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tic/Feminist Philosophy

보부아르 (2022) 제2의 성 (9) 자기포기의 운명

Soyo_Kim 2024. 12. 29. 17:06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2022. 

 

9.  자기포기의 운명

여자가 이런 자기 포기를 감수하는 것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소년들보다 열등하고 그들과 경쟁할 수 없게 된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주장한다. 헛된 경쟁을 포기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책임지는 책무를 우월한 계급의 일원에게 떠맡기는 것이라 한다. 사실상 여자의 겸양은 선천적 열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겸양이 그녀의 모든 무능을 낳는다. 그 겸양의 근원은 사춘기 소녀의 과거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그리고 그녀에게 제시된 바로 그 미래 속에 있다.

이성적 사유와 논리가 우울증에서처럼 아무 손상도 입지 않은 채 남아 있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유기체의 혼란의 한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정열적인 확실성에 활용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러나 여자가 그 사실들에 중요성을 부여하느냐 마느냐는 그것을 의식하는 방식에 의해서 정해진다.

 소년들은 열세 살 무렵부터 폭력을 실제로 배워 공격성, 권력욕, 도전정신이 발달한다. 바로 이때 여자아이는 난폭한 놀이를 포기한다. [...] 소녀에게는 이런 정복 행위와 특히 폭력이 허용되지 않는다. 

폭력은 각자가 자기 자신에, 자기 열정과 자기 자신의 의지에 찬동하는 진정한 판단 기준이다. 폭력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스스로 일체의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며, 추상적 주체성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근육을 통하지 않는 분노나 반항은 상상에 그친다. 자기 심장의 움직임을 지구 표면에 새길 수 없다는 것은 지독한 좌절이다.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이 백인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수수께끼 같은 ‘흑인 영혼’을 해명할 열쇠는 바로 이 금지령이다. 백인 세계에서 흑인이 자기를 느끼는 방법,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하는 행동, 찾고 있는 보상,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방식은 그가 처한 수동성에서 설명된다. 독일군 점령 기간에 점령군에 맞서 심지어 점령군이 도발해도 폭력 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던 프랑스인들은 - 그것이 이기적인 신중함에서든 혹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든 - 세계 안에서 자기들의 지위가 뿌리째 뒤엎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객체로 변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기분에 달려 있었고, 그들의 주체성은 더 이상 구체적인 표현 수단이 없었으며 부차적 현상에 불과했다. 이처럼 세계는 자기 자신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허용된 소년과, 즉각적 효과를 박탈당한 감정을 지닌 소녀에게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남자는 끊임없이 세계를 재검토하고, 매 순간 주어진 것에 대해 항의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이 세계를 받아들일 때는 능동적으로 확인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자는 세계를 그저 감내하기만 할 뿐이다. 세계는 그녀 없이도 정의되고, 변함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신체적 무력함은 더 일반적 소심함으로 나타난다. 여자는 자기 신체 안에서 시험해 보지 않은 힘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감히 기도도 반항도 창조해 보지도 않는다. 순종과 체념에 바쳐진 여자는 사회에서 이미 다 만들어진 자리 하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사물의 질서를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의 몸 – 특히 처녀의 몸 – 은 정신생활과 그것의 생리적 실현 사이에, 이를테면 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히스테릭한’ 몸이다. 소녀가 사춘기의 여러 혼란을 새로 경험하므로 인해 받는 충격은 그 혼란을 더욱 격화시킨다. 그녀는 자기의 몸을 미심쩍어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살펴보기 때문에 자기 몸이 병에 걸린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상 그 몸은 병을 앓고 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소녀의 몸은 연약해서 기관 장애가 생긴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들을 찾아온 환자들 가운데 90퍼센트가 상상에 의한 환자들로, 그녀들의 불편함은 생리학적으로 전혀 증상이 없든가 아니면 기관 장애 자체가 심리적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여자의 몸을 괴롭히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다.

