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henomenology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Soyo_Kim 2019. 11. 1. 13:37

2019-2 예술철학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

- 시(時)와 사유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 글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지 않고, 곧장 “예술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왜냐하면 후자의 질문이 합당하게 해명되고 나서야,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영미의 분석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철학자들, 즉 예술 정의 불가론을 주장하는 웨이츠(M. Weitz)나, 정반대로 예술이 정의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단토(A. Danto) 혹은 디키(G. Dicky) 등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들은 “예술은 정의(定議)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있어 양 극단에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 “예술철학의 주요 문제는 예술을 필요충분조건(If and if only)으로 정의하는 일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자명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 내에서 모든 물음의 목표는 그것의 본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윤리학은 “윤리와 같은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하고, 인식론은 “인식(앎)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렇다면 예술철학이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 그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자명성은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해명되지 않으면 자명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첫째, 철학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적법성을 가지고 있는가? 즉 철학의 고유한 질문 형식이 예술이라는 대상에 적용될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면 철학에서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단지 확립된 세계관(Weltanschauung)[각주:1]에서 바라본 예술의 의미에 불과할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해 예술을 비본질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 즉 예술을 그 고유한 존재로 묻지 않고 단지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행한 작업의 의미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객관성을 증명함으로써 그 학문들을 정초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물음 중 하나는 “선험종합판단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선험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각주:2]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판 철학은 사변 이성의 영역 아래에서 형이상학의 물음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해, 사변이성의 영역에 위치한 자연과학이 신앙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학문적 월권임을 암시한다. 고로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각주:3]이 도처에 존재한다면, 각 학문의 지배 영역의 적법성은 그 경험의 대상이 개별 학문의 영역에서 얼마나 고유하게 개현(開顯)될 수 있느냐[각주:4]에 달려 있다.

둘째, 설령 그러한 적법성이 확보되었다 할지라도, 위에 언급한 철학자들의 방식이 적절한 물음의 형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이들이 탐구하려는 예술의 본질은 어찌하여 필요충분조건의 형태로 제시되어야만 하는가? 필요충분조건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p → q) ∧ (q → p)]라는 것, p는 예술 개념의 외연(外延)이며, q는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갖는 내포(內包)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각주:5] “진리의 본질은 ‘내재함’(inesse)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내-재함(in-esse)의 근원 형식 (...) 일차적인 근원적 진리들은 ‘동일한 것들(identica)'[각주:6]이다.” 즉 그것은 ‘동일성’(identitas)으로부터 산출된 판단의 타당성에 근거한다.[각주:7] 경험으로부터 붙잡은 개념의 엄밀성은 이렇게 논리학의 타당성으로부터만 구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동일성 자체는 다시금 존재 이해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명제논리는 사물의 '어떻게 있음(wie-sein)'을 구성하지만, 사물의 “무엇(das Was)”에 앞설 수 없다.[각주:8][각주:9] 그러나 앞서 철학자들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묻고자 했던 것은 예술의 ‘무엇-임’, 즉 본질이지 않았던가?

