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 서양고중세철학
플로티노스의 철학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후기의 지배적인 사상이다. 기원 후 3세기의 마지막 10년대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2세기의 호교론자(Apologeten)들로부터, 12세기 중반 이후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철학과 신학은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다.
플로티노스의 철학, 특히 일자, 정신(nous), 영혼에 대한 그의 세 가지 근본 실체(Hypostasen) 이론은 기원 후 1세기에 시작된 중기 플라톤주의를 통해 준비되었으며, 중기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후기 사상과, 구 아카데미아의 원리론(Prinzipienlehre), 그리고 “티마이오스”의 창조 신화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2-1) 중기 플라톤주의
아카데미아의 철학적 경향은 아르케실라오스 밑에서는 회의주의로 기울었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 지방의 아스칼론 출신인 안티코오스(Antiochos von Askalon)는 아카데미아를 다시 본래의 교조주의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특히 스토아 철학, 스토아 물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마도 이데아가 신의 생각이라는 이론도 그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 플라톤과 구 아카데미아의 원리론을 이어받은 사람은 약 기원전 25년에 사망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에우도로스(Eudoros von Alexandrien)이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일원론과 근본실체 이론의 출현을 예비한 사람이다. 하나(das Eine)는 모든 것의 원인이며, 물질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더 나아가서 첫째 하나와 둘째 하나를 구별하고 “티마이오스”에 주해를 달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로 귀화한 유태인 필론(Philon)이 성서, 특히 창세기에 대한 우화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유태교의 유일신 사상을 플라톤의 신학과 연결시켰다. 신은 초월적 하나이며 모든 존재의 근본 원인이다. 물질은 창조되었다. 신을 물질에게 자기의 아들인 로고스를 줌으로써 물질을 주재하며, 로고스는 창조의 매개자로서 스토아 철학의 숨 Pneuma(공기, 입김)과 같은 방식으로 물질에 스며들어, 물질에 형태를 부여하고 유지시킨다. 이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 이성의 원형이다. 이데아는 신의 생각들이다. 로고스는 이데아들의 이데아이다.
카이로네이아 출신의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von Chaironeia)는 필론과 마찬가지로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 세계가 시간 속에서 생성되었다고 보며, 그 생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티마이오스”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데미우르고스, 이데아, 그리고 질료가 그 원인이라고 보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선한 세계영혼과 악한 세계영혼을 구별한다. 질료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것이다.
알비노스(Albinos)는 “플라톤 철학 요강(Didaskalikos)”은 플라톤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철학의 이론들과 결합시킨다. 그는 두 가지 Triade(3분법- 3개로 한 조가 된다는 뜻)를 주장한다. 하나는 질료, 이데아, 데미우르고스에 해당하는 제 1의 신(神)이다. 다른 하나는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제 1의 신(神), 정신, 그리고 세계영혼이다. 알비노스는 이데아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한다. 비물질적인 플라톤의 이데아는 신의 생각이다. 이 이데아의 모방이며 질료와 결합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다.
알비노스는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일치로부터 출발하는 반면, 기원후 176년경의 아티코스(Attikos)는 정통적인 플라톤주의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플라톤과 조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엔텔레케이아라 불리는 그의 현실태 이론을 통하여 영혼의 비신체성과 불멸성을 부정해버렸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또 부동의 원동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은 신의 역할을 테오리아(신적 관조)에 한정함으로써 신의 섭리적 예지를 알지 못하며, 그래서 무신론의 한 형태라고 그는 비판한다. 그의 “티마이오스” 해석에서 아티코스는 창조되지 않은 질료를 받아들이며, 이것이 나쁜 세계영혼에 의해 무질서한 운동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질료에게는 형상을, 그리고 나쁜 세계영혼에게는 정신을 부여해 주는 것이 데미우르고스라고 그는 가르친다.
