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좋은 사람으로 느껴진다면 애초에 알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알고봐야 좋은 사람들” 중 정작 내 사정을 알아봐주려 했던 사람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는 아름다운 덕목이고, 많은 위인들의 실천이 증명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에고이즘을 이타주의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데, 이타주의자라 해서 관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에고이즘과 이타주의 모두 관점의 표현이라고 파악해보면, 이제 무분별한 이타주의는 책임의 면피와 더불어 전투와 대립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힐 가능성이 생긴다.(푸코는 촘스키와의 대담에서 이와 유사한 논리로 변증법을 비판한 적이 있다.) 실로 개인적인 사정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있는가? 사정은 행위의 충분조건이 아닐뿐더러, 그렇게 모든 사정을 고려하라는 요구는 너무 쉽게 책임의 분산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예전에 나에게 “알고보면”을 설파했던 어떤 분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 말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타심보다는 문제의 봉합에 급급한 태도였다.
고로 나는 “이타주의는 책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니체는 기독교의 이타심이 저열하다고 평가했지만, 도스토옙스키(“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의 이타주의는 니체의 비판과는 아주 다른, 강한 자의 기독교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황지우, [서풍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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