있다. 어쨋든, 우리가 나쁜 공기나 영향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인 반면에, 세균은 현미경, 염색, 배양의 복잡한 매개체를 요구하긴 할지라도 눈에 보일 수 있다. 존재자를 본다는 것은 이미 행동을 예견한다는 것이다. 감염 이론의 치료적 적용에 있어 낙관적인 성격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소의 발견과 특정 개별 병원체의 역할 인식은 오랫동안 질병에 대한 반응의 지속성을 숨겨왔던 학설의 아름다운 단순함을 파괴했다. 이 학설의 과학적인 겉치레는 인간만큼 오래된 것이었다.
A vulgar hierarchy of diseases still exists today, based on the extent to which symptoms can - or cannot - be readily localized, hence Parkinson's disease is more of a disease than thoracic shingles, which is, in turn, more so than boils. Without wishing to detract from the grandeur of Pasteur's tenets, we can say without hesitation that the germ theory of contagious disease has certainly owed much of its success to the fact that it embodies an ontological representation of sickness. After all, a germ can be seen, even if this requires the complicated mediation of a microscope, stains and cultures, while we would never be able to see a miasma or an influence. To see an entity is already to foresee an action. No one will object to the optimistic character of the theories of infection insofar as their therapeutic application is concerned. But the discovery of toxins and the recognition of the specific and individual pathogenic role of terrains have destroyed the beautiful simplicity of a doctrine whose scientific veneer for a long time hid the persistence of a reaction to disease as old as man himself. [For terrain , see glossary - Tr.] [39-40]
만약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면 그것은 공포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고, 질병에 걸린 유기체를 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마술적이든 실증적이든 어떤 방법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치유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50-51]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안심시킬 필요를 느낀다면, 그 이유는 하나의 고통이 우리의 생각을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이다.만약 우리가 병든 유기체를 원하는 규준으로 회복시키는 과업을 기술적 수단에 (그것이 마법적이든, 실증적이든 간에) 위임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자연 그 자체에서는 그 어떤 좋은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If we feel the need to reassure ourselves, it is because one anguish constantly haunts our thoughts; if we delegate the task of restoring the diseased organism to the desired norm to technical means, either magical or matter of fact [positive] it is because we expect nothing good from nature itself. [40]
이와 대조적으로, 히포크라테스의 글쓰기와 그 실천에 나타난 그리스의 의학은, 존재론적이지 않고 역동적인, 국소화되어 있지 않고 전체적인 질병의 개념을 제시한다. 자연(피지스)는, 인간 안에서든 밖에서든, 조화이자 균형이다. 조화와 균형의 어긋남이 질병이라 불린다. 이 경우 병은 사람 안의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모든 곳에 있다. 그것은 그 사람 전체이다. 외적 상황은 이유이지 원인은 아니다. 인간의 균형은 4개의 채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체액의 유동성은 변동과 진동을 견딜 수 있도록 완벽하게 맞추어져 있다. 이 체액의 특성은 반대되는 성질들(뜨거움/차가움, 습함/건조함)로 짝지어져 있다. 이러한 체액의 어긋남이 질병을 유발한다. 그러나 질병은 단순히 불균형 또는 부조화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일텐데, 사람 안에 있는 새로운 균형을 창출하기 위한 자연의 일부의 노력이다. 질병은 치료를 가져오기 위해 고안된 일반화된 반응이며, 유기체는 나아지기 위해 질병을 발달시킨다. 치유는 무엇보다 견디는 것이며 만약 필요하다면 쾌락적이고 자발적인 치유 반응들을 강화시킨다. 의학적 기술은 자연적 의학 반응을 모방한다. 모방하는 것은 외관을 그저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운동을 연장하고 경향성을 모방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념 역시 낙관적이긴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낙관주의는 자연의 방식에 관여하지 인간 기술의 효용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By contrast, Greek medicine, in the Hippocratic writings and practices, offers a conception of disease which is no longer ontological, but dynamic, no longer localizationist, but totalizing. Nature (physis), within man as well as without, is harmony and equilibrium. The disturbance of this harmony, of this equilibrium, is called disease. In this case, disease is not somewhere in man, it is every where in him; it is the whole man. External circumstances are the occasion but not the causes. Man's equilibrium consists of four