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8. 젠더로서의 여성
오늘날 여자들은 여성성의 신화가 차지하는 권위를 뒤엎고, 자신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확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완전히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의 세계 한가운데에서 여자들에 의해 키워진 그녀들의 통상적인 운명은, 여전히 그녀들을 남자에게 실질적으로 종속시키는 결혼이다. 남자의 위신은 아직도 공고한 경제적·사회적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사라지려면 한참 멀었다. 그러므로 여자의 전통적인 운명을 면밀하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여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학습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어떤 세계 속에 갇혀 있는지, 그리고 여자에게 어떤 탈출이 허용되는지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연후에만, 무거운 과거를 물려받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에게 어떤 문제들이 제기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자’나 ‘여성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당연히 어떤 원형도, 어떤 불변의 본질도 참조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 대부분에는 ‘현재의 교육과 풍습에서’라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여기에서 관건은 영원한 진리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여성 존재가 살아가는 공통된 배경을 서술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생물학적·심리적·경제적 운명도 사회 속에서 인간의 암컷이 띠고 있는 모습을 규정하지 않는다. 문명 전체가 남자와 거세된 남자의 중간 산물을 공들여 만들어 내어, 그것에다 여자라는 이름을 붙인다. 오직 타인의 개입만이 한 개인을 타자로 구성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성적으로 구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게 신체는 우선 주관성의 발현이며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실현하는 도구다. 그들이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눈과 손을 통해서이지 성적 부분을 통해서가 아니다. 출생의 드라마나 이유離乳의 드라마도 양성의 유아에게 같은 방식으로 전개된다. 즉, 그들은 모두 같은 흥미와 쾌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입으로 빠는 행위가 그들에게 최대의 쾌감의 원천이다. 곧이어 항문기에 접어들어서도 남녀 모두 배설 기능에서 최대의 만족감을 끌어낸다. 그들의 생식기 발달도 유사하다. 그들은 같은 호기심과 무심함으로 자기의 몸을 탐색한다. 음핵과 페니스에서 똑같이 막연한 쾌감을 끌어낸다. 그들의 감각은 이미 객관화되는 데에 따라서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그 이유는 부드럽고 매끈하며 탄력적인 여성의 육체가 성적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은 대상을 파악하려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공격적으로 어머니를 포옹하고 만져 보고 애무한다. 동생이 태어나면 그들은 똑같이 질투하고 같은 행동으로 질투를 나타낸다. 즉, 화를 내거나 토라지거나 배설작용에 이상을 가져온다. 그들은 어른들의 애정을 얻기 위해 똑같이 애교를 부린다. 열두 살까지는 여자아이도 남자 형제들만큼 튼튼하며, 그들과 같은 지적 능력을 나타낸다. 여자아이가 남자 형제들과 경쟁하는 것이 금지된 영역은 아무것도 없다. 사춘기 훨씬 이전에 그리고 때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자아이가 이미 성적으로 특정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신비스러운 본능이 태어날 때부터 수동성, 애교, 모성애에 여자아이를 바친 것이 아니라, 거의 애초부터 어린아이의 삶 속에 타인이 개입하여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그러한 소명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들 사이에서 그 유명한 여성의 ‘거세 콤플렉스’만큼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된 문제는 별로 없다. 오늘날 그들 대부분은 페니스의 선망이 경우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선 나이를 먹었어도 남자의 신체 구조를 모르는 여자아이들이 많다. 아이는 해와 달이 있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아이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본질을 믿고 있는데, 왜냐하면 아이의 호기심이 원래 분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여아에게 남자아이들의 다리 사이에 매달려 있는 이 조그만 살덩어리는 의미 없는 하찮은 것이거나 웃음거리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옷이나 머리 모양의 특이함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특이함이다. 종종 새로 태어난 남동생에게서 그 작은 살덩어리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H. 도이치Helen Deutsch(1884~1982)12가 말하기를 “여자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남동생의 페니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H. 도이치는 그 예로, 페니스의 발견에 완전히 무관심하다가 훨씬 나중에야 개인적인 관심사와 관련하여 가치를 둔 생후 18개월 된 여자아이의 경우를 인용했다. 페니스를 이상한 것, 즉 혹이나 유두 혹은 물사마귀처럼 피부에 달린 돌기나 모호한 것으로 간주하는 일도 있고, 또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요컨대 여아가 남자 형제나 친구의 페니스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여아가 페니스에 대해 말 그대로 성적인 질투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 기관의 부재로 인해 심히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아는 무엇이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페니스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피상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남자아이들은 자기 페니스를 만질 권리가 있으므로 그것을 장난감처럼 다룰 수 있지만, 여자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성기가 금기물처럼 보인다. 이런 요소들 전체가 많은 여아에게 남자 성기의 소유를 갈망하게 한다는 것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실행된 많은 설문조사와 그들이 수집한 고백이 입증하고 있다.
