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20th Century Continental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

Soyo_Kim 2019. 10. 5. 17:34

<사회철학 발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장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과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설

4절 논리주의(Logizismus)와 심리학주의(Physchologismus)의 대립

앞서 설명했듯이 데카르트가 결행한 cogito의 확립은 근대의 존재론을 확실성을 기반으로 한 마주-세움(Gegen-stand)의 존재론으로 이끌었다. 이 확실성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clara et distincta, 즉 명석하고 판명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명석한 지각이란 “집중하고 있는 정신에 현존하며 드러난 지각”을 의미하며, 판명한 지각이란 "명석하기 때문에 모든 다른 지각과 잘 구별되어 단지 명석한 것만을 담고 있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 최초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명석 판명한 지각(clara quaedam distincta perceptio) 이외에 다름 아니다. (...) 그러므로 내가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 규칙(regula generali)으로 설정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각주:1]

이로부터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을 어떻게(wie) 얻을 수 있냐는 물음이 나타난다. 이에 대한 근대 철학자들의 대답은 거칠게 말해 판단의 형식에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실로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생각하는 사물은 온전히 실체로서만 규정되어 있는, 즉 실체 이외에 전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unbestimmt)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러한 실체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 내지 속성으로써 지성intellectus 내지 이성ratio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2] 즉 생각하는 것은 의심할 수 있고 의심하고 있는, 감각을 불신하는 실체이다.[각주:3]

라틴어로 ratio인 이성은 고대 그리스어 logos에서 나왔으며 독일어로는 Vernunft로 번역된다. 로고스Logos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다의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의미를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로고스는 이성Vernunft, 판단Urteil, 개념Begriff, 정의Definition, 근거Grund, 관계Verhältnis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며, 기본적으로 Rede, 즉 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각주:4] 그러나 그것의 원래 의미에 충실하자면 로고스는 “말에서 그것에 관하여 ‘말’이 되고 있는 그것을 드러나게 함을 뜻한다.”[각주: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아포파이네스타이(ἀποϕαίνεσϑαι)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 자체에서부터 ‘보이도록 해줌’”[각주:6]을 의미한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가 영원한 생성의 법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던 로고스Logos는 이후 인간의 지성의 근거인 동시에, 인간의 지성nous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원천으로 이해된다.[각주:7] 그렇기에 인간은 zoon logon exon, 로고스를 지닌 존재이며, 로고스는 신적 이성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 자연의 빛lumen naturale로 규정된다.[각주:8][각주:9]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이러한 이성의 능력으로부터 두 가지 판단 형식과 진리를 구분해낸다. 하나는 분석 판단이자, 이성의 진리verites de raison이며, 다른 하나는 종합 판단이자 사실의 진리verites de fait이다. 이는 그가 1714년에 쓴 단자론(Monadology)에 잘 나타나 있다.

두 가지 종류의 진리, 즉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가 있다. 이성의 진리는 필연적이고 그 반대가 불가능하다. 사실의 진리는 우연적이고 그 반대가 가능하다. 진리가 필연적일 경우, 분석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분석이란 기본적인 것에 다다를 때까지 단순한 관념과 진리들로 분해하는 것이다.[각주:10]

이성의 진리란 분석판단, 즉 그 판단의 부정이 필연적으로 모순을 함유하고 있는 판단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총각은 미혼의 남성이다.”라는 명제는 그 부정인 “총각은 미혼의 남성이 아니다.”가 언제나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명제이다. 이는 총각이라는 개념이 미혼의 남성이라는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고로 총각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관념과 진리들로 분석될 수 있으며, 그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얻어낸 판단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반면에 사실의 진리란 종합 판단을 일컬으며,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우연적인 판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판단들은 감각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에, 경험적인 명제이며, 판단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참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라는 명제는 날마다 그것의 관찰을 통해 믿음으로 확립될 수는 있어도, 필연적으로 참임을 보장할 수는 없다.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상황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러한 상황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판단은 우연적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러한 이성의 진리, 즉 분석판단이 필연적인 명제라는 점은 모순율(A ∧ ~A)에 근거한다. 그는 모순율을 동일률(A=A)과 배중율(A V ~A)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라이프니츠는 항진 명제뿐만 아니라 수학의 공리 공준, 정의와 정리는 모두 이성의 진리로써 동일성 명제(Identical Proposition)이며, 그 반대는 모순율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명제들 역시 유한번의 분석 절차를 통해 이성의 진리임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논리주의(Logizismus)라는 이름으로 계승된다. 이들은 라이프니츠를 따라 “논리학이 순수한 이론적 학문이기 때문에 심리학이나 형이상학과 독립된 분과라고 주장”[각주:11]하였다.

