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연 and 황국명. (2022). 경계에서 이야기하기 - 탈북여성의 자기서사와 ‘다른’ 고백의 정치. 코기토, 97, 89-128.
Kim, Kyung-yeon and Hwang, Guk-myung. (2022) Testifying at the Boundary - Politics of Confession ‘Different’ From Self-Narrative of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Cogito, 97, 89-128.
2. 탈북 여성들은 ‘이야기’할 수 있는가―고백과 파레시아 사이
‘탈북’이란 주지하듯이 1990년대 이후 북한의 기근과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사태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자국을 떠나 제3국이나 남 한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지시하며, 정치적 월경보다는 경제적 생존을 위한 탈출이라는 의미를 유력하게 환기하는 용어이다. 때문에 이러한 함의가 기입된 탈북민,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등으로 명명되는 탈냉전 시대의 월경자들은 냉전시대 분단의 경계를 넘었던 귀순 자, 귀순용사, 귀순동포로 불리던 이들처럼 남한체제의 이념적 정당성을 보증하는 존재로 추대되기보다는 남한 주민의 “지원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취약자”로 흔히 상상된다. 헐벗고 유린당한 자들로 연민되거나 한국사회에 기생하는 자들로 적대되는 탈북민들은 기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실존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97]
과거 ‘귀순’의 주류가 남성이었다면 ‘탈북’의 주체는 대부분 여성들이 되었다. 한 탈북 여성작가는 이를 “거창한 식량난의 파도가 휩 쓸어와 질곡 같은 남성상의 제방을 사정없이 무너뜨”린 결과라 설명한다. 가부장적 가족국가인 북한에서 ‘혁명적 현모양처’를 배정 받았던 여성들이 “돌연히 ‘낮 전등’이 되어 버리고 ‘자물쇠’로, ‘멍멍이’로 되어”간 남성 세대주를 대신해 “가족생계의 엄혹한 짐”을 떠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비된 국가경제가 개인의 부엌경제에 의해 대체되던 女先後男”의 이례적인 시기에 생계를 떠맡은 여성들은 ‘장마당’을 만들고 식량을 찾아 집을 떠났으며, 인간성을 유지하고 생명력을 보존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무희망”의 상황에서 국경을 넘는 모험도 불사했다. 그렇게 국경을 거듭 넘어 남한으로 이동해 온 탈북여성들을 재빨리 포착한 것은 남한의 각종 재현 장치들이다. [98]
탈북여성들 역시 남한 사회에 도착하는 순간 이러한 질문을 예외 없이 건네받지만, 그러나 그 물음은 기실 환대의 언어가 아닌 신문의 형식이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백해야 한다. 그 폭력적인 발화의 경험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중앙합동신문센터’이다. ‘북한이탈주민’이라는 남한의 시민으로 승인되기 위해서 모든 탈북민들이 통과해야 하는 이곳은 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예외상태가 규칙이 되”는 수용소이며, 탈북민들은 이곳에서 예외 없이 잠재적 간첩이며 벌거벗은 생명으로 등록된다. 전방위적인 감시체계가 전일적으로 작동하는 이 무법의 공간에 고립된 채 이름이 아닌 번호로 호명되는 탈북민들에게 강제되는 것은 ‘자서전’ 쓰기이다. [100]
그러나 이는 탈북민들에게 “인격을 현시”하고 “새로운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권리를 되돌려 주는 환대의 의식이 아니라, 진짜 탈북자와 위장 탈북자를 식별하고 북한이탈주민으로 등록할 자와 간첩으로 적발할 자를 선별하는 심문의 절차이다 [101]
자기의 기술이 아닌 지배의 기술로 변질된 고백의 경험을 통해 탈북민은 ‘온전한’ 진실이 아닌 ‘특정한’ 진실을 발설하는 선택적 증언을 생존의 기술로 터득하며, 결백을 증명하는 자기서사를 통해 “누구보다 북한에 대한 비판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남한 시민”으로 자신을 훈육한다. 푸코의 지적처럼 고백된 진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강탈당하는 자에게 효력을 발휘”하며, 발화된 이야기는 인간이 “자기상과 자신이 서는 위치”를 지정하는 “가장 엄혹한 감옥”일 수 있는 것이다. [102]
각종 수기 공모, 사례 발표, 교회나 민간단체에서의 증언, TV 프로그램의 토크쇼에 이르기까지 탈북민들은 그들을 부단히 호출하는 남한 청중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자서전’을 생산하면서 ‘진짜 탈북자’를 거듭 증명하고 남한에 합당한 시민임을 다시 승인받는다. [102-103]