2-2) 플로티노스 (1)- 영혼(Ψυχή, Psyche)
플로티노스(205-270)의 출생지와 국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포르퓌리오스(232?-305?)는 플로티노스의 종교적 신앙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그는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으며, 그의 영혼은 순수하였으며, 항상 그는 신적 존재를 관조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통하여 그것에 도달하기를 희구하였다. (...)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그 신에게 가가이 가고 그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실은 그가 기울인 모든 노력과 정성의 목적이자 목표였다; 내가 그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그가 이 초인적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능력으로써 이 목표에 도달한 것이 족히 네 차례는 되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을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을, 특히 그의 정치적 차원을 배제시킴으로써,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우주론, 심리학, 정신철학은 모두 일차적으로 종교철학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윤리학은 인간의 내면적 정화를 위한 이론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완전 타자에 대한 동경심(Sehnsucht nach dem ganz Anderen)의 형이상학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의 근본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미와 선에 있다. 이로써 그의 철학의 두 근원은 플라톤과 신비주의임이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세 근본실체들-영혼, 정신, 일자-는 우주에서만이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내재한다. 고로 우주론과 형이상학적 심리학은 플로티노스에게는 단지 하나이고 동일한 실재에 대한 두 가지 고찰방식일 뿐이다.
플로티노스는 Enneades 1의 6권에서 “미에 관하여” 논구한다. 이 철학의 최종 목표는 일자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고 그것을 관념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은 가시적 세계를 넘어서 가지적 존재 영역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미학적 체험이다. 플로티노스는 신체적 미의 단계로부터 출발하는데 여기에서는 성애적(에로스적) 체험과 미적 체험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경탄의 대상뿐만이 아니라 사랑의(사랑받는) 대상이며 욕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일치감, 합치, 친족감, 상호적 대응(만남)을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미학적 개념은 일종의 상기이기도 하다.
플로티노스는 “형이상학” 7권의 존재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탐구를 전개한다. 영혼은 “어떤 것인 무엇이다.” 영혼은 인간이 그것, 인간의 인간임, 인간의 형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혼은 물질에 대하여 그리고 질료와 결합된 실체와 비교할 때, 일차적 의미에서의 존재이다. 그리고 동시에 가시적 실체들에 있어서 영혼이 보거나 알아채는 형상은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추함은 아무 형상도 없거나, 또는 형상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의 전체ㅡ그 안에서 질료가 형상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전체, 형상이 완전히 표현되고 완전히 개진되면서 이루어진 전체, 지각될 수 있도록 형성된 전체이다.
영혼은 한 아름다운 대상 안에서 온전히 전개되고 개진된 형상을 보고 인식하면서 영혼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존재론적 위상을 의식하게 된다. 본래적 존재자로서의 형상은 미(美)의 원인이다.
“만약 아름다움으로부터 존재를 제거한다면, 아름다움은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존재로부터 아름다움을 제거한다면, 존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그것에게서 아름다움이 박탈당한다면, 그것에게는 존재마저도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둘 모두가 결국은 오직 하나의 존재일진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어느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인지를 탐구해야만 할 것인가?”
경험 가능한 실체는 형상에 근거하여 존재하며 또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형상의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지는 한, 그리고 그 형상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그것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름다울 때에는 그것은 그만큼 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상의 기능은 단지 원인성이 전부가 아니다. 다시 말해 실재는 단지 개념적 추론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학적 체험을 통해 존재에로 인도하는 근원적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존재는 동시에, 그리고 항상 욕구의 대상이다. 이것은 우선 미학적 체험의 차원에서보다 먼저 자기 보존의 현상에서 나타난다.
플로티노스의 이론은 존재 개념을 이성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약시키는 것에 반대하며 미학적 차원의 체험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존재자의 존재가 존재의 위계질서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그 존재자의 아름다움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현상의 독립성은 계속 유지된다. 따라서 동시에 그것은 비합리주의를 반대한다. 미학적 존재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미적 경험의 대상은 동시에 존재론적인 언어를 통하여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진술은 존재론적 진술을 통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
미학적 인식은 플로티노스에게 있어 상기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물을 바라보면 영혼은 “자기 자신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해낸다. 아름다움 또는 형상에 대한 인식은 영혼의 가장 고차원의 능력이 수행하는 업적이다. 그것은 이성적 능력과 동시에 감정적 능력에 의해서 수행된다. 플로티노스는 형상과 형태를 구분한다. 형태는 다수의 부분들로 형성된 전체에 있어서 그러나 분할되지는 않는 형상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동시에 형상은 더 높은, 그리고 분할되지 않은 존재 양식으로 인간 영혼 안에 존재한다. 인식은 형상의 이 두 가지 존재 양식 사이의 관계를 형성시킨다. 영혼 안에 있는 형상은 규범이며, 이 규범에 따라서 지각된 대상의 형상은 판단된다. 지각은 다수의 부분들에 걸쳐 펼쳐져 있는 형상을 다시 그것 본래의 분할되지 않는 통일체로 종합하여 파악한다. 지각은 그것을 영혼 안으로 가져오며, 그러고 나서는 영혼 안에 이미 항상 내재하고 있던 형상과의 일치 여부가 확인된다.