반면에 논리학의 본성에 대해서 정반대의 주장을 했던 학파도 있다. 이들은 그 연원을 따져보았을 때, 흄(David Hume)의 경험주의 인식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앞서 말한 사실의 진리, 즉 종합 판단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무한한 분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을 도입함으로써 종합 판단이 실은 분석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를 포함한) 기존의 형이상학이 시도한 신 존재 증명은 칸트Kant가 초월적 변증론die transzendentale Dialektik에서 보인 바와 같이, 이성의 궤변적인 추리에 근거한 부당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가 설령 칸트의 비판을 도외시한다 할지라도, “사실판단이 실은 분석판단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신과 같은 어마어마한 존재자를 설정해야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라이프니츠의 체계가 정합적이라는 사실이 그것의 참임을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을 끌어들여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의 최선의 세계임을 “증명”하지만,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체계는 1755년 리스본에 찾아온 대지진과 함께 휩쓸려 사라진다.

흄은 이러한 체계가 그저 “있을 법”할 뿐, 경험을 그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단론에 불과한 것이라 비판한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여왕은 그 핏줄이 경험이라는 천민에서 근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 신을 증명했다고 말하는 형이상학 저작들은 모두 불에 태우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관념들은 공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탁월한 직능들만이 할 수 있는 순수하고 지성적인 조망(pure and intellectual view)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많은 불합리를 감출 수 있고 또 모호하고 불확실한 관념에 호소함으로써 명석한 관념의 판결에 복종하기를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책을 쳐부수기 위해 우리는 여러 차례 거듭 강조되었던 관념은 모두 인상을 묘사한 것이다라는 원리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만 하면 된다.”[각주:12]

칸트(Kant)는 『서설』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흄의 경험론 철학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나고자 한다.[각주:13] 흄은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것으로 환원시킨다. 그것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이다.[각주:14] 그런데 흄에 따르면 인상은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각주:15]이요, 관념은 그 기원을 따져보았을 때, “내가 느낀 인상의 정확한 재현(representation)”[각주:16]에 불과한 것이다. 고로 모든 종류의 관념은 경험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또한 그는 “형이상학의 유일하지만 중요한 하나의 개념”[각주:17]인 인과성 개념 역시, 그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필연성이 습관으로부터 유래한 “상상력의 사생아”[각주:18]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로 흄은 모든 판단을 우연적인 사실 판단으로 환원시키며, 명석 판명한 학문의 기초를 세우려는 합리론의 시도는 회의론의 공박을 이겨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심리학주의(Physchologismus)는 흄의 이러한 생각을 물려받아, 논리학이 판단과 추리의 규범을 다루는 실천적 학문으로 심리학에 의존하는 분과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논리법칙이란 심리적 사실에 근거한 심리법칙이기 때문에 논리학은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이를테면 모순율이란 서로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립되는 마음의 신념을 가리킨다. 따라서 심리학이라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발견함으로써 논리 법칙 역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심리학주의의 견해이다.

5절 심리학주의에 대한 후설의 비판과 현상학Phänomenologie의 목표

수학자로 출발하였던 후설은 이러한 대립에 대한 응답으로 논리주의와 심리학주의 양측을 모두 비판한다. 이에 따르면 논리학이 이론적 학문이라 주장하는 논리주의와 규범적 학문이라 주장하는 심리학주의의 대립은 사실 외관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이론적 학문은 존재의 사실을 다루며, 규범적 학문은 존재의 당위를 다룬다.[각주:19]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명제를 같은 의미에 대한 상이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모든 군인은 용감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는 ‘용감한 군인만이 훌륭한 군인이다.’라는 사실 명제로 바뀔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각주:20] 고로 논리학이란 “본질적으로 이론적 학문에 속하고 부차적으로만 규범적 성격을 띤다고 정리할 수 있다.”[각주:21]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법칙들이 “올바른 판단과 추리에 관한 기술”[각주:22]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 학문이며, 이러한 규범성의 근거는 인간의 심리적 활동에, 즉 심리학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 Prolegomena zur reinen Logik)는 이러한 심리학주의의 견해를 비판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심리학주의에 대한 후설의 대표적인 비판은 이들의 주장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객관성이 심리학적 사실이라는 우연적 사실로부터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객관성이란, 사실이 변하면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우연적인 것이므로, 심리학주의의 주장 역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회의주의의 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후설의 비판이다.