이러한 승인의 정치가 가공한 탈북수기들은 한 탈북 여성작가의 지적처럼 흔히 “고난의 시기와 정치범 수용소, 최고 권력층의 문제로 주제의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북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균형적 이 해를 증발시”키는 편향적인 서사로 주조되고, 이러한 천편일률적 탈북기 속에서 저자이자 주인공인 탈북여성들은 다시 ‘도망친/팔려 간/추방된’ 피해자로 동결된다. “성 노리개가 된 탈북여성의 수난 기”, “탈북여성의 고백”, “북한과 중국에서 겪는 눈물 나는 이야기”, “눈물로 쓴 탈북민 수기” 등으로 이미 결정된 고백 장치 혹은 증언 체제 속에서 발화하는 탈북여성들은 스스로를 “인권유린과 인신매매 속에 고통받는” “불쌍한 운명”의 여성들로 표상하며, 북한체제를 잔 혹한 가해자로 적발하고 대한민국을 선량한 구원자로 추대한다. 북 한은 가난하며 무자비한 폭력이 일상화된 “아무런 미련 가질 것이 없 는” 곳으로 부정되는 반면, 남한은 “자유의 나라”, 난민인 그들을 국민으로 받아준 감사한 나라, “가다가 죽더라도 가야 할, 아니 죽어서도 가야 할” 곳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103]
3. 탈북여성난민의 증언과 이언어적 번역의 정치
이처럼 최진이에게 모성은 부과되거 나 강요된 것이라기보다 발견되고 자발적으로 실천된 것이며, 따라 서 그녀에게 ‘모성’과 ‘여성’은 서로 갈등하지 않는다. 외려 아버지ㆍ 남편ㆍ국가와 같은 실패한 가부장들로부터 쟁취한 것이 모성이며, 때문에 그녀에게 모성의 수행은 여성의 자각과 다르지 않다. 평양 추방령 이후 탈북에 이르는 여정을 이렇듯 상실과 고난보다 발견과 이행의 기록으로 구성한 최진이는 여성 난민의 경험 역시 피 해자보다는 살기 위해 분투하는 피해생존자의 서사로 달리 이야기한 다. 그러므로 “도강해 오는 조선 여자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성을 제 공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205) 탈북여성들의 현실을 환기하고, 매매결혼을 전전하며 자신을 산 “주인남자”(269)의 치명적인 학대와 성적 유린을 낱낱이 증언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을 ‘팔려간/도망친/추 방된’ 가련한 여자로 주조하기보다 자신과 아이를 구원하기 위해 폭 력에 “항거”한 “뜻 있는 여자”(274)로 재현한다. [112]
“지옥과도 같은” 북한 생활을 고백하고 “내 나라 내 조국”이 된 남 한에서 “자유와 함께”82)살 것을 다짐하며 마무리되는 것이 탈북수기 의 전형적 수순이라면, 최진이의 국경은 이러한 상례를 벗어나 남 한에서 북한이탈주민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최종적으로 이야기한다. 과거 북한의 생활과 탈북의 여정을 서사화한 1~3부와 달리, 현재진 행형인 남한살이를 서술한 4부는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예외적인 장을 통해 최진이는 자신이 북한과 “정신적 결별”(300)을 했으나 절대 결별할 수 없는 자라고 공지한다. 환북 의사를 묻는 노 인권운동가의 질문에 “어머니가 없는 땅”(303)인 북한에 영원히 돌아 가지 않겠다고 언급한 일화를 소개하며, 그녀는 이것이 북한 사회에 대한 자신의 항의를 피력한 것이며 북한을 “아주 잊는다”는 의사를 천명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는 또한 ““아주 잊지 않겠다”고 입으로 말 하는 것보다 “더 잊지 않겠다”고 처절하게 부르짖는 애정의 다른 표 현”(304)이라는 것이다. 최진이에게 북한은 어머니가 없는 땅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는 땅이며, 때문에 돌아가지 않아도 잊을 수 는 없는 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115]
어린 시절의 귀국자들처럼 남한 사회에서 낯선 자로 살아가는 최 진이 역시 긴장과 자유, 의심과 객관성을 동시에 보유한 이방인의 위 치에서 남한 사회를 다른 눈으로 응시한다. 예컨대 탈북자들에 대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배려”(291)를 하기보다 그들이 국경을 횡단하 는 모습을 촬영해 스펙타클하게 업적을 전시하려는 남한 후원자들의 욕망을 냉소하며, “약자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남한의 선교사들이 “탈북자들을 대상화하는 행위”(309)를 적발하기도 한다. 통일 이후 환북 의사를 묻는 남한 사람들의 질문에서 한국이라는 문명사회에 정착할 수 없는 열등한 존재로 탈북민을 바라보는 위계적 시선을 간 취하기도 하며,86) “한국을 사람 못살 사회로 만들었던 위정자들에 대해서는 ‘독재자’”라 비판하면서도 북한을 “비인간적인 사회로 전 락시켜놓은 당사자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평가 내리기를 꺼려”(331) 하는 남한 인텔리 계층의 모순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117]