humors, whose fluidity is perfectly suited to sustain variations and oscillations and whose qualities are paired by opposites (hot/cold, wet/dry); the disturbance of these humors causes disease. But disease is not simply disequilibrium or discordance; it is, and perhaps most important, an effort on the part of nature to effect a new equilibrium in man. Disease is a generalized reaction designed to bring about a cure; the organism develops a disease in order to get well. Therapy must first tolerate and if necessary, reinforce these hedonic and spontaneously therapeutic reactions. Medical technique imitates natural medicinal action (vis medicatrix naturae). To imitate is not merely to copy an appearance: but to mimic a tendency and to extend an intimate movement. Of course, such a conception is also optimistic, but here the optimism concerns the way of nature and not the effect of human technique. [40-41]
의학적 사고는 질병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표상,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낙관주의가 번갈아 가며 나오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으며, 언제나 새롭게 설명되어지는 발병 안에서 하나 또는 다른 태도에 대한 몇가지 좋은 이유를 찾아냈다. 결핍의 질병 및 모든 감염병과 기생충 병은 존재론적 이론을 선호하는 반면, 내분비 교란과 dys [악화, 불량, 곤란]의 접두어를 갖는 모든 질병은 역동적 또는 기능주의적 이론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두 개념 모두 한 가지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니, 병 안에서, 보다 정확히 말해, 병든 상태의 경험 안에서, 양자 모두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a polemical situation)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유기체와 외부 물질 간의 전투이든 간에, 두 반대되는 힘의 내적 투쟁이든 간에 말이다. 병은 건강의 상태와 차별화되고, 병리학적인 것은 정상적인 것과 차별화되는데, 이는 특정 원리의 존재 여부나 전체 유기체의 변형에 의해 한 가지 특성이 다른 특성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정상과 병리적인 상태의 이러한 이질성(heterogeneity)은 오늘날 자연주의적 관념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규준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 반면, 자연이 치료를 향한 길을 찾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Medical thought has never stopped alternating between these two representations of disease, between these two kinds of optimism, always finding some good reason for one or the other attitude in a newly explained pathogenesis. Deficiency diseases and all infectious or parasitic diseases favor the ontological theory, while endocrine disturbances and all diseases beginning with dys- support the dynamic or functional theory. However, these two conceptions do have one point in common: in disease, or better, in the experience of being sick, both envision a polemical situation: either a battle between the organism and a foreign substance, or an internal struggle between opposing forces. Disease differs from a state of health, the pathological from the normal, as one quality differs from another, either by the presence or absence of a definite principle, or by an alteration of the total organism. This heterogeneity of normal and pathological states persists today in the naturalist conception, which expects little from human efforts to restore the norm, and in which nature will find the ways toward cure. [41]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우리의 규범적 욕망에 맞게 강제하고 변형할 수 있게 하는-기실 그러한 것을 기대하는- 관념 안에서 병리적인 것으로부터 정상인 것을 분리해내는 질적 변화를 유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베이컨 이후로 자연을 지배하려면 자연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반복되지 않았는가? 질병을 다스리는 것은 그것과 정상 상태와의 관계를 숙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삶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병리학을 생리학과 연결시켜 확립해야 한다는 이론적 필요가 있지만, 이는 이미 기한이 지나버린 기술적 과제이다. Thomas Sydenham (1624-1689)은 아픈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그의 아픔이 제한되고 규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동물 종이나 식물 종이 있듯이 병의 종이 있다는 것이다. Sydenham에 따르면 Isidore Geoffroy Saint-Hilaire가 변칙들 사이에서 찾아냈던 규칙들과 유사하게 병들 간의 질서가 존재한다. Pinel은 자신의 저서 《Nosographie philosophique》(1797)에서 질병 분류를 완성함으로써 이러한 모든 분류 시도를 정당화했으며, Daremberg는 이를 임상의보다 자연과학자의 작품으로 묘사했다 [29, 1201] .
