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경 (2012). 경험되는 북·중 경계지역과 이동경로 북한이탈주민의 경계 넘기와 초국적 민족 공간의 경계 확장. 공간과 사회, 22(2), 114-158.
Sung Kyung Kim. (2012). Experiencing North Korea-China Borderland and Routes of Mobility: ‘Border Crossing’ of North Korean border-crossers and the Expanding of Transnational Ethnic Spaces. Space and Environment. 22(2), 114-158.
1. 들어가며
중국과 북한은 북·중 국경을 넘는 북한주민의 이동이 단순 경제적 목적으로 한 불법월경으로 이해하여 당사국간의 해결을 주장 한다면, 미국과 한국은 이들의 북한내외의 인권적 상황을 들어 정치적 박해자로 규정함으로써 북핵 등 주요 사안에서 중국 과 북한을 압박하는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주 민의 이동의 성격과 추동 요인은 각 당사국의 정치적 논리 안에서 왜곡 되기 쉽고, 이는 북한이탈주민을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이들의 안정적 인 정주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115-116]
기존의 연구에서는 과거의 북한이탈주민의 이주는 정치적이었다면, 대량 탈북사태 이후에는 경제적 이유에 그 근원을 둔다고 지적하고 있다 (윤인진, 2009; 2001; 정주신, 2011; Lee, 2004; 김수암, 2006; Aldrich, 2011). 냉전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1960~1980년대까지는 주로 북한 정권에 탄압을 피해 이주한 군인이나 정부 관료가 대부분이었다면, 1990년대 중 반부터 시작된 대량탈북은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 극복을 위한 경제이주라는 것이다. 물론 정치적 요인이 지배적이었던 과거에도 경제 적 이유로 이주를 감행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경제적 이주자 중에서 도 몇 번의 강제 북송을 경험하면서 정치적 난민으로 성격이 변화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북한 주민의 이주의 성격과 원인을 정치적 혹은 경제적 요인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 다 [116]
첫째,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시작된 북한주민의 이동은 적게는 30만에 서 많게는 100만까지로 추정되는데, 이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한 으로의 이주를 선택하기 보다는 중국에 체류하거나 혹은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기는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들이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 이주를 감행했다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돌아 가는 경우가 발생하기 어렵고, 단순히 경제적 이주로 일반화하기에는 아 직까지 중국에 남아 있는 북한주민의 수가 너무 많다. [116-117]
둘째, 대량 탈북사태 이후 대다수의 북한 주민이 남한으로 이주를 감행하기보다는 중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5년에 미국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의하면 약 10만에서 30만 명의 북한 주민이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데, 이들이 단순히 남한으로의 이주 과정이 험난하여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단기 체류 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그 수가 상당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17]
셋째, 북한주민이 북한 정권의 폭압이나 극한의 경제난을 피 하기 위해서 이주를 감행한 것이라면 북한 전역에 걸쳐 이주가 발생해야 하는데, 이주민의 대부분은 함경북도 출신이라는 점은 북한주민 이주의 또 다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즉, 중국과 국경으 로 맞닿아 있는 지역 중에서도 함경북도 출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이주를 감행한 이유는 이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과 경계지역의 성격을 규명하 면서 설명될 수 있다. [117-118]
넷째, 북한이탈주민 중 많게는 70%까지 차지하는 여성의 비율에 대한 문화적 규명이 필요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북한여 성이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서 팔려나가게 되면서 여성의 수가 급증하였 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다면 북·중 경계지역의 문화 지리적 측면에 서 여성의 이주를 유인하는 요소는 없는지 확인하고, 경제난 이후 북한 여성의 생활경험세계가 확장되면서 이들의 이주가 가능했던 것은 아닌 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118]
