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Phenomenology

철학으로 본 문학 기말고사

Soyo_Kim 2018. 12. 28. 15:51

2018-1 철학으로 본 문학 기말고사

Q) 철학과 문학 사이의 관계 속에서 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 시도했던 문체적인 노력을 서술하시오.

A)

철학은 오직 시 지음으로서만 쓰일 수 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 글의 목표는 철학과 문학 사이의 관계 속에서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가 그들의 사상(Gedanken)을 표현함에 있어 시도했던 문체적 노력을 그들의 언어철학과 연관 지어 드러냄에 있다. 따라서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철학자의 문체에 관련한 일련의 문제들이 어떤 지엽적이거나 부차적인 취향의 문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철학과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문체 사이에는 근본적인 연결고리가 있으며, 나아가 문체라는 형식과 철학이라는 내용 사이 이분법을 넘어서 철학의 형식으로부터 내용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위의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에 앞서 살펴보아야 하는 지점은 철학자들이 어찌하여 철학적 문체와 문학적 문체 사이에서 본인들의 사상을 표현하려 고민하고 있냐는 점이다. 그들이 철학자이고 그들의 사상이 철학이라면, 바로 그 이유에서 그들의 문체는 철학적으로 쓰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우리가 ‘철학적’이라는 말을 철학을 하는데 적합한 방식들로 정의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유를 표현함에 있어 ‘철학적인’ 문체와 ‘문학적인’ 문체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은 “철학적인 문체가 철학의 본질에 적합한 문체이다.”라고 아직은 말할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여겨온, 철학에 적합한 문체야말로 철학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사유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문체를 ‘철학적인’ 문체로 여기는가? 우리가 ‘문학적인’ 의미에서와 대립되는 의미로 ‘철학적’인 문체에 대해 정의 내린다면, 그것은 헤겔이나 칸트가 주지했다시피 엄밀한 학문으로서 체계를 갖출 수 있는 문체, 논리적이면서도 명료한 문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과학으로서 철학이라는 학문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 내용과 논리상에서 엄밀하면서도 동시에 문학적인 비유나 수사들은 그저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즉,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대립되는 의미에서 우리는 문학적인 문체의 의미를 감정이나 의지의 표현 내지는 비유나 수사 자체의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철학에 있어서 문학적인 문체란 이를테면 이해를 돕는 예시 정도의 한갓 제한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이상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모든 사고는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전제가 미리 깔려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를테면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사고, 언어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고가 존재한다면, 이제 문학적인 문체란 단순한 표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을 넘어서 논리적 사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즉, 철학적 문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 글은 철학적 문체와 문학적 문체 사이에서 고민하며 둘 사이의 갈등의 미묘함 속에서 사유했던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문체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철학자야 말로, 사유의 한계와 그 이후의 철학함의 가능성에 대해 모색했던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의 사유의 핵심을 “철저한 사유 끝에 예감해야할 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라는 명제로 드러내보고자 한다. 이러한 명제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전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논리적 사유는 언어에 귀속되며, 모든 종류의 철학적 사유를 표현하는데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정한 사유에 있어 논리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친다. 두 번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사유는 언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며, 존재의 신비로움을 지시하고 있는 사유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논리와 명료함을 넘어서 있는 철학적 사유는 오로지 예감으로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가 과연 옳은 것인지, 또 이러한 전제로부터 과연 이 두 명의 철학자가 택한 방법만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따져보는 일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목표는 두 철학자의 문체적 노력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 철학자의 사유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어떤 문체로 드러나고 있는지만 논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먼저,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문체의 고민은 그의 사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문제이며, 이는 그의 독특한 철학관에 기반하고 있다. 논리철학논고로부터 철학적 탐구로 이어지는 그의 모든 저작에서 문체의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두 가지 근본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로, 그가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에서 쓴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에 있어 철학의 역할은 사유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 둘째로, 같은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이 교과서가 아니며, 될 수 있으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철학, 특히 그의 전기 사상을 집대성한 “논리철학논고”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한 대중 강연인 “윤리학에 관한 강의”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보고자 한다.(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글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다루지 않는 까닭은 전기와 후기 사상의 “단절”때문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위의 두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 사상에 걸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임을 미리 밝힌다.)