But it proved difficult to maintain the qualitative modification separating the normal from the pathological in a conception which allows, indeed expects, man to be able to compel nature and bend it to his normative desires. Wasn't it said repeatedly after Bacon's time that one governs nature only by obeying it? To govern disease means to become acquainted with its relations with the normal state, which the living man - loving life - wants to regain. Hence the theoretical need, but a past due technique, to establish a scientific pathology by linking it to physiology. Thomas Sydenham (1624-1689) thought that in order to help a sick man, his sickness had to be delimited and determined. There are disease species just as there are animal or plant species. According to Sydenham there is an order among diseases similar to the regularity Isidore Geoffroy Saint-Hilaire found among anomalies. Pinel justified all these attempts at classification of disease [nosology] by perfecting the genre in his Nosographie philosophique (1797), which Daremberg described as more the work of a naturalist than a clinician [29, 1201]. [41-42]
그동안에, Morgagni(1682-1771)의 병리해부학 체계의 창안은 특정 기관의 병변을 안정적인 증상들의 군들과 연관지을 수 있게 하였고, 이로써 해부학적 분석에서 질병기술학 분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Harvey and Haller의 추종자들이 해부학anatomy을 생리학physiology으로 변환시켜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병리학pathology도 생리학의 자연스러운 확장이 되었다 ( Sigeris는 이러한 의학 사상의 진화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107, 117-142 참조).
Meanwhile, Morgagni's (1682-1771) creation of a system of pathological anatomy made it possible to link the lesions of certain organs to groups of stable symptoms, such that nosographical classification found a substratum in anatomical analysis. But just as the followers of Harvey and Haller "breathed life" into anatomy by turning it into physiology, so pathology became a natural ex tension of physiology. (Sigerist provides a masterful summary of this evolution of medical ideas: see 107,117-142.) [42]
이러한 혁명적 과정의 최종 결과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의 형성으로서, 이에 따르면 살아있는 유기체 안에서 발견되는 병리학적 현상은 양적 변동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생리학적 현상보다 더 하거나 덜하거나 할 뿐인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병리학적인 것은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a- (~가 아닌)나 dys- (악화, 불량) 같은 접두어가 아니라 hyper- (~보다 뛰어난), hypo- (~보다 아래의) 같은 접두어에 의해 지정된다. 이 접근법은 질병을 기술적으로 정복할 가능성에 대한 존재론적 이론의 안정감을 유지하면서도, 건강과 질병을 질적으로 대립된 상태나 전투하는 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더 효과적인 행동을 하기 위한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연속성을 재확립해야 하는 필요성은 종국에는 질병이라는 개념을 사라지게 만든다. 과학적으로 규준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은 결국 병리적인 것을 파기한다. 질병은 더 이상 건강한 사람에게 고통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대신에 건강 이론가의 연구 대상이 된다. 병리학, 특히 대규모로 작성된 병리학에서 우리는 건강에 대한 교훈을 풀어낼 수 있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의 제도에서 개인 영혼의 덕과 악덕을 더 크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등가물로 찾으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The end result of this evolutionary process is the formation of a theory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normal and the pathological, according to which the pathological phenomena found in living organisms are nothing more than quantitative variations, greater or lesser according to corresponding physiological phenomena. Semantically, the pathological is designated as