여자의 생물학적 상황이 그녀에게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그녀가 놓여 있는 상황의 전망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경쇠약이나 혈액순환 중추의 불안정 정도는 병적으로 되지 않는 이상, 여자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지장을 주지 않는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체질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한 달에 하루 이틀쯤 몸이 불편한 것은 괴롭긴 하더라도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 많은 여자가 그것에 적응하고 있으며, 특히 달마다 겪는 ‘저주’가 더 많은 지장을 줄 수 있는 운동선수, 여행가, 고된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들도 적응하고 있다. 직업 대부분은 여자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포츠에서의 목표는 신체적 능력과 무관한 성공이 아니라, 신체의 각 기관에 고유한 완성도를 성취하는 것이다. 경량급 챔피언은 중량급 챔피언의 가치와 같고, 여자 스키챔피언은 그녀보다 더 빠른 남자 스키챔피언보다 열등하지 않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두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남자보다 핸디캡을 가장 덜 느끼는 사람은 바로 여자 운동선수들이다. 신체적 연약함이 여자에게 폭력을 배울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여자가 다른 방식으로 신체 속에서 자기를 주장할 수 있고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면, 이런 결함은 쉽게 보상될 것이다. 수영을 하든, 높은 산의 정상을 등반하든, 비행기를 조종하든, 원소元素와 싸움을 하든, 위험을 무릅쓰든, 모험을 하든 여자는 세계 앞에서 내가 말한 그런 소심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여자들이 보이는 이러한 특성들은 여자에게 아주 작은 출구만을 남겨놓는 상황에서, 그것도 직접적 방식이 아니라 유년기를 통해 그녀 안에 뿌리내린 열등 콤플렉스를 강화하면서 그 의미를 갖는다.

여성의 지적 성취를 어렵게 하는 것 또한 이 콤플렉스다. 사춘기부터 젊은 처녀들은 지적·예술적 영역에서 뒤처진다고 흔히 지적되었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아주 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녀들은 남자 형제들이 받는 격려를 주변으로부터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되레 사람들은 그녀 역시 한 명의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직업 활동에서 오는 책임과 여자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책임을 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패배주의의 근본 원인은 소녀가 자기 미래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이 결국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다. 자기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남자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남자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스스로 열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 가장 비천한 여자부터 가장 고결한 여자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은 모두 남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운다. 어머니들은 그녀들에게 사내아이들을 더 이상 친구로 대하지 말고, 그들을 앞서지도 말고 수동적 역할을 감수하라고 엄명한다.

 

사춘기 소녀가 종종 남자보다 오히려 손위의 여자에게 첫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폭력이나 강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남성적인 여자는 그녀에게 아버지인 동시에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된다. 이 여자는 아버지의 권위와 초월성을 갖고, 가치의 원천과 기준이 되며, 현실 세계를 초월한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자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어루만짐에서 너무 일찍 떨어져 나왔거나 반대로 어머니에게서 너무 오랫동안 귀여움을 받은 사춘기 소녀는 남자 형제들처럼 따뜻한 젖가슴을 꿈꾼다. 자기 몸과 닮은 이 남성적인 여자의 몸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젖가슴으로부터 분리될 때 잃어버린 생명과의 직접적 융합을 거리낌 없이 되찾는다. 그녀를 감싸는 이 타인의 눈길에 의해 그녀를 개별화시키는 분리가 극복된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는 갈등이, 모든 사랑에는 질투가 뒤따른다. 그러나 처녀와 그녀의 첫 남성 애인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어려움이 이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동성애의 경험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띨 수 있다. 그 경험은 젊은 처녀에게 대단히 행복한 안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녀는 이를 지속하고 또 반복하고 싶어 하게 되며, 향수 어린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그녀는 더욱 에로틱한 동성애의 성향을 드러내거나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대개 그런 경험은 처녀 시절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그런 경험은 너무 쉽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는다. 손위 여자에게 바치는 사랑 속에서 젊은 처녀는 자신의 미래를 갈망한다. 그녀는 자기 우상과 일체가 되고 싶어 한다. 예외적으로 뛰어나지 않는 한, 우상은 곧 그 오라를 잃어버린다. 손아래 여자가 자기를 확립하기 시작하면, 손위의 여자를 평가하고 비교한다. 마침 자기와 닮았고 두렵게 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된 그 타자는 오랫동안 경외심을 갖게 할 정도로 아주 다르지는 않다. 남성 신들은 아득히 먼 그들의 하늘에 있으므로 그보다 더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젊은 처녀의 호기심과 관능은 그녀에게 더욱 거친 포옹을 욕망하도록 부추긴다. 그녀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동성애의 모험을 과도기적 단계나 통과의례나 대기 상태 정도로밖에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면서도 아직 경험할 용기나 기회가 없었던 연애를 별다른 위험 없이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을 다소나마 시인하면서 사랑, 질투, 분노, 자존심, 기쁨, 고통 등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바쳐졌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평범하고 완전한 여자의 운명을 원하고 있다.

