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Foucault

진실-말하기-놀이에 나타난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

Soyo_Kim 2018. 12. 27. 18:25

프로메테우스 제전 (2018.11)

 

Cause ain't no such things as halfway crooks[각주:1]

: 진실-말하기-놀이 에 나타난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

 

목차

 

1. 서론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에 주목해야하는 이유

 

2. 본론

제1장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 Ⅰ : 가치 부여에 있어 Real함과 Fake함

1절 진실함은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이다.

2절 진실함을 삶의 규범으로 삼는 힙합

 

제2장 주체의 실천적 변형을 위한 철학의 개념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3절 도덕과 윤리의 차이 초월과 내재

4절 철학 개념의 재검토 - 철학(Philosophie)에서 철학함(Philosophieren)으로

5절 철학함으로부터 드러나는 윤리적 주체의 자리, 고대 그리스와 근대 이후 인식 개념의 결정적 차이 『알키비아데스』에 나타난 자기 배려의 주체

 

제3장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 Ⅱ : 주체화로서의 자기 고백

6절 힙합에 나타난 주체화의 축 - '자기 고백'

7절 잃어버린 주체를 찾아서 막스 슈티르너의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을 중심으로

8절 에고이즘, 유동하는 주체와 비동등성의 동등성

 

제4장 윤리적 주체화와 통치성의 문제 힙합의 고백 양식은 저항의 준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9절 주체의 생산으로부터 발생하는 권력 작용

10절 윤리적 주체화와 실존의 미학(l’esthétique de l’existence) 프로그램

 

3. 결론 Beyond the walls of intelligence, life is defined

【국문요약】

[주제] 힙합의 고유 양식에 나타난 윤리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

[주제어] 힙합, 주체, 윤리, 자기 고백, 자기 배려, 미셸 푸코, 막스 슈티르너, 파레시아(Parrhesia)

[요약문] 본고는 힙합 음악이 1990년대를 중심으로 흑인들에게 있어 저항의 목소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파티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 흥을 돋우기 위해 시작했던 힙합과 랩이 어떻게 저항 음악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물음이다.

따라서 본고는 힙합 음악에 내재한 저항의 힘을 탐구하기 위해 다른 음악 장르와 차별화되는 힙합 고유의 양식에 대해 분석한다. 이러한 양식은 ‘진실함의 추구’와, ‘자기 고백’이며, 이 두 가지 양식은 모두 윤리적 주체화를 가능하게 함을 보이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윤리적 주체화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돌봄으로써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기술’이며 같은 규범의 영역에 자리한 도덕적 주체화와는 차별화되는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윤리적 주체화의 고유한 특성- 구체성, 유동성, 이론과 실천의 분리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 개념과 막스 슈티르너(Marx Stirner)의 유일자(der Einzige) 개념을 통해 구체화한다.

이러한 힙합의 고유 양식에 나타난 윤리적 가능성은 소수자에게 있어 국지적 저항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은 곧 정치적 저항의 가능성으로 이행한다. 고로 본고는 힙합 뮤지션들의 텍스트가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고찰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의 양식이 특수한 처지의 이들에게 저항적 규범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서론: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에 주목해야하는 이유

우리는 이 글에서 힙합에 대한 음악적 비평이나 문화 비평을 시도하지 않는다. 또한 이 글은 힙합 문화에 있어 흔히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요소들- 폭력성, 반사회성, 남성성 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나 비판은 더더욱 의도하고 있지 않다. 본고의 저자는 음악이나 문화에 관한 비평을 전문적으로 시도할 만한 능력이 없을뿐더러, 철학적 분석이 힙합이라는 장르의 존재를 정당화하거나 부정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자의 존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에 대한 정당화는 있을 수 없고) 우리는 다만 도덕 내지 윤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존재의 가치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 내지 윤리는 그 정당성을 어디에서 부여받는가? 도덕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일까, 아니면 특정한 기원을 지니고 있을까? 그리고 특정한 기원을 지닌다면 그 기원의 가치는 무엇일까?[각주:2]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도덕이 어쩌면 특정한 관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다. 이 의심을 따르자면 우리가 시도하는 힙합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맹목성의 위장된 형태, 즉 본고가 피하고자 하는 비평에 지나지 않을 위험을 그 시작에서부터 품고 있는 셈이다. 칸트(Immanuel Kant)는 철학이라는 학문에서의 인식이 공허하지 않은 동시에 맹목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반면 이 글을 쓰는 우리는 니체를 따라 가치의 인식에 있어 철학이란 공허한 동시에 맹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전제 아래에서 사유하고자 한다.

고로 우리의 목표는 양면적이다: 첫째, 힙합의 서사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극도의 남성성, 폭력성, 반사회성 등이 필연적인 것이 아닌 권력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다시 말해 맹목성에 의해서 지탱되어 왔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힙합이라는 문화의 가치 체계 내에서 본질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다.

둘째, 힙합의 고유 양식은 ‘진실-말하기-놀이’이며, 이러한 놀이가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주체화 과정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어떤 내용이든 담을 수 있기에 공허하지만, 동시에 어떤 내용이든 담길 수 있기에 전략적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고로 힙합이 기존 권력 담론의 소수자 계층이자 Ghetto(빈민가)와 Street(길거리)로 몰려났던 흑인들에게 있어 저항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적절하게 해명될 수 있다.

실제로 1980년대 말부터 힙합의 황금시기(Golden Era)로 칭해지는 90년대 말까지, 힙합 음악의 서사는 삶의 긍정이자 존재의 증명으로써, 저항과 계몽의 도구로써,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경향이 N.W.A, Public Enemy(퍼블릭 에너미), Nas(나스), 2Pac(투팍), Wu-Tang Clan(우탱 클랜) 등의 래퍼(Rapper)들에 의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목할 부분은 힙합이 애초부터 저항 음악으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각주:3] 파티 음악을 시작으로 힙합이 태동했던 1970년대부터 힙합 고유의 방법론을 확립한 80년대까지의 시기와 위의 언급한 래퍼들의 등장 시기 간에는 10~15년의 간격이 존재한다. 1970년대 초반 힙합의 음악적 형식을 최초로 확립한 Kool Herc(쿨 허크)[각주:4], "힙합의 4대 요소를 전파하며, 힙합을 문화로 확장시킨 Afrika Bambaataa(아프리카 밤바타)"[각주:5] 1979년 힙합을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The Sugarhill Gang(슈가힐 갱)[각주:6], 주류 음악 시장 편입에 기여한 1986년의 Run-D.M.C(런 디엠씨)[각주:7] 등은 저항 음악과는 거리가 먼 파티 음악을 추구하였다. 심지어 Consicous Rap(정치적, 사회 비판적 랩)의 시작을 알린 Public Enemy나 N.W.A 조차도, 그 시작은 "엔터테인먼트적 차별화"[각주:8]를 위한 시도였지, 저항과 비판 정신을 처음부터 서사의 중심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으로, 저항의 의지로부터 형식이 산출된 것이 아니라 형식으로부터 저항이 산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힙합의 기원이 파티 음악이라는 사실, 또 현재 주류 힙합의 다양한 흐름을 저항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힙합 음악이 저항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나왔다거나, 그러므로 힙합 음악은 저항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명백한 오류처럼 보인다. 다만 라임(Rhyme), 플로우(Flow)와 같은 힙합 고유의 음악적 양식이 힙합의 발전 과정에 따라 점차 고유한 방법론으로 확립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고백이라는 하나의 양식이 힙합 음악의 특정 시기에 발명되었으며 90년대에 황금기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로 이 시기에 나타나고 확립된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에 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따라 본고는 힙합의 양식에 내재한 저항으로서의 힘을, 윤리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을 시도한다.