이렇게 본다면 본질에 대한 물음을 기호 체계적 엄밀성을 통해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언어의 형식이 미해석된 연산 체계이고 언어의 내용이 해석에 의존한다”[각주:10]는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형식적 명료화와 해석 양자는 이미 기호들에 대한 선이해(Vorverständnis)를 요구한다.[각주:11] 고로 양자의 연관을 자의적으로 분리하여 고정시키고 어느 한쪽에 우위를 부여하는 행위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함으로써 마주-세움의 존재론을 세웠던 근대성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어의 죽음이자 존재의 황폐화”[각주:12]를 의미한다. 고로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시(詩)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은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아직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각주:13]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매우 기묘한 역설과 만나게 된다. 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읽어야(해석해야)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이해에 의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경험(이해)으로부터 붙잡은 개념의 타당성은 논리에 의존하지만, 논리는 또 다시 경험(이해)에 의존해야 한다. 이러한 순환이 설령 긍정적이라 할지라도[각주:14][각주:15], 본질에 대한 통찰이 일반적인 경험에 대한 통찰과 매우 다른 어떤 것임은 드러난다. 일부 철학자들이 논리적 명료화를 통해 얻으려는 설명은 어디에선가 끝나야 한다. 그러나 그 설명이 근거하고 있는 지평(Horizont)은 언어 사용 과정 전체를 기술(記述)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각주:16] 즉 이 통찰은 다른 모든 것을 가능하게 개시(開示)하지만 그 자신은 개시하지 않는 그런 것을 사유하도록 요구한다. 칸트는 이미 이러한 지평을 초월성(Transzendenz)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한 바 있다. “[선험적] 표상들은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그러면서도 이 표상들은 경험의 대상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초월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각주:17] 그러니 이제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러 의미론적으로 무(Nichts, 無)와 다름없는 것이 밝혀졌다 할지라도[각주:18],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로 이제 우리는 적법성이라는 최초의 물음을 다시 본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학이 그 고유한 물음을 견지해나감에 있어 개념에 의한 사유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철학 고유의 물음 형식인 “-임”이라는 정의(Definition)는 이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로부터 제시된 바 있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여러 차례 “~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질문이 이 질문에 속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열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들을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제시해야 한다고 논박한 바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수효를 헤아리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 앎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거든. (...) 그러므로 ‘앎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어떤 기술에 대한 이름으로 대답할 경우, 그런 대답은 우스꽝스런 것이네.”[각주:19] 그러나 플라톤 그 자신도 “[본질에 대한] 지식은 개념 안에서 완벽하게 개시될 수가 없기 때문에 결코 논증적으로 얻어질 수 없”[각주:20]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플라톤이 철학적 지혜를 온전히 로고스(λόγος)로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비유와 신화, 즉 미토스(μῦθος)로 전달하려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즉 그는 로고스에 담길 수 없는 의미의 잉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한다.[각주:21]

철학이 그 독자성을 획득하는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진 “미토스에서 로고스로”라는 표어는, 단순히 미토스로부터 로고스로 대립되는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토스와 로고스는 그 어원을 살펴 볼 때, 연속적 이행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신화를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지어낸 이야기’, ‘거짓된 이야기’라는 뜻의 우화와 대립되는 의미로 신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각주:22] 그리스어 미토스(μῦθος)는 ‘참된 말’로서의 ‘말’을 의미하며, 그것은 본래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말’, ‘있는 사실에 대한 말’이다.[각주:23] 미토스와 로고스는 거짓되고 참되다는 점에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토스는 “어떤 조건이나 연관성 없이 그 자체로”[각주:24] 참된 말이고, 로고스는 “어떤 연관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각주:25] 숙고한, ‘올바른’ 말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원시적인 미토스로부터 이성적인 로고스로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토스는 “존재를 부여하는 실재성의 계시”로, 로고스 이후에도 여전히 저 나름의 방식대로 지혜에 봉사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는 철학 내에서 완전히 극복되지 않고[각주:26], 내적긴장의 형태로 계속해서 불안한 공존을 지속한다.

물론 플라톤이 ‘시인 추방’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시(詩)를 존재론적으로 '덜 참된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시(詩)가 “본성상 (...) 일종의 마력을”[각주:27] 지니고 있으며, “우리 안에 생겨난 이런 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시가 최선의 것이며 가장 진실된 것임이 밝혀지는 데 대해 호의적일 것”[각주:28]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시(예술)에 대한 변론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즐거움을 위한 시와 모방이 훌륭히 다스려지는 나라에 자기가 있어야만 하는 어떤 논거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자신이 이런 시에 의해서 매혹되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두세. (...) 시가 서정시로 된 것이건 또는 다른 어떤 운율로 된 것이건 간에 변론을 제대로 하게 되었을 땐, 이렇게 귀환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는가?”[각주:29]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예술은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보다 정확히 말해 플라톤이 세운 체계 안에서 특정한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라톤의 의도는 예술을 무작정 폄하하고 몰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미토스를 로고스의 지배 아래에서 경계하며 수용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보다 노골적으로 “철학과 시(詩)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diaphora)가 있다”[각주:30]고 말한다. 이 불화는 진리의 소유권에 있어서 예술과 철학 사이의 대립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미토스와 로고스 사이의 외적긴장은 플라톤에 이르러서도 극복되지 않고[각주:31] 내적긴장의 형태로 변모하여 존재한다. 이 긴장이 바로 철학과 시(詩) 사이에 있는 오랜 불화의 원천이다.

