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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헌, 김숙진 (2016) 중국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지리적 해석 : 중국 동북3성 조선족 이주를 중심으로

Soyo_Kim 2024. 11. 29. 15:54

최재헌, 김숙진 (2016) 중국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지리적 해석 : 중국 동북3성 조선족 이주를 중심으로. 대한지리학회지,  51(1), 167-184.

Jae-Heon Choi, & Sook-jin Kim (2016). Geographical Interpretation of Korean Diaspora in Northeastern China - Its Migration and Spatial Diffusion -. Journal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51(1), 167-184.

 

1. 서론

중국 내에서도 조선족의 위상에 대해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

① 먼저 조선족은 디아스포라가 아니며 100% 조선족일 뿐으로 한반도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초국적 이주민(transnational migrant)적인 시각과 함께(황유복, 2008),


② 이와는 상반되게 중국 조선족을 중국 국민이면서도 이중 문화 배경과 신분을 갖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갈래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각이 존재한다(조성일, 2013).

③ 다음으로는 중국 조선족의 거주지는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제3의 영역’에 속하는 특수한 공간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정치 경제 생활에서는 중국화 되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모국문화의 유전인자를 간직하고 있는 변인문화형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김강일·허명철, 2001; 김호웅, 2010).

분명한 점은 전체 인구수가 200만 명에 달하는 중국 조선족이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중국 동북3성의 주요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과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관계가 밀접해 질수록 중간인으로서의 중국 조선족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168]

첫째, 중국 조선족 공동체 의 형성과정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들로는 문화기술지(ethnography) 관점에서 1930년대 만주의 조선족 마을 공동체 형성을 흑룡강성 오상현 등의 사례를 통 해 밝히려고 한 연구(강위원, 2005; 김왕배·이수철, 2008), 1990년대 이후 동북3성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 족이 중국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조선족 공동체의 변 화와 해체를 다룬 연구(권태환·박광성, 2004; 권태 환, 2005; 김재기, 2005; 신주백, 2012) 등을 들 수 있 다. 이들 연구들에서 주목할 점은 조선족 공동체가 벼 농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농촌공동체이며, 한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된 1990년대 이후 도시화와 한국 이주 의 영향으로 이들 공동체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168]

 

2. 본론

중국 조선족의 이주의 출발점에 대해서는 조선족을 고구려 내지 발해 고조선의 후손들로 보는 견해, 14세 기 원·명 시대에 국경을 넘어 이주한 조선인들로부터 보는 견해, 명·청 교체기인 17세기로 보는 견해, 그리 고 19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인이 이주한 것 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17세기에는 자연재해와 전 쟁이 잦았던 시기였다. 특히, 1619년 명·청 전쟁에 동 원되었던 강홍립 장군 휘하의 5천명의 장병들이 청에 항복하고,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에 조선 인 인질 수만 명 중에서 일부 귀국자를 제외하고 대부 분 요동지방에 머물게 되면서 조선인의 중국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표 1). 하북성 청룡현 팔가자 향 박씨가구, 요녕성 개현의 진툰향 박가구촌, 그리고 요녕성 본계현 산성자향 박보촌의 박씨들이 모두 17 세기에 이주하였다는 연구결과가 이를 입증한다(김진 국, 1993). 그러나 19세기 이전에 이주한 조선인은 이 미 중국에 동화되어서 역사적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 문에 추적이 가능한 19세기 이후 조선족 이주가 본격화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70]

중국 조선족의 이주과정은 시대별 주요 사건과 관련하여 크게 19세기 후반에서 한일합방(1910) 이 일어난 ‘난민 월경기’, 1910년에서 만주사변(1931) 에 이르는 ‘정치 이주기’, 1931년에서 해방(1945)에 이르는 ‘강제 이주기’, 그리고 1945년 이후 최근에 이르는 ‘경제 이주기’로 구분 가능하다. 일제강점기의 인구 자료를 조합하여 만주지역의 조선인 인구변화를 살펴 보면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를 보이지만 1910년을 전후 로 하여 증가폭이 커지고, 다시 1931년 이후 변곡점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1). 1907년 71,000명에  1911년 126,000명, 1912년에 248,403명로 늘었고, 1920년대 동안 50만 명까지 늘어나다가 1931년 63만 명, 그리고 1935년에 80만을 넘었고 1945년에는 216 만 명에 이르고 있다(이규태, 2000). [170-171]