 

제 1장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 Ⅰ : 가치 부여에 있어 Real함과 Fake함

1절 진실함은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이다.

2002년 개봉된 래퍼 Eminem(에미넴) 주연의 영화 『8 Mile』은, 주인공 Eminem이 래퍼로서 성공하기 이전까지의 자전적 삶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90년대 자동차 산업 몰락 이후로 쇠락해버린 도시 디트로이트(Detroit)의 공장에서 일하는 전형적인 White Trash(백인 빈민) 계층으로, 랩(Rap)으로 성공하는 길 이외에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I've got to formulate a plot or end up in jail or shot. Success is my only motherfxxkin' option, failure's not."[각주:9] (나는 계획을 짜야겠어, 아니면 감방에서 끝나거나 총을 맞거나. 성공만이 내 개같은 선택지지, 실패는 아니야) 그는 알코올중독자인 어머니의 트레일러 집에서 몇 년째 얹혀살며,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가난에 찌든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다. "Cuz man, these goddam food stamps don't buy diapers."[각주:10](왜냐하면 이봐, 이 망할 식권으론 기저귀도 살 수 없잖아) 이에 자신의 유일한 재능인 랩만이 성공의 길이라 판단하고 버스를 탈 때나, 쉬는 시간일 때에나 미친 듯이 랩을 연습하지만, 이마저도 백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흑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힙합 씬(Scene)에서 역으로 차별받고 무시당하며 무대에서 쫓겨나게 된다. "I been chewed up and spit out and booed off stage."[각주:11] (나는 씹히고 다시 뱉어진 다음 야유를 받으면서 무대에서 쫓겨났지.)

우리는 주인공을 둘러싼 이 모든 외부적 압력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랩 배틀(Rap Battle) 장면에서 외부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으로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Fxxk y'all if you doubt me! I'm a piece of fxxking white trash, I say it proudly."[각주:12]날 의심하는 놈들 전부 다 엿이나 먹어! 그래 나는 x같은 백인 쓰레기야, 자랑스럽게 말할게.) "Don't never try to judge me Dude, you don't know what the fxxk I been through."[각주:13](절대 날 함부로 판단하지 마, 너는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x도 모르니까.) 반면 그를 초반부터 줄곧 무시해오던 래퍼 Papa Doc(파파 독)은 갱스터(Gangster) 래퍼인 척하던 언행과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까발려지면서 관중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But I know something about you. You went to Cranbrook, That's a private school?

하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조금 알지, 너 크랜브룩 다녔잖아, 거기 사립학교라며?

(...)

This guy's a gangster, His real name's Clarence.

자칭 갱스터라는 놈이 진짜 이름은 클레란스라고.

Clarence lives at home with both parents, Clarence's parents have a real good marriage

클레란스는 부모님 두 분 다 멀쩡한 집에 얹혀살지, 부모님 금슬이 아주 좋다네.

This guy don't wanna battle. he's shook

이 자식 이제 더 싸우기도 싫을 걸. 완전 쫄았으니.

'Cause ain't no such things as halfway crooks'

'왜냐하면 반쪽짜리 범죄자 같은 건 없으니까' "[각주:14]

이 마지막 구절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Eminem은 원래 비트(Beat)에 있던 구절을 인용하여 Papa Doc을 공격하는데, 이 구절이 단순한 인용을 넘어 새로운 의미로 변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Cause ain't no such things as halfway crooks"는 2인조 힙합 그룹 Mobb Deep(맙 딮)의 곡, Shook Ones Part.Ⅱ의 후렴구로 앞의 구절 "he's shook"와 더불어 반복되고 있다. 곡의 내용은 Ghetto와 Street에서 살아남기 위한 갱스터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곡의 전체를 단적으로 대표하는 구절 "We got you stuck off the realness"[각주:15](우리는 너를 진실함 속에 빠뜨렸지.)는 마약과 총격, 범죄가 난무하는 Street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짜배기 갱스터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자들은 반쪽짜리로라도 살아남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리며 떨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진실함은 삶의 가능조건으로서 성립한다.

진실함에 대한 다음의 인식은 동시기의 여러 래퍼들의 구절에서 나타난다. 뉴욕 거리에서의 총격전을 눈에 잡힐 듯이 그려내는 Nas의 N.Y. State of mind[각주:16], 살아남기 위해 저질렀던 범죄들을 고백하며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각주:17](돈은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라고 말하는 Wu-Tang Clan, 생존에 있어 불법이 가장 쉬운 탈출구라고 말하는 Jay Z(제이 지)의 "And the workings of the underworld, granted"[각주:18] (지하 세계에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와 같은 구절에서 생존과 진실함은 동일한 장소에 위치한다.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현상을 결코 모든 힙합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Big Poppa[각주:19]에서 여자와 파티를 노래하던 Notorious B.I.G(노토리어스 비아이지)가 Juicy[각주:20]에서 자수성가 이전의 삶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모습, California Love[각주:21]를 부르던 2Pac이 Life Goes On[각주:22]에서 친구를 추모하며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그려보는 모습 등을 보면, 힙합 안에서의 Real(리얼)함의 추구, 즉 태도의 문제가 래퍼들에게 있어 매우 자연스럽게 체화(體化)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파티 음악이나 단순한 Money Swag(돈벌이에 대한 자랑)으로 기능하는 음악에서조차 Real함과 Fake(페이크)함, 진실함과 거짓됨의 구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놀라운 점은 백인 래퍼로 멸시받던 Eminem이 갱스터 래퍼를 자처하던 흑인 래퍼 Papa Doc에 대한 공격으로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Street의 삶 속에서 발현되는 흑인들의 진실한 태도를 의미하던 Mobb Deep의 가사는, Eminem에 이르러 그러한 태도가 흑인들만의 국지적 삶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는 인식으로 확장된다. 가난하고 부모 집에 얹혀사는 White Trash 계층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을 진실하게 뱉어낼(spit out) 수만 있다면 겉멋만 든 주류 흑인 래퍼보다 인정받을 수 있다. 흑인의 삶이라는 조건마저도 힙합에서는 가장 큰 가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어떠한 외부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던 간에, 그러한 삶을 말할 수 있는 진실함이 래퍼에게 있어 더 큰 가치로 요구된다는 점,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못하는 구절들, 역으로 자신이 말한 구절을 지키지 못하는 래퍼는 Fake로 평가받는다는 점은 힙합에 있어 태도의 문제, 진실함의 문제가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임을 드러낸다.