우상이 하나의 수컷이 되어 버린 까닭에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도망친다. ‘재미있다’든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교태를 부리는 사춘기 소녀들이 있다. 그러나 남자가 너무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명하면 모순되게도 그녀들은 화를 낸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마음에 든 까닭은 다가가기 힘들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남자가 사랑에 빠지면 그는 평범해진다. “다른 남자들과 진배없는 남자일 따름이야.” 젊은 처녀는 그의 실추를 그의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처녀의 감수성을 불안하게 하는 신체적 접촉을 거부하기 위해 그것을 구실로 삼는다. 젊은 처녀가 자기의 ‘이상적인 남자’에 굴복하더라도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무감각한 채로 있다. 슈테켈104은 이렇게 말한다. “흥분한 처녀들은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자살하기도 하는데, ‘이상적인 남자’가 ‘난폭한 동물’의 형태로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그녀가 상상했던 사랑의 모든 구조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남자가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에게 구애할 때 젊은 처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아주 흔하게 기혼 남자를 선택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취미에 의한 것이다. 그녀는 자진해서 돈 후안에게 매혹당한다. 어떤 여자도 결코 붙잡아두지 못한 이런 유혹자에게 복종하고 그를 좋아할 것을 꿈꾼다. 그녀는 그의 행실을 고치겠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자기의 기도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이유 중 하나다. 어떤 처녀들은 현실적이며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들은 일생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할 것이다.

즉, 젊은 처녀의 나르시시즘과 그녀의 섹슈얼리티가 원하는 경험 사이에는 갈등이 있다. 여자는 자기 포기 한가운데서 자기를 본질로써 되찾는 조건에서만 자기를 비본질로써 수락한다. 자기를 객체로 만들면서 그녀는 우상이 되어 그 속에서 득의양양하게 자기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비본질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가차 없는 변증법을 거부한다. 그녀는 마력적인 보물이 되기를 원하지, 사람들이 마음대로 취하는 물건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법의 향기를 지닌 멋진 숭배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보이고 만져지고 상처를 입는 하나의 육체로 여겨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는 먹잇감이 되는 여자를 극진하게 여기지만, 식인귀인 데메테르에게서는 도망가는 것이다.

남자의 관심을 끌고 남자를 감탄시키는 데 긍지를 느끼는 그녀는 역으로 그런 일을 당하면 격분한다. 사춘기를 겪으며 그녀는 수치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수치는 그녀의 교태와 허영심에 뒤섞여 있다. 남자들의 시선은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 그녀는 자기를 보이고 싶은 범위 내에서만 보이기를 원한다. 그녀의 두 눈은 언제나 지나치게 날카롭다. 이런 일관성 없는 태도는 남자들을 좌절시킨다. 그녀는 어깨나 가슴, 다리를 드러내면서도 남자들이 자기를 바라보면 즉시 얼굴이 빨개지며 화를 낸다. 그녀는 남자를 도발하는 것을 재미로 여기지만, 만약 그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알아채면 혐오를 느끼고 뒷걸음질한다. 남자의 욕망은 찬사인 만큼 모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매력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매력을 자유로이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에서 승리감에 도취한다. 그러나 자기의 용모, 태도, 육체가 남에게 알려져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것들을 탐내는 타인의 낯설고 무례한 자유로부터 감추려고 한다. 그것이 이 본원적 수치심의 깊은 의미이며, 이 수치심은 가장 무모한 교태와 뜻하지 않게 충돌한다. 

