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 문화철학연구
『햄릿』에 나타난 유령과 호명
애도의 윤리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햄릿은 오래 전부터 정신분석학자들의 사랑을 받아 온 캐릭터이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수많은 인물 중 가장 복합적이고 모호한 인물로 여겨지는 햄릿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에 대해, 프로이트는 그의 주저 『꿈의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왕의 혼백이 맡긴 임무를 실행하지 못하도록 그를 가로막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이 임무가 가진 특수한 성격이 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햄릿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차지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이 남자는 어린 시절 억압된 자신의 소원을 성취시킨 사람이다. 햄릿에게 복수할 것을 촉구하는 혐오심은 자기 비난, 즉 문자 그대로 징벌해야 하는 죄인보다 자신이 더 나을 것이 전혀 없다고 꾸짖는 양심의 가책과 뒤바뀐다. 1
그렇다, 라깡에게 있어서 포우의 『도둑 맞은 편지』가 그렇게 중요했던 것처럼, 프로이트에게 있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그의 이론의 본질을 설명하는 키워드였다. 햄릿의 복잡미묘한 행동에는 정신분석의 핵심을 이루는 여러 이론들(억압 가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 담겨 있으며, 그렇기에 프로이트는 “세계 문학사의 영원한 세 걸작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모두 아버지 살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 2 라고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프로이트가 파악한 『햄릿』의 핵심을 바탕으로 이 책이 쓰여지던 당대의 사회적 억압을 조망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 보려는 시도이다. 즉,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동시에, 사회적 억압에 대한 한 가지 대응책으로서 셰익스피어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제안한 애도의 윤리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을 살펴보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2장). 그의 해석이 지닌 한계는 한편으로 추상적, 환원적 분석에 머무르기 쉽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주체의 실천적 자리가 소거될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따라서 『햄릿』이 쓰여지던 당대의 구체적 사회적 억압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셰익스피어의 의식적 노력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파악해본다(3장). 이를 바탕으로 주체의 윤리적 실천을 위한 애도의 본질을 확인해 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4장).
2.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과 그 한계
앞서 인용문에서 설명한 것처럼, 프로이트는 『햄릿』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어내고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충동적인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는 유아기에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한다.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가 그것이다.”유아가 3세에서 6세 사이가 되는 남근기(phallic stage)에서 유아의 리비도는 생식기를 지배하며 쾌락 원칙이 유아를 지배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시기의 아동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Ödipuskomplex)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비로소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남자아이는 그의 어머니와 성적인 결합을 바라면서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지만,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의 욕망은 곧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인해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남성으로 성공적인 전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이 과정에서 아동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억압하는데, 햄릿의 불안한 심리와 복수에 대한 망설임은 바로 이 억압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이렇게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 즉 햄릿의 심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하려는 해석은 많은 지지를 받으며, 오토 랑크, 어니스트 존스, 자크 라깡 등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햄릿』과 그 작가 셰익스피어, 그리고 프로이트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냐의 문제는 “프로이트의 『햄릿』 해석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실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을 제시한 프로이트 본인마저 어떤 혼란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셰익스피어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은 “단일 인과적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4 5
실로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이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통해 『햄릿』을 이해하는 데 오랜 기간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복수의 지연’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동이 무의식의 층위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주인공의 무의식과 작가의 무의식,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과의 비교를 통한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의 내면에서 일어난 세속적 억압의 진보” 6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햄릿을 히스테리 환자로 봄으로써, 햄릿이 오필리아와의 대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에 대한 혐오감 역시 설명하고 있다. 7
그렇다면 『햄릿』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먼저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햄릿』의 캐릭터와 극중 갈등 구조는 해석의 대상이자 작가의 무의식, 그것을 읽는 독자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정신분석 이론 적용의 대상이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햄릿』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의 적용 대상인 동시에 이론에 대한 실증적 증거로 기능한다.