논리 철학 논고의 목표는 사유의 한계를 긋는 작업이다. 이는 위에서 말했던 논리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사고와 논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사고를 구분하는 작업으로써,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철학이 시로서만 쓰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정직하면서도 철저한 사유를 통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유에 한계를 그어야 하는가? 그 까닭은 언어는 그 겉보기 형식과 실제의 논리적 형식이 다르며, 그러한 까닭에 사고의 본질을 위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에 있었던 철학적 질문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질문들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조건에 대해서는 기존 철학자들이 철저하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가한다. 문제란, 답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적에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답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일 경우에는 질문 역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따라서 기존의 철학적 물음들은 이러한 비판을 통과할 때에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모든 철학적 질문들은 이러한 비판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질문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많은 이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철학적 질문이 무의미하므로 배제되어야함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러한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해석은 그의 언어철학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의미를 말하는 동시에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문장은 스스로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말하며, 동시에 즉각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의 “철학적인” 문체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며 인식적으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모든 철학적 물음들은 “문학적인 문체” -특히 시 지음으로부터 그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논리적인 것은 모든 사태의 가능성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사물의 어떠함(wie)에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논리학은 모든 경험에 앞서있다.(선험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논리학은 사물의 무엇임(was), 사물의 존재함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앞서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 자체의 명제를 표현함에 있어 우리는 동어 반복적으로 말할 수밖에, 즉, 무의미하게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이다. 따라서 과학의 진보를 통해 인간의 인식능력이 개선된다 할지라도 전연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자연과학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삶의 문제들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느낀다. 문제는 답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답이 무의미함을 보임으로써 해소된다. 마치 물에 들어간 설탕이 스스로 풀어지는 것과 같이.”

이러한 이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모든 윤리적 명제와 종교적 명제는 단지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한계에 부딪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늘이 짙은 파란 색이거나 옅은 붉은색인 것에 대해 경탄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 내에서 더 짙거나 더 옅은 파란색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짙거나 더 옅은 붉은색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하늘의 파란색에 대해 경탄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즉, 우연적인 것에 대해 경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파랗건, 파랗지 않건 그 자체에 대해 경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나는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에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은 “왜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라는 존재와 관련된 물음을 던진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와 맞닿게 된다. 그리고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은 윤리에 관한 표현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 무의미한바와 같이, 모든 윤리적 명제도 무의미하다는 점에 있다. 이 점을 설명해보겠다.

아까 이야기했던 “나는 세계가 파란색이거나 파란색이지 않은 것에 대해 경탄한다.”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p v ~p에 대해, p이거나 ~p인 것에 대해 경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동어반복이고 동어반복은 무의미하므로 위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너는 ~에 대해 해야 한다.”는 윤리적 명제는 그 명제가 강제되어야 할 어떤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너는 ~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형식을 지닌다. 이 역시 p-> p 라는 형식을 지니므로 동어 반복적으로 무의미한 명제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세계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는 이러한 사실들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논리의 귀속을 받는 명제 속에는 어떤 초월적이고 필연적인 가치는 전연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에 대한 표현은 언제나 언어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초월적인 것, 신, 윤리적 명제, 존재에 대한 경탄, 신성과 같은 단어들은 모두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한 명제는 스스로를 드러내어 보여주며, 초월적인 것을 지시한다. 이제 이러한 이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저술했던 논리철학논고라는 책의 문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논리철학논고는 비트겐슈타인 그 자신이 말한바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영역과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한다고 말함으로써, 이제까지 그 자신이 써온 내용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그가 독자로 하여금 이전까지 읽어온 글들을 하나의 사다리로 여겨 버릴 것으로 요구한다. 독자가 책을 통해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다면 그 이전까지의 생각에 대해서는 완전히 버려도 좋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 문학적 문체의 철학함을 시도한다. 먼저 그는 금강석과 같은 단순하면서도 철저한 철학적 명제를 “말함으로써” 철저한 사유의 끝까지 나아가려한다. 이 점에서 앞서 말했던 철학적 문체의 철학함을 비트겐슈타인 역시 시도한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우리가 마땅히 말해야할 것에 대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말해온 모든 것들도 버려야하며 이후부터는 예감으로써만 철학함이 가능하다고 침묵함으로써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로써 그는 철학적 문체와 문학적 문체 사이의 단호한 접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침묵의 윤리학이며, 침묵이라는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행위를 통해 문학적 문체로 나아가야함을 선언함과 동시에, 철학함(윤리와 신, 존재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란 기존의 철학적인 문체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또한 그는 자신의 책의 명제를 말해진 것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만들기 위한 사다리로 여기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논리철학논고의 문체는 교과서처럼 설명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잠언과 수수께끼 같은 신비로운 명제들의 나열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도록, 또, 스스로 사유를 넘어서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쓰였다. 그가 논리철학논고를 내기 전에 전쟁터에서 자신의 사유를 정리하면서 저술했던 전쟁일기에는 논리철학논고에서 나타나는 선언적이면서 단절적인 명제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비교적 상세하게 쓰여 있다. 이런 연결고리를 책에 넣어 놓았더라면 분명히 그의 논의를 독자들이 훨씬 잘 따라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실제로 버드란트 러셀로부터 이러한 요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 것은, 진리가 명료하고 논리적인 문체를 통해 말해질 수 있다는 기존의 철학적 문체를 사용한 철학책들 모두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진리관은 근대 이후의 철학들이 품고 있던 진리관으로부터 고대의 진리관으로 복귀한다. 근대 이후 데카르트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이 이루어졌던 고대의 진리이론은 간단히 말해 근대 이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진리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는 “명제와 대상사이의 일치함”이 결코 아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진리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데카르트가 이러한 인식의 근거를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즉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res cogitans에서 찾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근거에 하나의 전제가 숨겨져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전제는 현대의 사유를 특정하며, 특히 오늘날 자연과학의 인식 개념을 결정적으로 특정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주체에겐 그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으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적 회의의 근저에는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너무나 명백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Cogito Ergo Sum을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Gnothi sauton(너 자신을 알라.)에 연관시키는 것에, 즉, 데카르트의 사유가 Gnothi sauton의 근대적 변형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러한 “이성의 정당한 자기 사용”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이르러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표현으로 정식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로 Gnothi sauton이 그것이 실제 사용되던 맥락에서 벗어나 이해되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의 인식 개념은 오늘날 망각되어버렸다. 왜냐하면 Gnothi sauton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단독적으로 고려되는 개념이 아니며, 이 개념이 나오는 《알키비아데스》의 텍스트를 면밀히 살펴볼 경우 Epimeleia Heautou(자기 자신을 배려함, 자기 자신을 돌봄, 자기