 

(3) 강제 이주기

‘강제 이주기’는 193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제의 이민정책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한 개척민들과 빈농들이 대거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시기로서, 당시 조선인 이주는 동북지방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억제하고 만주를 일제의 통치하에 두려는 대륙침략 정책의 일 환이었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을 일으키고 만주국 을 세우면서 만주를 일본의 전쟁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집단 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만주척식주식회사(1935)를 내세워 개척촌을 건설하고 조선인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흑룡강성과 길림성 중부, 북만주일 대 하천 부근에 한반도 남부 출신들의 집단촌이 세워 졌다. 당시 이민단 부락은 의도적으로 산지와 함께 수 전이 유리한 하천 연변의 평야지대에 집중하였다. 또 한 철도부설 사업에 따라 조선인의 이주는 이전시기 와 달리 1930년대 개통된 철도노선을 따라 이루어졌 다. 조양천-개산툰선, 화룡-조양천선, 도문-목단강 선, 도문-돈화선이 건설되어 이주 통로가 되었다. 예 를 들어 당시 흑룡강성 이주민은 청진-도문-목단강 철도를 통해 동녕과 호림을 거치거나 청진-조양천 돈화-교하 철도를 따라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이주 하는 노선이 일반적이었다. 그 결과 조선족 인구밀집지는 한반도 접경지대인 길림성 지역을 벗어나 1930 년대 중반 이후에는 흑룡강성 일대로 확대되었다(그 림 2). 한편, 이들 조선족의 출신 지방은 각 지역과 이주 시기에 따라 상이한 패턴을 보인다(김일학·박용한, 2009; 리흥국 등, 2010). 먼저 압록강 유역은 평안도 이주민, 그리고 두만강 일대는 함경도 이주민이 주류 를 차지하여 지리적인 근접성(proximity)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10~1921년 재만조선인의 원적 통계표(1922)’을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두만강 인근의 북간도는 함경북도 출신이 인구의 70%인 반면, 압록강인근의 서간도는 평안북도 출신이 37%이 고 다음으로 경상북도와 함경북도가 각각 10~20% 를 차지하였다. 한편, 흑룡강성 일대에는 일제에 의한 집단촌에 이주하였던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도 다 수 분포하였다. 1932년의 남북조선인 분포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재만조선인 49만 명 중, 44 만 명인 약 89%가 북부지방 출신이며, 남만주 지방에 서는 한반도 북부가 90.8%, 남부가 9.2%인 반면, 북 만주 지방에서는 한반도 남부 출신이 52%, 북부 출신 이 48%의 비율을 보인다(주성화, 2007). 이렇게 이주 시기에 따라 원적지 분포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1936년을 경계로 그 이전은 한반도 북부 지방에서 자 유 의지에 의해 가까운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 그리고 중러 국경지역 및 흑룡강성과 요녕성의 일부 내륙지 역으로 이주하였고, 그 이후에는 조선인 개척민을 위 주로 한 강제이주에 의해 한반도 남부지방의 이주민 들이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내륙 지역에 이주한데서 찾을 수 있다. [172]

 

(4) 경제 이주기

‘경제 이주기’는 해방이후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이 1990년대 들어와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경제 적 목적의 이주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시기로서 중국 조선족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한국에서의 노동 경험을 축적한 중국 조선족들이 농촌에서 벗어나 연 안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이 우세하다. [172]