“내가 그를 미워하고 있을 때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하고자 했을 때 그는 여전히 시를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 내가 그를 의식하고 있을 때, 나는 아직도 그보다 약자인 것이다. 시와 철학의 복잡 미묘한 애증관계에 민감한 것은 시인들이 아니라 철학자다. 시인들은 철학자를 경멸하지 않지만 철학자는 때로 시인들을 경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의 무의식이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그런 철학자들의 눈치를 본다. 시가 철학의 무의식이라면 철학은 비평의 초자아다. 비평가는 호메로스와 횔덜린과 랭보를 염두에 두지 않고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헤겔을 염두에 둔다. 연인이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느끼는 불안은 비평가들의 고질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시를 사랑하지만 철학을 등지지 못한다. (...) 그래서 하이데거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들이 시인과 다르지 않았음을 강조할 때, 횔덜린을 ‘시인 중의 시인’이라 찬미하면서 오로지 시만이 구원의 장소라고 말할 때, 비평가들은 기꺼이 감동하지만 하이데거를 진심으로 믿지는 못한다. 위대한 것은 횔덜린이 아니라 차라리 하이데거가 아닌가를 의심한다.”[각주:32]

어느 문학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이미 양자의 불화가 결정적으로 한 번 단절된 이후에 쓰인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과 시(詩)를 분명히 구별하고, 미토스가 로고스의 우위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지언정 그 긴장을 온전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철학의 기원을 놀라움에서 찾으며, 동일한 기원을 갖는 ‘미토스를 사랑하는 사람’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한다.[각주:33] 심지어 막스 베버가 ‘탈마법화Entzauberung된 세계관’이라 불렀던 계몽의 시기에도,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났던 낭만주의 혁명은 미토스를 다시 한 번 극적 위치로 끌어올려 사유하였다.[각주:34] 그러나 20세기를 자연과학의 양화(量化)와 논리주의(Logizismus)의 엄밀성이라는 두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로고스는 미토스를 객관적 과학 밖으로 추방해 버렸다. 아니, 로고스(철학)는 그 자신을 학문 밖으로 유폐시켜 버렸다. 철학적 지혜를 지탱하던 내적 긴장이 무너지면서, 사유는 시(詩)에 대한 적법성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사유는 본질을, 즉 참된 것을 사유하려 하며, 그렇기에 참되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예술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예술에 대한 하나의 규정에 이르렀다. 예술에 대한 사유의 적법성은 예술과 사유가 같은 선상에 있을 때만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의 공속성(共屬性)으로부터, 진리의 소유권에 대한 내적긴장으로부터 사유와 시(詩)는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시 지음을 사유함과 비교해본다면, 시 지음은 아주 다른 또 하나의 탁월한 방식으로 언어를 위해 헌신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을 깊이 숙고해 보는 우리의 대화는 반드시 사유함Denken과 시 지음Dichten의 관계를 논구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사유함과 시 지음 사이에는, (...) 어떤 숨겨진 친밀함이 편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또한 갈라진 틈이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가장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살고 있기wohnen auf getrenntesten Bergen> 때문이다."[각주:35]

고로 이제 우리는 예술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비록 그것이 언어의 한계에 달려가 부딪치는 것[각주:36]이라 할지라도 말이다.[각주:37] 이 규정은 한편으로는 낯설고, 다른 한편으로는 (낯설기에) 긴급하게 숙고(das besinnliche Denken)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이 오직 철학적 물음의 고유한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후자는 그러한 가능성, 즉 내적긴장을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가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사유의 종말과 허무주의(Nihilismus)가 초래한 극단의 위험[각주:38]이다. 존재를 뒤따라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우리는 우리를 앞서가는 논리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예술이 위험에 처한 사유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각주:39] 다만 우리는 “예술의 본질적인 존재를 순전히 미학만을 보아서는 더 이상 보존할 수 없다는 상황의 긴급성을 확인”[각주:40]했을 뿐이다. 시(詩)에 관한 사유가 사유를 떠나지 않듯, 사유에 관한 시(詩)는 시(詩)를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詩)가 붙잡고 있는 그것은 사유와 마찬가지로 그 존재 자체의 정당성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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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르틴 하이데거,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번역 김재철, 김진태. 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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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6. 마르틴 하이데거,『동일성과 차이』, 번역 신상희, 믿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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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2. 찰스 테일러,『헤겔』, 번역 정대성, 그린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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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승종. 1999.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1999-01 12:395-424.

15. 양대종. 2018. 〈철학에 깃들인 종교적·수동적 이성의 전통에 대한 소고〉,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76(), 487-512.