departing from the normal not so much by a- or dys- as by hyper- or hypo-. While retaining the ontological theory's soothing confidence in the possibility of technical conquest of disease, this approach is far from considering health and sickness as qualitatively opposed, or as forces joined in battle. The need to reestablish continuity in order to gain more knowledge for more effective action is such that the concept of disease would finally vanish. The conviction that one can scientifically restore the norm is such that in the end it annuls the pathological. Disease is no longer the object of anguish for the healthy man; it has become instead the object of study for the theorist of health. It is in pathology, writ large, that we can unravel the teachings of health, rather as Plato sought in the institutions of the State the larger and more easily readable equivalent of the virtues and vices of the individual soul. [42-43]
19세기 동안,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르고 인간 경험에 의해 상반된 가치로 여겨지는 정상과 병리적 생명 현상의 실질적인 동일성이 과학적으로 보장된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교리는 철학과 심리학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생물학자와 의사들이 이 교리에 부여한 권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교리는 프랑스에서 Auguste Comte와 Claude Bernard에 의해 해설되었는데, 각자는 매우 다른 상황과 매우 다른 의도를 갖고 작업했다. 콩트의 교설에서 교리는 Broussais로부터 (명시적이고 존경을 담은 감사를 표하며) 취한 아이디어에 근거한다.클로드 베르나르에게 있어 정상과 병리의 동일성은 평생에 걸친 생물학적 실험의 결론으로, 그의 유명한 《실험 의학 연구 입문》(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에서 방법론적으로 체계화되었다.
In the course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real identity of normal and pathological vital phenomena, apparently so different, and given opposing values by human experience, became a kind of scientifically guaranteed dogma, whose extension into the realms of philosophy and psychology appeared to be dictated by the authority biologists and -physicians accorded to it. This dogma was expounded in France by Auguste Comte and Claude Bernard, each working under very different circumstances and with very different intentions. In Comte's doctrine the dogma is based on an idea taken (with explicit and respectful thanks) from Broussais. In Claude Bernard it is the conclusion drawn from an entire lifetime of biological experimentation, the practice of which is methodically codified in the famous Introduction a l'etude de la medecine experimentale. [43]
콩트의 사상에서는 병리적인 것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며, 정상 상태의 법칙을 사변적으로 결정하려는 관점을 취한다. 이는 생물학적 실험이 특히 인간에게는 종종 실행 불가능하기 때문에, 질병이 체계적인 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동일성은 정상적인 것에 관한 지식의 증진으로 여겨진다.
In Comte's thought interest moves from the pathological to the normal, with a view to determining speculatively the laws of the normal; for it is as a substitute for biological experimentation - often impracticable, particularly on man - that disease seems worthy of systematic study. The identity of the normal and the pathological is asserted as a gain in knowledge of the normal. [43]
베르나르는 정상적인 것에서 병리적인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며, 병리적인 것에 대한 합리적 행동을 목표로 하는 관점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은 질병에 대한 지식이 생리학과 생리학에서 파생된 것을 수단으로 하여 찾아진다는 완고한 비경험적 치료법의 기초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동일성은 병리적인 것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의 지식의 증진으로 여겨진다. 결국, 콩트에게 있어서 동일성의 주장은 순전히 개념적인 것인 반면, 클로드 베르나르는 정량적이고 수치적인 해석 안에서 이 동일성을 정확하게 확립하고자 시도한다.
