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inental/Ancient & Medieval

한국에서의 대학의 이념과 교양 교육

Soyo_Kim 2018. 12. 28. 15:44

2018-1 서양철학고전읽기

 

한국에서의 대학의 이념과 교양 교육

 

등장인물

교수

학생

학생 : 교수님, 요 며칠 사이에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읽으면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하게 될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모두 뒤엉켜버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의 것은 가운데의 것에 있어 방해되는 것으로 느껴지고, 가운데의 것은 뒤의 것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며, 뒤의 것에 대해서 저는 단지 미망에 빠져있을 뿐이니까요. 제도권 안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제 생존과 철학 모두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수 : 오늘날 사유함이 자네의 재산이나 지위, 가족을 돌보는 것으로부터 점점 더 무관해지고 있다는 것, 아니 차라리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세. 우리가 보다 양심적이고 철저하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위의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괴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어떤 좋은 조짐으로 보이니, 사유와 사유의 본질이 같지 않듯이, 철학과 철학함이 같지 않다는 것을 자네도 느끼게 되었다고 여겨지니 말일세......그 이전에, 어디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는지 말해주게니. 그 편이 우리의 논의를 진행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학생 : 제가 이전에 품고 있었던 철학에 관한 생각과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군요. 모든 이들은 어떤 일을 자신의 업(業)으로 삼기 이전에 그 업에 대한 막연한 허상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철학에 있어서 저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저는 철학이라는 것을 투쟁의 도구로, 실천을 위한 망치로 생각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바꿔나가야 하고, 투쟁을 통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상가들이 저를 자극했던 방식처럼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것이 철학을 통해 가능할거라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철학과에 들어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철학이라는 것이 제가 생각했던 그것이 맞는가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진리와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노력은 철학의 시원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아포리아(aporiā)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저와 능력 면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은 독단이나 회의에 빠져버렸고, 아니면 차라리, 사유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접근 불가를 선언한 정도이지요. 옳음 그 자체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품은 철학자들이 공들여 만든 망치는 언제나 현실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오히려 역사가 제게 보여준 것은 투쟁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지 거기에 정의로움에 대한 검토가 선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검토가 끝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투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좋은 이상과 계획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저에게 필요한 것은 전략의 기술(technê)이지, 정의로움을 검토하는 기술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교수: 그렇다면 자네에게 있어서 철학은 정의로움을 검토하는 기술인가? 아니면 자네의 정의로움을 검토하는 기술인가? 그 두 가지는 명백히 다른 것으로 보이니 말일세.

학생: 제가 첫 번째 것에 대한 아포리아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으니, 저의 정의로움을 검토하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해보입니다. 철학은 아무래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기술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뛰어들려고 하는 알키비아데스에게 너 자신을 알고, 그럼으로써 너 자신을 돌볼 줄 알아야, 다른 이들 역시 돌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각주:1]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그 자신도 『변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른 이에게 그 스스로의 영혼을 돌보라고 말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은 자신의 재산과 명예, 가족을 돌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각주:2] 즉, 그것은 전략의 기술과는 무관한, 혹은 해를 끼치는 기술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규정으로부터, 저는 대학이 철학을 배울만한데 적합한 공간이냐 하는 것, 철학이 실천으로부터 배제될 수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대학이라는 공간이 삶으로부터 철학을 유리시키고 있지 않는가하는 질문에 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기술이라면,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처럼 누가 그것을 올바로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각주:3] 그러한 지식은 권위 있는 자에게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가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그것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또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지혜는 그 전달에 있어서도 훌륭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각주:4] 그렇다면 돈을 주고 수업을 들으며, 학점이라는 평가의 잣대에 맞춰 지식을 얼마나 함양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소피스트나 할 법한 일이 아닐까요? 또 오늘날의 교양이 2400년 전처럼 훌륭한 시민을 함양하는데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 보시는지요? 교양이란 차라리 누군가 실제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리하여 의례적으로 사람들이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훑어봄으로써 그저 한번 교양 있어 보이는 자리에서 말해볼 수 있게 만드는 지적 허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교수: 자네의 말은 예리하고, 이치에 맞네. 하지만 그 이전에 나한테도 소크라테스처럼 이 논의에 대해 검토할 시간을 주게나. 먼저 정치에 대해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물음(어째서 당신은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는 정치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걸세. “안티폰, 어떤 때 내가 정치를 더 많이 할까요? 나만 혼자 정치를 할 때일까요? 아니면 유능한 정치가를 되도록 많이 배출하도록 노력할 때일까요?” [각주:5]여기에 대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치의 본질은 자네가 말하고 있는 정치의 본질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일세.

그가 말하는 정치에 있어 정의로움이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의 근거를 행동(Tun)으로 삼고자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존재(Sein)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일세. 왜냐하면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행위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일세. 자신들이 무엇인지(was si wären) 검토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선해진다면, 우리의 행위(Werk) 역시 밝게 빛날 것이란 이야기지.[각주:6]

성스러움, 정의로움과 같은 모든 가치는 온전히 우리의 의지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해보게.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선과 악에 대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은 의지하는 주체에 의해서만 가능해보이고, 또 그러한 의지는 이 세계 속에서 오로지 ‘나(Ich)’에게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세. 의지가 세계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세계가 의지 속에 담기는 것으로 여겨보란 이야기네. 의지를 버리고 떠나있던지(Abgeschiedenheit), 아니면 의지를 최고로 고양시키던지 함으로써 말일세. 그렇다면 철학이야 말로 온전히 윤리적인 학문,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학문이라 정의내릴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제도와 교양에 대한 자네의 비판에도 역시 동의하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진탕 속에서 철학을 배운다고 해도, 그 진탕을 헤쳐 나가는 것에 역시 철학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네. 우리는 그저 예감해야할 것에 귀 기울이면서, 내가 옳다고 믿는 최선의 한에서 행위하며 언제나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는 것일세. 나는 그러한 빛남이 언젠가 대학이라는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어두움도 걷어낼 수 있을 거라 믿어보고 싶다네.

철저한 사유 끝에 예감해야할 것이 스스로 드러난다고 말일세.

 

  1.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128a,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 김주일,정준영, 이제이북스, 2007, p.102 [본문으로]
  2.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6b-36d,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 강철웅, 이제이북스, 2014, p.100 [본문으로]
  3.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319a-320c,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번역 강성훈, 이제이북스, 2011, p.84-86 [본문으로]
  4.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 1권 6장 (11)~(13), 번역 천병희, 도서출판 숲, 2018 p.58~59 [본문으로]
  5.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록》, 제 1권 6장 (15), 번역 천병희, 도서출판 숲, 2018 p.60 [본문으로]
  6.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 영적강화(Die Reden der Unterweisung) (4), 번역 이부현, 도서출판 누멘, 2009, p.14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