더불어 심리학주의는 명증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심리적 사실이므로 논리학의 명증성 역시 심리학으로부터 유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설은 이에 대해서도 논리적, 수학적 명제들은 명증성이라는 상태의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명증성의 이념적 조건을 다룬다고 반박한다. 모순율이 설령 우리에게 특정한 심적 상태를 갖게 한다 할지라도, 모순율 자체는 A와 ~A가 이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를테면 순수논리법칙은 그 명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의 존재여부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명제의 타당성을 판단하고 있다. 둥근 사각형에 대한 명제는 당연히 둥근 사각형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 둥근 사각형은 그것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형식상 오직 거짓인 진리치를 갖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율은 그 명제의 타당성에 대해 판별할 뿐, 판단의 내용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

고로 논리학의 본성을 심리적 사실(모순된 두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신념)로부터 도출해내려는 심리학주의는 (말 그대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규범성을 지닌 심리학의 사실들은 실재적인 것(Reales), 다시 말해 명제의 내용과 관련을 지닌 반면에, 논리학의 타당성은 그 형식, 즉 이념적인 것(Ideales)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심리학의 사실들로 논리학의 규범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겠다는 심리학주의의 기획은 탑의 주춧돌을 빼서 위에 쌓겠다는 발상과 다를 바가 없다. 명제의 내용이 실로 형식과 관련하는 이념적인 것에 앞선다면, 이 앞선 내용의 형식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무한소급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작용과 이 작용을 통해 통일적으로 구성된 이념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내용의 혼동”[각주:23]이 심리학주의가 이러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다.

“지각의 영역에서 ‘보지 못한 것(Nichtsehen)'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듯이, 명증성이 없다고 비-진리는 아니다. (...)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명증성을 얻을 수 없다.” (논리 연구 제 1권, 190~191쪽)[각주:24]

“심리학주의 비판의 핵심은 곧 이념적인 것(Ideales)과 실재적인 것(Reales) 그리고 이념적인 것이 실천적 계기를 통해 변형된 규범적인 것(Normales)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론적으로 혼동한 기초이동(metabasis)에 대한 지적이다. 후설은 이것들의 올바른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경험이 ‘발생하는 사실’(quid facti)이 아니라 경험이 ‘객관적으로 타당하기 위한 권리’(quid juris), 즉 ‘어떻게 경험적인 것이 이념적인 것에 내재하며 인식될 수 있는지’를 해명한다.”[각주:25]

 

결국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분한 이래로, 어느 한쪽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대립이 이름만 바꿔서 2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후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구분 자체가 문제시되는데, 이는 ‘이 둘 사이의 관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가 전혀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후설이 ‘논리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도출된다. 오히려 후설은 헤르바르트, 볼차노, 마이농 등의 객관적 논리학주의도 철저하게 비판하며 주관과 객관의 구분 자체를 문제시한다. 즉 후설에게 있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은 사실상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증과학은 실재의 객관적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학문의 위기를 초래했다. 의식인 주관은 단순히 객관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어서 실재를 향해 움직이는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지니고 있다. 고로 후설은 모든 학문의 ‘객관적’ 진리가 인간 의식의 활동으로부터 다시 정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설은 이러한 방식을 현상학적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어떻게 세계가 처음으로 인간 의식에 나타나는가?”를 탐구함으로써 지식의 근원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의 구호는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말로 대표된다. 이는 우리가 객관적인 판단을 도출하기 이전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대로를 탐구함으로써 “객관이 되기 이전의 세계는 우리가 이미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경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의 목표는 주관-객관의 분리 이전에 근원적 관계를 정초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객관적 세계의 근본적 의미와 인간의식은 본래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 이후에야 반성적인 논리를 통해 분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현대 과학의 실증주의적 입장은 세계를 고립된 객체로, 의식을 육체를 벗어난 주관으로 환원시킨다. 고로 세계와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실체 사이의 관계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간 주체성은 생활세계에서 행하는 창조적 활동성과 작용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의미 창출 작용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대신에 사물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후설은 이러한 학문적 경향이 현대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고(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현상학을 통해 우리의 원래 체험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고자 한다. 세계는 항상 의식에 대한 세계로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마찬가지로 의식은 그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현상학은 의미가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상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이 둘 사이의 지향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근본적인 전제로 한다. 우리는, 분리된 세계 또는 세계와 분리된 우리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 내에(in-der-Welt) 있다. 이는 흄을 필두로 하는 경험론자들의 주장처럼, 대상이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표상이나 관념(쇠퇴한 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의 지향성은 의식이 객관에 대한 지각이나 모사를 갖고 있는 상자인 것이 아니라, 이미 대상 자체를 향해 나아가 있음을 뜻한다.