자신에 몰두함)의 개념과 결부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념과는 달리, 《알키비아데스》의 어떤 맥락에서 Gnothi sauton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01년 《문헌학》에서 제시한 로셔의 해석에 따르면, Gnothi sauton은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의 신전에 쓰여 있던 글귀에서 가져온 것이며, 이러한 글귀는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처럼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Gnothi sauton에서 말하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의 이성을 알라는 의미가 아닐뿐더러, 무언가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체에게 내재되어있는 것을 의미함은 더더욱 아님을 알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Gnothi sauton은 결국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있어 그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질문을 던지라는 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탁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결국 무녀를 통해 신의 말을 듣는 것이며, 신탁에 의뢰함에 있어 신탁을 들으러 온 자가 가져온 질문은 경건함을 따라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숙고된 것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Gnothi sauton은 신에게 질문함에 있어 스스로 먼저 질문을 검토해볼 것이며, 과다하게 질문하지 않도록 수를 줄여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인식의 능력이 주체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준비를 통해 주체를 변화시킴으로서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주체는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고, 이렇게 얻은 진실을 통해 다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Gnothi sauton이 결국 Epimeleia Heautou의 종속된 형태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사례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구절을 통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라고 충고하는데, 첫 번째 구절인 29d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구절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의 삶이 이러한 상황(재판을 받는 상황)에 처해진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이와 다른 삶을 살라고 한다면 거절하겠다는 말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변론에서 말하는 자랑스러운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을 따르기보다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삶이며, 그 삶이란 아테네 시민들에게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타이르고 가르침”이란 명예를 얻는 법이나, 재산을 늘리는 법, 장인의 기술(Techne)을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그들 자신의 명예나 지위, 재물 등을 얻기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어째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배려를 하지 않는가에 대해 타이르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 건강, 지위 등을 돌보려고 노력하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을 쓰지 않는다. “이성이라든가 진리라든가 또한 자신의 영혼을 부단히 훌륭하게 만드는 일에는 배려를 하지 않고 마음도 쓰고 있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는가?” 이것은 결국 주체가 스스로를 돌보고,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며 “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게 한다.