오랫동안 형성 되어온 문화적·언어적 커뮤니티(cultural and linguistic community)가 바로 북· 중 경계지역에 자리 잡혀 있었고, 이로 인해 북한 주민의 ‘경계 넘기’는 타국으로의 ‘이주(migration)’이기 전에 일상생활 깊게 작동해온 커뮤니티 내(內)의 ‘이동(mobility)’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118]
2. ‘경계(들)’, ‘국경’, ‘문화적·언어적 커뮤니티’: 문화적 자원으로의 북·중 경계지역
즉 지리학적 선으로 존재하는 ‘국경’ 은 국가와 국민, 그리고 주권의 지역적 한계를 명시하는 것으로 작동해 왔지만 실제 국가 간의 구분으로의 ‘국경’은 지리적 국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상상, 재현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작동하기도 하고 혹은 전혀 작동하지 않기도 한다(Akaha and Vassilieva, 2009; Wast-Walter, 2011). 이는 ‘국경’은 지리적으로 그려진 실제 ‘국경’에서 작동하기 보다 는 국가 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구분이 요구되는 다양한 공간에서 작 동할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119]
19세기 중엽부터 일제 강점기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뿌리를 내린 중국 동북 3성과 북한이 맞닿아 있는 북·중 경계지역은 북한 사람들에게 국경으로 제 한된 지역이기보다는 오랜 시간동안의 소통과 교류를 바탕으로 역사적· 문화적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압록강 이북의 조선족의 대부분은 조선 북부 평안도 사람들이었고, 두만강 이북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은 함경도 출신이었다는 점(리흥국 외, 2010: 14)을 감안할 때 중국 동북 3성과 북한의 국경지대는 근대의 ‘국경’의 선이 그어지기 전부터 오랫동 안 혈연적·문화적으로 묶여 있었던 지역이었다. 특히 함경북도와 두만강 을 두고 맞닿아 있는 중국 쪽 지역은 연변조선족자치주6)로 조선족의 문 화적·언어적 특성을 지금까지도 지켜가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근 대의 국경이 생겨나고 난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북한 경계지역과의 교류를 계속해왔고, 이로 인해 국가라는 체제와는 다른 수준의 감정적· 일상적 커뮤니티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북한 주민들이 강 넘어 중국 조선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는 역사적 기억은 이들을 좀 더 가깝게 연결시켜주는 고리역할을 하였다 (Lee, 2004: 45). [120]
반면 <그림 2>에서 보듯이 자강도와 양강도는 국경 반대편에 조선족 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같이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아닌 흩어져서 분포되어 있고, 자강도에 군사시설이 집중 되면서 타 지역보다는 국경이 강화되어 작동해왔다는 점과 양강도의 경 우에는 백두산의 험한 산새가 중국 조선족과의 빈번한 접촉을 가로막았 다는 점 때문에 함경북도와 연변자치주와 같은 일상에서 작동하는 문화 적·언어적 커뮤니티를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구성하지 못하였다 [122]
지정학적으로 압록강보다는 강폭이 좁고 물살이 느린 두만강 유역의 경계지역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기보다는 중국과 북한의 중앙정부나 내륙과는 구별되는 경계지역으로의 구별적인 지역문화를 갖고 있다. [122]
3. 탈북자의 ‘이동’: 일상에서 경험되는 ‘경계’
1994년 김일성의 죽음과 1995년 대홍수로 시작된 최악의 경제난은 수 많은 북한 사람들을 극단의 상황에 내몰게 하였다. 1990년을 기점으로 곡물생산은 1997년에 약 25% 이상 감소하였고, 배급은 1993년부터 계 층9)에 따라 차등 지급되기 시작하였다. 에너지 수급까지 문제가 생기자 중앙정부가 위치해 있는 평양 지역을 제외하고 수송 체계가 미비한 북부 산간 지역과 동부 지역에서부터 배급이 끊겼다(김병로·김성철, 1998: 80). 1994년부터 시작된 5년간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각 지역별로 먹는 문제 를 자력갱생을 하여야 한다는 김정일의 교시가 내려왔고, 이에 따라 각 지역은 각자 살아가야 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124-125]