2-3) 플로티노스 (2)- 정신(Νοῦς, Nous)
그러나 인간은 수동적 형태의 미적 체험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형태로 미적 체험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예술가들의 창조적 활동으로써, 여기에서부터 플로티노스는 제 2의 근본실체인 정신에 대해 논한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의 원인은 형상이다. 예술가가 형상을 질료에 각인시키기 이전에 그 형상은 그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는데, 다시 말하면 이것은 그가 예술 활동을 수행하거나 예술 활동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예술의 특징적 성격은 독창성이다. 플로티노스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생각에 반대하여 자연과 예술은 모두 똑같이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창의성은 예술가의 능력이며, 정신은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형상들의 생산자이다. 플로티노스는 영혼을 질료와 비교하며, 정신을 예술가와 비교한다. 영혼은 분리되지 않는 형상들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영혼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서로 다른 개별적인 형상들을 자신 안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근원적 통일체로서, 그 안에서는 형상들이 서로 차별화되어 있지 않다. 이 차별화는 마치 예술가가 질료에게 하듯이 정신이 형상을 영혼에게 각인시킬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형상들의 원인으로서의 정신은 형상들의 경우보다 더 본래적인 의미에서 아름답다. 가시적 세계가 정신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를 플로티노스는 그림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한다. 이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인공적인 그림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임을 플로티노스는 강조한다. 자연적 그림은 거울에 비친 그림이나 그림자이다. 이러한 그림의 아름다움으로부터 그 그려진 원형의 아름다움이 인식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정신이 가지는 원인성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정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나 생산 기술자가 자기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정신은 예술가나 기술자와 달리 정신은 필연성을 따라 우주를 만든다. 태양이 광선을 만드는 것과 같이. 이로써 정신과 마찬가지로 우주도 영원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창조할 때, 맞추어 짜거나 구성하지 않는다. 전체는 부분들에 앞서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인식은 논증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직관적이다. 직관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예술작품을 그 마지막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각인시키는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이에 따라 예술과 학문을 구분한다. 학문의 작업방식이 전제와 결론을 통해 수행되는 반면 예술가의 직관적 인식은 학문적 사고보다 더 근원적이다. 플로티노스는 이성(Verstand)의 논증적 사고(diskrusive Denken)와 정신(Geist)의 직관적 인식(intuiuives Erkennen)의 차이를 알파벳 자모로 씌어진 문서와 상형문자로 씌어진 문서 사이의 차이를 통하여 해명한다. 알파벳 자모를 읽는 사람을 자모 하나 하나를 순서에 따라 차례로 받아들이며, 여기에서 읽기와 말하기는 전후의 순서에 따라 나열된 배열의 차원을 통과하는 것이다. (논증에서) 이는 개념과 분석, 공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상형문자로 씌어진 문서들이 사용하는 상징들은 정신 안에 내재하는 형상들에 상응한다. 그림은 봄과-동시에-즉각적으로-알려지며,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체적 지혜이다.
각 형상은 정신 전체이다. 모든 예술작품들 하나, 하나는 실재계 전체를 반영한다. 예술작품은 오직 그 작품을 전체로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해 준다. 금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금을 아무리 쪼개도 각각의 부분들은 모두 금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각각의 부분은 전체이다. 빛은 완전히 투명하며, 자신도 통과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형상들은 정신의 부분이다. 각각의 형상은 그러나 모든 형상들의 총체이며, 형상들의 총체는 정신이므로, 각각의 형상은 정신 전체이다.