이것이 젊은 처녀를 특징짓는 특성이며, 그 행위의 대부분을 이해하는 열쇠가 거기 있다. 그녀는 자연과 사회가 자기에게 할당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세상과 싸움을 벌이기에는 내적으로 너무 분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혹은 현실에 대해 상징적으로 이의 제기하는 데 그친다. 그녀의 각각의 욕망은 불안으로 배가되고,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손에 넣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자기의 과거와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는 한 남자를 ‘소유하기’를 바라지만, 그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혐오한다. 그리고 공포의 배후에는 욕망이 숨어 있다. 강간은 그녀를 소름 끼치게 하지만 수동성은 동경한다. 그래서 그녀는 기만과 온갖 술책을 동원하게 되고, 모든 종류의 부정적인 강박관념의 성향을 지닌다. 이것은 욕망과 불안의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젊은 처녀가 이 모든 행위에서 자연적·사회적 질서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가능성의 한계를 축소하거나 가치를 쇄신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그 경계와 법이 보존된 기성 세계의 한가운데서 자기의 반항을 표명하는 것에 만족한다. 이것이 흔히 ‘악마적’이라고 규정되는 젊은 여성의 태도이며, 선善은 조롱당하기 위해서 인정되고 규칙은 위반되기 위해서 마련되었으며, 신성은 모독을 범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존경받는다는 근본적 속임수를 내포하는 태도다. 젊은 처녀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기만이라는 매우 불안한 암흑 속에서 그녀가 세계와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거부하는 사실로써 정의된다.

사춘기 처녀를 비난받게 하는 모든 결점이 단지 그녀가 처한 상황을 표현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희망에 부풀고 야심으로 가득 찬 나이에, 삶에 대한 의지와 지상에 자리 하나를 차지하려는 의지가 왕성한 나이에, 자기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자는 자신감이 충만한 시기에 자기에게는 그 어떤 정복도 허용되지 않고 자기를 부정해야만 하며, 자기의 미래가 남자들의 뜻에 달려 있다는 점을 터득한다. 성적인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갈망에 눈을 뜨지만, 그녀는 그 갈망을 채우지 못한 채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생명이나 정신적 차원의 약동은 모두 곧 저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가 자기 균형을 회복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불안정한 기분, 눈물, 신경의 발작은 생리적 허약함의 결과라기보다 심각한 부적응의 표시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어머니, 법칙, 관습, 타성이 군림하고 있으며 그녀는 이런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절대적 주체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아내가 됨으로써만 성인의 삶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포기를 해방의 대가로 지불한다. 한편, 그녀는 식물과 동물들 한가운데에서는 한 인간이다. 그녀는 자기 가족과 남자들에게서 동시에 해방되어 주체이자 자유가 된다. 그녀는 숲의 비밀 속에서 자기 영혼의 고독한 이미지를 발견하고, 드넓은 평원의 지평선 속에서 초월성의 감각적 형태를 발견한다. 그녀 자신이 이 무한한 광야이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나무와 산의 정점이다. 그녀는 미지의 미래를 향한 이 길을 따라갈 수 있으며 따라갈 것이다. 언덕 꼭대기에 앉아서 그녀는 자기 발밑에 펼쳐지고 제공된 세계의 모든 부副를 지배하고 있다. 출렁이는 물과 반짝이는 빛을 통해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는 기쁨과 눈물과 황홀을 예감한다. 연못의 잔물결과 태양의 반점이 그녀에게 막연히 약속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 마음속으로 떠나는 모험이다. 향기와 색깔은 신비로운 언어를 이야기하지만, 그중 한 단어가 압도적으로 뚜렷하게 떠오른다. 바로 ‘삶’이라는 단어다. 삶이란 단지 관청의 장부에 기재되는 추상적인 운명만이 아니라 미래이며 물질적인 부다. 육체를 지닌다는 것이 더는 수치스러운 타락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춘기 소녀는 어머니의 눈길 아래서 거부했던 그 욕망에 나무 속에서 가지를 향해 올라가는 수액을 알아본다. 그녀는 더 이상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나뭇잎과 꽃들과의 혈연관계를 주장한다. 그녀는 꽃부리를 짓이기고, 자기의 빈손에도 언젠가는 싱싱한 먹이가 가득 차리라는 것을 안다. 이제 육체는 더러운 것이 아닌 기쁨이며 아름다움이다. 하늘과 광야와 혼연일체가 된 젊은 처녀는 세계를 활기차고 뜨겁게 하는 묘연한 숨결이다. 그리고 그녀는 히드의 새싹 한 잎 한 잎이다. 땅에 뿌리박은 개인이자 무한한 의식인 그녀는 정신이자 생명이다. 그녀의 존재는 대지 자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이며 득의양양하다.

그녀는 때로 자연을 넘어서 더 멀리 있는, 한층 더 눈부신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을 찾고 있다. 그녀는 신비로운 황홀경 속에서 자신을 잊을 채비가 되어 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시대에는 많은 젊은 여성의 영혼이 신에게 자기 존재의 공허를 채워 달라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