광복(1945) 이후 만주에 있던 조선인 중에서 약 50만이 귀국하고, 구소련의 극동지역에 있던 일부 조선 인이 중국 흑룡강성의 밀산, 호림일대로 이주하였다. [172-173] 사실 구소련의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는 동만주 지방 과 공동 생활권으로 인식되어 많은 조선인이 이주하 였지만, 1860년 베이징조약의 결과 아무르강 동쪽이 러시아에 편입하면서 중국 동녕현과 애훈 등의 지역 으로 조선인의 재이주가 이루어졌고, 1890년대 초에 는 시베리아와 간도의 조선인이 대규모로 북만주 일 대로 이주하면서 동녕, 영안, 해림, 목릉 등 일대에 조 선인개간민촌을 형성하였으며, 1917년 극동지역 정 세 불안과 1928년 구소련의 사회주의 집체화 정책 등 을 이유로 연해주의 조선인은 다시 북만주 중국 동 북 지방으로 이주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서명 조, 1985; 주성화, 2007). 특히, 1937년 극동지역 조 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는 연해주와 중국 조선 인의 정체성에 차별화를 가져온 큰 사건이었다. 당시 171,781명이 강제 이주되었고 76,625명은 우즈베키 스탄으로, 95,256명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하 였다(기광서, 2002). 그 결과 소련 해체 전에 연해주 43,000명의 한인을 포함하여 총 438,650명의 한인인 구가 구소련에 거주하였다. [173]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1952년 연변 조 선족자치구 설립과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승격, 그리고 장백산조선족자치현과 자치향 등이 설립된 뒤 에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지게 되었으나 중국의 호 제에 따라 원적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이 중국 동북 3성에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은 각각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이 많고, 내륙에 있는 흑룡강성은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충청도 등 출 신지가 다양하고, 길림성은 경상도와 평안도 두 개 지 역 출신이 우세하며, 요녕성은 경북, 평안도, 강원도 등의 출신들이 주로 분포하는 패턴을 유지하였던 것 이다. [173]

중국 조선족 인구의 가장 큰 변화는 한중 수교가 이 루어진 1990년대 들어와서 일어났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한국으로의 이주와 동북3성에서 벗어나 중국의 연안도시로 이주하면서 과도한 인구유출로 인해 동북 3성 농촌지역의 조선족 집거구가 없어지거나 합병되 는 등 공동체 해체의 문제까지 봉착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과도한 조선족의 유입에 따라 한국에서도 국 내 저임금시장을 잠식하는 등 노동시장 교란 문제와 불법체류자 문제가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173]

해방이후 중국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약 절반이 귀 국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 통계에 따르면 조선족 인구수는 1953년 1,120,405명, 1964년 1,339,567명, 1982년 1,765,204명, 1990년엔 1,923,361명, 2000년 에는 1,923,842명, 그리고 2010년에는 약 1,830,000 명으로 증가폭이 크지 않으며 2000년 이후부터 인구 수가 오히려 감소하였다(표 2). 특히, 2000~2010년 사이 연평균 -4.8%의 속도로 감소하였다(표 4). 이런 급속한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는 중국 전체와 소수민 족의 인구증가율과 비교하였을 때 낮은 인구증가폭, 그리고 빠른 출산률 감소와 함께 경제성장에 따른 도 시화의 영향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김두섭·유정 균, 2013). 한 예로 1971년 4.42였던 총출산율이 1974 년에 1.89로 떨어졌고, 1989년에는 1.56, 1999년에는 1.1로 낮아졌다(권태환, 2005, 18). 조선족의 인구분포에서 보면 동북3성은 여전히 조 선족 인구의 최대 집적지로 나타난다. 동북3성이 조 선인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53년 99%에서, 1964년 97.7%, 1982년에 97.9%, 2000년에 92%, 그리고 2010년에 약 88%로 점차 낮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표 2). 이를 각 성별로 나누어보면 조선인 인구수는 길림성이 가장 높으며 이어서 흑룡강성과 요녕성이 순으로 나타난다(표 3). 그러나 각 성의 전체인구수는 증가하는 반면 조선인 인구수는 감소하기 때문에 각 성에서 조선인 인구의 비율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그 결과 2010년 길림성의 조선인 비율은 3.79%, 흑룡강 성은 0.86%, 요녕성은 0.55%에 불과하다(표 3). [173]

