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henomenology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3)

Soyo_Kim 2019. 10. 5. 19:20

8절 후설의 시간의식Zeitbewußtsein을 다루기 위한 예비 작업 -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중심으로

후설은 명증성Evidenz을 ‘사고한 것이 주어진 사태나 대상과 일치함’으로 사용한다.[각주:1] 이러한 명증성은 다시 사태와 사고가 일치하는, 즉 지향한 대상이 충족되는 충전적adäquat 명증성과, 주어진 사태가 존재하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필증적apodiktisch 명증성으로 구분된다.[각주:2] 이 부분에서는 일종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아데쿠아티오(adequatio)라는 단어는 흔히 동화, 일치라는 뜻을 지니며, 전통적인 진리개념- 즉, “진리는 대상과 판단 사이의 ‘일치’에 있다.”에서 바로 그 ‘일치’에 해당한다. 이 단어의 유래는 아리스토텔레스로, 그는 영혼의 체험, 즉 노에마Noema는 사고된 것으로서 사물과의 동화[일치]라고 말한다.[각주:3]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비센나(Avicenna)로부터[각주:4]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즉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정의를 수용하게 된다.

후설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명증성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명증성은 ‘의미 지향’과 ‘의미 충족 사이’의 일치로 의미 지향이 직관을 통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는 공허하다.[각주:5] 고로 실증적 자연과학이 표현하는 기호, 공식, 도형 등은 그 직관적 충족이 아프리오리하게 불가능한, 의미지향만 지닌 탐구방식에 불과하다.[각주:6] 이로써 후설은 자연과학이 탐구한다고 자부하는 그 자체An sich로서의 자연이 '의미 충족'과 진리성 검증이 불가능한 이념화된 산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각주:7]

이제 후설의 그 유명한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의 구분이 등장한다. Noesis의 어원은 사유, 인식하는 주관, 삶의 주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nous로 플라톤이 《국가》 제 6권에서 선분의 비유(519d-511e)를 들며 나온 개념이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인식대상noema을 가시적인 것들ta horata, 감각적 대상들ta aistheta과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들ta noeta로 나누며 이 중 전자에 그림자에 대한 짐작eikasia과 실재에 대한 확신pistis을 대응시키고 이를 속견doxa이라 부른다. 반면 후자에는 수학적인 대상에 대한 추론적 사고dianoia와 이데아에 대한 직관episteme을 대응시키고 이를 지성을 통한 인식noesis라 부른다. 후설은 후자를 취해 이를 의식의 인식 작용을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노에시스는 의식의 표층에서 표상작용이 발생하기 이전에, 주어진 감각 자료에 의미를 부여하여 통일적 인식 대상인 노에마를 구성한다.[각주:8] 한 가지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구성Konstitution 개념은 칸트 철학의 맥락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칸트에게 있어 구성이란 감성Sinnlichkeit에 주어진 잡다에 지성Verstand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사유형식인 범주Kategorie를 도식Schema 기능에 따라 적용한 것이다. 반면 후설에게 있어서는 인식의 내용 역시 아프리오리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의 구성은 실상 “대상성에 의미를 부여해 명료하게 밝히는 작용”으로써 역사적으로 해명함을 의미한다.[각주:9] 고로 이러한 의미의 구성은 세계의 구성이 아닌, 동일한 세계를 다층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의 재구성에 해당한다.[각주:10][각주:11] 노에시스와 노에마는 의식의 지향성을 구성하는 상관적 요소로 그 관계나 대상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그러한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식 대상의 핵심을 파악하는 양상은 언제나 ‘지금’ 지각하여 주어진 활동성에서 배경으로 물러나 비-활동성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시간의식Zeitbewußtsein에 대한 분석이 필요해진다.

시간Zeit이란 칸트에 따르면, 공간Raum과 함께 감성 영역에서의 선험적a priori인 일종의 표상Vorstellung으로써, 그 자체로는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미리 선제되어야하는 조건Bedingung이다. 칸트는 앞서 언급한 흄의 경험론적 공박을 받아들이지만, 이로부터 흄의 모든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칸트는 모든 지식(판단)이 경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이 곧 그 지식이 순전히 경험적인, 다시 말해 우연적인 명제들이며 따라서 모두 감각 경험으로 다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반대한다. 칸트는 흄의 이러한 주장이 수학적 명제에 대한 그의 간과에서 비롯된 실책이라고 주장한다. 흄은 관념을 단지 인상이 지닌 생동성과 힘이 약화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니, 이는 실제로 감관의 수용성만을 인정한 것이다. 칸트는 흄의 주장처럼 우리의 모든 직관(Anschauung)[각주:12]이 감관(Sinn)에서 오지만, 또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기능인 사유(Denken)를 통해 개념(Begriff)[각주:13]을 형성하고 그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고로 칸트는 필연성에 대한 흄의 요구에 대해 선험 종합 명제를 제시한다. 순수 기하학과 수학은 분석적이지 않다. 그것은 선험적이고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순수 기하학과 수학은 선험적 표상인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4]