인식 행위는 빛의 비유를 이용하여 상호적 통과 현상으로 묘사된다. 개별적 형상은 정신 전체이며 동시에 인식을 수행하는 원리이다. 정신은 이러한 형상 하나를 인식함으로써 실재 전체를 인식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2-4) 플로티노스 – 일자(τὸ Ἕν, to En)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아름다움(das Schön-sein)뿐만 아니라 하나임(das Eines-sein)도 존재에게 적용되는 초월적 술어다. 우선 여기에서 우리가 고찰한 “선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든 존재자는 하나를 통하여 하나의 존재자이다.” 한 식물과 한 동물은 하나이다. 그들이 그들의 하나임을 잃어버리면 그와 함께 그들의 본질도 잃어버린다. 한 존재자의 완전성은 그것의 하나임의 정도에 상응한다. 신체의 통일성의 원인인 영혼은 신체보다 더 높은 정도로 하나이다. 그러나 영혼도 영혼대로 또 하나의 다수성-여러가지 다양한 능력-을 갖는다. 예를 들면 사고, 의지, 지각 등.
플로티노스는 이에 따라 영혼과 일자 사이의 차이, 더 보편적으로 형상과 일자 사이의 차이를 지적한다. 만약 우리가 형상이 본래적 의미의 존재자라고 말한다면, 이로써 일자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영혼은 신체에게 통일성을 매개해 주지만, 다수성 그 자체인 영혼은 다시 단일성의 원리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각 형상은 단일성의 원리이지만 또한 하나의 다수성이며, 이는 결국 정신 위에 더 큰 단일성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정신의 개념은 사고의 주체와 사고 대상의 양자성(둘임)을 내포한다. 정신은 자신의 사고 안에서 자신에 대하여 반성한다. 정신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물음으로써, 정신은 자신의 근원에 대하여 묻는다. 그는 이러한 자기반성 안에서 자신의 다수성을 경험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초의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정신은 오직 그가 동시에 자신의 근원, 즉 하나와 함께 있는 방식으로서만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는 하나를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또 그는 자기 자신을 생각함으로써 실재 전체를 생각한다. 정신은 본래적 의미에서의 존재자이다. 그것은 존재자 총체이다. 존재자는 술어를 매개로 하여 생각되며, 이는 다시 말해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술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자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무형상의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무(無)(Nichts)이다. 일자는 어떤 것도 아니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양의 범주에도 또 질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정지해 있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공간과 시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어떤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일자에 대해 부정의 용어(~이 아니다.)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자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 의존하는 그것이며, 모든 것은 그것을 향해 바라보면서 존재하고 살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과 사고와 존재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들은 그것에 도달하려 하며, 마치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그들이 예감이라도 한 듯이, 그들의 본성으로부터의 강제력에 이끌리어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마치 애초부터 그랬다는 듯이 이미 깨닫고 깨어난 사람들에 의해 감동적으로 수용되고 경탄의 대상이 되며, 이 깨어남은 에로스를 통해 일어난다. 반면에 선은 우리의 타고난 욕구의 대상으로서 애초부터 우리와 함께 있어 왔으며, 우리가 마치 졸고 있듯이 머무는 한 우리가 언젠가 그것을 마주 보게 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경이감에 빠트리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며, 또 우리는 그것을 한 번도 기억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단지 그것이 우리의 수면 상태에 현존해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을 뿐이다.”
- 플로티노스, Enn. V 5
일자는 영혼의 중심점이다. 영혼이 궤도를 벗어나 바깥쪽으로 일탈해버리지 않고 자기의 이 중심을 돌 때, 영혼은 자기의 본질에 고유한 운동을 한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의 본래적인 중심점을 가지고 이 절대적 중심점을 만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자는 항상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는 항상 일자와 함께 있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절대 중심점으로서, 일자는 존재의 근원이며, 정신의 발원이며, 선의 원인이며, 영혼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자로부터 정신과 영혼이 낳아지는데, 이는 태양으로부터 빛의 발산에 상응한다. 정신은 일자의 완전성의 표현이며 정신과 영혼은 일자와 마찬가지로 영원하며 필연적이나, 빛이 태양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정신과 영혼도 일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정신의 영역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선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만남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며 예감할 뿐이다. 그것이 나타날 경우, 마치 한 중심점이 다른 중심점과 만나듯이 그것과 만나면서 일자와 합일을 이룬다. 이 합일은 관조가 아닌 자기로부터의 일탈이자, 자기를 단순화시킴, 자기를 포기함(Abgeschiedenheit-세상을 버리고 떠나있음)의 경지이다.