2절 진실함을 삶의 규범으로 삼는 힙합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은 Real함, 진실함의 추구이다. 이것이 다른 종류의 음악 장르와 힙합이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가 개인의 삶과 예술은 분리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상기해본다면 이러한 차이가 더 확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베토벤의 교향곡을 그의 개인적 삶과 결부시켜 평가하지 않는다. 그의 삶의 특수한 경험이 음악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베토벤이 교향곡을 쓴 직접적인 동기나 체험과는 무관하게 음악적 기준을 따라 그의 음악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의 음악을 평가하는 기준은 연주의 기술적, 감성적, 창의적 측면이지 그의 개인적 삶이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예술가가 그의 개인적인 범죄로 인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경우에도, 다소의 논란이 있을지언정 그의 인성이나 도덕성을 그가 남긴 예술 작품의 우선적인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힙합의 경우 가사와 그 가사를 말하는 주체는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주체의 삶 역시 예술의 평가 기준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때론 가장 높은 평가 기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래퍼는 음악성 이외에도 언행일치나 진실함 등에 관한 태도를 청자로부터 평가받는다. 단적으로 말해 힙합의 리릭(Lyric), 즉 텍스트는 그것을 말하는 주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스로 가사를 쓰지 않는(혹은 못하는) 래퍼는 씬(Scene)안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힙합 역사상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명으로 인정받는 Dr. Dre(닥터 드레)가 프로듀서로 인정받을지언정 래퍼로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은 그의 가사가 대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래퍼는 그의 이야기, 생각, 사상을 진실 되게 말함으로써 청자의 인정을 받는다. "See, everything you say is real, and I respect you cause you tell it."[각주:23](당신의 모든 말은 진실이고, 그것을 말한다는 사실 때문에 당신을 존경하죠.) 래퍼들이 버릇처럼 말하는 "Keep it real"(계속 진실하게)과 같은 구절. "Where fake nixxaz don't make it back"[각주:24](가짜들은 돌아올 수 없는 곳) 등에서 볼 수 있는 Real함과 Fake함의 구분 짓기. "Ya wanna get real, now it's time to peel"[각주:25](진짜를 원한다면 지금 나타날 시간이야.)에 나타나는 자신의 Real함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태도. 이들은 모두 진실 말하기의 한 형태로서 형성된 문화의 사례들이다.

힙합의 원래 시작, 또 현재 흐름과는 무관하게 진실-말하기-놀이로서의 힙합은 나름의 고유한 형식을 구축하였고 199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지금까지도 힙합 장르 전체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의 추구가 윤리 내지 도덕과 어떠한 연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인가? 힙합의 가사들은 오히려 사회 전반의 도덕과는 지나치게 먼 곳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실제로 대마 흡연으로 징역살이를 한 후에 출소한 래퍼 E Sens는 "미안합니다. 판사님, 선고날 내가 했던 말의 반은 가짜지"[각주:26]라는 가사로 논란을 일으키며 대중으로부터 도덕적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적어도 그 가사가 진실하다는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약, 섹스, 범죄만을 보고 자랐기에 내가 말할 진실은 이것들 밖에 없다는 어느 래퍼의 인터뷰는 이러한 진실-말하기-놀이가 도덕 내지는 윤리가 자리한 규범의 영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진실과 규범, 고백의 세 축의 연관 관계는 무엇이며, 또 이들은 주체에게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제 2장 주체의 실천적 변형을 위한 철학의 개념 -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중심으로

3절 도덕과 윤리의 차이 초월과 내재

우리는 위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윤리학, 나아가 철학 일반의 개념을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이해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윤리와 도덕에 개념에 관한 철학적 명료화를 시도하고, 둘째로 주체와 철학의 관계에 고찰해 봄으로써 철학 일반의 개념을 재검토할 것이다.

우리가 앞서 󰡒도덕 내지는 윤리󰡓라는 단어로 두 단어를 뭉뚱그려 설명한 반면에, 지금부터는 도덕과 윤리를 엄밀하게 구분하여 사유하고자 한다. 앞에서 우리가 주장한 것은 도덕 내지 윤리가 존재의 가치를 판별하는 판별 기준이며, 규범의 영역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둘은 도덕과 윤리의 공통된 특성으로 인정할 만하다. 우리가 무어(G. E. Moore)의 『윤리학 원리』를 따라 윤리학을 "좋은 것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로 정의한다면 말이다.[각주:27] 위의 정의를 윤리학에 관한 '안전한' 정의로 인정할 때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도출해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단번에 말할 순 없지만, 좋은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윤리는 가치의 판별 기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치의 판별 기준은 곧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가치의 판별 기준은 우리의 실천적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가치를 지닌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가치 있는 것을 하나의 규범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과 윤리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전개된 니체의 도덕 비판의 관점을 따라 도덕과 윤리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한다. 나는 도덕을 주체와 무관한, 혹은 주체의 외부에 있는 초월적인 규범으로 정의한다. 니체가 파악한 도덕, 즉 Moral의 핵심은 "너는 ~을 해야 한다."는 형식에 내재한 절대적 당위성이다. 우리는 도덕의 핵심을 초월성과 당위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도덕은 기독교의 십계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정당성을 신과 같은 초월자로부터 부여받는다. 십계명은 신의 명령에 의해 보증되고 그러기에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명령이 절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모든 도덕적 명제는 당위의 형식을 지닌다. "~을 해야 한다.", "~을 하지 말아야 한다."의 명제는 모든 보편적 상황에 적용되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가 어떤 도덕을 받아들일 경우 주체는 도덕이 요구하는 바를 거부하거나 선택할 권리를 전연 갖지 못한다. 도덕은 주체에게 있어 초월적이기 때문에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며, 심지어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의 핵심 개념인 선과 악이, 그리스도교의 성립 이후에 등장한 하나의 발명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선(Gut)'과 '악(Böse)'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좋음(Gut)'과 '나쁨(Schlecht)'이라는 개념만이 있었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어떤 사람의 긍정적인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으로 '좋음'을 사용하였고, 그것에 대한 결여 내지 부족으로써 '나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각주:28] 이렇게 정도의 차이로 표현되던 가치 개념은 그리스도교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변화를 맞는다. 니체는 도덕을 가치를 지니지 못한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으로 이해한다. 약자는 자신의 힘을 강자만큼 고양시킬 능력이 부족하기에 강자를 '악'으로 정의하고 그와 대비되는 자신을 '선'으로 놓는다.[각주:29] 따라서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각주:30] 첫째, 신이라는 초월을 가져옴으로써 현실의 삶을 부정하고 자신의 능력 부족을 면피하기에 저열하며, 둘째, 당위를 통해 강자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에 삶에 유해하며, 셋째, 강자와의 대립을 조건으로 원한 감정에 의해 성립되기에 자립적이지 못하고 노예적이다.

반면 니체는 주인 도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윤리(Ethics)의 영역으로 이해한다. 윤리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기술이며, 주체가 존재 변형을 위해 내적으로 부과하는 특정한 가치와 규범을 의미한다. 따라서 윤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데 그 핵심이 있고 규범이나 진리 역시 이러한 정의 아래에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윤리는 주체와 무관하거나 분리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일차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에게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한 윤리가 그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으므로, 윤리를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라고 이해해도 똑같이 좋을 것이다. (더 나아지는 것을 더 좋은 것, 더 가치 있는 것과 동일시한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윤리의 당위는 주체가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하기 위한 실천을 전제로 할 때에만 정당할 수 있고, 그렇기에 존재 변형을 이룬 주체에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자면, 도덕과 윤리에는 다음과 같은 대립적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체인 내가 없어도 도덕은 존재하며 이 경우 "주체가 어떻게 삶을 잘 살 것인가?" 보다는 진리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윤리는 진리보다도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주체의 삶에 방점이 찍혀 있다. 도덕의 정당성이 초월로부터 부여된다면, 윤리의 정당성은 삶으로부터 부여된다.