칸트는 수학의 명제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술이라는 견해를 좀 더 발전시켰다. 칸트는 수동적인 관조만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활동을 전제한다.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은 정의를 제시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것에 선험적인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다.[각주:15]

 

칸트는 순수 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인 종합 명제라고 보기 때문에, 흄의 경험론으로는 순수 수학의 성질을 해명할 수 없다고 본다. 공간과 시간은 흄이 수용적이라고 말한 그 점에서는 분명히 순전한 직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요소가 전혀 섞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순수한 직관이다.(달리 말해 감성의 질료가 아닌 형식이다.) 칸트의 근본 기획인 초월 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의 혁명적인 부분은 기존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던 대상들 자체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ens qua ens)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대상들에 대한 경험적인 개념을 다루는 것도 아닌,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개념을 다룬다는 것이다.[각주:16]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a priori)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라 일컬어질 것이다.”[각주:17]

“나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의 모든 고찰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만큼 사람들이 유념해야만 하는 하나의 주의를 해둔다. 곧, 선험적인 모든 인식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에 의해 어떤 표상들이 (직관이든 개념이든) 오로지 선험적으로 적용된다거나 또는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러한가를 우리가 인식하는, 그런 선험적 인식을 초월적이라고 (…) 일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도 공간의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적 표상이 아니고, 이런 표상들은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그러면서도 이 표상들은 경험의 대상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초월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각주:18]

고로 초월철학이란, 그 자신은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의 탐구는 경험적인 대상을 다루는, 자연 과학의 탐구와 그 영역에 있어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초월철학은 오히려, 자연과학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경험이 가능하기 위한 인식의 가능성을 연역적으로 탐구한다. 칸트는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어떻게 선험적 개념이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그 개념의 초월적 연역(die transzendentale Deduktion)이라” 일컫는다. 칸트는 이 연역을 철학자의 과제를 피고를 기소하려는 (로마법 체계의) 검사가 맞닥뜨릴 법한 과제에 비견한다. 검사는 두 개의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각주:19]

1. 권리 문제quaestio quid iuris

피고가 법을 위배했음을 어떤 권리로 주장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피고에 대한 기소가 타당한 법적 근거를 갖추었음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이를 보이려면 법규에서 다음과 같은 형식의 명제를 도출해야 한다. '피고가 X를 했다면, 그는 Y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자신의 것이 아닌 재산을 처분했다면, 그는 절도죄를 저지른 것이다.)

2. 사실 문제quaestio quid facti

피고가 X를 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그가 자신의 것이 아닌 재산을 처분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피고에 대한 소송을 성립시키려면 위의 두 가지가 입증되어야 한다. 피고가 X를 했다는 점이 입증될 수 없다면, 피고가 X를 했다고 추정됨으로써 성립하는 모든 범죄에 대해 그는 무죄이다. 그리고 X를 하는 행위가 Y라는 범죄의 성립 요건이 된다는 점이 법규에서 도출될 수 없다면, 사실 관계가 어떻든, 심지어 피고가 X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셈이다.[각주:20]

로마법에서 권리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는 논변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법률 용어가 연역(Deduktion)이다.[각주:21] 고로 칸트는 초월적 연역에서 범주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과제를 범주의 초월적 연역(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Kategorien)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범주와 관련한 칸트의 목표는 범주가 경험의 대상에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확립하는 것이다.[각주:22] 이는 권리문제에 대한 칸트의 답변임을 뜻한다.

이성의 권리문제는, 인간 이성(Vernunft)이 지닌 두 종류의 선험적 형식, 즉 감성과 지성을 사용하여 외부 대상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자격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각주:23] 칸트가 이러한 권리문제를 탐구함으로써, 즉 연역을 통해 얻은 가장 영향력 있던 성과가 바로 초월적 통각(die 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다.

이는 경험의 성립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칸트의 의도와 그 과정을 선험종합명제의 해명에서 찾으려는 방법론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험적인 순수한 개념들이 있다면[각주:24], “이 개념들은 물론 어떠한 경험적인 것도 함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오로지 그 위에 그것들의 객관적 실재성이 근거하는, 가능한 경험을 위한 선험적인 순전한 조건들이어야 한다.”[각주:25] 그런데 이 개념들을 우리는 범주에서 발견하므로[각주:26], 감각에 주어진 잡다, 곧 수용성에는 항상 자발적인 종합작용이 결합해서만 비로소 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각주:27] 칸트는 이러한 종합을 3가지로 들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종합이 이루어짐에 있어 의식의 통일이라는 초월적 근거를 반드시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각주:28] 칸트가 초월적 통각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근원적인 “자기에 대한 의식”[각주:29]이다.