이 사례는 유아기 경험의 여러 가지 요소를 밝혀 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그토록 중요성을 띠는 것은 당연히 특이한 경우에 한한다. 일반적으로 자란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의 배뇨할 때의 특권이 직접적으로 열등감을 자아내기에는 지나치게 미미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단지 페니스의 발견만으로도 정신적 외상을 충분히 입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유아의 심리를 전혀 모르고 있다. 유아의 심리는 그들이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덜 이성적이고, 뚜렷한 범주도 설정하지 않으며, 모순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 아주 어린 여아가 페니스를 보면서 “나도 전에 있었어”라든가 “나도 나중에 가질 거야” 아니면 “나도 하나 있어”라고 외치면, 그것은 자기방어를 위한 속임수에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 그 그림이 증명하듯이 – 자기가 일단 그렇다고 고정해 버린 의미심장한 유형을 자기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믿는다. 아이는 종종 실물을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어찌 됐든 자기 지각 속에서 자기가 집어넣은 것만을 찾아낸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강조하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는 뤼케Georges-Henri Luquet(1876~1965)의 대단히 중요한 다음의 관찰을 인용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한 번 선線을 잘못 그었다고 인정하면 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잘못 그어진 선을 대체하는 새로운 선에 의해 어떻게 보면 최면이 걸려서 먼저 그은 선을 정말로 더는 보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 우연히 있을 수도 있는 여러 개의 선도 더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남자의 신체 구조는 여자아이에게 종종 강한 인상을 주는 강렬한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여자아이는 자기 자신의 몸을 더 이상 진정으로 보지 않는다. 소쉬르는 남자아이처럼 방책의 창살 사이로 오줌을 누려 하면서 “물이 흘러나오는 조그맣고 기다란 것”을 갖고 싶다고 말하던 네 살배기 여아의 예를 인용하고 있다. 그 여자아이는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는 동시에 갖고 있지 않다고도 주장했는데, 이것은 피아제Jean Piaget(1896~1980)가 묘사한 어린아이들에게서의 ‘참여’라는 사고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자아이는, 모든 아이가 페니스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곧이어 부모가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여자아이로 만들기 위해 페니스를 잘라 버린다고 주저 없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자기 부모를 신격화하면서 “부모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인위주의人爲主義를 만족시킨다고 피아제는 말하고 있다. 아이는 거세 속에서 처음에는 처벌을 보지 못한다. 거세가 욕구 불만의 성격을 띠기 위해서는 여아가 무슨 이유에서든 이미 자기 처지에 대해 불만족해야만 한다. H. 도이치가 정확하게 주의를 환기하고 있는 것처럼, 페니스의 목격과 같은 외부적 사건이 어떤 내면적 전개를 지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자의 성기를 보는 것은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 수 있으나, 다만 이런 결과를 낳기에 적합한 일련의 사전 경험이 선행한다는 조건으로 가능하다”고 H. 도이치는 말한다. 만일 여자아이가 자위나 노출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고 느끼거나 부모가 아이의 수음을 처벌하거나 혹은 남자 형제보다 사랑이나 인정을 덜 받는다고 느끼면, 그때 아이는 남자의 성기에 자신의 불만을 투사하게 된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와의 신체적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여아가 이전에 느낀 욕구의 확인, 말하자면 그 합리화다.” 그리고 부모와 주위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높은 가치 부여는 남자아이에게 권위를 부여하는데, 여자아이에게는 페니스가 그 권위의 이유와 상징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아들러가 적절하게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남자 형제를 우월한 것처럼 간주하고, 그 자신도 자기의 남자다움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때 여아는 남자 형제를 부러워하고 박탈감을 느낀다. 