서부의 평야지대를 제 외하고는 대부분 산악지대인 북한의 지리적 특성상 북부지역과 동부지 역은 가장 척박한 지역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타격을 받은 지역은 자강도, 양강도, 함경남·북도였다. 각 지역 단위로 생산된 곡식이 중앙정 부로 집결되어 배급되는 시스템에서 지리적 위치가 가장 멀기도 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물류 운송에 큰 어려움이 있다는 점과 중공업 시설과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자체적으로 생산 할 수 있는 지역 내 곡물 생산량이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중국과 경계지역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식량난이 가장 심각했던 지역 중 특히 월경자가 많았던 곳은 함경북도였다. 다음 <표 2>에서 보듯 이,10) 약 68%의 북한이탈주민은 함경북도 출신이고, 그 뒤를 함경남도 (약 10%), 양강도(5%), 평안남도(4%), 평안북도(3%), 평양(2%) 자강도(1%)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125]
그렇다면 여기서 중국과 국경으로 맞닿아 있는 지역인 자강도와 양강 도가 함경북도가 비슷하거나 혹은 더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음에도 불구 하고 왜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은 함경북도 출신인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 대부분의 함경북도 사람들은 북한 내 다른 지역 혹은 중앙당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서 ‘자력갱생’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강 건너 조선족에게 기대었는가하는 점이다. 국경 으로 나누어진 중국과 북한의 ‘경계(border)’가 북한 지역 내의 경계(border) 보다 함경북도 사람들에게 더 쉽게 이동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27]
이 때문에 남편이 죽고 아들이 영양실조가 걸린 극한의 상황에서 평양에 있는 오빠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생각하 지 못하고, 오직 중국에 가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그 만큼 중국에 가는 것이 평양으로 가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면서도 친 근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28]
함경북도인들의 경우 경제난과 대중교통의 미비, 권력 서열에 따른 거 주 지역 서열화 등으로 북한 내의 타 지역과는 상대적으로 활발한 접촉 지대를 형성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와는 편리 한 접근성, 민족정체성, 역사성 그리고 동일 언어사용이라는 점을 바탕 으로 일종의 동일문화·언어지대(Cultural and linguistic zone)를 형성하고 있 었다(Reichert, 1992: Dominian, 1915). 이 지대는 단순히 물리적 혹은 지리적 으로 두 지역이 맞닿아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각 지역의 사람들이 오랫 동안 구성되어온 상호 연계 관계 속에서 공동체적이면서도 유사한 언어 와 문화지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렐프, 2005: 85~87). 즉 북·중 경 계지역은 함경북도 주민에게는 일상의 공간으로 접촉과 교류가 항상 횡 단하는 지역으로 경험되고 있었고, 이에 이들은 경제적 위기가 닥치자 동일문화·언어지대 내의 이동을 감행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 던 것이다.12) 사센을 인용하자면 아무리 경제적 이유로 이주를 감행하더라도 지역적·문화적·사회적 지리여건이 주요한 이주 추동 원인일 수 있 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Sassen, 1990). 많은 수의 함경북도 주민은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친척이 있고, 경 제 위기 전에는 중국으로 친척을 방문하거나, 혹은 조선족 친척이 북한 을 방문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129]
1986년에서 1992년까지 친척들이 하루도 안 빼고 장사하러 왔었어요. 엄마가 김철 제철공장 여맹위원장도 했고 연맹 공장에 오랫동안 있었어 요. 그때 친척들이 정말 많이 왔었어요.[…] 1998년도부터 각자 자체로 살아가라는 교시가 내려왔어요. 그때부터 중국이랑 무역하고, 교역하고 그 랬어요.[…] (예전에) 친척들이 올 때마다 제가 다 도와주고 했거든요 (C씨 인터뷰). [130]
친척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C는 경제난이 닥치자 자연스레 중국으로 넘어가 친척들을 통해 무역을 하게 된다. 과거에 도 움을 받았던 친척들은 C를 반겼고, 이 때문에 C는 결국 중국에 장기체류 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보다 가난했던 조선족 친척들 이 북한에 들어와서 생필품을 팔고, 광물이나 건강식품 등을 사가지고 넘어가 중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례들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북·중 경계지역은 국경으로 나뉘어져 있기보다는 끊임없는 초국적 경험들로 재구성된 동일문화·언어지대로 자리 매김된 것이다. [130]
그만큼 월경을 한다는 것이 국가를 넘어가는 이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보다는 일상의 공간 내에서의 반복된 이동의 성격을 뗬다 [131]