6절 프란츠 브렌타노와 지향성Intentionalität 개념

현상학의 핵심 개념인 지향성Intentionalität은 후설의 스승이었던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로부터 유래한다. 브렌타노는 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는데, 교회와의 갈등 이후 교회를 떠나 결혼하게 되며, 빈 대학Universität Wien의 교수직도 내놓게 된다.[각주:26] 브렌타노의 대표적인 관심사는 신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이었다.[각주:27] “신이 있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은 일종의 표상에 불과한 것인가?, 세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세계 바깥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브렌타노는 ‘있다es gibt’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지향적 대상intentionale Objekte을 제시한다.[각주:28] 브렌타노는 이 개념을 중세 스콜라 철학자로부터 가져온다.

모든 심적 현상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이 어떤 대상의 지향적 (혹은 심적) 내존(die intentionale (auch wohl mentale) Inexistenz)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전적으로 애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떤 내용에로의 지칭(die Beziehung auf einen Inhalt), (어떤 외부 사물(eine Realität)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선 안 되는) 어떤 대상을 향한 정향(die Richtung auf ein Objekt), 혹은 내재적 객체성(die immanente Gegenständlichkeit)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모든 정신적 현상은, 비록 그들이 동일한 방식 속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 안에 어떤 것을 대상(Objekt)으로 포함한다. 현시(Vorstellung)에서는 그 무엇이 현시되고[표상되고], 판단(Urteile)에서는 어떤 것이 긍정되거나 부정된다. 또한 사랑(Liebe)에서는 그 무엇이 사랑되고, 증오(Hasse)에서는 그 어떤 것이 증오되며, 욕구에서는 그 무엇이 욕구된다.

이러한 지향적 내존은 오로지 심적 현상(psychischen Phänomenen)에만 특징적이다. 어떠한 물리적 현상(physiches Phänomen)도 그와 같은 것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적 현상은 그 자체 안에 어떤 대상을 지향적으로 포함하는 그런 현상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심적 현상을 정의한다.[각주:29]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해석뿐만 아니라 로데릭 치좀(Roderick Chisholm 1916-1999)의 분석적 해석을 통해 분석 철학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각주:30] 먼저 브렌타노는 심적 현상이 물리적 현상과 다르며, 그 기준은 지향적 (혹은 심적) 내존(die intentionale (auch wohl mentale) Inexistenz)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심적 현상은 표상, 판단, 감정으로 나누어지며, 그러한 현상이 존재할 때, 언제나 지향적 내존을 갖는다. 주관인 의식은 지향적 내존을 내적 지각을 통해 파악한다.

치좀은 이 지향성 개념을 분석 철학의 주요 문제에 적용한다. 오늘날 분석철학의 주요 문제 중 하나인 심신 문제에 대해 지향성 개념은 하나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에 있어 이 문제를 잠시 치우고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치좀의 분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정적 대상들을 생각하고 표상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해 "그러한 유형의 지칭과 표상은 우리 정신이 그 안의 지향적 내존에 정향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답할 수"[각주:31]있다.