내가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을 시도한다 했을 때, 이는 힙합의 구체적인 두 양식, 진실과 고백이 주체에게 있어 실천적 변형의 조건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시도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음의 필요성은 철학 개념의 재검토를 통해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늘날의 철학이 지닌 의미를 주체와의 연관 속에서 다시 파악해볼 수 있으며, 이러한 철학의 입장에서 주체의 윤리적 규범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 구체적 저항과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탐구는 의미를 지닌다.

4절 철학 개념의 재검토 - 철학(Philosophie)에서 철학함(philosophieren)으로

철학은 역사적으로 이중의 의미로 파악되어 왔다, 그 하나는 철학을 철학적 물음의 총체로, 즉 철학적인 물음들에 관하여(über) 탐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내리는 것이다.[각주:31] 우리는 "Philosophia"를 너무나 쉽게 "지혜를 사랑함"의 의미로, "모든 지혜의 학문"으로 번역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대상을 다루는 학문으로, 진보의 첫 단계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철학을 단순히 다른 학문의 시원으로 파악하고, 다른 학문이 철학적 문제를 역사적으로 점유하게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오늘날 철학 내에 머무르면서 사유하는 것은 더욱 더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까닭에 철학에서의 탐구는 일반 학문에서의 탐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가 물리학이나 식물학, 경제학 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들 학문의 목표는 그 학문들이 관계 맺고 있는 대상에 관하여(über)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물리적 대상에 관하여(über), 식물이라는 존재자에 관하여(über), 경제라는 개념에 관하여(über)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자리는 여전히 해명해야 할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학문의 대상이, 탐구라는 과정을 통해 곧바로 학문의 지식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권력의 요구, 인정, 타자와의 긴장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생산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대상과 판단 사이의 일치'로 여기는, 현대 학문의 이념 역시 결코 확고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순수한 지식은 허상이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학문의 대상과 지식의 조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며, 우리는 학문의 대상이 과연 지식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역설적으로 그러한 조건이 탐구 방향을 이미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는 오늘날 학문의 엄밀함으로 요구되는 가치중립의 태도가, 역설적으로 하나의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현대의 가장 큰 위험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각주:32] 오늘날의 모든 지배적 가치는 '진보'라는 단어 속에 머물면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철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엄밀한 학문에 의해 밀려난', '반성적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하는', 등의 평가를 받으며 그 원래의 위치를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각주:33] 그러나 구체적인 저항과 해방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철학이 언제나 그 이상과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자명하지 않은가? "진보가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각주:34]이라면, 여기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의 길 위에서 철학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종전에 이해되었던 철학과 구분하기 위해 철학함 (philosophieren)이라 부른다.[각주:35] 혹자는 이에 대해 철학이란 단순히 철학적 물음의 총체일 뿐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물음들을 다루지 않고 철학을 탐구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물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을 철학적 물음의 총체로 파악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옳은 것'과 '참된 것(das Wahre)'을 구분하는 것이다.[각주:36]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시(詩)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은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아직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각주:37] 이는 단순한 사실이 그 사태 자체의 본질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질로부터만 참된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본질이 가치 함축적이라고, 즉, 본질은 그 안에서 하나의 윤리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으로부터 우리가 예비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다음 잠언에 나타나 있다.

"너희는 내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 기울여라.

그러므로 (......) 지혜로울지니"[각주:38]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 잠언에서 하나의 해방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über) 말하고 있는 '내'가 아닌 로고스로부터 진리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진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으로서의 진리가 아닌, 진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것과 어떻게 관계 맺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진리를 수용하는 자의 위치이며, 그로부터 철학은 윤리적 주체에게 있어 하나의 해방이 될 수 있다.

5절 철학함으로부터 드러나는 윤리적 주체의 자리, 고대 그리스와 근대 이후 인식 개념의 결정적 차이 『알키비아데스』에 나타난 자기 배려의 주체

흔히 근대 철학의 출발점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근대와 근대 이전 철학 사이의 연속성과 단절에 대하여 사유해보아야 한다. 근대 철학의 출발을 데카르트로 놓는다는 것은 "근대(近代)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해야함을 뜻하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들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기에, 여기에서는 데카르트와 근대 이전의, 더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의 인식 개념 간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관점에서 사유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인식의 근거를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각주:39]에서, 즉 사유하는 주체인 res cogitans에서 찾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근거에 하나의 전제가 숨겨져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전제는 현대의 사유를 특정하며, 특히 오늘날 자연과학의 인식 개념을 결정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이다.[각주:40] 이 전제는 "주체에겐 그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적 회의의 근저에는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Cogito, ergo sum’을 소크라테스(Sokrates)가 사용했던 “Gnothi sauton”(너 자신을 알라.)에 연관시키는 것에, 즉, 데카르트의 사유가 ‘Gnothi sauton’의 근대적 변형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각주:41] 이러한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르러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과감히 알려고 하라! (Sapere aude)"[각주:42]라는 표현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로 ‘Gnothi sauton’이 그것이 실제 사용되던 맥락에서 벗어나 이해되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의 인식 개념은 오늘날 망각되어버렸다. 왜냐하면 ‘Gnothi sauton’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단독적으로 고려되는 개념이 아니며, 이 개념이 나오는 『알키비아데스』의 텍스트를 면밀히 살펴볼 경우 “Epimeleia heautou”(자기 자신을 배려함, 자기 자신을 돌봄, 자기 자신에 몰두함)의 개념과 결부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념과는 달리, 『알키비아데스』의 어떤 맥락에서 ‘Gnothi sauton’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01년 『문헌학』에서 제시한 로셔(W.H Roscher)의 해석에 따르면[각주:43], ‘Gnothi sauton’은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의 신전에 쓰여 있던 글귀에서 가져온 것이며, 이러한 글귀는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처럼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Gnothi sauton’에서 말하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의 이성을 알라는 의미가 아닐뿐더러, 무언가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체에게 내재되어있는 것을 의미함은 더더욱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Gnothi sauton’은 결국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있어 그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질문을 던지라는 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결국 무녀를 통해 신의 말을 듣는 것이며, 신탁에 의뢰함에 있어 신탁을 들으러 온 자가 가져온 질문은 경건함을 따라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숙고된 것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Gnothi sauton’은 신에게 질문함에 있어 스스로 먼저 질문을 검토해볼 것이며, 과다하게 질문하지 않도록 수를 줄여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인식의 능력이 주체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준비를 통해 주체를 변화시킴으로서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주체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고, 이렇게 얻은 진실을 통해 다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Gnothi sauton’이 결국 ‘Epimeleia heautou’의 종속된 형태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사례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구절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라고 충고하는데, 첫 번째 구절인 29d-30b까지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구절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삶이 이러한 상황(재판을 받는 상황)에 처해진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이와 다른 삶을 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다는 말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말하는 자랑스러운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을 따르기보다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며, 그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에게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타이르고 가르침"이란 명예를 얻는 법이나, 재산을 늘리는 법, 장인의 기술(Techne)을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그들 자신의 명예나 지위, 재물 등을 얻기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어째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지 않는가에 대해 타이르려는 것이다.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각주:44]