Bernard's interest moves from the normal to the pathological with a view toward rational action directed at the pathological; for it is as the foundation of an emphatically non-empirical therapeutics that knowledge of disease is sought by means of physiology and deriving from it. The identity of the normal and the pathological is asserted as a gain in remedying the pathological. Finally, in Comte the assertion of identity remains purely conceptual, while Claude Bernard tries to make this identity precise in a quantitative, numerical interpretation. [43-44]
이러한 이론을 교리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단지 폄하하고자 하려는 의도만을 지닌 것은 아니며, 대신에 그 범위와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가 콩트와 베르나르의 저작에서 그 의미를 규명하기로 한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두 작가가 19세기 철학과 과학, 그리고 아마도 문학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의사들이 의학이나 철학 자체보다 문학에서 그들의 기술에 대한 철학을 찾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확립되어 있다. Littre, Renan, 그리고 Taine의 저작을 읽는 것이 Richerand이나 Trousseau를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의학 경력에 영감을 주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학 이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의학에 입문하지만, 많은 의학 개념에 대해서는 선-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콩트의 사상이 의학, 과학, 문학 분야에 널리 퍼진 것은 리트레와 파리 의과대학에서 조직학 교수직을 처음으로 맡은 샤를 로빈의 공로였다. 그들의 영향은 특히 심리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르낭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배운다:
In calling such a theory a dogma we do not mean at all to disparage it, but rather to stress its scope and repercussions. Nor is it at all by chance that we decided to look to Comte and Bemard for the texts that determined its meaning. The influence of these two writers on nineteenth-century philosophy and science, and perhaps even more on literature, is considerable. It is well established that physicians are more willing to look for the philosophy of their art in literature than in medicine or philosophy themselves. Reading Littre, Renan and Taine has certainly inspired more medical careers than reading Richerand or Trousseau: it is a fact to be reckoned with that people generally enter medicine completely ignorant of medical theories, but not without preconceived notions about many medical concepts. The dissemination of Comte's ideas in medical, scientific and literary circles was the work of Littre and Charles Robin, first incumbent of the chair of histology at the Faculty of Medicine in Paris.2 Their influence is felt most of all in the field of psychology. From Renan we learn: [44]
개인의 심리학을 연구할 때, 수면, 광기, 섬망, 몽유병, 환각은 정상 상태보다 훨씬 더 선호할만한 경험의 장을 제공한다. 정상 상태에서는 그것의 희박함 때문에 거의 지워진 현상들이 비정상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과장되기 때문에 손에 만져질듯이 나타난다. 물리학자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약한 양의 전기를 연구하지 않고, 실험을 통해 이를 증대시켜 더 쉽게 연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장된 상태에서 연구된 법칙은 자연 상태의 법칙과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인간 심리학도 인간의 광기, 꿈, 그리고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모든 페이지에서 발견되는 환각을 연구함으로써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In studying the psychology of the individual, sleep, madness, delirium, somnambulism, hallucination offer a far more favorable field of experience than the normal state. Phenomena, which in the normal state are almost effaced because of their tenuousness, appear more palpable in extraordinary crises because they are exaggerated. The physicist does not study galvanism in the weak quantities found in nature, but increases it, by means of experimentation, in order to study it more easily, although the laws studied in that exaggerated state are identical to those of the natural state. Similarly human psychology will have to be constructed by studying the madness of mankind, the dreams and hallucinations to be found on every page of the history of the human spirit [99, 184]. [44-45]
Dugas는 Ribot에 관한 그의 연구에서 Ribot의 방법론적 관점과 콩트, 르낭, 그리고 그의 친구와 옹호자들이 지녔던 아이디어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L. Dugas, in his study of Ribot, clearly showed the relationship between Ribot's methodological views and the ideas of Comte and Renan, his friend and protector [37, 2 I and 68]:
생리학과 병리학은,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양자에서, 두 양극으로서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전체의 두 부분으로 존재한다. 병리학적 방법은 동시에 순수한 관찰과 실험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인 조사 수단으로, 풍부한 결과를 가져왔다. 질병은 사실상 가장 미묘한 질서에 대한 실험으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매우 정확한 상황에서 자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연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한다.