‘나는 사고한다(Ich denke)’는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그것은 표상으로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겠는데-이 나에게서 표상되는 셈이 될 터이니 말이다. (...) 이 표상은 자발성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감성에 소속되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이 표상을 순수 통각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그것을 경험적 통각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는 그것을 근원적 통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여타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을 낳으면서, 모든 의식에서 동일자로 있는, 다른 어떤 표상으로부터도 이끌어낼 수 없는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각주:30]

9절 시간의식Zeitbewußtsein과 선험적 현상학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이제 사르트르는 이러한 자기의식의 초월적 통일이 권리문제에 국한되어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각주:31]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의 사실상의 현존에 관해서는 결코 확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는 ‘나’가 없는 의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32] 이는 초월적 통각에 있어 그것이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이 필연적인 것이지, 실제로 항상 동반되고 있음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칸트주의자들은 이를 부주의하게 ‘현실화’했다.[각주:33]

고로 그것의 사실문제, 즉 의식의 실제적인 현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이라고 사르트르는 파악한다. 칸트의 초월철학이 권리문제를 다룬다면, 후설의 현상학은 사실문제를 다룬다. “현상학은 의식에 관한 학적 연구이며, 의식에 관한 비판이 아니다.”[각주:34]

이 연구의 본질적인 방식은 직관이다. 후설에 따르면 직관이란 우리를 사물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각주:35] 더군다나 후설이 현상학을 ‘기술하는’ 학으로 명명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현상학은 ‘사실’에 관한 학이며, 현상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이란 ‘사실에 관한’ 문제들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나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은 실존의 문제들이다. 후설은 칸트의 초월론적 의식을 다시 발견하고 에포케(epoche)를 통해 그것을 거머쥔다.[각주:36]

후설은 칸트를 따라 시간에 관한 분석을 ‘선험적 감성론’이라 부른다.[각주:37] 그러나 칸트에게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의식의 통일이 의식의 시간성에 논리적으로 앞서는 반면, 후설에게는 의식의 통일이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시간은 모든 체험이 근원적으로 종합되고 구성되는 근원이다.[각주:38] 후설에 있어, 의식에 표상작용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노에시스가 주어진 감각자료에 의미를 부여해 노에마를 구성해야 한다.[각주:39] 인식 작용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활동성으로부터 비-활동성으로 변해간다. 그러므로 인식 대상이 구성되기 이전의, 인식 활동 자체가 이루어지는 시간의 심층 의식에서는 인식 작용과 그 대상, 질료로서의 인식한 내용과 형식으로서의 인식하는 작용의 구분이 없어진다.[각주:40] 남는 것은 오로지 내적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일 뿐이다. “시간의식은 모든 체험이 종합되며 통일되는 근원적 터전이다.”[각주:41]

후설이 연구하고자 하는 시간은 나타나는 시간 그 자체, 나타나는 지속 그 자체로, 의식이 경과하는 내재적immanent 시간이다.[각주:42] 내재는 의식 영역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의식영역 밖에 존재하는 초재Transzendenz와 구별된다. 또한 내실적reell은 의식작용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감각적 질료와 의식의 관계로 의식과 실재적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와 대립한다.[각주:43] 따라서 자아에 있어 순수 내재와 내실적 초재(인식 작용 속에 내실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은 지향적 내재(구성된 의미, 노에마)라는 접점을 갖는다. 이 노에마의 여집합이 구체적인 의식 체험의 흐름인 내실적 내재이며, 직관되지 않은 초재는 반면 내실적 초재에 있어 지향적 내재의 여집합인 순수 초재이다.[각주:44]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양화(量化) 가능한 객관적 시간이나 실재적 시간과는 달리, 현상학의 시간은 이러한 내실적 내재, 즉 체험된 ‘지금’과 ‘근원적 시간의 장(場)’을 다루고자 한다.[각주:45] 오히려 ‘감각’된 자료인 시간이 경험적 통각을 통해 구성해낼 때 비로소 이러한 객관적 시간과의 관계가 ‘지각’된다.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경우, 지각된 것은 잠시나마 현전Anwesenheit하는 것으로 남는다. 어떤 멜로디가 울려 퍼질 때의 개별적 음은 자극이나 운동신경이 정지한다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데, 새로운 음이 울려 퍼진다고 해서 지나간 음이 과거로 밀려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각주:46]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매 순간마다 하나의 음만 남게 되어 잇달아 일어나는 음을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을 기억하고 지시하는 내재적 발생의 짝짓기를 후설은 근원적 연상Urassoziation이라 부른다. 이 때 분리된 기억들은 감각된 것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따른 연상적 일깨움에 근거해서만 하나의 시간적 상관관계 속에서 직관적으로 질서 잡히게 된다. 바로 이 연상 작용이 내적 시간의식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종합 위로 층을 이루며 올라간 ‘수동적 종합’이다.[각주:47]