후설 역시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수용한다. 특히 후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브렌타노의 “경험적 심리학” 개념이다.[각주:32] 브렌타노는 데카르트가 실체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정신이 ‘실제로 행하고 기능하는 여러 방식과 양태’를 기술하고 분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렌타노의 경험이란, 자연과학에서의 실험과 관찰이라는 의미보다는 직접적인 삶의 세계에서 심리주체가 갖는 체험(lived experience)을 의미한다.[각주:33] 이러한 경험적 심리학은 “기술적 심리학”과 “설명적 심리학”으로 나누어지는데, 기술적 심리학은 이러한 체험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분류하며, 설명적 심리학은 그것의 인과적 기제를 탐구한다. 중요한 점은 기술적 심리학은 설명적 심리학의 토대가 되지만, 설명적 심리학은 기술적 심리학의 토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각주:34] 오히려 설명적 심리학, 즉 생리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요소들은 기술적 심리학에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기술적 심리학은 이러한 요소에 물들기 전에 순수한 현상을 포착하는데 그 중점을 둔다.

후설이 주목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기술적 심리학이 인식론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론과 설명을 도외시하고 지향 작용, 그 작용에 결부된 지향적 내존, 그리고 그러한 작용과 대상에 대한 내적 의식을 순수하게 포착하고 기술함으로써 새로운,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탐구방법-현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후설은 깨달았다. 마주-세워진 것(Gegen-stand)으로서의 대상의 현존Existenz, 눈앞에 있음Anwesenheit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그 본질Wesenheit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대상과 의식이 지향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내-존(In-existenz)을 직관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을 포착할 수도 있다. 브렌타노는 이렇게 표상이란 순수하게 내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것’의 표상이라고 주장한다. 표상이란 내게 주어지고 내게 나타나는 어떤 존재자의 의식이며 이러한 의미에서만 신 역시 주어져 있다es gibt.[각주:35]

7절 후설의 의미론과 지향성의 3가지 구조

후설은 지향성이야말로 생활세계Lebenswelt의 복원에 있어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명제는 우연적인 종합명제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우리가 이에 대한 과학적 탐구 방식을 신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수식과 도구를 통해 관찰한 태양이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태양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제시했던 명증성에 대한 이러한 강박이 ‘가상과 현실의 도식’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말하게 된다.[각주:36]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은 풍자적인 어조로 ‘화창한 8월의 하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대서양 상공 위로 저기압이 걸쳐 있었다. 저기압은 러시아 상공의 고기압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아직 이 고기압을 북쪽으로 밀어낼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등서선과 등온선이 서로를 지탱했다.” 무질의 조롱처럼 ‘화창한 8월의 하루’를 등온선과 저기압으로 우리가 체험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생활세계의 한 현상Phänomen이다.[각주:37]

후설은 “엄밀한 자기 분석을 통해 그러한 의식 현상의 내적 질서를 관찰한다.”[각주:38] 그 과정은 의식의 무엇임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존재하고 현출하는지를 서술하는 것이다.[각주:39] 이로써 현상Anwesenheit과 그 배후에 있는 본질Wesenheit 사이의 이원론은 사라진다. 본질은 현상을 파헤침으로써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에, 현상으로써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 역시 의식의 조작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의식은 지각에 있어 의식이 놓치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상은 의식에 들어서는 모든 것이기에 보이지 않음Nichtsehen 역시 의식의 한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40]

본질은 현상 ‘배후’에 숨겨진 무엇이 아니다. 내가 본질을 사유하는 한, 혹은 본질이 나를 따돌린다고 내가 사유하는 한, 본질 자체도 현상이다. 칸트의 ‘물 자체’, 즉 단적으로 현출하지 않는 무엇을 가리키는 이 비개념Unbegriff 또한 결국은 하나의 현상인 바, 그것은 사유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각주:41]

후설의 의도는 결국 의식이 우리의 내부에 있는 그릇 같은 것이어서 세계가 그 속에 담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의식은 비어있는 그릇처럼 세계가 담기기 이전에 비어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식은 우리의 내부에 있지 않고 언제나 어떤 무엇의 의식으로 의식대상이 되는 외부의 무엇 곁에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세계-내In-der-Welt에 있음을 말한다.