이것은 결국 주체가 스스로를 돌보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각주:45]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영혼)에 대한 배려가 자기 자신과 무관한 것들(육체나 돈)에 대한 배려보다 언제나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어서 강조한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가운데 젊은이에게나 나이 든 이에게나 영혼을 돌보는 것(즉 영혼이 최대한 훌륭한 상태가 되도록 돌보는 것)보다 우선해서, 혹은 그것과 비슷한 정도의 열심을 가지고, 육체나 돈을 돌보지 말라고 설득하는 일이거든요."[각주:46]

이로부터 드러나는 결정적인 점은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인식 개념은 결코, 주체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인식을 위해서 주체는 말하는 자가 아닌, 귀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귀 기울임은 말하자면, 인식에 있어서 예비적인 것, 즉,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며 몰두하는 일련의 실천적 행위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주체는 진실을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한다. 이로써 주체의 인식은 주체 내부의 윤리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윤리적 주체의 인식과, 자기 배려에 관한 논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분석했던 Epimeleia Heautou의 계보학에서 다소 거칠게 가져온 것이다. 푸코는 이를 영성(Spiritualite)으로 정의 내린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e)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르도록 합시다."[각주:47]

이러한 인식(철학적 담론)과 영성(철학적 삶, 삶의 양식)은 고대 그리스 철학 전반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로 사유되었다. “담론을 철학적 삶과 떼어 놓고 생각한다면 철학적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담론은 없다. 또한 철학적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은 이상, 철학적 삶도 있을 수 없다.”[각주:48]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 플로티노스 등은 그들의 사유를 삶의 양식이라는 실천과 끊임없이 결부시켰다. 그들에게 있어 철학자라는 칭호는 “그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주어지는 것”[각주:49]이며, “담론은 삶의 양식으로 변화했을 때에만 철학적인 것”[각주:50]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론의 정합성이나 독창성보다도 우선시되는 것은 다름 아닌 삶과 철학(말해진 것) 사이의 일치였다. 이는 우리가 앞서 확인했던 ‘진실함의 추구’라는 힙합의 고유 양식과도 부합한다. 즉, 이들에게도 진실함은 삶의 규범이자 가치 판별의 기준으로 인정되었다.

"오히려 모든 학파가 능숙한 삼단 논법으로 존경받고자 하면서 실제 행실은 모순적인 자들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 스토아주의자 에픽테토스는 그들 자신이 인간답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인간답게 사는 법을 논한다고 꼬집기도 했다."[각주:51]

결론적으로, 뱀이 자신의 허물을 벗듯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쇄신하는 윤리의 영역 아래에서 자기 배려는 의미를 지닌다. 자기 배려는 '존재의 변형 -> 진실에의 접근 -> 존재의 변형'이라는 영속적 구도 아래에서 움직이며 자기 극복의 성격을 지닌다. 이로써 우리는 진실함의 추구라는 목표를 위해 '고백', '증명', '태도의 유지' 등을 요구하는 힙합의 규범들을 '존재의 변형 -> 진실에의 접근'이라는 자기 배려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3절에서 살펴보았듯 힙합이 가치로 삼는 진실함은 주체와 분리되지 않고, 삶으로부터 성립하며, 주체의 실천을 요구하는 특정한 규범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 도덕은 not allowed but (여기에서 도덕은 허용되지 않으나)

윤리는 우리 심장에 tattoo (윤리는 우리 심장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얘넨 봐야만 믿으니 내가 죽어야겠군"[각주:52]

이제 이러한 진실에의 접근을 추구하는 힙합의 주체화 과정을 '자기 고백'의 분석을 통해 접근해본다.

 

제 3장 힙합 고유의 존재 양식 Ⅱ : 주체화로서의 자기 고백

6절 힙합에 나타난 주체화의 축 - '자기 고백'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힙합 양식의 주체화 과정이라는 문제는 보다 진지한 탐구의 명분을 획득하게 된 셈이다. 혹자는 여전히, 이 문제가 너무 국지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고, 즉 특정 시기, 특정 인종의 문화 아래에서만 유효한 주체화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식의 심연을 건너는 방식에 있어 그 기원이 실로 무엇 때문에 중요하단 말인가? 삶에 대한 절박한 개선 의지와 보편의 배제라는 폭력에 깊이 감응할 수 있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채택할 수 있는 법이다. 게토에서 마약을 팔면서 자수성가를 꿈꿨던 Jay Z, 수없이 많은 총격 사건과 폭력 사태 속에서 개인의 생존에 몰두하다가 흑인 사회 전체의 변화와 각성으로 인식을 확장했던 2Pac, 백인이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조건에서도 랩으로 인정받길 바랐던 Eminem까지 이와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들이 각각 처한 조건과 그러한 조건의 극복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상이하다 할지라도 배제된 삶과 그러한 삶으로부터의 개선 의지라는 공통 지점 아래에서 고백은 성립한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을 90년대 미국의 힙합을 넘어서 한국 힙합의 오늘과 미래에 대한 진단으로 확장할 수 있다. 한국 힙합의 뿌리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들이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 내지 문화 수입의 관점을 넘어서 본토의 힙합과 차별화되는 한국 힙합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실로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이런 차원의 담론을 생산해내는 래퍼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재미 교포라는 특수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성찰하며 한영혼용이나 사대주의의 문제를 제기했던 테이크원(Take one)[각주:53], 한국사회 청년 세대에게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무기력함과 냉소를 대변하는 김심야(Kim Ximya)[각주:54], 자신이 나고 자란 노원구 특유의 분위기를 전달하며, 양아치 세계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던 저스디스(Justhis)[각주:55]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본고의 물음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이후에 다룰 수 있는 문제이기에, 이 글에서는 한국 힙합의 윤리성에 관한 물음을 잠정적인 질문으로 남겨둘 수 있을 뿐이다.

힙합은 진실에의 접근을 말하기, 즉 고백을 통해 추구한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표현되는 진실은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가? 우리는 힙합에서 말하는 진실을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백이 대상으로 삼는 사실로서의 진실, 고백 과정에서 요구되는 태도로서의 진실, 고백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로서의 진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진실은 각각 현실 인식, 인식의 전환, 선언적 투쟁의 과정으로 이행한다.

먼저 고백은, 고백의 대상이자 현실 인식으로서의 진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진실은 그러나 고백하는 이에게 있어 단순히 객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태도로서 유지하고 자랑스럽게 긍정할만한 진실이 있는가 하면, 선언적 투쟁을 통해 변화시켜야 할 진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태도의 영역에 위치한 진실은 "Keep it real" 이라는 표현 아래에 함축되어 있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함", "자기 자신에게 정직함",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켜 나감"등이 태도로서의 진실의 구체적 사례로 나타난다.