고난의 행군시기에 각 단위의 주민들이 각자 알아서 경제활동을 할 것을 독려했던 북한정권은 사실상 북한 주민들의 월경을 지원 혹은 묵과했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서류는 ‘친인척 방문허가증’이라는 서류 한 장이었고, 이 서류는 중앙정부가 아닌 당 의 지역사무소에서 처리되었다. 이 시기의 중국과 북한의 국경경비은 대부분이 동일언어지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지역(local)’ 사람들로 국경을 관리하고 단속하는 데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에 불법적인 월경은 마치 이웃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131-132]
4. 강화되는 국경: 탈북자의 ‘경계 넘기’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북한정부가 사실상 불법월경자 를 묵과하였기도 했고, 식량난으로 인해 사회 시스템이 급격하게 붕괴되 면서 이들에 대한 처벌도 일정기간 구호소에서 수용한 이후에 석방하는 등 처벌의 수위도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묵과 해온 월경자들이 북에 돌아오는 것이 아닌 중국에 머물면서 노동시장을 교란시키거나 제3국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속속 생겨나고, 합법적 월경자 들의 경우도 경제적 이득을 갖고 북에 돌아오기 보다는 중국에 장기간 체류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북한과 중국정부가 본격적으로 ‘국경’을 강화 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친척이나 친족이 있다는 증명만으로도 쉽게 얻 을 수 있었던 ‘친인척 방문허가증’은 2000년대 초부터 중앙정부의 허가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친인척 방문허가증’을 받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길어지고, 뇌물이나 사회적 연결망의 지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남한의 각종 ‘단체·조직·인사들의 기획입국’ 시도로 탈북자 문제가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송봉선, 2011: 291~292), 지금껏 적극적으로 국경을 강화하지 않았던 중국과 북한이 탈북자 강제 북 송 등의 방법으로 두 국가의 경계를 강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133]
이와 같이 강화된 ‘국경’은 경계지역의 동일 문화·언어지대로서의 공동체적 문화까지 변화시켰고, 이는 조선족과 북한이탈주민의 대립적 관 계까지 양산하게 된다(윤여상, 2008). 특히 북한 주민의 월경이 이주 산업 화되면서 많은 수의 조선족이 탈북 브로커가 되거나 인신매매산업에 뛰 어들었고, 조선족과 북한주민 사이의 상당한 갈등을 야기하였다. 또한 농촌지역의 가난한 조선족들이 북한 월경자들을 숨겨준 후 이들의 노동 력을 착취하고 중국정부에 신고하여 포상금을 받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조선족은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 북한 월경자 사이에 퍼져 나가기도 하였다. 반대로 대다수의 젊은 조선족이 남한으로 경제이주를 떠나면 서 텅 빈 조선족 마을을 탈북자들이 약탈을 하거나 부녀자와 노약자를 폭행하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조선족 사이에서 탈북자에 대한 반감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Lee, 2004: 45). 연변대학교의 박창익 교수는 일부 탈북자가 범죄 집단화되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중국동북지역의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137]
특히 북한이탈주민 중 약 70%를 차지하는 북한여성들은 남한으로 경제이주를 떠난 조선족 여성의 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이는 상대적으로 계발이 덜 된 농촌지역에서 눈에 띄게 포착된다. 물론 많은 수의 탈북여성들이 인신매매나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결혼하지 못한 농촌 조선족들이 브로커들에게 돈을 지불 하고 북한여성들을 데려와 정착한 사례가 많지만, 동북 3성 조선족 사회의 여성의 빈자리는 더 많은 북한여성들이 월경을 할 수 있게 하는 큰 동기임에 분명하다. [137-138]
이 곳의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은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데, 이곳이 자신들의 고향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언어와 문화가 비슷 하여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조선족과의 결혼과 출산 등을 경험하면서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중국 조선족 사회 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이곳이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는 것이다.18)물론 이들 또한 공안 단속의 공포와 법적 신분이 없기 때문에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지만,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시골 조선족 마 을의 경우 유대감이 높고, 대부분의 촌장이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서 북 한이탈여성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리정순, 2009: 30). [138]