후설은 이제 의식의 지향성을 전제해야 가능한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의미의 구조를 밝혀낸다.[각주:42] 모든 기호는 언제나 ‘무엇에 대한’ 기호Zeichen이지만, 모든 기호가 그 기호를 통해 표현Ausdruck된 뜻Sinn인 의미Bedeutung를 갖지는 않는다.[각주:43] 다시 말해 기호는 그것이 표시하는 기능(협약이나 연상 등)을 넘어서 의미하는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의미를 결여한다.)[각주:44]

많은 경우 기호Zeichen가 그것에 대해 기호라 부르는 것을 ‘표시한다(bezeichnen)'고 말할 수조차 없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허용되는 경우에도 표시하는 작용이 그 표현을 특징짓는, 그 ’의미하는 작용‘으로서 항상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관찰해야 한다. 즉 기호는 표시(Anzeichen)-표지, 부호 등- 의 의미에서, 그것이 지시하는(Anzeigen) 기능 이외에 어떠한 의미의 기능도 충족시키지 않는 한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각주:45][각주:46]

후설은 이렇게 유의미한 기호인 표현을 단지 지시하는 기호와 구분한다. “의미하는 작용은 지시하는 의미에서 일종의 기호로 있는 것Zeichensein이 아니다."[각주:47] 표현Ausdruck은 다시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하나는 감각적 기호, 종이의 문자와 같은 물리적 측면의 표현이요, 다른 하나는 표현에 연상적으로 연결되는, 그를 통해 표현을 무엇에 관한 표현으로 만드는 심리적 체험이 그것이다. 이 심리적 체험이 바로 뜻Sinn, 또는 의미Bedeutung이다.

표현Ausdruck의 1차적인 기능은 말하는 사람이 통지하고, 듣는 사람이 통지받는 통지 기능이다. 그런데 통지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의미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의미가 없는 표현은 불가능할뿐더러 그 대상이 비록 가상일지라도(이를테면 둥근 사각형)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로 통지기능은 보다 본질적인 표현의 기능의 보조수단일 뿐인데, 이렇게 통지하고 통지 받는 것의 일치를 통해 표현에 의미를 부여하고 대상성을 직관Anschauung하는 것을 의미 기능이라 한다.[각주:48]

의미 기능은 “의미를 부여해 표현된 대상성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의미 지향’과 이 의미 지향을 확인, 보증, 예증해 대상성과의 관계를 성립시키고 충족시키는 '의미 충족'의 두 계기가 있다.”[각주:49] 이 때 표현이 실제 대상에 직접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작용으로 표현되고, 논리적 대상들과 우선 관계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이 동반된 직관을 통해 현재화되어 나타날 때 이를 대상성을 지시하는 명명 기능이라 일컫는다.[각주:50]

이제 위의 의미론을 통해 후설이 제시한 언어철학의 대강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와 같은 명제는 의미지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반면, “둥근 사각형”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의미 충족이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불가능하지만 의미 지향이 표현을 이해시키기 때문에 무의미하지는 않다. “황금산”은 의미충족이 이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오직 상상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대상성이 결여되어 있고, “내 앞에 있는 흰 벽”은 상응하는 직관에 따라 유의미하게 의미 충족 가능한 표현이다.[각주:51] 이렇게 후설의 의미론은 직접 지시론이 지닌 난점을 피해가면서 가상적 존재자를 불필요하게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발전된 언어 철학의 하나이다.

후설은 이제 지향성의 양식을 3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지각이 있다. 지각은 그 대상을 하나의 직접적인 실재로서 지향한다. 대상을 지향하고 목표하는 의식의 활동은 그 대상을 현존(presence)으로서 자신에게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내가 지각에 있어 어떤 나무를 지향한다면 이 개별적인 나무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의식에 주어진다. 반면 지향성에는 상상 작용도 있는데, 이는 나의 의식에 유사한 현존(quasi-presence)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현존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 그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지향한다. 무엇인가가 의식에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은 자체로 참되지만, 경험적 의미에서 실재하는 나무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무의 그림 내지 표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실재하지 않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은 과거와 미래의 경험이라는 시간적 지평을 늘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제로 있는 나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나무에 대한 경험을 기억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며, 현재 있지 않은 미래의 나무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향성의 양식에는 의미화가 있다. 이것은 지각 또는 상상 이전의 공허한 직관으로서의 의식을 가리킨다. 이것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의식이 추상적인 방식에서 의미를 개념화하기 위하여 언어라는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한 예로 나는 개별적인 인간을 실제로 지각하거나 상상하지 않아도 인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미화라는 것은 순전히 결여되어 있는 사물을 지향하는 비상상적, 비지각적 사유에 해당한다. 수학과 논리학은 그런 개념적 언어의 가장 확실한 예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1+1=2이다. P, Q와 같은 명제 기호 역시 개념적 사고 또는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화이자 의식의 능력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지각적이고 상상적인 의식이 새로운 의미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향성의 3가지 양식은 상호보완적이다. 즉 우리에게 상상과 의미화가 없다면 지각은 경험적 사실에 한정되는 유물론이 되어버리고, 지각과 상상이 없다면, 살아있는 현존의 생생한 경험의 세계에 뿌리박지 못하고 공허한 추상에 매몰되는 개념주의에 빠져버리며, 지각과 의미화가 없다면 현재의 실재와 미래에 발견될 새로운 것에서 차단되어 자신이 낳는 환영을 모든 것이라고 하는 유아론에 빠지게 된다.