지속하는 시간의 객체를 근원적으로 산출하는 원천이자 시점은 근원적 인상Urimpression이다.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에는 매순간 ‘지금’이 과거에서 미래로 부단히 이어지는 '가로방향 지향성'과 그 지금이 지나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고 변양된 채 침전되어 유지되는 '세로방향 지향성'이라는 이중의 연속성이 있다. (...) 1차적 기억으로 지각하는 과거지향Retention과 근원적 인상인 생생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것을 현재에 직관적으로 예상하는 미래지향Protention이 연결되어 통일체를 이룬다.[각주:48]

과거지향이란 라틴어 retentare에서 유래한 용어로 “굳게 보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방금 전에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작용을 뜻하며, 방금 전에 지각된 것이 현재에 직접 제시되는 지각된 사태로서 1차적 기억(직관된 과거)이다. 반면 미래지향은 이미 친숙하게 알려진 것에 근거해 미래를 직관적으로 예측하는 작용을 뜻한다.[각주:49]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현상학에 이르러서 이념성과 실재성의 구분이 더 이상 의식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설에게 있어 실재적real은 시공간적으로 일정하게 지각하고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 개체의 특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렇지 않은 이념적idea인 것과 구별된다.[각주:50] 실재성과 이념성은 시간성을 구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다양한 작용 역시 실재성을 갖는다. 따라서 내실적 내재와 지향적 내재 모두 현상학에 있어서는 실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의식을 발생적 분석의 기본 틀로 삼음으로써 오늘날 흔히 말하는 정적 분석과 발생적 분석의 구별이 생겨나게 된다.[각주:51] 후설은 이로부터 선험적 현상학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후설의 《논리 연구》는 사르트르가 이해했던 것처럼 일종의 경험적 현상학, 기술적 심리학이다. 후설은 논리연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구성하는 의식(노에시스)의 현상학인, 선험적 현상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선험적 현상학(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칸트의 초월 철학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나, 칸트적 의미의 초월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후설은 transzendental이라는 표현을 가장 넓은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모든 근대 철학에 의미를 부여한 원본적 동기originale Motiv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한다.[각주:52] 즉 그것은 “모든 인식이 형성되는 궁극적 원천으로 되돌아가 묻는 동기이며, 인식하는 자가 자신의 인식하는 삶에 대해 자신을 성찰하는 동기”[각주:53]이다. 따라서 후설에게 있어 ‘선험적’의 대립항은 칸트와 달리 ‘세속적’(mundan)이다.[각주:54] 달리 말하면, 후설에게 있어 선험적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형식적 조건이나 존재자에 대한 소박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넘어서 일체의 타당성 자체를 판단중지하고 궁극적 근원으로 돌아가 묻는 반성적 태도를 뜻한다.[각주:55]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후설이 선험적 현상학의 방법에 있어 핵심으로 삼은 것은 현상학적 에포케, '판단중지Epoche'이다. 판단중지란 자연적 태도로 정립한 실재세계의 타당성을 괄호 속에 묶어 유보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경험에 있어 미리 형성하거나 이론을 통해 형성한 일체의 편견을 보류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심과 태도를 변경하는 것이다.[각주:56]

대상의 무엇임(본질)Wesenheit에 대한 판단은, 이러한 극미한-지금을 주파하는 현상들Erscheingungen의 흐름에 비하면 이미 사후적이고 2차적인 일이다.[각주:57] 대상에 대해 ‘~임’과 ‘~이 아님’이라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했을 때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 현존(실존)Anwesenheit하는 현상학적 잔여인 이 현상들에 대해 후설은 질료Hyle라 이름한다.[각주:58]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급격한 흐름이 주어지는, 그러나 그 자신은 주어지지 않는 터가 필요하므로, 이를 초월적인 순수의식이라 일컬은 것이다.[각주:59] 물론 양자는 분리되지 않은 채로 통일되어 흘러가므로, 후설은 이 영역을 순수의식의 내실적 영역(reelle Späe des reine Bewußtseins)이라 부른다.[각주:60] 이렇게 근원적이고 내적인 영역에서 시간의식이 성립하며, 이 의식이 ‘생생한 현재’(lebendige Gegenwart)를 산출해낸다.

내적 시간의식의 수동적이면서 근원적인 종합Ursynthesis은 근원적 인상Urimpression과 과거지향Retention, 미래지향Protention의 종합인 바, 이로부터 산출되는 생생한 현재의 근원은 극미한 지금’infinitestimales Jetzt이자, 철저한 현존(Existenz, existentia)이다.[각주:61] 후설은 이렇게 서양 철학사의 대립항으로 여겨지던 실존existentia과 본질essentia사이의 대립, 그리고 실존에 대한 본질의 우위를 지양하고, 현존의 터 위에서 본질을 직관한다. 실존을 뜻하는 ‘exsistere’는 이는 그리스어 ‘…밖에’ 혹은 ‘…너머’라는 뜻을 지닌 ‘εξ -’(eks-) 혹은 ‘εκ-’(ek-)에서 온 'ex-'와 ‘자리를 잡다’라는 뜻을 갖는 ‘sistere’의 합성어로 ‘…밖에 자리하다’ 혹은 ‘…너머에 자리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 ‘~너머’의 ‘~’가 바로 '극미한 지금'인 것이다.[각주:62]