  1. 철학을 가치론의 관점에서 세계관의 건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형이상학은 가치의 위계를 세우는 작업으로, 인식론은 그러한 가치를 알기 위한 도정(道程)으로, 윤리학은 그러한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기술(技術)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20,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 230 [본문으로]
  3.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번역 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한동원, 문학동네, 2012 p.10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5. 양화사를 적용하면, , 즉 모든 x에 대하여, 예술 작품인 x는 Q(내포)인 x와 필요충분조건 관계에 있어야 한다. [본문으로]
  6. 마르틴 하이데거, 『논리학의 형이상학적 시원근거들』, 번역 김재철, 김진태. 길, 2017, p.69-70 [본문으로]
  7. Ibid. p.90-91 [본문으로]
  8.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5.552, Suhrkamp Verlag, 1969, p.87 [본문으로]
  9. 이러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경험Erfahrung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고] ‘보여지는 것’으로,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의 ‘존재 이해’로, 가다머는 ‘진리의 경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더 날카롭게 “우리가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경험’은 [일반적인] 바로 그 경험이 아니다.(aber das ist keine eben Erfahrung.)”라고 말한다.(같은 곳) [본문으로]
  10. 이승종. 1999.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1999-01 12:395-424. p. 408 [본문으로]
  11. op. cit. [본문으로]
  12. op. cit. [본문으로]
  13.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이학사, 2008, p.12 [본문으로]
  1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22-23 [본문으로]
  15. “존재자가 그 존재에 있어 규정될 수 있다. 이때 존재의 의미에 대한 명시적인 개념을 이미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 [명시적인 개념이 아닐지라도] ‘존재’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그 모든 존재론에서 ‘전제되었다.’” (같은 곳) [본문으로]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번역 이승종, 아카넷, 2016, p.36-37 [본문으로]
  17.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81,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 278 [본문으로]
  18.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를 세 가지 층위로, 즉 의미Sinn있는 명제, 뜻이 없는sinnlos 명제, 무의미한Unsinn 명제로 구분한다. 이 세 가지는 각각 경험적 명제, 논리적 명제, 윤리적[미학적] 명제에 대응한다. 그러나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주류 담론[분석철학]의 해석이 이 책의 요점[윤리적인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철저히 무시하게 된 원인은, 각각의 층위에 대한 관계성을 통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논리학과 윤리학은 초월적teanscendental이다.(TLP 6.13, 6.421) 이는 『논고』의 기획이 칸트적 의미의 초월성- 그 자신은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논리와 윤리-에 정향(定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원리”라는 자의적 해석을 도입함으로써 이 기획을 결정적인 망각에 빠뜨렸다. [본문으로]
  19.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46e-147c, 번역 정준영, 이제이북스, 2013, p.81-82 [본문으로]
  20. 양대종. 2018. 〈철학에 깃들인 종교적·수동적 이성의 전통에 대한 소고〉,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76(), 487-512. p.492 [본문으로]
  21. op. cit. [본문으로]
  22. 칼 알버트,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번역 이강서, 아카넷, 2010, p.20 [본문으로]
  23. Ibid. p.19-20 [본문으로]
  24. Ibid. p.20 [본문으로]
  25. Ibid. [본문으로]
  26. 칼 알버트, 『플라톤 철학과 헬라스 종교』, 번역 이강서, 아카넷, 2010, p.17 [본문으로]
  27. 플라톤,『국가』, 번역 박종현, 서광사, 1997, p.624 [본문으로]
  28. Ibid. p.639 [본문으로]
  29. Ibid. p.638 [본문으로]
  30. Ibid. p.637 [본문으로]
  31. 플라톤이 말하는 오랜 불화는 이를테면, 호메로스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비난을 의미한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인간의 치욕스러운 일을 신에게 적용시켰다고 비판한다. (칼 알버트, 같은 곳) [본문으로]
  32.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p. 296-297 [본문으로]
  33. 칼 알버트, Ibid. p.18 [본문으로]
  34. 찰스 테일러,『헤겔』, 번역 정대성, 그린비, 2014, p.77-79, 89-97 [본문으로]
  35. 마르틴 하이데거,『동일성과 차이』, <철학- 그것은 무엇인가?>, 번역 신상희, 믿음사, 2000, p. 100-101 [본문으로]</철학->
  3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5.6, Suhrkamp Verlag, 1969, p.89 [본문으로]
  37. 비트겐슈타인이 사유해야 하는 것의 ‘말할 수 없음’에 주목하고 있다면, 하이데거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사유해야 함’에 주목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38.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48-49 [본문으로]</기술에>
  39. Ibid. [본문으로]
  40. Ibid.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