첫째로, "자기 자신에게 몰두함"은 성찰적 상황 아래에서 등장한다. 이는 90년대 전반의 수많은 래퍼들의 가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AZ는 "Life is a bixxh"[각주:56]에서 "Visualizing the realism of life and actuality"(삶과 현실성과 실재에 대해 떠올리고 있어), "And my mentality is, money orientated"(그리고 내 마음은 돈을 지향하지)라고 말한다. 2Pac은 Life goes on[각주:57]에서 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이러한 몰두를 통해 고백하는 주체는 가치 승인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즉 주류로부터의 배제라는 현실 인식은 회피나 기만이 아닌 정직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하고(자기 자신에게 정직함), 이로부터 인식의 전환은 이루어진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켜 나감)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주체에게 있어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외부의 현실과 조건이 어떠하든 자기 자신에 의해 승인된 주체의 삶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다. 이로써 주체는 외부의 어떤 압력에도 무심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래퍼들이 흔히 말하는 I don't give a fxck(나는 x도 신경 쓰지 않아)의 의미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하기가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분석했던 Parrhesia(파레시아) 개념과 굉장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Parrhesia는 어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솔직, 마음을 열기, 언어의 개방, 말의 자유)"[각주:58]를 의미하며 말해야 할 것, 말하고 싶은 것,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자유로움의 형식을 의미한다.[각주:59] Parrhesia라는 개념이 Ethos(도덕적 태도)와 Techne(기술적 절차)와 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은 이 연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어 보다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즉 Parrhesia는 두 가지 적, 도덕적인 적과 기술적인 적을 갖는데 이는 각각 아첨과 수사학으로 나타난다.[각주:60] Parrhesia는 아첨을 추방하고 제거하기 위한 진실의 용기를 요구하며, 수사학의 규칙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엄격하고 전술적으로 국한되는 기술을 요구한다.[각주:61]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작업,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긍정과 연계되어 나타나는 "I don't give a fxck"과 같은 태도를 이러한 자유로운 말하기의 구체적인 사례로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힙합의 고백 양식이 단지 특정 계층이나 계급에 유효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외부 압력에 의한 반작용으로써 삶의 긍정이 나타난다면, 이러한 압력과 긍정은 무한한 구체성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의 개념화가 보편성을 확보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의 유(類)적 본질로써 인간을 차등화 하는 반면, 이러한 추상적 본질을 거부하고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 몰두하게 하는 힙합의 고백 양식은 그러기에 (힙합 문화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수용될 수 있다.

7절 잃어버린 주체를 찾아서 막스 슈티르너의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각주:62]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제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와 바흐어(Bruno Bauer)의 인간 개념을 비판하며 비인간(Unmensch)을 주장했던[각주:63] 막스 슈티르너(Marx Stirner)의 유일자 개념을 빌려 삶의 긍정 테제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는 힙합의 고백 양식에서 드러나는 인식의 전환과 선언적 투쟁이 슈티르너가 그의 저작에서 묘사했던 유일자의 인식과 투쟁 과정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먼저 슈티르너는 인간의 삶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주장하는 투쟁의 삶"[각주:64]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타자와는 끊임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생존 '투쟁'(Kampf der Selbstbehauptung)이 불가피하다"[각주:65]

이러한 전제는 힙합 음악에서 그리 낯선 인식이라 말할 수 없다. '존재 증명의 투쟁'이라는 표어로 설명될 수 있는 생존 투쟁은 힙합의 많은 요소들 안에서 디스(Disrespect), 랩 배틀(Rap battle) 등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존 투쟁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정의(定義) 아래에 포섭될 수 없는 유일자(Der Einzige)라는 사실이다. 이는 슈티르너가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이 세계 이해의 근거로 제시했던 본질 개념이 도리어 개인의 구체성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작용해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계율은 신의 이름 아래 동성애자를 배제하고, 사회 교육은 국가의 이름 아래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비교양인을 배제한다. 자본주의는 능력주의와 물신(物神)화된 화폐의 이름 아래에서 노동자들을 배제한다. 이 모든 종류의 이상들, 다시 말해 신성(Gottheit)한 사상에 복종하기 시작하면서, "신, 황제, 법왕, 조국 등은 유령이 되어"[각주:66] 나타난다. 인간에 대해 특정한 본질을 설정하고, "유일자의 육신이나 정신을 어떤 보편성에 포섭하는 것"[각주:67]은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호명(Beruf)에 불과한 것이다.[각주:68]

이러한 호명을 통해 주체가 명령하는 권위에 대해 복종할 수밖에 없다면, 슈티르너의 전략은 저항적 주체로서 "세계를 이상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하자는 것"[각주:69]이다. 고로 주체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가 필연적이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삶의 구체성은 다른 기준으로부터의 비교가 아닌 비교될 수 없는 삶에 대한 긍정에 의해 성립된다. 이를 통해 "소유자로서의 나는 사상들이 육체화된 것을 깨부수어 사상들을 나에게로 되찾아오게"[각주:70]된다.

이러한 까닭에 슈티르너는 "신, 국가 등으로 표상되는 것을 고정관념으로 여기며, 이러한 고정관념의 이겨냄"[각주:71]을 그의 철학의 주된 관심사로 삼는다, 고로 유일자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지배에 있다. 이는 힙합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첫 번째, 내 구절에 나를 걸어.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짜릿하고 어려운 작업. 그 번거로움이 날 만들지. 고차원으로 행하는 영혼의 담금질. 두 번째, 진실을 파헤쳐. 전능한 자가 아닌 너와 나 인간의 입장에서. Professional함 보다 앞서야 될 내 Soul. 깨달은 바가 없다면 깨닫기 위해서”[각주:72]

결론적으로 윤리의 영역 아래에서 유동하는 주체, 삶에 대한 '직접성'과 '말할 수 없음'을 바탕으로 "매 순간 자신을 그때그때 최초로 정립하거나 창조하"[각주:73]는 주체만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권리를 갖을 수 있다.

8절 에고이즘, 유동하는 주체와 비동등성의 동등성

우리가 주체라고 명명(命名)한 슈티르너의 자아(ego) 개념은 근대를 대표하는 "순수한 자아, 혹은 자기 동일적인 자아"[각주:74]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아는 "타자성을 결여한"[각주:75] 자아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자아는 "모든 것의 소유자 (Eigentumer)이자 소유자로서 (der Egoist als Eigentumer) 행동하는 자"[각주:76]로 정의될 수 있다.

앞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작업'이라고 말했던 주체화 과정에 있어,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된 자아 개념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다음의 정의가 말하는 것에 대해 귀 기울여볼 때, 우리는 윤리적 주체의 정립에 있어 나타나는 중요한 3가지 함축을 파악해볼 수 있다.

첫째로, 자아를 '모든 것의 소유자'로 정의하는 것은 자아가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거나 모든 것에 대한 소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자아를 종속하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운동"[각주:77]에 맞서 자아가 모든 것에 대한 소유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자기 배려와 투쟁은 이러한 자아에게 있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과 타자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배려하며 관조하는 것은 Substantia separate(분리된 실체), 즉 세계 밖의 존재인 신(神)에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안에 있는 자아에게 있어 투쟁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를 위해 투쟁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외부의 것에 대한 소유를 위해 또한 투쟁해야 한다.

둘째로, 자아는 '소유자로서 행동하는 자'이다. 나는 이에 대해 3절에서 윤리의 가치 창조적 측면, 즉 가치와 규범의 관계를 통해 논한 바 있다. 따라서 단순히 소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 혹은 투쟁을 통해 소유를 쟁취한 것을 넘어 슈티르너의 주체는 끝없는 활동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아는 "타자성을 지니고 그러한 타자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지속되고 변화되는 자아"[각주:78]이다.