 

3장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과 실존 개념

10절 존재 물음 제기의 필요성과 실존 개념

후설은 현상학적 에포케를 통해 소박한 자연적 태도를 괄호 안에 넣는다. 이러한 현상학적 시선의 성과를 후설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현상학적 에포케는) 우리를 무와 대면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획득되는 것, 좀 더 분명히 말해 그렇게 성찰을 하는 자로서 내게 획득되는 것은 모든 체험들과 순수한 의견들을 포함하는 내 순수한 삶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적 의미에서 현상들의 우주가 획득되는 것이다. (...) 에포케란 내가 나를 순수한 자아로서 포착하는 철저하고 보편적인 방법이다.[각주:63]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우리는 의식이 텅 비어있는 공허한 상자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식을 충분히 깊게 파고들다 볼 때 우리가 그 사물이 있는 바깥으로 내던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각주:64]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볼만한 점은, 후설의 말마따나 자기의식이 지각의 지각에서 부차적으로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초월적 자아를 전체의식 과정의 처음으로 놓을 수 있냐하는 점이다.[각주:65] 이는 역설적이지 않은가? 후설이 하고자 했던 작업을 우리가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주-세움의 존재론의 극복으로 본다면, 후설은 분명 의식 과정을 자아와 세계의 분열 이전으로 돌려놓았다.[각주: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해체되었던 그 자아는 다시 확고부동한 확실성의 기준으로 세워진다. 후설은 현상학적 태도를 다시 초월적 자아의 장소로 선언해버렸던 것이다.[각주:67] 이것이 바로 후설이 데카르트적 자아 연구에 집착했던 한 원인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후설의 현상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후설과 결별하게 된다. 2장에서 본 것처럼 후설의 진리 개념과 자아 개념 등은 전통 형이상학-인식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하이데거는 이 점을 바로 후설의 실책이라 여겼던 것이다. 후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묻지 않았다. 인간, 곧 지향적 의식이란 후설에 따르면 그저 자연을 향한 되던짐Gegenwurf이라는 규정을 획득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는 아직 물어지지도 않은 것이 아닌가?[각주:68]

하이데거는 의식 철학에 대한 딜타이와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다시 발견한다. 역사적 삶을 연구했던 딜타이는 초월적 자아가 단지 역사의 피안에 위치한 무력한 의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삶이 실제로 “되풀이해서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결정해야하는 상황에 직면”[각주:69]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에도, 의식 철학은 생생한 삶의 위험으로부터 단순히 도피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삶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확립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각주:70]

따라서 하이데거는 후설이 괄호 속에 집어넣었던 것을 풀고 실존Existenz을 주제로 삼는다.[각주:71] 그런데 이 실존은 후설이 표현하고자 했던 현존Existenz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떤 것이 현존Anwesenheit한다.'는 기본적으로 ‘눈앞에 있음’을 뜻하며 이는 후설에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자연적 태도로 인해 훼손된 현존을 복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 현존 자체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타동사적으로 사용한다.[각주:72] 즉 실존Existenz이란 것은 더 이상 눈앞에 있음Existenz이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것, 실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존이란 동물이나 식물과는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존재방식, 자기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인 현존재Dasein에게 귀속된다. 그것은 있는 무엇일 뿐만 아니라 거기da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 무엇이다.[각주:73] 따라서 실존이란 시간 속에서 우려하고 근심하며 스스로를 기획-투사Ent-wurf하는 현사실적 삶이다.[각주:74]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어찌하여 무Nichts가 아니고 존재Sein인가? 철학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존재하고 있는 세계Welt에 대한 경이로움과 이러한 세계에 내던져있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인 나의 기분Stimmung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기분을 통해 현존재의 불안이 드러난다. “존재는 짐인 것으로 드러났다.”[각주:75] 일찍이 현존재는 한 번도 자신이 존재하고자 하는 여부를 자유롭게 결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각주:76]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것을 개시하지만 그 자신은 개시하지 않는 지평Horizont에 대해 후설이 제시했던 의식Bewußtsein을 거부하고 존재Sein를 그 근원으로 삼는다. 실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의 역사에 있어 언제나 소홀히 다루어졌다.[각주:77] 하이데거의 이러한 진단은 사뭇 충격적이라 혹자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형이상학의 근본 주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러한 물음들은 언제나 존재자Seiende를 제시했을 뿐, 존재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Sein inst nicht so etwas wie Seiendes)”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한국어로는 그 특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Was ist 'Sein'”은 우리가 묻고자 하는 그것(Sein)이 이미 물음에 포함되어 있다는(ist) 점에서 독특한 물음이다. 우리는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물음을 물을 때 이미 ‘이다’에 대한 이해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각주:78] 이렇게 우리는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를 ‘이미’ 지니고 있다.[각주:79] 하이데거는 이 물음을 보다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연관구조를 제시한다. 먼저 “존재란 무엇인가?”에서 물어지고 있는 것은 존재(Sein)이며, 물음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존재의 의미(der Sinn von Sein), 그 물음이 걸려있는 것은 다시 존재자 그 자신(das Seiende selbst)이라는 점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존재자 중에 물음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현존재(Dasein)이라 부른다. 오직 인간(현존재)만이 그러한 물음을 던질 수 있으며, 또한 그 존재자의 존재이해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구조(Wesensverfassung)에 속한다.