때로 여아는 그것 때문에 엄마에게, 더 드물게는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는다. 아니면 신체 일부를 훼손한 데 대해 자기 자신을 책망하거나 페니스가 자기 몸속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 날 나오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비록 여자아이가 페니스를 진정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페니스의 부재는 여자아이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남자아이가 페니스에서 끌어내는 커다란 특권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기관을 갖추고 있으므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에 자신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자아이는 자기 신체의 신비와 그 위협을 몸 밖으로 분출함으로써 자기에게서 멀리 있게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는 자기 페니스에서 위험을 느끼고 거세를 두려워하지만, 여자아이가 자기 ‘내부’에 대하여 느끼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 흔히 여자의 일생에 영속하게 될 두려움보다는 통제하기가 더 쉬운 공포다. 여자아이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자기가 보기에도 여자가 애초부터 남자보다 훨씬 더 불투명하며 생명의 불가사의한 동요에 의해 훨씬 더 깊이 둘러싸여 있다고 여긴다. 남자아이는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분신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대담하게 자아를 감당할 수 있다. 그 속에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대상 자체는 자율성, 초월성, 힘의 상징이 된다. 즉, 자기 페니스의 길이를 재고, 동무들과 오줌 줄기의 길이를 비교한다. 나중에는 발기와 사정이 만족감과 도전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자기 몸의 어떤 부분에서도 자신을 소외시킬 수 없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여자아이에게는 그 곁에서 제2의 자아 역할을 하도록 외부의 물체인 인형 하나를 손에 쥐여 준다. 여기서 상처 난 손가락에 감긴 붕대도 ‘인형’으로 부른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옷을 입힌 분리된 손가락은 흥겹게 일종의 자랑이 되고, 아이는 거기에다 소외의 과정을 시도해 본다. 그러나 페니스라는 분신이자 자연적인 장난감을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대신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조그만 상像 – 그것이 없으면 옥수수술 또는 나뭇조각 하나 – 이다.
여기서 커다란 차이라면 인형이 한편으로 그 전체로서 신체를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수동적 물체라는 것이다. 이제 여자아이는 인형에 자기 인격을 송두리째 투영하고, 투영된 자기 인격 전체를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비활성체로 간주하도록 격려된다. 남자아이가 페니스 속에서 자율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추구하는 데 반해, 여자아이는 자신이 치장되고 소중히 여겨지기를 꿈꾸는 것과 같이 인형을 꾸미고 애지중지한다. 역으로 여아는 자기 자신을 신비로운 인형처럼 생각한다.28 칭찬과 꾸중을 통해, 이미지와 말을 통해 여아는 ‘예쁜’과 ‘미운’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발견한다. 조만간 여아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림처럼 예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 폭의 그림을 닮으려고 애쓰며 분장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동화 속의 공주와 요정에 자기를 비교한다. 어린아이의 이러한 멋부림을 보여 주는 놀라운 실례가 마리 바시키르체프에 의해 전해진다. 늦게 젖을 뗀 그녀 – 세 살 반이었다 – 는 네다섯 살경에 칭찬을 받고 타인을 위해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를 아주 강하게 느꼈는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유離乳의 충격은 분명히 보통의 경우보다 성숙한 아이에게 더 컸고, 틀림없이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남다른 공을 들여야 했다. “나는 다섯 살에 엄마의 레이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채 거실로 춤을 추러 가곤 했었다. 나는 위대한 무용수인 페티파Marius petipa였고, 가족 모두가 나를 보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라고 그녀는 일기에 쓰고 있다.