그녀는 또한 북한의 문화를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남한 의 문화를 보편적이거나 정상적인 기준으로 제시하려는 ‘남한화’87) 의 요구 역시 순순히 내면화하지 않는다. “생활총화나 사상투쟁, 각 종 비판총회를 통해 감시 통제하는 제도가 가시화되어”(312) 있는 북 한과 “감시 체계가 비가시화되어” 있기에 “더 무서운”(313) 남한과의 차이를 포착하는가 하면, 북한의 노동현장에서 진행하는 각종 학습 시간이 “북한인의 세뇌를 위해 고안된 것이라 할지라도 노동자와 사 무원 간의 계급적 차이를 완화시키는 완충기 역할”(314)을 했다면, “노동자를 일하는 도구로”로만 여기는 남한의 “냉정한 자본주의 체 제”를 간파하고 이러한 체제에 합류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315) 탈북자들의 처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한편 최진이 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콤플렉스”(336)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한 다. 천재콤플렉스와 미모콤플렉스, “성공한 사람은 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죽어야 한다는 살인적 분위기에 전 국민이 내몰리는”(337) 성공 콤플렉스를 한국사회의 3대 콤플렉스로 적시하며, “사회를 따듯하고 살기 편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서로의 소중한 마음에 있다”(338)고 조언하기도 한다. [117-118]
북한사투리를 폐기하고 남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이 탈북민의 정착 성공을 증빙하는 가장 유력한 지표로 간주되는 한국사회에서,92) 최 진이는 가령 다음과 같이 북한어를 말소하지 않고 남북한의 언어 사 이에서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다. [119]
최진이가 발화한 북한어 역시 국가와 연결된 공민/인민의 언어가 아닌 국민국가로부터 쫓겨난 자 들의 언어, 곧 난민의 은어로 다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달리 말해 그 녀가 기억하고 기입한 낯선 말은 북한을 환기하는 ‘모국어’라기보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모어’로 가늠되는 것이다.94) 모어가 쫓겨난 자 들, 고향 상실자들, 절대적 이방인들의 “최후의 고향” , “절대 뜯어내 버릴 수 없는 자기-집”95)이라면, 모어 혹은 쫓겨난 자들의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언어-공민/국민-국가’의 연결망을 중단하려는 “소 수적 실천”96)일 것이다 [120-121]
서경식은 ‘모어’(mother tonge)와 ‘모국어’(native language)가 전혀 다른 개념이 라고 설명한다. ‘국어’란 국가가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인민에게 주입하는 언어이며 인 민을 ‘국민’으로 만들어가는 수단이라면, ‘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익힘으로써 무자각인 채로 자신 속에 생겨버리는 언어”이며 “일단 몸에 익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모어와 모국어는 반드시 일치하 는 것은 아니다. 서경식, 권혁태 옮김, 언어의 감옥에서(돌베개, 2011), 35 [120, 94번 각주]
그러므로 최진이의 국경은 공민이나 국민의 서사가 아닌 ‘난민’ 의 서사로 정독되며, “남한 생활에 감격하며 대한민국이 받아주었음 에 진심으로 감사”97)하는 파브뉴의 서사가 아닌 “남한 사회의 북한 인식이 너무도 겉핥기식이고 각종 색깔로 덧칠돼 있”98)다고 일갈하 는 파리아의 서사로 달리 독해된다. 아렌트가 언급했듯이 ‘파브뉴’가 자신을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 사회에 완전히 ‘동화’ 되기를 열망하는 자라면, ‘파리아’란 되레 “사회가 부여한 비실재의 위치에 저항하고, 쫓겨난 그 자리에서 쫓겨 난 이들 전체의 정치적 위치를 성찰하는 자”99)이다. 국경은 북한 의 공민에서 중국의 난민으로 다시 남한의 이등국민으로 월경을 거 듭했던 한 여성이 자각한 파리아로 이행해 간 여정을 고백한 예외적 탈북기인지 모른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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