현존재가 그것과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언제나 어떻게든 관계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Existenz이라고 이름한다. (...)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부터 이해한다.[각주:80]

이렇게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획득할 수도 있다.[각주:81]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상실하거나 아직 획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본래성Eigentlichkeit과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으로 표현한다.[각주:82] ‘eigentliche’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이란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까닭에 이 단어의 명사형 Eigentum은 ‘소유물’ 내지는 ‘재산’이라는 뜻을 갖는다.[각주:83] 고로 실존의 획득이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획득해야함을 의미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존의 의미를 일상적인 존재양식을 지닌 그들(das Man)과의 대비를 통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낸다. 현존재는 규범이나 집단이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의 영웅으로 선택함”으로써 자기 본래성에 이른다.[각주:84] 하이데거가 비록 본래성에 이르는 집단적 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존재와 시간》에서는 이런 유아론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드러난다. 실제로 하이데거 자신도 이러한 접근법을 “실존적 유아론”이라 부르기까지 한다.[각주:85]

인간은 이미 세계에 내던져진(geworfen) 존재로, 마찬가지로 또한 자신의 가능성을 내던질(entwerfen) 수도 있다. 독일어 동사 werfen은 ‘던지다’라는 뜻을 가진 자동사인데, 하이데거는 이 동사의 과거형인 geworfen(던져진)과 대비되는 의미로 entwerfen을 사용한다. 독일어 동사 entwerfen은 설계도를 그리다, 입안하다, 구상하다 등을 의미하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의 명사형인 Entwurf(기획, 계획, 설계도)를 그 원래 의미와, 비분리전철 ent와 wurf의 합성에 착안한 Ent-wurf의 ‘-던짐’의 의미를 모두 담아 기투(기획투사)라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사용한다. 고로 Entwurf는 기투를, Geworfenheit는 피투성을 의미하게 된다.

11절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결정적 차이

이로써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 개념 사이의 본질적 의미가 밝혀졌다. 사르트르는 1943년 발표한 《존재와 무》에서 하이데거가 현존재라 부른 것에 헤겔 강의에서 코브가 사용한 용어인 대-자Für-sich라는 이름을 붙인다.[각주:86] 사르트르는 그 자신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계승하고 있다 여겼다. 이는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내던져짐, 기투, 배려 등의 실존범주를 사르트르 역시 사용하고 있는데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각주:87]

물론 여기서부터 헤겔, 후설, 하이데거를 독창적으로 원용한 사르트르의 고유한 철학이 전개된다. 먼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주목하지 않았던 공동-존재는 사르트르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현존재를 양심의 부름Gewissensruf에 따른 결단성Entschlossenheit으로 이끄는 신학적 모티브와 양심의 윤리는 사르트르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르트르는 책임의 윤리를 기술하는데 중점을 두며, 의식을 철학의 중심으로 놓는다는 점에서 후설을 계승한다.[각주:88]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이라는 단어를 데카르트적 의미의 ‘눈앞에 있음’, 현전으로 사용한다. 인간은 우선 단순히 실존하고있으며(눈앞에 있으며), 자신의 그러한 눈앞에 있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스스로를 기투해야만 하는 것이다.[각주:89]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이야기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현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사르트르의 강연 이후 자신을 실존주의자라 부르기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했던 일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적 의미에서의 실존 개념이 자신의 철학을 왜곡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자유 개념에 매력을 느꼈고, 하이데거적인 실존의 의미를 대-자Für sich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느끼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대한 답변으로 《휴머니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간명한 어구는 전후 유럽의 패전이후 우울에 잠겨있었던 독일과 프랑스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자유와 책임의 철학, 참여의 철학임을 밝히면서 실존주의에 대한 앞선 비판들에 맞대응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이 당시 이미 나치즘 참여와, 패전, 총장직 수행 실패 등으로 끝없는 무력감에 빠진 상태였다. 하이데거는 정치적 무력감을 느꼈고, ‘나는 일개 철학자일뿐’이라고 말한다.[각주:90] 그는 오직 사유Denken에 몰두하고 싶을 따름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던 실존주의의 자기 책임성과 참여의 휴머니즘에 대해 하이데거의 대응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이데거는 그의 도피처였던 사유로부터 휴머니즘에 대답하는 방향으로 (혹은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여기에는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 대한 단서가 상당수 들어있지만, 또한 한나 아렌트가 비판했던 본질화로 인한 ‘우매함’ 역시 적지 않게 보인다.[각주:91]