프로이트가 그러한 관점에서 『햄릿』을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먼저,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적 관찰을 통해 확인한 후, 이에 대한 추가적 증거로 『오이디푸스 왕』과 『햄릿』을 제시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따금 정상적인 어린이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해 주는 재료로써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이어서 등장하는 『오이디푸스 왕』과 『햄릿』의 비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문명 전체에 걸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타당한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 왕』에서 “폭로되고 현실화되는” 소원 공상이 『햄릿』에서 억압되는 것은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일어난 “억압의 진보”의 결과이다. 8
이어서 프로이트는 「도스또예프스키와 아버지 살해」 9에서 수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의 해석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시도한다. 그는 『햄릿』의 테마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지적하면서, 『햄릿』이 부친이 죽은 이후 쓰여졌다는 점 10 , 또 어려서 사망한 셰익스피어의 어린 아들 이름이 햄닛이었다는 점 등을 작가의 정신 분석을 위한 정황적 증거로 제시한다. 11
이렇게 본다면, 프로이트의 『햄릿』 해석은 “환원적인 분석, 정답이 있는 분석” 12 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정신분석 비평이 현실성을 정신분석적 개념으로 추상화하고 환원한다” 13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정신분석 비평은 본질적으로 이론의 적합성을 증명하는 데 사용될 뿐이며, 비평 전체를 정신분석학 아래 종속시켜 단조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류사 전체의 보편적 진리라면, 작가의 개인적 삶을 분석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사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쓰기 위해 “먼저 쓰인 작품들에서 줄거리의 뼈대뿐 아니라 세부 사항의 상당수를 빌려왔다.” 14 이에 따르면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기 최소 10년 전에도 영국에서는 동명의 연극이 상영되었고, 그는 이 연극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5 아마 이 점이 프로이트의 또 다른 생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신화적 근원성’을 입증해주는 증거가 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셰익스피어의 전기적 요소는 거의 무화(無化)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프로이트 자신도 이후에 셰익스피어가 옥스퍼드 백작 에드워드 드 베어의 필명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며, 셰익스피어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철회하고 있다. 16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통해 모든 모순된 해석들의 혼란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단언함으로써 확고한 환원적 해석을 고수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햄릿』의 오래된 수수께끼를 해결한 탐정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프로이트가 정신 분석 비평의 전통적인 외재적 접근법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이다. 그는 때로는 햄릿의 대사를 실제 극의 맥락에서 벗어나게 인용하면서 멜랑콜리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그의 전통적 분석과는 다르게 오필리아를 욕망하는 햄릿을 소개하기도 하며, 위에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구상을 철회하기도 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다양한 접근법은, 그가 『햄릿』을 단순히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비난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체계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며, 언어유희를 통해 구조화된 무의식인 언어가 가진 이중의미를 분석해 낸다. 17
3. 셰익스피어 당대의 사회적 억압
종합적으로 볼 때,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가장 흔하게 받는 비판, 즉 “이론과 그 실례라는 단조로운 도식에 얽매여 있으며, ‘복수의 지연’이라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라는 주장은 일정부분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프로이트 자신도 이 ‘단조로운 도식’을 넘어서려 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적 접근의 발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햄릿』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햄릿』에 내재한 수수께끼의 해결을 넘어서 ‘억압의 진보’라는 가설을 통해 『햄릿』이 쓰여진 당대 영국사회의 풍속도를 그려내고, 억압적 사회 구조를 해부해내는 문명비판가로서의 프로이트를 보게 된다. 이러한 그의 원대한 기획을 환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당대 사회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되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억압의 진보’라는 가설의 타당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프로이트 문화 심리 분석에 있어 주목할만한 점은 첫째,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셰익스피어로 내려오는 비극의 발전 계보를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이며, 둘째, 무의식을 초월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욕망의 표현’이라는 문제를 순전히 구조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 핵심 요소를 행동으로 보며, “인간의 행과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인간의 액션이지 그의 자질을 정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셰익스피어는 비극의 핵심을 성격으로 보았으며 ‘성격이 운명이다(Character is destiny)’라는 등식 아래에서 작품을 저술했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자신의 비극관을 통해 ‘성격의 시종일관’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며, 성격의 성장과 발전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햄릿』의 파국을 초래하는 요소인 성격을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사실적 차원의 진리로 환원시킴으로써 『햄릿』을 고전적 비극으로 복귀시킨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극의 전개에 있어 셰익스피어의 의식적 선택과 변화를 간과하고 있다. 18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창조하는 시인의 정신 안에 일어나는 움직임의 심층을 해석하고자 시도한 것”이라는 언급을 통해 무의식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한다. 달리 말해 그는 무의식을 “그 스스로는 의식적이지 않지만 의식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19으로 여기며, 이 과정에서 의식적인 주체의 역할을 소거한다.