여자아이의 경우에 이런 나르시시즘이 매우 조숙하게 나타나고 여자의 삶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여, 사람들은 기꺼이 나르시시즘을 여자의 신비한 본능에서 나오는 것처럼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껏 보았듯이, 여성에게 그런 태도를 부추기는 것은 해부학적 운명이 아니다.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들과 구별하는 차이는 여아가 많은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사실에 있다. 페니스는 분명 하나의 특권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가 배변 기능에 흥미를 잃고 사회화될 때, 그 가치는 자연스럽게 감소한다. 만약 여덟아홉 살이 지나서도 아이에게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가 부여된 남성성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교육과 주위 사람들의 영향은 지대하다. 모든 어린아이는 이유기의 분리를 유혹과 과시의 행동으로 보상받으려 애쓴다. 사람들은 남자아이에게 이 단계를 극복하라고 강요하고 아이가 자기 페니스에 집중하여 나르시시즘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모든 어린아이가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을 객체화하는 경향으로 확고해진다. 인형은 여아가 그렇게 되는 것을 도와주지만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남자아이 역시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곰이나 어릿광대 인형에 집착할 수 있다. 페니스나 인형이라는 개개의 요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어린아이들 생활의 전체적 형태 속에서다.
이처럼 ‘여성적’ 여자를 무엇보다 특징짓는 수동성은 그녀 안에서 생애 초기부터 전개되는 특질이다. 그러나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교육자들과 사회가 그녀에게 강요한 운명이다. 남자아이는 그 존재 방식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도록 격려한다는 엄청난 행운을 가진다. 그는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자기 존재에 대한 훈련을 쌓아 나간다. 그리고 다른 남자아이들을 상대로 강한 정신과 독립성을 경쟁하고, 여자아이들을 경멸한다. 나무 위에 기어오르거나 친구들과 격투하거나 격렬한 놀이 속에서 충돌하면서 자연을 지배하는 수단이자 투쟁의 도구로 신체를 파악한다. 자기의 성기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근육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놀이와 운동, 싸움, 도전, 시련을 통해 자기 힘의 균형 잡힌 용도를 발견한다. 그와 동시에 폭력의 엄격한 교훈을 터득한다. 그는 구타를 견디고 고통에 굴하지 않으며, 어릴 적부터 눈물을 거부하는 것을 배운다. 그는 일을 도모하고 창조하고 감행한다. 확실히 자기가 ‘타인을 위해’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자기의 남성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그 결과 어른들이나 친구들과 관련해 많은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객관적인 모습에 대한 근심과 자기를 구체적인 계획 속에서 확립하려는 의지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하나의 같은 동작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데, 이와 반대로 여자는 애초부터 이미 자율적인 자기 존재와 자기의 ‘타자 - 존재’ 사이에 충돌이 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고, 자기를 객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녀는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인형처럼 취급하고 그녀에게 자유를 제한한다. 이러한 악순환은 되풀이된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파악하며 발견하기 위해 자기의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 적으면 그만큼 그녀는 세계 속에서 자원을 발견하는 일이 적어지며, 또 그만큼 자기를 주체로서 확립할 용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유로이 행동하라고 격려한다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와 대등하게 원기 왕성한 행동과 호기심, 솔선수범의 정신과 대담성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때때로 여자아이가 남성적인 교육을 받았을 때 일어난다. 그런 경우 여자아이는 많은 문제를 모면하게 된다.29 아버지가 딸을 쾌히 이런 식으로 교육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남자 손에 키워진 여자는 여성성의 결점을 많은 부분에서 피하게 된다. 그러나 풍습은 여자아이들을 완전히 남자아이들처럼 다루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한 마을에서 아버지가 서너 살의 여아들에게 반바지를 입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다른 모든 아이가 “계집애냐, 사내 녀석이냐?”라며 그 여아들을 괴롭히고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 여아들은 부모들에게 원피스를 입혀 달라고 간청했다. 비록 부모가 남자아이의 생활방식을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여자아이가 매우 고독한 생활을 하지 않는 한, 여자아이의 주위 사람들, 아이의 여자친구, 선생님들은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견제하기 위해 언제나 숙모, 조모, 사촌들이 있게 될 것이다. 보통 딸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은 부차적이다. 여자를 짓누르는 저주 가운데 하나는 – 쥘 미슐레가 정확히 지적하는 것처럼 – 유년기에 여자의 손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남자아이 역시 처음에는 어머니에 의해 키워진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자아이의 남성성을 존중하고, 남자아이는 아주 빨리 그녀의 수중에서 벗어난다. 반면에 어머니는 딸을 여성의 세계에 통합시키려고 한다.