이와 같은 사례를 볼 때 10~30만으로 추정되는 중국내의 북한 사람들의 삶이 하루하루 극도의 불안과 함께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난민적 상황이기보다는 적절하게 조선족 사회와 연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동일문화·언어지대 내에서 안정감을 구축하면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38-139]
5. 이주의 과정: 초국적 민족 공간의 확장
2005년 자료에 의하면 북한이탈주민의 제3국 체류기간은 총 41개월로 나타났다(김수암, 2006: 13).21) 이는 북한주민이 탈북을 하자마자 남한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중국이나 제3국에서 체류 혹은 이동을 반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140]
한동안 정착했던 중국을 떠나 머나먼 길을 이동한 북한주민에게 있어 남한행은 그만큼 절박한 사안이었다. 그만큼 상당한 기간 동안 체류하였 던 중국을 벗어나서 동남아시아로 이동한 것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 가는 것 이상의 큰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었고, 그들에게 남한행이 좌절 된다는 것은 다시 돌아갈 곳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남한행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당함과 고통도 감내하려 한다. 남한행이 좌 절될까 하는 불안감은 사실상 이들이 남한정부가 제공하는 시설에서 지 낼 때조차 계속되고, 이 때문에 시설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이 된다. 여기서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의 동 남아시아 체류는 이동의 중간기착지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대부 분의 북한주민은 동남아시아 국가 내(內)에서 체류하기보다는 동남아시 아에 존재하는 한국-조선족 커뮤니티의 연결선을 따라 이동하고, 그 연 결선 안의 영역에서만 체류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게다가 장시간 지속되어온 중국 내의 체류도 중국 사회에 정착하거나 스며들어가는 것 이 아닌 한국인-조선족-북한인으로 구성된 민족적 공간내의 체류에 한정 되기 때문에 이들이 남한에 들어올 때는 상당한 수준의 민족 정체성이나 민족적 공동체의 가치와 연관 지어 자신들의 이주의 이유를 주장하기도 한다. [148]
6. 남한으로의 이주 이후 경험되는 ‘경계’
중국에서 범람하는 한국 대중문화에서 본 화려한 한국에서의 삶이 자신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들이 파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임대주택과 기초생활 수급비는 높은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한민족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자신들이 결코 남한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빠 르게 실망감으로 변해간다. 하나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한국사회에 첫 발 을 내딛는 날은 이들에게는 한국의 삶의 현실을 인지하게 하는 첫 순간 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은 ‘좁고, 더럽고, 낡은’ 임대 주택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실망하고, 그 순간 자신들의 남한사회의 위치 를 어렴풋이 파악하게 된다. [149]
북한이탈주민은 ‘경쟁’조차 가능하지 않은 약자로 구분되거나 아니면 최하위 노동자에 위치된다. 세금납부자 인 대다수의 남한국민의 일방적인 도움이 필요한 ‘생활보호대상자’이고, 숙련된 기술이 없는 저임금 노동자(low-skilled labour)이며, 남한 사회의 문 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주자(migrant)’이다. 이동의 과정에서 민족 정 체성과 민족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된 북한이탈주민들은 세 금납부자인 남한국민의 차가운 시선과 선입견이 견디기 힘들고, 생활보 호대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저임금 노동자의 힘 겨운 삶이 적응하기 괴롭고, 낯선 환경과 문화는 무의식적으로 믿었던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의 허상을 맞닥뜨리게 한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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