Physiology and pathology, both physical and psychological, do not stand in contrast to each other as two opposites, but rather as two parts of the same whole . . . . The pathological method tends simultaneously toward pure observation and experimentation. It is a powerful means of investigation which has been rich in results. Disease is, in effect, an experiment of the most subtle order, instituted by nature itself in very precise circum stances by means unavailable to human skill: nature reaches the inaccessible [100]. [45]
1870년부터 1914년 사이에 의사들에 대한 클로드 베르나르의 영향은 광범위하면서도 깊었으며, 생리학을 통해 직접적으로, 문학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는데, 이는 문학적 자연주의와 19세기 생물학 및 의학 교리 사이의 관계를 다룬 라미와 도날드-킹의 저작들에 의해 확립되었다. 니체는 클라우드 베르나르로부터 정확하게 정상적인 것이 병리적인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을 빌려 왔다. 《동물의 열에 관한 강의》(Lecons sur la chaleur animale)로부터 가져온 건강과 병환에 대한 긴 지문을 인용하면서, 니체는 다음과 같은 서두를 떼었다.
Claude Bernard's influence on physicians between 1870 and 1914 is equally broad and deep, both directly through physiology and indirectly through literature, as established by the works of Lamy and Donald-King on the relations between literary naturalism and nineteenth-century biological and medical doctrines [68 and 34]. Nietzsche borrowed from Claude Bernard precisely the idea that the pathological is homogeneous with the normal. Quoting a long passage on health and sickness taken from Lecons sur la chaleur animale (Lectures on Animal Heat),3 Nietzsche precedes it with the following statement:
모든 병적 상태의 가치는, 그것들이 정상 상태일 때는 쉽게 보이지 않는 특정 상태를 확대경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45]
It is the value of all morbid states that they show us under a magnifying glass certain states that are normal- but not easily visible when normal. [45]
이 요약된 지표들은 우리가 의미와 중요성을 정의하려고 하는 논지가 단순히 원인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해야만 한다. 사상사의 역사는 강제로 과학사의 역사에 겹쳐질 수 없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온전히 과학적이지만은 않은 환경과 사회적 배경에서 생활하는 이상, 과학사는 사상사를 무시할 수 없다. 논지를 논리적인 결론으로 추적할 때, 그것이 문화적 환경에서 겪는 변형은 그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These summary indications must suffice to show that the thesis whose meaning and importance we are trying to define has not been invented for the sake of the cause. The history of ideas cannot be superimposed perforce on ' the history of science. But as scientists lead their lives as men in an environment and social setting that is not exclusively scientific, the history of science cannot neglect the history of ideas. In following a thesis to its logical conclusion, it could be said that the modifications it undergoes in its cultural milieu can reveal its essential meaning. [46]
우리는 콩트와 클로드 베르나르를 중심으로 설명을 전개하기로 했는데, 이 작가들이 반자발적으로 [이러한 주의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과 같은 정도로 인용되었고 다른 관점에서 더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보다 이들이 선호되었다.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우리는 콩트와 베르나르의 사상에 Leriche의 사상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기로 했다. 르리쉬는 의학과 생리학 모두에서 많이 논의되는데, 이는 그의 중요한 공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검토는 예상치 못한 깊이와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권위 숭배에 굴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뛰어난 실무자가 콩트와 클로드 베르나르보다 병리학에서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여기서 다루는 문제와 관련된 한에서, 르리쉬가 현재 콩트와 클로드 베르나르 자신이 유명하게 만든 콜레주 드 프랑스의 의학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따라서 그들 간의 차이는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다.
We chose to center our exposition around Comte and Claude Bernard because these writers really played the role, half voluntarily, of standardbearer; hence the preference given them over so many others, who are cited to an equal extent and who could have been more vividly explained from one or another point of view. For precisely the opposite reason, we decided to add the exposition of Leriche's ideas to that of Comte's and Bernard's. Leriche is discussed as much in medicine as in physiology - not the least of his merits. But it is possible that an examination of his ideas from an historical perspective will reveal unsuspected depth and significance. Without succumbing to a cult of authority, we cannot deny an eminent practitioner a competence in pathology excelling that of Comte and Claude Bernard. Moreover, as far as the problems examined here are concerned, it is not without interest that Leriche presently occupies the chair of medicine at the College de France made famous by Claude Bernard himself. Thus,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are only the more meaningful and valuable.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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