하이데거는 따라서 사유가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를 표한다. 사유가 이론을 세우고 실천이 사유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은 이미 유용성에 지배된 생각이다. 사유도 참여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사유가 정치나 사회의 실천적 문제에서 유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각주:92] 하이데거는 철학의 유용성을 증명하라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반대하면서, 철학이 일체 학문적 태도에 선행하는 경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현상학적 구호를 다시금 내보인다. 사유는 언제나 이러한 경험 곁에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멀어져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려는 사유는 이미 철학으로선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존재의 경험으로 나아간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현존재분석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현존재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다가 원래 잡았어야 할 존재를 정작 놓쳐버렸다고 느꼈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용어로 붙잡고자 했던 것도 ‘실현되어야 할 고유한 존재’로서의 존재Sein였는데도 말이다.[각주:93]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의도와 기투의 용어로서 ~으로의-존재(zu-Sein)를 말하기도 했다.[각주:94]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실존의 의미를 탈-존Ek-sistenz으로 확장한다. "존재의 빛트임Richtung안에 서있음을 나는 인간의 탈-존이라 명명한다. 이러한 존재 양태는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각주:95] 실존은 이제 결단성으로부터 존재에의 초연한 내맡김으로 나아간다.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버리고 떠나있음Abgeschiedenheit'의 경지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내맡김은,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으로 나가는 핵심 개념이 된다. 인간은 이제 존재로부터 말 건넴을 받는다. 존재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기분을 갖게 하며, 사유는 본래적 신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감함이 된다. 본래적 신의 소리 없는 부름(Sage)으로부터 응답하는 자들이, 존재의 고향에서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파수할 때만, 비로소 본래적 신의 신성이 세계 내에 드러난다는 것이다.[각주:96]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유에서 사유가 이론적이거나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고로 이제 하이데거가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이유는 명백해진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인간다움을 충분히 높게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각주:97]

휴머니즘이 지나치게 가치 절상되었다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평가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봤을 때 정치적 무력감의 표현이며, 파렴치하기도 하다. 정작 그가 참여하였던 국가 사회주의가 “최근 파국적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가치 하락 시켰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외면”[각주:98]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해야 하며, 설령 신의 실존에 대한 타당한 증명이 있더라도, 인간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건 전혀 없다.”는 사르트르의 철학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다.[각주:99]

아마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진정으로 위대하고 심오한 사유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판단의 심오함과 위대함이 유대인 학살이나 세계 대전과 같은 일을 존재에의 사유에 비하면 ‘사소한’ 일로 여기게 만든다면, 우리는 이제 그러한 심오함이 어떠한 윤리에 발붙이고 있는지 보다 합당하게 물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야스퍼스와 한나 아렌트의 서신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한나 아렌트에게 전하면서 경멸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는 존재에 관한 사변에 빠져있네. 그는 존재Seyn라고 쓰지. (...) 영혼이 순수하지 못한데도..... 정직하지 못한데도, 가장 순수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일까?”[각주:100]

“문명을 비방하고 y자로 존재를 쓰는 그 삶은 실상 그가 숨어든 생쥐 굴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게 숨어든 건 순례를 하듯 자신을 찾아와 경탄을 표하는 사람들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럴듯한 자기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1200m를 올라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거예요.”[각주:101]