우선 여자아이는 가정에서의 경험으로 양성의 위계를 발견한다. 아버지의 권위가 평소 일상에서 느껴지지 않았지만 절대적이라는 것을 점차 이해한다. 그 권위는 손상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비록 가정에서 실제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어머니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지를 앞세우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순간에 명령하거나 보상하거나 혹은 벌을 주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가 행하거나 혹은 아버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삶은 신비한 위엄으로 에워싸여 있다. 아버지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 아버지가 일하는 방, 아버지 주위에 있는 물건들, 아버지가 하는 일, 아버지의 습성 등은 모두 하나의 신성한 성격을 띤다.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아버지이며, 그는 집안의 책임자이며 가장이다. 평소에 그는 집 밖에서 일하므로, 그를 통해서 가정과 세상의 나머지가 소통한다. 그는 모험으로 가득 차고 거대하며 힘들고 멋진 이 세계의 화신化身이다. 그는 초월이며 신이다.33 여자아이는 자기를 들어 올리는 강인한 두 팔에서, 자기 몸을 바짝 붙이고 의지하는 이 신체의 힘에서 바로 이러한 것들을 관능적으로 느낀다. 옛날에 이시스Isis가 라Râ에게, 대지가 태양에게 지위를 박탈당한 것처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지위를 빼앗긴다. 그러나 그때 여자아이의 상황이 심히 변화한다. 그녀는 언젠가 전능한 어머니와 같은 여자가 되도록 요청받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결코 절대 권력자인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어머니에게 묶어둔 관계는 적극적인 경쟁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남자아이는 아버지의 우월성을 경쟁의식을 통해서 파악한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무력하게 감탄하며 견뎌 낸다. 프로이트가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적 욕망이 아니라고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복종과 숭배에서 자기를 객체화하는 데 동의하는 주체의 철저한 자기 포기다. 만약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 애정을 나타내면, 딸은 자기 존재가 훌륭하게 정당화된 것으로 느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쟁취해야 할 모든 장점을 겸비한 것이다. 그녀는 한껏 만족하고 신격화된다. 평생 그녀는 이 충만감과 평화를 그리워하고 추구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만일 그녀에게 이 사랑이 거부된다면 그녀는 영원히 죄책감을 느끼고 벌을 받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혹은 자신에 대한 가치 부여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아버지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거나 적대감까지 품을 수 있다. 게다가 아버지는 세계를 여는 열쇠를 쥔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 보통 모든 남자가 남성적 위엄을 지니고 있다. 그들을 아버지의 ‘대용품’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할아버지, 오빠, 아저씨, 친구의 아버지, 가족의 친구, 교사, 신부, 의사는 남자로서 여자아이를 즉각적으로 매료시킨다. 성인 여자들이 남자에게 표시하는 감동 어린 존경은 남자를 우상으로 받들기에 충분하다.