첫째, 조선족의 인구이동과 관련한 인구문제를 들 수 있다. 인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해외 유출 인구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농촌지역에서의 여성 인구 유출에 따라 성비 불균형 문제와 농촌 총각들의 혼인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청장년층 농업 노 동력이 이주함으로써 농촌 노동력의 고령화문제와 함께 한족 농민들의 조선족촌 진입으로 노동력의 양적, 질적 변화가 야기되어 농촌마을의 해체로 이어지 고 있다. 이것은 과거 농촌을 기반으로 한 중국 조선 족 공동체와 정체성에 큰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해석 된다 [179]. 그러나 동북3성에 집단 이민을 통해 조선족만 의 폐쇄적 생활공간을 형성하였던 과거와 달리, 한국 과 연해지역, 기타 해외로의 이주를 통해 중국 조선족 의 생활영역의 개방적 확대가 이루어지고 또 다른 디아스포라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이 는 중국 동북3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 조선족의 디아스 포라가 농촌공동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조선 족 도시공동체로 질적 변화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미 조선족 이주의 목적지인 한국이나 중국 연해지역, 기타 해외지역에서는 이런 새로운 조선족 도시공동체 가 출현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디아스포라 경관을 형 성하고 있다 [179-181].

 

3. 요약 및 결론

중국 조선족의 이주과정은 청이 봉금령을 폐지한 19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시대별 주요 사건에 따라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즉, 19세기 후반 에서 한일합방(1910)이 일어난 ‘난민 월경기’, 1910년 에서 만주사변(1931)에 이르기까지 항일독립과 일제 에 의해 농토를 잃은 빈농들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이주한 ‘정치 이주기’, 1931년에서 해방(1945)에 이르는 시기동안 일제의 대륙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개척민들이 강제적으로 집단촌을 만들어 이주한 ‘강제 이 주기’, 그리고 1945년 이후 1990년대 한중 국교 정상화로 교류가 본격화된 최근에 이르는 ‘경제 이주기’로 구분 가능하다. 이주시기에 따라 원적지의 분포가 다 르게 나타나 길림성과 요녕성의 국경에 접한 부근은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이 많은 반면 흑룡강성과 내륙 지역에는 한반도 남부출신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181-182]

특히, 조선인의 중국으로의 이주는 만주지역에 걸 쳐서 일어났으며 벼농사의 재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 다. 한일합방에서 해방직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길림 성, 흑룡강성, 요녕성의 동북3성의 조선인 인구는 지 속적으로 증가하여 해방직전에는 216만 명에 이르렀 으며, 해방이후에도 112만 명을 유지하였고 2000년 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2만 명이었으나 이후 출 산률 감소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계속 감소하는 추세 이다. 동북3성이 조선족 인구의 최대 집적지였으나 최근 연해지역 대도시의 비중이 커지면서 그 비율이 낮아지고, 조선족의 집거지가 동북3성에서 벗어나 연 해 도시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조선인 인구수는 길 림성이 가장 높고 이어서 흑룡강성과 요녕성의 순으 로 나타난다. 연변의 경우 조선족인구가 차지하는 비 율이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182]

한편, 1990년대 이후 중국내 연해지역과 대도시, 한국을 비롯한 타 국가로의 중국 조선족 디아스포라 의 공간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로 인한 중국 조선족 사회는 인구문제와 교육 및 민족정체성 문제, 농촌공 동체의 와해 문제들에 봉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와 변화를 농촌공동체에서 벗어나 도시공동체로 질적 변화를 하는 과도기적 과정으로서 이해하고 새 로운 기회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동 북3성 위주의 농촌공동체 대신에 연해 대도시 위주의 도시공동체를 건설하고, 폐쇄적 민족교육에서 개방 적 글로벌 교육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조선족 인재 양 성의 계기로 삼으며, 양질의 교육과 투자환경을 조성 하여 지속가능한 조선족 공동체 건설을 꾀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공간 변화는 중국 조선족 공동체의 재구조화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간의 다변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