  1. 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 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번역 이현복, 문예출판사, 1997, p.57 [본문으로]
  2. Ibid. p.46 [본문으로]
  3. Ibid. p.35 [본문으로]
  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54 [본문으로]
  5. Ibid.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신승환. 이성 개념의 현대적 이해. 철학논집, [s. l.], n. 37, p. 31, 2014. [본문으로]
  8. op. cit. [본문으로]
  9. 물론 데카르트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분리를 이루어낸 이후,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라는 이성 개념은 점차 희미해진다. 인식론이 지배적이었던 근대 철학의 담론 아래에서 이성은 인간의 이성ratio humana으로, 인식하고 계산하는 이성으로 변모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신승환. 이성 개념의 현대적 이해. 철학논집, [s. l.], n. 37, p. 31, 2014. 참조 [본문으로]
  10. 스테판 쾨르너, 『수학 철학』, 번역 최원배, 나남, 2008, p.32 재인용 [본문으로]
  11.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0 [본문으로]
  12.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 오성에 관하여』, 번역 이준호, 서광사, 1977, p.92 [본문으로]
  13. 임마누엘 칸트,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번역 김재호, 한길사, 2018, p.27 [본문으로]
  14.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 오성에 관하여』, 번역 이준호, 서광사, 1977, p.25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p.26 [본문으로]
  17. 임마누엘 칸트, Ibid. p.24 [본문으로]
  18. 임마누엘 칸트, Ibid. [본문으로]
  19.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1 [본문으로]
  20. Ibid. [본문으로]
  21. Ibid.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p.35 [본문으로]
  24. Ibid. p.35 [본문으로]
  25. Ibid. p.37 [본문으로]
  26.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57 [본문으로]
  27. Ibid. [본문으로]
  28. Ibid. p.58 [본문으로]
  29. 김영진. 브렌타노 지향성 이념의 해석 문제 : 바톡의 입장에 대한 비판 / The Problem of Interpreting Brentano’s Idea of Intentionality : A Critique of Bartok’s View. 철학과 현상학 연구 / Research in Philosophy and Phenomenology, [s. l.], p. 1, [s.d.]. 재인용 [본문으로]
  30. op. cit. [본문으로]
  31. op. cit. [본문으로]
  32. op. cit. [본문으로]
  33. op. cit. [본문으로]
  34. op. cit. [본문으로]
  35.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58 [본문으로]
  36. Ibid. p.138 [본문으로]
  37. Ibid. [본문으로]
  38. Ibid. p.139 [본문으로]
  39. Ibid, [본문으로]
  40. Ibid. [본문으로]
  41. Ibid. [본문으로]
  42.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8 [본문으로]
  43. 에드문트 후설, 『논리 연구2-1』, 번역 이종훈, 믿음사, 2018, p.43 [본문으로]
  44.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194 [본문으로]
  45. 에드문트 후설, 『논리 연구2-1』, 번역 이종훈, 믿음사, 2018, p.43 [본문으로]
  46. Zichen : etwas Sichtbares, Hörbares/ bezeichnen: durch ein Zeichen kenntlich machen/ Anzeichen: Vorzeichen/ Anzeige: 1. Meldung einer strafbaren Handlung an, 2. gedruckte Bekanntgabe eines privaten Ereignisses [본문으로]
  47. Ibid. p.44 [본문으로]
  48.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9 [본문으로]
  49. Ibid. [본문으로]
  50. Ibid. [본문으로]
  51. Ibid. p.4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