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사건이라도 그것의 표현 양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사회적 구조의 변화에 귀속시킨다. 기독교 사회와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햄릿』에 나타나는 복수의 망설임을 ‘억압의 진보’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억압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문명의 구조적 성격이 강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한 억압에 대한 내적 저항과 욕망의 표현은 또한 시대와 작가의 심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햄릿』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금기된 욕망을 통해 관객의 전율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분명 비극이나, 동시에 이전의 비극과는 차별화되는 희극적 요소를 도입한 민중극이기도 했다. “복수를 요구하며 이 땅으로 돌아오는 유령은, 햄릿에 대한 초기 엘리자베스 시대를 기억하는 모든 이를 짜릿하게 하는 극적 장치였다.” 20 따라서 우리는 『햄릿』이라는 작품을 시대와 작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욕망의 적극적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21
당대 기독교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작품답게 햄릿은 억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촉발된 죄의식을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레어티즈와의 결투를 미루자고 제안하는 호레이쇼의 말에 햄릿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데도 각별한 신의 섭리가 있는 법”이라며 다가올 죽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2 이렇게 햄릿은 스스로의 욕망과 결부된 비극적 운명을 인정함으로써, “욕망의 폭로와 현실화”를 통해 몰락하고 장님이 되는 『오이디푸스 왕』의 운명과 달리 세계와 나름대로의 화해를 모색한다. 23
결정적으로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던 때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종교적 패러다임이 변화하던 시기였다. 연옥의 존재가 부정되고, 지상과 천상의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자들이 낡은 관념으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셰익스피어 자신과 당대 사회의 욕망이 집약된 대상이 시대착오의 위험을 감수하며 홀연히 출연한다. 셰익스피어가 의식적으로 극에 출현시킨 ‘유령’은 셰익스피어 이전에 존재하던 햄릿 이야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24 25 세네카에 영향을 받았던 셰익스피어는 세네카의 비극에 등장하는 서막혼령(prologue-ghost)을 주도면밀하게 『햄릿』에 삽입할 뿐 아니라,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적 인물로 격상시킨다. 유령은 햄릿이 품고 있는 죄의식을 현실화시키는 동시에, 햄릿이 겪지 못한 애도작업의 부재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26 셰익스피어는 1596년 어린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어렸을 때 경험했던 가톨릭의 장례 절차 대신 개신교의 “단순하고 유려한 추도사”를 들었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드리는 것은 개신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불법행위”였으며, 가톨릭의 모든 예식과 의식은 개신교의 공격을 받아 축소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망자를 달래는 가톨릭 문화에서 핵심적인 제의 장소인 수도원과 예배당을 차례차례로 해체”해버렸으며, 초창기의 개신교 기도문은 망자를 “그대”라고 지칭할 수 있었으나, 급진적 개혁을 거치면서 망자를 “그대”라고 호칭하는 것 역시 금지된다. 27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통로가 완전히 닫혀버린 것이다. 28
이제 『햄릿』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유령은 처음으로 만난 햄릿에게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부탁이다. 망자가 이름을 잃어가던 당대 사회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영혼은 처음에는 그것(this thing)으로 등장하다가 나중에는 ‘Enter ghost’라는 무대지시와 함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29 마침내 햄릿은 영혼의 요구에 대해 ‘연옥의 수호성인’인 성 패트릭의 이름을 걸며 맹세한다. 30 31
이렇게 셰익스피어는 억압된 무의식의 단순한 노출을 넘어, 문학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투영하며, 욕망으로 인해 촉발되는 삶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려 한다.
4. 『햄릿』과 애도의 윤리
산 자가 죽은 자를 욕망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 나이에 타계한 기형도 시인에게 바친 김현의 진혼가는 이 욕망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는지도 모른다. 32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이어져 온 서양 철학의 유구한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에선,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것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된다. 햄릿의 친아버지는 극중에서 단 한번도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한다. 그의 육신은 죽었으며, 그의 정신은 언제나 햄릿의 기억 안에서 호명의 형태로만, 유령처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햄릿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들은 유령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침내 인식하지 못한 것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햄릿』을 당대 사회적 억압에 대한 비판적 우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즉, 『햄릿』은 애도의 부재가 초래한 비극이다.
데리다는 유령(revenant)이 언제나 돌아올 수(re-venant)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령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살며 그 경계를 허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령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거의 자연재해를 연상시킨다. 『햄릿』이 유령의 돌아옴으로 인해 초래된 비극이며, 우리가 유령의 돌아옴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면 이 비극은 언제이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깡은 유령의 돌아옴을 데리다와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유령은 불충분한 애도 때문에 돌아온다. 33
김현의 말처럼, 유령은 그것의 원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무(無)로조차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유령은 어디까지나 호명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며, 라깡은 그것이 불충분한 애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로 인한 의식적, 정상적 과정인 반면 멜랑꼴리(우울증)는 사랑하는 대상의 무의식적 상실과 관련이 있다. 34