이로써 유일자라는 개념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끝없이 벗어난다는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유일자는 고정된 본질을 통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을 통해 포섭될 수 없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각각의 유일자는 비교 불가능한 고유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비교 불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유일자는 따라서 오직 비교 불가능하다는 그 점에서만, 타자와 동등성을 지닐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비동등성의 동등성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관계 맺음에 있어 근본적인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이기주의(利己主義)와는 차별화되는 어떤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정립되는 "경험적 주체의 활동성"[각주:79]을 주체가 지니고 있기에, 오히려 모든 타자의 문제는 나의 문제가 된다. 주체는 타자를 자신의 동일성에 포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Macht)의 역학 관계 속에서 투쟁을 통해 연합하거나,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힘(Macht)은 가치 창조의 원천인 동시에, 권력이기도 하다.[각주:80]

이로써 "존재 증명의 투쟁"이라고 여겨지는 폭력적인 힙합 문화가 어찌하여 또한 타자에 대한 Respect(존중) 문화로 곧장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이 생긴다. "Real recognize real"(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 이라는 힙합의 유명한 표어는, 세계와 부딪힐 때 생겨나는 파열음을 견뎌내며 힘을 도모하는 타자에 대한 존중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래퍼가 청자의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동시에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뚫고 나가려 할 때, 이 독특한 예술가는 비로소 진실한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타자로부터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 극복을 시도하는 타자의 고유성으로부터 존중은 성립된다.

 

제 4장 윤리적 주체화와 통치성의 문제 힙합의 고백 양식은 저항의 준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9절 주체의 생산으로부터 발생하는 권력 작용

그러나 이제 앞서 말했던 '해방'의 의미를 이 장에서 보다 명확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3장에서 기술했던 윤리의 주체화 과정의 긍정적 측면, 즉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타자와 차이에 대한 긍정을 포착했다 할지라도 이로부터 곧바로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치 도덕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고 윤리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그리하여 도덕은 권력적인 주체를 생산해내고 윤리는 자유로운 주체를 생산한다는 식으로 사태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는 기만적인 인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도덕의 원초적 폭력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리는 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이라는 유령을 잠시 자리에서 몰아낸 후에, 개명(改名)만 시켜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도덕과 윤리는 모두 원초적 의미의 권력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문제를 일으키는 동시에, 최악의 경우 기존의 사회도덕에 포섭되는 결과마저 가져올 수 있다. 즉 구체적인 실천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주체가 스스로 해방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공허한 구호로 전락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적 주체화를 만인이 지향해야할 어떤 보편 규범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명확한 역할과 한계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이 장에서 윤리적 주체화가 소수자에게 있어 국지적 저항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8절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윤리적 주체화를 통해 생산된 주체 역시 힘의 고양을 통한 권력의 획득을 추구한다. 가치가 규범을 생산해내는 한, 윤리와 도덕은 이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둘은 모두 원초적 의미의 권력이며 주체를 생산해낸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권력이 주체의 특정한 행동을 유도하거나 주체를 억압할 때, 즉 정상과 비정상,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을 통해 주체를 소수자로 만들 때, 소수자에 위치한 주체에게 있어 그(녀)가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는 과연 필연적일까? 오히려 그(녀)의 삶과 삶의 방식 역시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지 않을까?

또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에 대한 근대적 믿음이 니체, 프로이트(Sigmund Freud), 맑스(Karl Marx)를 거치면서 더 이상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오늘날, 인식이란 특정한 관점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은 철학자들의 공통된 전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이성의 능동적 측면보다 수동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철학에서, 특정한 규범을 설정하고 이를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과연 지적으로 정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인식을 따르자면 철학의 사명은 특정한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끊임없이 열어주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자기 배려' 개념을 제시한 미셸 푸코 역시, 그의 계보학의 목표를 구체성의 구제를 위한 저항의 거점 모색으로 파악한다.

"계보학은 바로 과학적이라고 간주된 담론에 고유한 권력 효과에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 당신이 '과학이다'라고 말한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어떤 유형의 앎을 자격 박탈하려 하는가? 당신이 '이 담론을 말하는 나는 바로 과학적 담론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학자이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 어떤 담론의 주체, 경험과 앎의 어떤 주체를 소수자화하고 싶은가?"[각주:81]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힙합의 고백 양식이 "과연 어떠한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가?", "또 이것이 소수자에게 있어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힙합의 고백 양식이 윤리적 주체화의 공간이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확인했다면 이제부터는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이 더 유효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인 것인지에 관한 물음이 해명되어야 한다.

10절 윤리적 주체화와 실존의 미학(l'ésthetique de l'éxistence) 프로그램

이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조심스럽게 타진했던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 즉 힙합의 고백 양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윤리적 주체화는 통치성과 저항의 문제로 이행한다. 미셸 푸코가 후기에 수행했던 작업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의 지향점을 지닌다. 그 하나는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방식으로 통치 받게 되었는가?"[각주:82]라는 통치성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주체화를 위한 실존의 미학(l'ésthetique de l'éxistence)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것이다.[각주:83] 양자는 각각 정치적 저항과 윤리적 저항을 구성하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각주:84]

실존의 미학 프로그램이란, 보편적 규범을 벗어나 삶을 예술작품으로 바라보고 창조하는 것, "보편윤리도 규제적 가르침도 없는 자기관계 형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윤리적 현실로 제시하는"[각주:85] 것을 말한다. 이러한 푸코의 제안을 수용한다면, 결국 진실-말하기-놀이의 세 번째 축, 놀이의 문제에 관한 분석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방식의 통치를 피하는 기술", 저항의 샛길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양식이 예술과 정치의 관계성에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6절에서 언급했던 Parrhesia가 이루어지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두 적들, 아첨을 피하기 위한 태도가 지금까지 고찰했던 윤리적 저항과 더 연관된다면, 이제 수사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사학을 전략적으로 운용하는 기술은 정치적 저항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며 예술의 형식에 관한 고찰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윤리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 사이의 교두보로서 ‘Parrhesia’를 고찰하기 위해선 진실-말하기-놀이의 놀이 축에 관한 분석이 요구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제시했던 정치의 예술화와 예술의 정치화 테제는 여기서도 유효하다. 정치와 예술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문제, 플라톤이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예술이 모방의 모방, 즉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가상을 다룬다면, 이러한 가상 속에서 진실함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 정치의 예술화로부터 예술의 정치화로 이행할 수 있는 기술은 과연 무엇인가?

이제 제시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힙합의 정치성, 힙합의 정치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이라는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힙합의 고백 양식의 분석에 있어 저항의 샛길은 예술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까? 글의 목표와 성격상 이에 관한 논의는 후속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3. 결론: Beyond the walls of intelligence, life is defined.

윤리는 삶의 말할 수 없는 지점, 끊임없이 유동하기에 개념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지점에서 성립한다. 『Illmatic』을 내던 해, 21살에 불과했던 Nas는 "Beyond the walls of intelligence, life is defined(지성의 너머에서, 삶이 규정된다.)"라는 어구로 이러한 지성에 대한 삶의 우위를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제 힙합의 윤리적 가능성에 관해 사유하면서 본고가 이룬 성취와 향후 연구의 방향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본고는 "원래 저항음악으로 시작하지 않았던 힙합이, 어떻게 저항 음악으로써 배제된 흑인들의 삶을 대변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으로 글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고는 힙합을 향유하는 이들이 기존의 저항 정신을 잃어버렸거나, 그러기에 저항정신을 음악에 담아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리스너(listener)들이 힙합을 즐기는 이유는 무궁무진하며, 그것이 반드시 저항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음악이 90년대 저항의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은 힙합 고유의 양식에 그러한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추정케 한다.