  1. Ibid. p.41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290 [본문으로]
  4. 그는 correspondentia(상응, 대응)이나 covenientia(합치)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5.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41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p.41-42 [본문으로]
  8. Ibid. p.44 [본문으로]
  9. Ibid. p.514 [본문으로]
  10. Ibid. p.514 [본문으로]
  11. 후설이 수동적 의미를 지닌 재귀동사의 형태로 “구성된다.”(sich konstituieren)고 쓰는 것도 인식되는 대상이 지닌 상당한 권리와 우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같은 곳 p.514) [본문으로]
  12. 칸트에 따르면, 직관은 개별 표상(repraesentatio singularis)으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직관은 대상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곧바로(직접적으로), 이른반 “직각적”으로 관계 맺는다.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 해제, p36-37 참조) [본문으로]
  13. 독일어 Begriff는 동사 begreifen에서 나온 단어로, '붙잡다', '포함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등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스테판 쾨르너, 『수학철학』, 번역 최원배, (주) 나남, 2015, p.41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김상봉,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본문으로]
  17.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211 [본문으로]
  18. Ibid. p.307 [본문으로]
  19. 앨런 우드, 『칸트 입문1: 생애와 선험적 종합 인식』, 번역 김동욱, 김은정, 박준호, 신우승, 차하늘, 전기가오리, 2018, p.106-107 [본문으로]
  20. Ibid. [본문으로]
  21. Ibid. p.108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그린비, 2004, p.106 [본문으로]
  24. 칸트는 이것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25.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318 [본문으로]
  26. Ibid. p.319 [본문으로]
  27. Ibid. p.320 [본문으로]
  28. Ibid. p.326 [본문으로]
  29. Ibid [본문으로]
  30. Ibid. p.346 [본문으로]
  31. 장 폴 사르트르, 『자아의 초월성』, 번역 현대유럽사상연구회, 믿음사, 2017, p.18 [본문으로]
  32. Ibid. p.18-19 [본문으로]
  33. Ibid. p.19 [본문으로]
  34. Ibid. p.23 [본문으로]
  35. 우리는 6절과 7절에서 후설이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의 단적인 인식 불가능성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을 지향성 개념을 통해 확인하였다. 칸트의 경우 물자체로의 귀결은 그의 철학이 애초에 마주-세움(Gegen-stand)의 존재론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6. Ibid. p.24-25 [본문으로]
  37.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522 [본문으로]
  38. Ibid. [본문으로]
  39. Ibid. p.44 [본문으로]
  40. Ibid. [본문으로]
  41. Ibid. [본문으로]
  42. Ibid. p.217 [본문으로]
  43. Ibid. p.514 [본문으로]
  44. Ibid. p.515 [본문으로]
  45. Ibid. p.218 [본문으로]
  46. Ibid. p.45 [본문으로]
  47. Ibid. [본문으로]
  48. Ibid. p.45-46 [본문으로]
  49. Ibid. p.513 [본문으로]
  50. Ibid. p.515 [본문으로]
  51. 이종훈 교수는 정적 분석과 발생적 분석의 대립으로 파악해왔던 기존 후설의 연구가 시간의식에 대한 후설의 연구가 늦게 발굴되면서 일어난 오해라고 이해한다. 발생적 분석은 모든 개별적 의식 체험의 시간적 발생Genesis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으로 당연히 시간의식의 지향적 지평 구조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발생적 분석이 정적 분석보다 우월한 분석으로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설 현상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이종훈 교수의 주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종훈, (같은 책, p.47, p. 518) 참고 [본문으로]
  52. Ibid. p.49 [본문으로]
  53. Ibid. p.49-50 [본문으로]
  54. Ibid. [본문으로]
  55. Ibid. p.49 [본문으로]
  56. Ibid. p.56 [본문으로]
  57. 조광제.(2010). 하이데거의 ‘실존’을 벗어난 사르트르의 ‘현존’. 철학논집, 0(23): 141-173 [본문으로]
  58. op. cit. [본문으로]
  59. op. cit. [본문으로]
  60. op. cit. [본문으로]
  61. op. cit. [본문으로]
  62. op. cit. [본문으로]
  63.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141 재인용 [본문으로]
  64. Ibid. p.146 [본문으로]
  65. Ibid. [본문으로]
  66. Ibid. [본문으로]
  67. Ibid. [본문으로]
  68. Ibid. p.150 [본문으로]
  69. Ibid. p.151 [본문으로]
  70. Ibid. [본문으로]
  71. 리처드 케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번역 임헌규, 곽영아, 임찬순, 한울, 1992, p.45 [본문으로]
  72.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215 [본문으로]
  73. Ibid. [본문으로]
  74. Ibid. [본문으로]
  75. Ibid. p.22 [본문으로]
  76. Ibid. [본문으로]
  77.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15 [본문으로]
  78. Ibid. p.20 [본문으로]
  79. 하이데거는 이것을 현사실Faktum이라고 표현한다. [본문으로]
  80. Ibid. p.28 [본문으로]
  81. Ibid. p.67 [본문으로]
  82. Ibid. p.68 [본문으로]
  83. 조광제.(2010). 하이데거의 ‘실존’을 벗어난 사르트르의 ‘현존’. 철학논집, 0(23): 141-173 [본문으로]
  84.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291 [본문으로]
  85. Ibid. [본문으로]
  86. Ibid. p.576 [본문으로]
  87. Ibid. [본문으로]
  88. 조광제.(2010). 하이데거의 ‘실존’을 벗어난 사르트르의 ‘현존’. 철학논집, 0(23): 141-173 [본문으로]
  89.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577 [본문으로]
  90. Ibid. p.604 [본문으로]
  91. Ibid. p.603 [본문으로]
  92. Ibid. p.605 [본문으로]
  93. Ibid. [본문으로]
  94. Ibid. p.608 [본문으로]
  95. Ibid. p.609 [본문으로]
  96. 신상희, 하이데거와 신, 제 2장 『철학에의 기여』와 궁극적 신, 철학과 현실사, 2007, p.84-87 [본문으로]
  97.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610 [본문으로]
  98. Ibid. [본문으로]
  99. Ibid. p.611 [본문으로]
  100. Ibid. p.620 [본문으로]
  101. Ibid. p.62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