라깡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애도와 멜랑꼴리의 차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애도와 멜랑꼴리는 단순히 의식/무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맺는 대상의 차이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오브제 a’의 작동 여부라고 볼 수 있다. ‘오브제 a’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경우 애도의 대상은 상상적 대상이 되는 반면,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때, 대상 자체를 찾을 수 없어 리비도 과잉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 멜랑꼴리이기 때문이다. 35
상상적 남근이 되기를 포기하고 상징계의 법을 받아들일 때만 아이는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로 구성할 수 있다. 거세의 결과로 결여가 자리 잡기 때문에 결여를 지시하는 기표인 ‘오브제 a’는 아이 자신의 애도가 성공했다는 징표인 것이다. 또 환상을 매개로 결여를 채우려 한다는 것은 대상의 무한한 대체가 가능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바꾸지 않고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36
그렇기에 햄릿은 극중에서 욕망의 주체로 서지 못한다. 햄릿은 “애도를 통해 욕망의 원인인 ‘오브제 a’를 정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욕망이 자랄 틈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애도는 단순한 허례허식도, 온전히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외려 애도는 살아 남은 자를 위한 것으로, 대상의 상실을 경험한 자리에 “결여의 기표인 남근을 투영함으로써 실재의 구멍을 욕망이 작동할 수 있는 상징계의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 37이다. 그렇기에 개신교가 장례 절차를 허례허식으로 여겨 치워버렸던 것은 단순히 가톨릭의 부정이 아닌 같은 대상의 상실을 경험한 공동체의 기억에 대한 부정이었다. 38
5. 나가는 말
『햄릿』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학이다. 조카가 왕을 죽이고 왕자가 숙부를 죽이는 참극은 그래서 문학이라는 틀 아래에서 사회적 애도작업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극을 쓴 셰익스피어와 그의 극을 관람하는 관중들은 사회적 억압이 지우려는 기억에 맞서 공동의 애도작업을 수행했다. 이렇게 『햄릿』은 문학이 자신의 가치를 끊임 없이 증명하기를 요구받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견실하게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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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문트 프로이트,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2003, 536쪽. [본문으로]
- 장도준, 「정신분석학적 비평」, 『한국말글학』 제25권, 2008, 128-129쪽. [본문으로]
-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햄릿』의 해석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전해 왔는가에 관해서는: 양석원, 「『햄릿』과 정신분석: 프로이트, 랑크, 존스.」, 『비교문학』 제47권, 한국비교문학회, 2009, 93쪽 참조. [본문으로]
- 양석원, 같은 책, 95쪽 참조. [본문으로]
-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321쪽. [본문으로]
- 양석원, 「『햄릿』과 정신분석: 프로이트, 랑크, 존스.」, 101쪽 참조. [본문으로]
-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317, 321-322쪽. [본문으로]
- 지그문트 프로이트, 『예술, 문학, 정신분석』, 519-545쪽 참조. [본문으로]
- 그러나 연구결과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매장된 날짜는 1601년 9월 8일로, 『햄릿』이 쓰여졌을 때와 첫 공연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박소현 옮김, 믿음사, 2016, 544쪽 참조.) [본문으로]
-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323쪽 참조. [본문으로]
- 김서영, 「라깡의 『햄릿』 분석에 나타난 프로이트로의 복귀」, 『현대정신분석』 제9권, 한국현대정신분석학회, 2007, 103쪽. [본문으로]
- 양석원, 「『햄릿』과 정신분석: 프로이트, 랑크, 존스.」, 95쪽. [본문으로]
- 어니스트 존스, 『햄릿과 오이디푸스』, 최정훈 옮김, 황금사자, 2009 146쪽. [본문으로]
- 같은 책, 147-149쪽 참조. [본문으로]
- 김서영, 「라깡의 『햄릿』 분석에 나타난 프로이트로의 복귀」, 101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99-103쪽. [본문으로]
- 이경식, 『셰익스피어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358-359쪽. [본문으로]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81,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278쪽 참조. [본문으로]
- 아리스토텔레스가 금기시 했던 희극적 요소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적 비극의 특수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이경식, 『셰익스피어 연구』, 354-358쪽 참조. [본문으로]
- 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554쪽. [본문으로]
- 이 구절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의 변용이다. 이처럼 『햄릿』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반영에 대해서는 홍기영, 『셰익스피어 극의 기독교적 해석』, 동인, 2013, 53-71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70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54쪽 참조. [본문으로]
- 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532쪽 참조. [본문으로]
- 이경식, 『셰익스피어 연구』, 460쪽 참조. [본문으로]
- 햄릿은 부왕이 사망한 동안 독일로 유학을 가 있었고, 이로 인해 상실한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 햄릿은 거트루드를 비난할 때도 그녀가 너무 빨리 재혼했음을 지적하며 ‘기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으로]
- 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544-548쪽 [본문으로]
- 같은 책, 554쪽 참조. [본문으로]
- 이경식, 『셰익스피어 연구』, 460쪽 참조. [본문으로]
- 스티븐 그린블랫, 『세계를 향한 의지-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 555쪽 참조. [본문으로]
- 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잎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지음, 문학과지성사, 1989, 135-136쪽. [본문으로]
- 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 이론』 제24권, 한국비평이론학회, 2019, 36-37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37-38쪽 참조. [본문으로]
- 김석, 「애도의 부재와 욕망의 좌절」, 『민주주의와 인권』 제12권,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12, 65-66쪽 참조. [본문으로]
- 같은 책, 67쪽. [본문으로]
- 같은 책, 70쪽. [본문으로]
- 같은 책, 7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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