이러한 양식은 진실함이라는 평가기준과 자기 고백임을 제시함으로써 본고는 이 두 가지 양식에 윤리적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미셸 푸코와 막스 슈티르너의 논의를 통해 살펴보았다. 특히나 자기 고백 양식의 분석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인데, 이는 힙합의 자기 고백 양식이 진실-말하기-놀이라는 3가지 축 위에서 성립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미셸 푸코가 제시했던 Parrhesia 개념과 굉장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윤리적 주체화의 탐구는 곧 통치성과 저항의 문제로 이어진다. 저항으로써 정치적 의견 표명을 힙합의 고백 양식이 수행한다면, 윤리적 태도의 문제를 넘어 수사적 기술의 문제가 대두된다. 즉, 수사학을 적절한 방식으로 다루는 기술은 힙합의 진실-말하기-놀이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는 힙합이 하나의 예술에 속한다는 사실, 즉 놀이라는 세 번째 축에서 고백 양식이 성립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탐구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고로 놀이 분석을 통한 예술의 정치화 가능성, 이것이 향후 연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로, 6절에서 언급만 하고 지나갔던 한국 힙합에 관한 고찰이 이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문화 수입과 사대주의라는 관점을 넘어서, 한국 힙합의 고유성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201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태동하고 래퍼들이 생산하는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이를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연구가 세 번째로 수행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80년대 뮤지션들에게서 면면히 이어져온 예술의 저항성은 오늘날 여전히 힙합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지한 대화를 요구하고 있는 래퍼들이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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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보다 과학적이고 엄밀한 학문이 되려는 철학의 노력은, 오늘날 분석 철학을 중심으로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철학자들의 경우, 철학의 탐구를 자연과학의 탐구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아가곤 한다. 대표적으로, 자연화된 인식론을 주장하는 콰인(W.V.O Quine) 등이 있다. 이에 관한 논의로는 김도식,『현대 영미 인식론의 흐름』, 5장 자연화된 인식론,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4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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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이학사, 2008, p.12 [본문으로]
  37. 이기상, 『강연과 논문』 해제, 현대 기술의 본질 : 도발과 닦달, 이학사, 2008, p.398 [본문으로]
  38.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단편 제50), 번역 신상희, 이학사, 2008, p.270 [본문으로]
  39. 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2성찰 인간 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정신이 물체보다 더 쉽게 인식된다는 것, 번역 이현복, 1997, p.46 [본문으로]
  40. 『주체의 해석학』에서 '데카르트의 순간'이라는 표현으로 결정적 단절의 순간을 묘사한 미셸 푸코의 주장과 달리, 피에르 아도(Pierre Hadot)는『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번역 이세진, 열린 책들, 2017)에서 이러한 주장을 비판한다. 그는 푸코의 판단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데카르트에 이르러 󰡒명증성이 금욕을 대치하게 되었다.󰡓는 주장에는 의문을 표한다. 이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저서 제목이『성찰』인 점, 문체의 문학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영혼의 훈련'의 묘사 등은 고대 및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도, 같은 책, p.426-429) 그러나 푸코 역시 이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고 상투적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근대 이후에도 영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아도의 비판이 일정 부분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과학과 철학의 주류 인식에 대한 비판으로서 푸코의 작업은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우리는 푸코가 소크라테스를 분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자들을 수동적 이성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국내의 논문으로는 양대종. (2018). 철학에 깃들인 종교적․수동적 이성의 전통에 대한 소고.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76, 487-512. 참고. [본문으로]
  41.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82년 1월 6일 강의-전반부, 번역 심세광, 동문선, 2007, p. 58 [본문으로]
  42.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편역 이한구, 서광사, 2009, p.13 [본문으로]
  43. W.H Roscher, 『Weiters uber die Bedeutung des E[ggua] zu Delphi und die ubrigen grammata Delphika, Philologus』, 60, 1901, p. 81-101 [본문으로]
  44.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29d-29e,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 강철웅, 2014, p.83 [본문으로]
  45. Ibid, 38a, p.104 [본문으로]
  46. Ibid, 30a-30b, p.84 [본문으로]
  47.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81-1982』 中 1982년 1월 6일 강의-전반부, 번역 심세광, 동문선, 2007, p. 58-59 [본문으로]
  48. 피에르 아도,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과 철학적 담론들, 번역 이세진, 열린 책들, 2017, p.292 [본문으로]
  49. Ibid. p.290 [본문으로]
  50.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51. Ibid. p.292-293 [본문으로]
  52. 저스디스(Justhis), <2 many homes 4 1 kid>, 아뜰리에(Atelier) 中, 2016 [본문으로]</2>
  53. 김태균, <녹색 이념>, 2016 [본문으로]</녹색>
  54. 김심야와 손대현, , 2017 [본문으로]
  55. 저스디스(Justhis), <2 many homes 4 1 kid>, 2016 [본문으로]</2>
  56. Nas, , Life is a bitch 中, 1994 [본문으로]
  57. 2Pac, , Life Goes On, 1996 [본문으로]
  58. Michel Foucault, 『주체의 해석학-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1981-1982』, 1982년 3월 3일 강의-후반부, 번역 심세광, 동문선, 2007, p. 394 [본문으로]
  59. Michel Foucault,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60. Michel Foucault, Ibid. p.399 [본문으로]
  61. Michel Foucault,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62. 아직 국내에 번역이 되지 않은 관계로 원어로 표기한다. 박종성(2014)에 따르면 "유일자와 그의 소유", "유일자와 그의 고유성"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본문으로]
  63. 박종성, 『슈티르너의 '유일자'(der Einzige)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유일자', '고유성', '연합' 개념을 중심으로.』 학위논문(박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 철학과, 2014.8. p.18 [본문으로]
  64. Ibid. p.21 [본문으로]
  65. Max Stirner,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Reclam』. 2003, [본문으로]
  66. 박종성, 『슈티르너의 '유일자'(der Einzige)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유일자', '고유성', '연합' 개념을 중심으로.』 학위논문(박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 철학과, 2014.8. p.26 [본문으로]
  67. Ibid. p.45 [본문으로]
  68.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69. Ibid. p.26 [본문으로]
  70.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71. Ibid. p.146 [본문으로]
  72. E sens, , MC 中, 2008 [본문으로]
  73. Max Stirner, Ibid., S.167. 번역 박종성 [본문으로]
  74. 박종성. Ibid. p.70 [본문으로]
  75.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76. Ibid. p.69 [본문으로]
  77. Ibid. p.70 [본문으로]
  78.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79. Ibid. 같은 곳 [본문으로]
  80. Ibid. p.75 [본문으로]
  81.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년~76년』, 1강 1976년 1월 7일, 번역 김상운, 도서출판 난장, 2015, p.26-27 [본문으로]
  82.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수양』, 비판이란 무엇인가?, 번역 오트르망 심세광, 전혜리, 동녘, 2016, p.44 [본문으로]
  83. 백승영, 「'실존의 미학'으로서의 삶의 윤리 - 니체와 푸코」, 니체연구, vol., no.23, 2013, p.135 [본문으로]
  84. 도승연, 「영혼의 사목으로부터 인구의 통치로 : 미셸 푸코(M. Foucault)의 통치성의 계보학을 통한 윤리적 저항의 의의」, 한국여성철학, 2013, 231-269. P.233 [본문으로]
  85. 백승영, Ibid, p.13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