여자가 가장 달콤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비천한 신분의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다. 상대가 신이 되었든, 한 남자가 되었든 여자아이는 가장 철저한 자기 포기에 동의함으로써 절대적 힘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배운다. 즉, 그녀는 최고의 승리를 약속해 주는 마조히즘을 즐기는 것이다. 사자의 발톱에 할퀴어 하얀 살에 피가 낭자한 성녀 블랑딘Sainte Blandine, 유리관 속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백설 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실신한 아탈라, 멍들고 수동적이며 상처받고 굴욕과 모욕을 당하는 일군의 가련한 여주인공들은 후배들에게 학대당하고 버림받고 인종하는 미녀의 매혹적인 위엄을 가르쳐준다. 남자 형제가 영웅 놀이를 하는 데 반해 여자아이가 기꺼이 순교자 놀이를 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유희와 몽상은 여자아이를 수동성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한 사람의 여자가 되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다. 그리고 자신을 여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를 포기하고 훼손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만약 자기 포기가 매력적이라 한다면 자기 훼손은 불쾌한 것이다. 남자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은 미래의 안개 속에 아직 멀리 있는 것들이다. 지금으로서는 여자아이는 남자 형제들처럼 능동성과 자주성을 추구한다. 자유의 짐은 어린아이들에게 무겁지 않다. 왜냐하면 책임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른들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자기로부터 도피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못한다. 삶을 향한 무의식적 충동과 놀이와 웃음과 모험에 대한 의욕은 여자아이가 어머니의 세계를 비좁고 숨 막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은 남자아이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권위보다 훨씬 더 일상적이고 긴밀하게 행사되는 권위다.
그녀는 남자아이들의 경멸에 대하여 여자 친구들과 함께 경멸로써 응하는 척한다. 자기네들끼리 떼를 지어 남자아이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이 그녀를 동등하게 대해 주자마자 그녀는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며, 그들의 동의를 구한다. 그녀는 특권 계급에 속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원시 유목민에게는 여자를 남자의 패권에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 남자들 세계에 끼어들도록 허락받은 요즘 소녀들에게는 자기 운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녀 내부에서 초월성이 내재성의 부조리함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녀는 예의범절의 규칙에 억압되고 의복에 의해 구속받고 가사에 얽매이고 모든 도약이 정지당한 데 대해 분개한다.
자기를 주체며 자주체自主體이자 초월로서 또한 하나의 절대로서 느끼는 개인에게, 자기 안에서 열등함을 주어진 본질로써 발견한다는 것은 기이한 경험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일자一者49로 설정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 또한 타자로서 보인다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 수업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여자로서 파악하는 여자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녀가 속해 있는 영역은 남자의 세계에 의해 사방이 막히고 제한되며 지배되고 있다. 그녀가 제아무리 높이 기어 올라가도, 위험을 무릅쓰고 제아무리 멀리 간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천장이 있고, 그녀의 길을 가로막는 벽이 있을 것이다. 남자의 신들은 아주 먼 하늘에 있으므로, 사실 남자에게는 신이 없다. 하지만 어린 소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신들 가운데 살고 있다.
여자와 흑인의 커다란 차이는, 흑인들은 반항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감내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특권도 그 혹독한 상황을 보상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와의 공모를 권유받는다. 내가 이미 환기했던 바와 같이,51 존재자에게는 절대적 자유이고자 하는 주체의 진정한 요구와 더불어 자기 포기와 도피라는 비본래적 욕망이 들어 있다. 부모와 교육자, 책과 신화, 남자와 여자들은 어린 소녀의 눈에 수동성의 희열감이 어른거리게 만든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을 맛보도록 교육받는다. 유혹은 점점 더 교묘해진다. 여자아이의 초월적 도약이 더욱 심각한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에, 그녀는 그만큼 더 숙명적으로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 수동성을 받아들인 그녀는 외부에서 과하는 운명을 저항없이 감내하기를 수락하고, 이러한 숙명은 그녀를 공포에 떨게 한다. 야심적이든, 경솔하든, 소심하든 어린 소년은 열려 있는 미래를 향하여 돌진한다. 그는 선원 혹은 엔지니어가 될 것이고, 전원에 남아 있거나 도시로 떠날 수 있다. 그는 세계를 볼 것이고, 부자도 될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기회들이 기다리는 미래 앞에서 그는 자유롭게 느낀다. 여자아이는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녀는 장차 자기 어머니가 한 것과 똑같이 집안 살림을 할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돌본 것처럼 자기 아이들을 돌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열두 살에 벌써 하늘에 새겨져 있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결코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일 없이 날마다 발견해 나갈 것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지만 삶의 모든 단계가 예정되어 있어서, 하루하루가 가차 없이 그녀를 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떠올릴 때면 공포에 사로잡힌다.