2-5) 플로티노스 이후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 포르퓌리오스(Porphyrios)와 프로클로스(Proklos),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
플로티노스의 제자였던 포르퓌리오스(Porphyrios)는 그의 저작들(Enneades)을 출간하고 주해하였으며, 대중에게 플로티노스 철학을 널리 보급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이기도 한데, 그가 쓴 “아리스토텔레스 범주론 입문서(Eisagoge)”는 중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작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세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단 주석 역시 커다란 영향력을 중세에 행사하였다.
플로티노스 이후 신플라톤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로클로스(411-485)로 그는 위대한 스콜라주의적 학자였으며, 신플라톤주의 체계의 가장 완벽한 서술을 제공한 것이 그의 업적이다. 그의 저작은 플라톤 주해서, 체계적 저술들, 예를 들면 “신학 요강(Elemente der Theologie)”, “플라톤의 신학(über die Theologie Platons)”, 수학 연구서들을 포함한다.
그가 다루었던 형이상학적 근본 문제는 플로티노스의 경우와 같이 일자와 다수성 사이의 관계였다. 이미 플로티노스는 상위의 근본실체와 하위의 근본실체 사이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누어보았다. 하위의 것은 상위의 것으로부터 유출(Emanation)되어 나오며, 상위의 것을 지향한다. 프로클로스는 이를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한다.
1.생성된 결과는 원인을 닮는다. 서로 닮는 한, 그것은 원인 안에 “남아있게 된다.”(함축적으로 내재한다) 2.결과는 원인과 다르다. 서로 다른 한, 그것은 원인을 “떠나온다.” 3. 원인이 그로부터 생성된 결과 안에까지 작용하는 한, 원인은 결과 안에 어디에나 존재한다. 원인이 결과와 다른 한, 그것은 결과 안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결과는 원인을 향해 다시 “돌아선다.”
모든 실재는 이 삼분법의 순환 운동의 법칙을 통해 규정된다. 일자 이론에 있어 프로클로스는 플로티노스와 일치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근본적인 개선점은 일자로부터 다수의 단자들(Henaden)이 유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단순하지만, 서로 다른 것들과 함께 다수를 형성한다. 정신의 영역 안에서 프로클로스는 존재(가지적 영역), 사고(지적 영역), 그리고 생명(가지적-지적 영역)을 구별함으로써 얌블리코스(Iamblichos)의 이분법을 삼분법으로 대체시키고 존재 영역을 확장한다. 프로클로스는 형이상학적 실체들을 민속 종교의 신들과 일치시킨다. 그의 철학은 위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Psendo-Dionysius Areopagita), 그리고 “원인론(Liver de causis)”의 매개를 통하여 후기 교부철학과 중세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후에 르네상스와 독일 관념론 철학에까지 이어진다. 1
서구 라틴어권의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헬라어로 쓰인 저작들을 번역하고 주해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중세 라틴 문화권에 전수해주었다. 칼키디우스(Calcidius)의 “티마이오스” 부분 번역(31c-53c)은 플라톤의 우주론과 신학을 위한 중세의 가장 중요한 원전들 중 하나가 되었다. 수사학자였던 마리우스 빅토리누스는 노년에 기독교가 되었고,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의 일부를 번역하였고,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Enneades)”를 번역했으며, 포르퓌리오스도 번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얌블리코스는 시리아 학파의 창시자로 플로티노스가 말한 일자보다 상위에, “말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근원”을 위치시킨다. 플로티노스의 제2근본실체(정신,nous)를 그는 이데아들의 가지적 세계와 사고 능력을 가진 존재들의 지적 세계로 이분시키며, 이 둘은 다시 세 가지 영역들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나누어진 제2근본실체,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 영혼 사이에는 제2의 정신(제2의 nous)가 매개자 역할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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