“나는 늙은이건 젊은이건 딴 나라 사람이건 내 나라 사람이건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할(자기 스스로를 배려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을) 것이고, (......)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신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인데, 이 점을 유념하길 바라고 또한 여러분을 위해서는 신에 대한 이 봉사보다 더 큰 선한 일은 아직 이 나라에 한 번도 없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⁵

이로부터 드러나는 결정적인 점은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의 인식 개념은 결코, 주체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인식을 위해서 주체는 말하는 자가 아닌, 귀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귀 기울임은 말하자면, 인식에 있어서 예비적인 것, 즉,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며 몰두하는 일련의 실천적 행위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주체는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한다. 이로써 주체의 인식은 주체 내부의 윤리적인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많은 저술들 – 논리철학논고, 전쟁일기, 윤리학에 관한 강의 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그저 언어 비판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들은 무의미하며 엄밀한 학은 자연과학에 돌려야 한다는 선언으로, 논리실증주의의 태동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자기 인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필연성의 영역)과 통제할 수 없는 영역(우연성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예감의 영역으로, 즉, 윤리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이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의 자기인식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변화와, 윤리적 영역과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철학과 접점을 가지고 있는 또 한명의 철학자가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 역시 존재에 관한 물음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여, 소위 논리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철학자들은 실상 그들 스스로가 설정한 한계에 갇혀서 사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며, 진정으로 사유할만한 것은 존재 그 자체를 예감함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을 위해 하이데거가 시도하고 있는 문체적 노력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하이데거는 “무가 무화한다.”, “언어가 말한다.” 등의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사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까닭에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생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하이데거에 관한 단평에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a priori하게 무의미한 것이지만, 하이데거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동감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이데거 역시 비트겐슈타인처럼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은 존재의 논리에 선행하고 있는 것임을, “왜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인가”라는 물음은 철학의 시원에서부터 철학을 이끈 원동력-파토스이자, 우리 스스로의 본질을 찾기 위해 진정으로 사유해볼만한 것임을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비록 미셸 푸코처럼 자기배려의 연구를 명시화하지는 않았으나, 고대 철학에 대한 해석학을 통해, 근대 이후 철학의 진리관에 끊임없이 반발하고 도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도 진리란 주체와 무관한 것, 혹은 주체가 그저 자기인식을 통해 능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진리란 알레테이아-탈은폐로서의 사건으로, 실존적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내맡김으로서 자신의 본질- 존재로부터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내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 기울여라

(Habit ihr nicht mich, Sondern den Sinn vernommen,)

그러므로 (......) 지혜로울지니

(So ist es weise, (......))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 잠언에서 하나의 해방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über) 말하고 있는 ‘내’가 아닌 로고스로부터 진리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진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으로서의 진리가 아닌, 진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것과 어떻게 관계 맺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진리를 수용하는 자의 위치이며, 그로부터 철학은 (윤리적 주체에게 있어) 하나의 해방이 될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주체의 실존은 그의 본질을 환히 밝혀내기 위한, 진리의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실존으로부터 자기인식으로 복귀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내어맡김, 자기배려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하이데거는 소리 없는 부름(Sage)으로부터 이 부름에 조용히 응답하며, 다가오는(zu kommen) 자들을 위해 사유한다. 이들이 존재의 고향에서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파수할 때만, 비로소 본래적 신의 신성이 세계 내에 말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적 신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감함이 바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철학이다. 이로써 그는 의지를 버리고 떠나있음(Abgeschiedenheit)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이제 그것의 구체적 방법론으로써 하이데거는 시에 주목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시란, 언어가 존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탁월한 방식이며, 그렇기에 기존의 철학적 문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수단으로서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까닭에 횔덜린 시에 대해 해명하기도 하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거의 시에 가까운 설교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한다. 존재가 신성과 맺는 탁월한 방식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포이에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흔히 사람들이 원인에 관한 학설로 오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원인(causa)을 작용을 미치는 것으로, 어떤 결과로 떨어지다(cadere)로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아이티온(aition)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원인이란 “무엇에 작용을 미치는 그것”이 아니라 “책임짐의 공속적 방식들”이다. 형상인(eidos)과 질료인(hyle), 목적인(telos)은 모두 사물을 완결시킴과 동시에 존재할 바의 그것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도록 책임진다. 이를테면, 은잔을 만드는 데에 있어, 은잔의 보임새(모양), 질료(재료), 목적(제사) 등은 은잔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만든다. 이것을 은장이는, 숙고를 통해 하나로 모은다. 숙고란 그리스어로 레게인(legein), 로고스(logos)이다. 따라서 이 네 가지 아이티온(aition)을 통해 은폐되어있던 것은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이게 되는 것이다.(poiesis) 그리스인들은 은폐되어 있던 존재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 탈은폐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로마인들이 베리타스(veritas)라고, 현대에는 통상 진리(Wahrheit)라 부르는 그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예술과 시(詩)에 주목한다. 예술의 포이에시스는 고대로부터 신들의 현존을 이끌어내고 인관과 신 사이의 상호 대화를 빛나게 해주는 최고의 탈은폐였다. 따라서 하이데거에 의하면 결국 시적인 것이 참된 것, 가장 순수하게 밖으로 비추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끌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