일관성 있는 교육조차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해 두어야겠다. 부모와 선생들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있다 해도 에로틱한 경험을 말과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온갖 분석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 해도 유머러스한 일면 때문에 진실을 전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시적인 꽃의 사랑과 물고기의 결혼식에서 출발하여 병아리, 고양이, 염소를 거쳐 인류까지 올라가게 될 때, 생식의 신비를 이론적으로는 밝혀낼 수 있다. 그러나 관능과 성적인 사랑의 신비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요한 피를 지닌 아이에게 어떻게 애무와 키스의 즐거움을 설명할 것인가? 가족 간에는 서로 키스를 주고받고, 때로는 입술로도 주고받는다. 그런데 왜 어떤 경우에는 이 점막들의 접촉이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가? 그것은 시각장애인에게 색채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에로틱한 작용에 그 의미와 통일성을 부여하는 정신적 동요와 육체적 욕망의 직관이 결여되어 있는 한, 그 여러 가지 요소는 충격적이고 기괴하게 보인다. 특히 여자아이는 자기가 처녀이고 봉인되어 있으므로, 자기를 여자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남자의 성기가 자기에게 침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반발한다.노출증이라는 성도착이 세상에 퍼져 있어서 많은 여자아이가 발기한 페니스를 보아 왔다. 아무튼 여자아이들은 동물의 성기를 본 적이 있고, 유감스럽게도 말의 성기가 그녀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무척 흔한 일이다. 그녀들이 그것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쉽게짐작이 간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 남자 성기에 대한 두려움, 결혼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발작’에 대한 두려움, 불결한 성행위에 대한 혐오, 아무 의미 없는 행위에 대한 조롱, 그 모든 것이 여자아이가 다음과 같이 선언하도록 이끈다. “나는 절대 결혼 안 할 거야.” 이것이야말로 고통, 광기, 외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방어책이다. 때가 되면 처녀성 상실이나 아기를 낳는 것이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을 것이며, 수백만의 여자들이 그것을 감내해 왔고, 또한 그 때문에 건강이 별로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자아이에게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어린아이가 외부의 사건에 공포를 느낄 때 사람들은 아이를 안심시키긴 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안심시키는 것은 아니다.아이는 그때 미치광이로 길을 헤매는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번데기와 나비가 되는 애벌레의 변신은 어린아이를 불안하게 한다. 그렇게 긴 잠을 자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같은 애벌레일까? 화려한 날개 밑에서 나비는 자신의 예전 모습을 알아볼까? 나는 번데기를 보고 몹시 놀라서 깊은 생각에 잠긴 여자아이 몇 명을 알고 있다.
여자아이는 자기 몸이 자기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몸은 이제 더는 그녀 개인의 명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녀의 몸은 그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타인에 의해 하나의 물체로서 파악된다. 즉, 거리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눈으로 좇으며 그녀의 몸매에 대해 논평한다. 그녀는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는 육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육체가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그들의 성기는 비교와 도전의 대상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남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변신이다. 책임이 따르는 자유가 예고될 때, 많은 청소년이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은 희열을 느끼면서 남자의 위엄에 도달한다. 이와 반대로 여자아이는 어른으로 변신하기 위해서 여성성이 강요하는 한계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소년은 돋아나기 시작한 털에서 무한한 약속을 발견하고 찬미한다. 소녀는 자기 운명을 가로막는 ‘갑작스럽고 출구 없는 드라마’에 맞닥뜨려 혼란스러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페니스가 사회적 맥락에서 그 특권적인 가치를 끌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월경을 하나의 불운으로 만드는 것 또한 사회적 맥락이다. 페니스는 남성성을, 월경은 여성성을 상징한다. 여성성이 타성他姓과 열등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났을 때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라면 소녀는 월경을 단지 성인의 삶에 도달하는 여성의 특별한 방식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남자든 여자든, 이보다 더 혐오스러운 많은 구속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쉽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어서 누구에게도 결함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월경이 소녀에게 끔찍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녀를 열등하고 훼손된 범주 속으로 던져 넣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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